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 브라운, 코드 브라운, 닥터 김박스 응급실로 속히 부탁 드립니다. 코드 브라운, 코드 브라운"
중증 체크남방 환자에 대한 스트라이프 이식 수술을 마치고 교수실에서 간신히 한숨 돌리고 있던 김박스는 곧 자신을 찾는 응급 코드에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심각한 간지 결손 환자에 대한 응급 코드인 코드 브라운은, '브라운'이 뜻하는 급똥만큼이나 김박스의 머릿 속을 똥색으로 뒤덮고 있었다.
뿔테 바이러스
"바이탈은?"
김박스의 질문에 새내기 당직 간호사 수연은 손을 바들바들 떨며 말하기 시작했다.
"845/5/1166입니다"
김박스는 탄식에 가까운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렸다. 환자의 바이탈은 처참한 지경이었다. 인스타그램 게시글을 800개가 넘게 올렸는데 팔로워 수는 다섯에 팔로잉은 1천이 넘는 상황이라면, 이건 비정상을 넘어 심각한 만성질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천명이 넘는 친구를 추가하는데 그 중에 채 10명도 맞팔을 안 해준 상황이면 사실 볼 것도 없었다.
"이런"
김박스는 환자의 상태를 보다가 혀를 차더니 곧바로 그의 안경부터 벗겼다. 그 놈의 뿔테안경을.
"어서 수술실로. 긴급 OP 준비해"
한국인의 3대 만성 질환인 고혈압, 당뇨, 뿔테중독. 그 중에서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그 끝을 알 수 없이 증가일로이던 뿔테안경은 다행히 2015년을 전후해서 드디어 그 기세가 껶였다. 근 10년에 이르는 뿔테안경 신드롬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던 간지관리본부(GDC) 측에서 이독제독(以毒制毒)의 마음으로 김구 안경을 전면적으로 투입했기 때문이다.
그 시도는 제법 효과를 보아서, 근 63%에 이르던 한국인의 뿔테 중독율은 2017년 현재 약 30% 중후반까지 낮아졌으나 사실 이 역시도 당시 간지의들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혔었다. 물론 김박스 역시 그 선봉에 섰던 이중 하나였다.
"아니 장기하 잡자고 해리포터 투입이라니, 설사 막자고 된똥으로 항문 틀어막는거랑 뭔 차입니까? 라식, 라섹이야 안전이나 가격 이슈가 있다고 쳐도, 콘텍트 렌즈라는 수단이 있잖습니까"
하지만 그에 대한 반론 역시 만만찮았다. 특히 한국 모든 남성간지의 가성비를 평가하고 간지수가를 책정하는 신사평가원 측은 단호했다.
"멋쟁이들은 알아서들 다 잘 합니다. 문제는 한국의 평균남성들이죠. 생전에 안경 한번 맞추면 안경 다리 부러지는 날까지 같은 안경만 주구장창 쓰는 이들이 한국의 평균 남자란 말입니다. 그런 놈들한테 매달 렌즈 사라고 하면 제대로 살까요? 아니 돈이야 일단 넘어가봅시다. 위생은? 오줌싸고 손 한번 씻는 놈들이 절반이 안되는 이 나라 남자들의 위생 의식으로 렌즈라뇨? 눈알 다 상할 일 있습니까?"
언제나 간지의들의 발목을 잡는 신평원의 '한국남성 평균론'은 이번에도 그 위력을 발휘했다. 공개토론회에서 좌중을 압살한 신평원 측은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간지관리본부 측의 김구 안경에 대해서도 신랄한 태클을 걸었다.
"동네 안경점에서 단돈 만원에 구입 가능한 뿔테 버리고 도입하는게 김구라뇨? 아, 혹시나 해서. 요즘 이런거 민감해서리…여기서 말하는 '김구'라는 표현이 우리 민족대표 김구 선생님을 욕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은 모두가 알 거라고 생각하고, 이하 계속 김구라고 말하겠습니다. 예? 김구라뇨. 당장 한국 남자 얼굴 평균을 봅시다. 넙대대한 얼굴에 염색 안한 바가지 머리에 김구 안경 씌워봐야 도라에몽 노진구 밖에 더 됩니까? 1mm라도 더 가려야 할 판에, 거기에 이거 툭하면 툭툭 부러지는거, 어쩝니까? 그거 막자고 티타늄이라도 썼다간 가격 폭발하고. 이건 개악입니다 개악"
좌중 여기저기서 "으흠!" 혹은 "흠흠" 하는 불편한 헛기침 소리가 터져나오는 신랄한 혹평이었지만 조심스럽게 손을 든 간지관리본부 측 인사는 그에 대한 반박을 개시했다.
