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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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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나 또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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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말에 재원이는 전화기 너머에서 또 짜증을 부린다.

"하 나 이 새끼야, 내가 무슨 초딩 1학년 담임 선생님이냐? 뭔 쌈박질만 하면 일일히 보고질이야? 걍 시원하게 헤어져어, 야 내가 봤을 때 니네는 텄어. 답 없다"

그 말에 나는 실없이 웃었다.

"아, 니네는 내 앞에서 서로 귀싸대기까지 날린 커플이 결혼까지 가놓고서는…"

그러자 한 3초 답이 없던 재원은 "하긴 그랬지. 아 나도 답 없는 새끼네" 하고는 "어디냐? 니네 동네로 가?" 하고 묻는다. 나는 그러라고 하고서는 슬슬 씻을 준비를 했다.





물베기





재원은 더웠는지 아이스 아메리카노 반 잔을 시원하게 단숨에 들이키더니 입을 닦았다.

"아 더워 뒤지는 줄 알았네. 뭔 10월이 코 앞인데 이렇게 덥냐"
"야, 뭔 나는 막걸리 마시는 줄 알았다. 누가 그렇게 커피를 무식하게 마셔"
"이게 남자지 임마. 니처럼 뭐 컵 앞에 고개 요래 가져다 놓고 빨때 쪽쪽, 어? 야 임마 니 그러다 그거 떨어진다?"
"지랄"

과장되게 연기하던 재원의 말에 나는 웃다가 물었다.

"니네는 잘 지내냐? 아름이 잘 있고?"

그러자 재원이 실없이 웃는다.

"야, 잘 생각해 봐. 내가 지금 3주만에 쉬거든? 지난 주, 지지난 주 물량 맞추느라 우리 야근에 특근까지 했단 말이야. 오자마자 자고 바로 출근하고 또 24시간 주야 근무 풀타임 뛰고 자고 이런 미친 주말 보냈다고. 그리고 드디어 쉬는데? 너랑 이렇게 둘이 있잖아. 뭐겠냐?"
"또 대판 했냐?"

재원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진짜 형들 말 듣는건데. 왜 내가 장가를 가 가지고. 성욱아, 진심으로 충고한다. 결혼하지 마"
"왜? 아름이는 근데 니만 잘하면 싸울 일 없지 않냐? 바가지 긁는 타입도 아니잖아?"

하지만 내 말에 재원은 조금 씁쓸한 얼굴을 보인다.

"하, 그래. 내가 그 착한 애 다 버려놨지. 뭐 아름이가 다른 기집애들처럼 막 떽떽 거리는 타입도 아니고. 근데 부부라는게, 아니 커플이라는거 자체가 원래 좀, 남이 볼 때랑 둘이 있을 때랑 또 다르잖아"
"왜? 니들끼리 있을 때는 또 막 지랄지랄하는 타입이야?"

손사래를 치는 재원.

"아니 그런건 아닌데, 이게 한번 토라지면 얘 답 없다. 진짜 뻥 안치고 한달은 간다. 차라리 씨팔 시원하게 한번 머리 끄댕이 잡고 쌍욕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치우는게 낫지, 어? 그 날 둘이 끌어안고 자면 되는데, 이건 혼자 꽁해서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그렇게 토라져 있으면 사람 피가 마른다니까"
"아 그것도 진짜 피곤하겠네"

우리는 서로 긴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그때 재원의 폰이 울렸다. 경식이 형이다. "어? 이 형 간만이네"하고 전화를 받은 재원.

"여 브라덜. 예? 저야 뭐. 성욱이랑 있죠. 아이, 이거 참. 아시잖아요. 우리 커플인거. 앞뒤를 다 쪽쪽. 아름이는 위장결혼이죠. 하하하하"

녀석의 농담에 나는 "뭔 소리야 미친 놈아" 하고 퉁을 놓고 내 말을 다 무시한 재원은 "아, 형 어딘데요? 승암사거리요? 그럼 오실래요? 예예, 여기 증원동 이디엠 커피에요. 예, 그 골뱅이집 옆에 있는데. 네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왜? 온대?" 하고 묻는 나의 말에 재원은 "응, 온대. 야 결혼 두 번 실패한 꼰대가 주말에 할 일이 뭐가 있겠냐. 맨날 놀아달라고 조르는거지" 하고 혀를 찬다.