"압니다. 하지만 더이상 손쓰기 어려워지기 전에 무엇이라도 해야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새로운 스타일이 도입됨으로서 또 다른 제 3, 제 4의 스타일이 발생하기를 조심스레 기대해봅니다"
물론 뭐가 하나 유행한다고 하면 그거 뒤쫒기 바쁘지 먼저 뭘 할 줄 모르는 한국인들이 제 3, 제 4의 스타일을 알아서 도입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뿔테중독 이슈는 이미 10년 전부터 나왔던 말이었기에 당시의 공개토론회에서는 김구 안경의 도입 인가가 지지를 얻었다. 정말이지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정도로 심각했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뿔테란 말이지"
물론 이제는 또 하나의 클래식이 되어버린 뿔테이기에 그것을 스타일로 추구하는 녀석도 많지만, 애초에 이런 중증 환자가 그럴 리 없다. 싸구려 뿔테 안경테 장시간 착용으로 인해 완전히 눌러버린 콧잔등, 더운 날 안경다리가 퉁퉁한 옆얼굴에 밀착되어 생겨버린 소금가루 등 만성뿔테증후군의 증상들이 보였다. 김박스는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클리어 원데이"
그러자 폴리클 닥터 김원근이 그에게 클리어 원데이 렌즈를 전달하며 물었다.
"쿠퍼비전 프로클리어로 안 가십니까? 하다못해 트루아이라도…"
하지만 김박스는 고개를 저으며 환자의 손목을 들어보였다. 환자의 손목에는 싸구려 카시오 시계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김박스는 부연했다.
"현재 간지학계의 최신 조류는 '주어진 환경 내에서의 좋은 결과 창출'이다. 무리한 명품 착용이 불러오는 파산 쇼크는 말할 것도 없고,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 용품조차 누군가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되는 투자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원데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투자'이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과감한 시도'라는 사실을 우리 간지의들은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잠시 수술을 멈춘 그는 모두에게 다시 한번 다짐하듯 말을 해두었다.
"젊고 가난한 간지 결핍 환자들의 얼마 안되는 여윳돈은, 어쩌면 그가 이제 평생토록 다시는 누려보지 못할 멋에 대한 마지막 사치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항상 신중히, 그리고 최선의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진료를 선택해야 한다"
교과서와도 같은 말이지만, 그런 조언은 언제 들어도 새겨둘 가치가 있는 그런 말이었다. 하지만 사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닥터 김박스는 지금 자신의 말과는 정 반대의 노선에 있던 의사였다.
'매력은 육신에서 나오고, 멋은 돈에서 나온다'
칠판에 위 문장을 적은 김박스 교수는 의대생들에게 말했다.
"나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우리 모두는 평생동안 단 한번도 지나가는 사람의 고개가 휙휙 돌아갈 정도의 매력을 내뿜을 수 없다. 타고난 외모가, 육신이 그렇기 때문이다. 한계가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아, 거기 인철 군과 여원 양을 비롯해 몇몇 여학생들은 예외. 자네들은 풀메이크업 하고 제대로 꾸미면 가능해. 하지만 나머지는 단언컨데 불가능하다. 우리는 평생 누군가의 마음을 눈빛 한 번으로 뺏을 수 없다. 그것이 외모이고, 그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강의실이 조용해졌을 무렵, 박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인간은 날개가 없음에도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고, 물갈퀴와 지느러미가 없음에도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되었다.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도구와 기술과 능력 있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같은 매력 없는 이들도 이제는 집중적인 헬스 트레이닝과 성형수술, 의류와 악세서리, 헤어 스타일링과 피부 관리, 메이크업과 각종 보형물과 장구들로 그 나름의 매력을 내뿜을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한계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 수 있게 되긴 하지만, 두 팔의 날개짓으로 떠있는 것은 여전히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한계는 명확히 인지한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이야기를 한바퀴 돌린 그는 다시 핵심으로 돌아왔다.
"요는 돈이다. 돈이 있다면 몸도 멋있어지고, 얼굴도 아름다워진다. 몸을 추하게 가리던 거적떼기가 아름답게 얼굴을 비추는 빛이 되고, 모두에게서 무시받던 외관을 사랑받는 무기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이 돈이고, 매력과 멋의 실체이다. 따라서 간지 결핍 또는 간지 결손 환자의 치료에 있어서 최선의 길은, 외모에 대한 확실한 투자가 가장 분명하고도 빠른 치료법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세상에서 가장 추하게 태어난 사람도, 큰 돈이 있다면 추앙받고 사랑받을 수 있기에, 돈은 이미 그 자체로 간지통치약에 다름 아니다. 이상!"
'그랬었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김박스는 여전히 뿔테 환자의 수술을 집도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
"포마드"
"포마드요? 왁스가 아니라?"
닥터 김박스는 원근의 손에서 포마드를 빼앗으며 말했다.
"헤어의 모질과 두상에 따라 한국인일지라도 포마드 기름이 어울리는 사람이 존재하며, 그것은 특별한 강점이 될 수도 있다. 특히 2천년대 이후 수많은 젊은 한국 부모들의 아기두상에 대한 처절한 관리와 노력에 의해 한국인의 두상도 많이 예뻐졌기 때문이지"
"알겠습니다"
간지 결손 환자들에 대한 치료에 있어서 굉장히 과감하고 사치적인 하이엔드 라인의 명품 도입을 아끼지 않았던 김박스가 갑자기 자신의 노선을 버리게 된 것은 놀랍게도 뿔테 바이러스의 감염 때문이었다.