"진짜 대단해. 뭐한다고 결혼을 두 번이나 할까" 하고 내가 감탄하자, 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젠 안 한대. 지금 만나는 것도 띠동갑 12살 연하랑 만나잖아. 형네 학원 선생인데, 저번에 봤거든? 새끈해. 근데 이게 모르는거다? 형이야 이젠 결혼 안 해, 해도, 만약에 그 여자가 형 재산보고 결혼 조르면? 하게 되어 있다. 백퍼"
"두 번이나 실패했는데 또 하겠냐. 이젠 아예 선 그어놓고 만나겠지"

그러자 재원은 웃었다.

"야, 맺고 끊는거 확실한 새끼가 장가를 어떻게 가. 흐리멍텅하게, 어? 그런 새끼들만 장가 가는거야. 근데 두 번 갔다? 답 없다"




한 15분 뒤, 노란 머즈탱을 타고 나타난 배 나온, 많이 나온 40대 남자 경식이 형이 나타났다. 재원은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오, 뭐야. 어? 형 차 또 새로 뽑은거야? 장난 아니네? 아 진짜 형이 최고다. 어? 야, 완전 짜세네 이거"

경식은 씩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린다.

"어, 타던 차 팔고 바꿨어. 근데 이거도 얼마나 탈진 모르겠다. 살 땐 허세로 질렀는데, 너무 좀, 내 소셜포지션치곤 가벼운 거 같지 않냐?"
"어휴, 형. 뭘 걱정해. 그럼 또 한 대 뽑으면 그만이지. 제로시스 이큐 구천, 딱 뽑으면 짜세 나오겠구만"
"허허"

그리고는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 손을 덥썩 잡는 경식.

"간만이다 성욱아. 임마 니가 형한테 연락도 하고 그래야지"
"아휴, 저도 요즘 정신이 없어서. 잘 지내시죠?"
"그럼. 넌 아직도 서울에서 회사 다니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요즘 관두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어요. 형도 커피 한잔 하세요"
"어어, 내가 주문할께. 근데 니넨 무슨 남자 둘이 커피를 마시냐. 딱 이거 한 잔 꺾어야지"
"낮이잖아요 낮. 그리고 재원이 저 새끼 한잔만 마셔도 시뻘개지잖아요. 따귀 맞은 거처럼"

그 말에 너털웃음 지은 경식이 형이 웃었다.

"그래, 맞어. 저 새퀴 그래"




이야기를 나눈 후, 경식은 목을 긁으며 말했다.

"이게, 내가 봤을 땐 그래. 부부로 살다보면, 아니 커플도 그렇지만 이게 딱 '이 말만 나오면 백 프로 싸운다'라는 주제들이 꼭 있어. 뭐 전 여친 전 남친, 혹은 돈 문제, 애기 문제, 뭐 등등, 커플마다 다 주제가 다른데, 여튼 그 주제 안에서도 백프로 싸우게 되는 키워드가 있다고 키워드가"

과연 이혼 두 번에 총각 시절부터 이미 수십번도 넘게 여자를 갈아치운 연애·이혼·섹스 전문가답게 그는 자신만의 개똥철학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보통 이게…딱 그런 날이 있을거야. '아 이건 진짜 조졌는데. 사이즈 안 나오네' 싶게 싸울 때가 있었을거야. 진심으로 헤어지네 마네 하고 제대로 싸웠던거. 뭐 지지고 볶고 이런 레벨이 아니라 제대로 다 태워먹고 아예 불이 나버린거. 그런 싸움. 그럼, 그건 이미 거기서 조진거야. 그 주제로 둘이 끝나는 날까지 그거로 싸우다가 그걸로 관계 다 조진다. 아예 그런 싸움까지는 가지 말아야 돼. 근데 이미 가버렸다? 그럼 딱, 거기서 시마이 쳐야 돼. 그게 서로 빠르다. 내가 그걸 모르고 장가를 두 번 갔잖냐. 등신같이"

그렇잖아도 큰 머리 사이즈에 머리까지 저렇게 풍성하게 장발로 기르니 진짜 머리가 더 커보이는 그의 얼굴에 새삼 속으로 감탄하지만, 그의 온 몸에 둘러진 이런저런 명품으로 그의 요즘 벌이에 대해 또 감탄하게 된다. 교육 시장은 정말 불황이 없는 산업인가.

"그래도 쟤네는 잘 붙었잖아요. 재원이 저 새끼 바람 피우고 아름이랑 서로 귀싸대기 갈군 날"

그 말에 또 경식이 형은 빵 터져 웃다가 말했다.

"근데 진짜 맞어. 이 새끼는 또라이는 제대로 또라이야. 너 그때 아름이는 왜 때렸냐? 니가 바람 피워놓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주 맞바람이라도 피운 줄 알았을걸. 니 그 날 우리 다 싸이코새끼라고 존나 욕했다"

재원은 피식 웃었다가 커피를 쭉 들이켰다. 그나저나 이 카페는 주말의 한낮인데 사람이 이리 없어서야 장사 안 망하나. 재원은 담배를 만지작 거리다가 다시 집어넣는다.

"형. 내가 봤을 땐 그래요. 사람 사이는 다 파워게임 하는 사이에요. 이게 한번 먹히면 되돌릴 수가 없거든요. 설령 내가 잘못했어도, 거기서 꿇고 들어간다? 그럼 먹히는거에요. 뭐 아예 내가 평생 꿇고 이 사람 내 웃사람으로 모실거다 하면 몰라도, 그럼 안되겠다 하는 사람이면 먹히면 그기서 끝나는거라구요. 근데 잘 생각해봐요, 아름이 같은 애한테 내가 뭐가 잘난게 있어요. 대학을 나왔나, 집에 돈이 있나 뭐 책상머리 일을 하나. 그냥 밑바닥에서 구르는 나 같은 새끼한테 콩깍지 씌인게 전부인데, 내가 좀 잘못했다고 기집애한테 싸대기 쳐맞고 싹싹 빈다? 그럼 그 날로 먹히는거죠. 내가 잘못했어도, 잘못한건 잘못한거고 나는 어쨌든 입장은 항상 위에 있어야 되는거에요. 그게 인간관계죠. 남녀보다 그 위에 있는. 그리고 그래야? 관계가 이어집니다. 진짜로"

중학교 시절부터의 오랜 친구지만 분명히 나와는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린 재원. 그만의 인간론, 인간관계론을 새삼 본 느낌이랄까.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방학식 날, 어느새 자기보다 덩치가 더 좋아진 반의 넘버 투 곽현구 그 새끼랑 시비가 붙었을 때 주먹으로 안되자 의자로 대가리를 내리찍고 어깨에 콤파스를 쑤셔박던 그 지독함. 하기사 군대에서도 후임이 기어오르자 반 병신 되도록 두들겨 패서 만창 채웠던 일도 있었고. 독한 새끼. 그의 헌신적인 어머니만 아니었더라도 저 놈은 아마 옛날에 신세 조졌을거다. 조진다, 그 새 나도 이 양반들 표현에 감화되네.

"하여간 넌 제대로 또라이 기질이 있어. 성질 죽이고 살아야 된다. 아니면 마누라 두고 감방 가고, 마누라 바람난다. 알았냐? 나도 업종은 교육쪽인데, 여기도 양아치들이 엄청 많아. 여학생들 건드리고 그러는 새끼들. 그러다가 감방 가고 지랄나고 뭐 그러는데, 결말이 다 거시기해. 돈 좀 있는 새끼들이 감방 가잖아? 마누라들은 좋다고 백 프로 바람 피워. 백 프로. 근데 이혼은 안 해줘. 외려 감방 수발 들었다고 나중에 이혼 소송할 때도 존나 유리하게 끌고 간다니까? 그거보다 열불 나는 일이 어딨냐. 아, 시바 그보다 담배나 태워야겠다. 바깥으로 자리 옮기자"




경식이 형은 아이스코의 연기를 훅 뿜어내며 물었다.