"후우"
그것을 치료해야 할 병원이나 의료 기관에서 오히려 병원균이나 질환에 감염되는 원내감염. 그러나 그날따라 결막염을 이유로 콘텍트 렌즈 착용을 할 수 없었던 김박스는 그만큼이나 안경 면역력이 약해진 상황이었고, 하드한 업무 속에서 부주의한 선택은 그만 그가 잠결에 뿔테 안경을 뒤집어 쓰고 근무를 보게 된 치명적인 사고를 유발하고야 말았다.
"어머, 박스 선생님, 안경 쓰셨네요? 잘 어울려요"
"잘 어울리기는. 그냥 결막염이라서 쓴 거야"
더욱이 치명적이었던 것은 오전 내내 자신이 뒤집어 쓴 안경이 뿔테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병원 안을 돌아다녔던 사실이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만성적인 수면부족과 뿔테 특유의 편안함이 그를 완벽하게 뿔테 바이러스에 감염시켰다. 그가 자신이 뿔테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오후 회진 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김박스, 자네 지금 뭐하는건가?"
"예?"
"지금 뭐하고 있는거냐고! 시위라도 하는거야? 아니면 무슨 애들 장난질 치는거야"
응급간지학의 권위자이자 애플학파의 거두인 강 교수는 얼마 전에 바꾼 자신의 린드버그를 고쳐쓰며 김박스를 몰아부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김박스는 "예?" 하고 고개를 갸웃했고, 그러자 강교수는 폭발했다.
"내가 지금 안 어울리게 팀 쿡 스타일의 린드버그 며칠 썼다고 지금 자네 그런 싸구려 뿔테로 나 도발하는거 아닌가!"
그리고 그제서야 김박스는 자신이 실수로 싸구려 뿔테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엉겁결에 안경을 집어 던지면서까지 놀랐고, 그때까지만 해도 다들 멋으로 그가 뿔테를 썼다고 생각했던 모두는 그때 '닥터 김박스가 뿔테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했다.
다행히 김박스는 즉시 병원 내의 옵티컬 샵으로 옮겨져 볼프강 프록쉐, 니로와 실루엣의 티타늄 안경으로 집중 치료를 받고 뿔테 바이러스를 곧바로 치료했지만 그는 한동안 병실에서 마음을 추스려야 했다. 게다가 놀랍게도, 도대체 언제 얼마주고 맞췄던 안경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 싸구려 보세 브랜드 뿔테 안경이 썩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나쁘지 않았어'
오히려 박스의 얼굴형에는 니로 브랜드보다 그 싸구려 뿔테가 더 어울렸다는 사실을 그는 스스로 인정했다. 그리고 그날의 경험은, 그에게 새로운 의학적 깨달음을 주었다. 물론 그 시점에서도 "정말 해골물을 마셨다면 원효는 밤새 Vibrio parahaemolyticus에 시달렸을거라고"하고, 슬그머니 마음 한 구석에서 떠오르는 원효대사 해골물 이야기에 대해 귀여운 반박을 시도했지만 말이다.
"수술 완료, 회복실로"
싸구려 뿔테는 중저가 소프트 콘택트 원데이 레즈로, 환자의 더벅머리는 가벼운 가르마 펌으로 손보고, 손목의 카시오는 중고 애플 워치로 바꾸어 '최소의 투자로 그닥 썩 나쁘지 않은 간지의 확보'를 성공했으며, 정체불명의 보세 브랜드 옷은 역시 몇몇 중급 스트릿 브랜드로 갈아입히어 환자의 매력을 확보해냈다. 환자의 간지 바이탈이 팔로워-팔로잉 1/3 비율까지 올라오자 모두는 안심했고, 김박스는 수술 성공을 선언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특히 '중고'의 도입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수술실을 나오며, 폴리클 닥터 김원근은 간지의학에서 사실상 금기시되는 '중고'를 과감히 도입한 닥터 김박스에게 감탄했고, 그는 고개를 으쓱했다.
"넓게 보면 리셀러를 통한 구입도 '중고'의 개념 하에 포함될 수 있지만 그에 대해 경제적이라면 몰라도 간지적인 측면에서는 그 누구 하나 태클 거는 이 없는 관대한 2017년의 기준으로는, 민트급이라는 부분만 확인된다면 중고라도 간지의학에서 이제는 과감히 도입해 볼 필요성이 있지 않나, 싶구나"
"항상 깊은 가르침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숙직실로 돌아온 김박스는 최종적으로 스케쥴을 확인한 뒤, 확실히 비어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고는 이번에야말로 기나긴 휴식의 꿀잠으로 돌입했다.
"음냐"
물론 머지않아 그 깊은 꿀잠이 준 행복감을, M자 탈모 디자인의 'X같은 디자인'을 한 아이폰X에 완전히 망쳐버리게 되지만 그것은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몇 십 시간 이후의 이야기였다.
-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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