"성욱이 너는 그럼 지금 아예 쉬고 있는거야?"
"예. 뭐. 지지난 주에 관둔거라서 뭐 급한건 아니지만, 뭐 그래요"
"여친은?"
"걱정하죠. 남친이라고 있는게 빌빌대고 있으면"

재원은 "아 이 새끼. 니가 그러니까 싸움이 별 하찮은걸로 자꾸 커지는거야. 빌빌대니까. 남자는 딱 가오지 가오" 하고 끼어들었지만, 경식이 형은 그저 실실 웃을 따름이었다.

"니네 근데 사귄지 좀 되지 않았냐? 결혼 이야기 안 나와?"
"됐죠. 벌써 3년인데. 결혼 이야기도 그 형이 말한 '키워드'에요. 그 말만 나오면 싸워요. 근데 뭐가 있어야 장가를 가지. 니미럴"

형은 피식 웃었다.

"야 근데 그건 진짜 아냐. 결혼? 그거 돈 없어도 다 하는거야. 너 내 첫 결혼 때 못 봤냐? 우리 꼰대 죽기 전에, 나한테 시바 10원 한장 안 물려준다고 그 지랄 떨고, 나 양아치 짓 하고 다닐 때 그, 누구야, 이젠 이름도 가물가물하네. 아 그래, 영지 그 년이랑 나 결혼할 때, 나 그때 울 엄마가 준 2천 딱 그거 하나 갖고 결혼한거야. 한 푼도 없었어. 우리 신혼여행 안 갔어. 못 갔어 씨발. 돈이 없어 갖고"

그건 처음 알았다. 마지막에 '씨발'하는 그의 말에 한이 조금 섞인 것을 느꼈다.

"아 그래도 형은 나중에 집 해줬잖아요. 아부지가"
"야 그것도 시발, 이제와서 하는 말인데 그때 우리가 뻥 쳤거든. 영지 임신했다고. 세상에 손자까지 생기는 마당에, 어? 안양에서 큰 학원 두 개나 돌리는 양반 아들이 손바닥만한 원룸에서 셋이 살고 있다고 하면 세상이 욕한다고. 내가 그 꼰대 앞에 가서 자살쇼를 하겠다고 지랄생쇼를 해서 받아낸거야. 그리고 그건 나중 이야기잖아. 어쨌든 결혼은 했다 이거지"

글쎄, 그거까진 몰랐다.

"내가 씨발 다른건 모르겠는데 딱 하나 그거는 진심 영지 그 년한테 미안해. 진짜 존나 지금도 자다가 눈이 번쩍 떠지게 미안해. 세상에 암만 그지 새끼들이라도 결혼해서 하다못해 제주도라도 신혼여행은 가는데, 나는 염병, 아…. 존나 철없던거지. 근데도 이혼할 때까지 그거 갖고는 단 한 마디를 원망 안 하더라. 진짜. 그 기집애 바람 났을 때 이상하게 그 생각이 딱 나니까 솔까 내 차마 뭐라고 못 하겠더라니까"

그의 첫 이혼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 재원이는 알고 있었던 듯 그를 달랬다.

"근데 형 잘못이 아니지 그건. 형네 꼰대가 좀 너무했던거고, 그리고 영지 누나도 뭐, 잘 됐잖아?"
"잘 됐지. 그 년이 그래도 이거는 되잖아. 탈아시안이지. 것도 아주 탱탱해. 어휴, 그니까 그런 새끼 물어서 시집 잘 갔지. 차라리 잘 됐어"

술자리도 아닌데 자리의 분위기가 열띄다.

"그래도 형은 그게 지나간 일이고, 1년도 안 된 일이잖아요. 고생시킨게. 근데 나는 아름이랑 몇 년이야 쉬바. 벌써 7년이네. 사귄 기간까지 합하면 9년이야 9년. 아 갑자기 술 땡기네. 형, 괜찮죠? 대리 부르면 되잖아. 대리"
"그래, 가자. 재원이 이 시키 그래도 속정은 있지. 성욱이 너는 뭐 먹고 싶냐?"




오후 3시에 소주잔을 채우며 고기를 굽노라니 이것도 별미다.

"좆까고, 그냥 해. 결혼. 우리 같은 새끼들은 원래 결혼하면 안되는 새끼가 결혼해서 이 지랄 난거고, 니는 그래도 그나마 좀 멀쩡한 새끼 아니냐. 어? 씨 없는 또라이, 배운 양아치, 서울로 회사 다니는 모범생. 이 세 병신 중에 그래도 니가 제일 낫잖아. 한국대 간판이 거저 난거냐. 캬 시발. 울 아버지가 니를 몰라서 다행이지, 니 알았으면 나는 진짜 뒤졌다. 얼마나 비교해댔을꼬"

중간에 씨 없는 또라이 라는 말에 재원이 "야 형 나 있다고. 그냥 우리 안 갖는거야. 딩크, 딩크으" 하고 수습했지만 난 알지. 언젠가 술 취해서 한 그의 고백을. 물론 우리 모두 안다.

"형은 그럼 만나고 있는 여자는요"

이미 재원에게 듣긴 했지만 물어본다. 그러자 그는 폰에서 그녀의 사진을 보여준다.

"29살이고, 선명여대 나온 애야. 괜찮아. 이쁘지?"
"뭐 형이 만나는 여자들이야 항상 외모는 되죠. 다른게 문제라서 그렇지"

그는 또 낄낄대며 웃는다.

"야, 니가 꼭 안 좋을 때만 봐서 그래. 걔들 다 괜찮은 애들이야. 근데 니랑 같이 볼 때만 꼭 그렇게 꼬여서 그렇지"
"뭘 또 성욱랑 볼 때만 그래요. 맨날 바람 나고, 성병 걸려오고, 어? 돈 땡겨쓰고, 구라쟁이에, 술자리에서 얼굴에 술 끼얹고 가고, 어? 아주 골고루잖아요 골고루. 존나 드림팀 아냐?"

재원의 핀찬에 더 크게 웃던 그는 "야 몰라, 됐고, 술이나 마셔. 자, 어이. 그리고 얘는 진짜 그런 애들 아냐. 얘는 깨끗해. 내가 다 싹 알아봤어. 내가 면접 본 애야" 하고 얼른 수습한다. 그리고 문득 어쩌면 형은 세 번째 장가를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갈 수 있다면 말이지만.




둘과 헤어지고 혼자 터덜터덜 집으로 걷는 길. 간만에 많이 마셨다. 밤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지만, 휴대폰에는 그러나 전화 한 통 없다. 그 흔한 카톡 하나도. 그래, 나는 재원과도 다르고, 경식이 형과도 다르다. 누구처럼 독하지도, 누구처럼 부유하지도 않은 그런 흔한 소시민.

놓아주어야 하나, 하고 생각이 든다. 사실 나 없어도 알아서 잘 살 기집애다. 오히려 내가 발목을 잡으면 잡았지. 머릿 속이 복잡하다. 그녀도 그렇겠지. 어쩌면 결혼을 하는 이유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놓치기 싫어서. 계속 잡고 싶어서. 더 오래 곁에 두고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

근데 만약에 내가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걸 안다면? 그럼 진짜 너무나 사랑한다면 놓아주는게 맞는거 아닐까. 사실 그녀가 행복하기 위한 조건에 나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오히려 내가 그녀의 행복을 가로막는 사람이라면? 나에 대한 자신감도, 자존감도 어느새 밑바닥을 긴다.

"시발…"

힘없는 욕이 흘러나온다.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지만, 그 순간 휴대폰이 울린다. 진아다.

"여보세요"

나의 힘없는 목소리에 한참 말이 없던 그녀가 대꾸한다.

"저녁은 먹었어?"

조금 화가 누그러진 것일까. 조금은 밝음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나도 조금은 힘이 들어간다.

"응, 아는 형이랑 재원이랑 같이 먹었어. 고기. 술도 좀 마시고"

그 말에 "잘했어" 한 진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안해. 나도 너무 예민하게 굴어서. 내일 뭐해"
"아무 것도"

그러자 "그럼 내일 같이 영화보자. 나 보고 싶은 영화 생겼어" 하고 제안하는 진아. 나는 조금 전 놓아주네 마네까지 생각했던 것에 생각이 미지차 조금은 부끄럽기도, 조금은 울컥하기도 하면서 단단히 얼었던 마음이 단숨에 녹아내리는 것을 느낀다.

"그래, 보러가자"

집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이, 그렇게 조금 가벼워졌다.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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