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의 역삼동답게, 도로는 꽤나 막힌다. 황사 탓인지 코는 매케하게 막히고 콧물이 흐르기 시작하니, 아까 콘솔박스에 쳐박은 물티슈가 생각난다. 마침 신호도 걸린 차에 콘솔박스를 열자, 이런저런 잡동사니 사이로 CD 하나가 툭 떨어진다.
[ 승미에게 ]
매직으로 찍찍 갈겨쓴, 내 필적으로 적힌 문구. 그리고 추억의 이름. 피식 웃으며 다시 넣으려다 문득 시디를 그대로 집어 플레이어에 넣는다. 몇 초의 로딩과 함께 차 안에는 한숨 같은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아…"
그리고 꾹꾹 묻어두었던 추억들이 어느새 차 안에 가득해지고, 신호가 바뀜과 동시에 나는 그 무렵 어딘가의 기억으로 떠나기 시작한다.
"만약에 어느날 갑자기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오빤 어떻게 할거야?"
부여를 향해 신나게 달리는 차 안에서, 그녀는 뜬금없이 물었다. 쿵작쿵작 음악 소리에 반쯤 묻힌 승미의 말이었지만 귀신같이 그 말을 캐치한 나는 볼륨을 줄이는 대신 음악 소리 이상으로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어쩌긴! 달려가서 붙잡고, 이유를 묻고, 반성하고 사과하고 고쳐서, 다시 마음 돌려서, 처음 만난 그때처럼 정말로 잘해주고 더 멋있고 재밌게 해줘서 꼭 붙들어야지. 절대로, 절대로 안 헤어져! 미쳤나!"
그 말에 그녀가 무어라 대꾸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다음에 흘러나온 신나는 노래에 맞춰 우리 둘 다 몸을 흔들며 터널 속으로 기분좋게 빨려들어간 것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그 아름다웠던 여름 날의 찬란한 햇살이 단박에 터널의 붉은 빛으로 바뀌는 그 짜릿함과…, 선글래스를 벗고 슬쩍 옆자리를 보았을 때, 나를 보고 웃으며 몸을 흔들던 승미의 모습이 내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었으니까.
선한 인상에 웃는 모습이 귀엽고, 못된 표정으로 애교 부릴 때는 또 한없이 고양이 같아지던 그녀. 맨날 그런 장난 좀 치지 말라고 하면 혼자 또 빵 터져서 "오빠 괴롭히는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 하고 좋아죽던 너.
"그래도 잠깐 밥이라도 먹자"
"알았어, 15초만 기다려"
"천천히 와도 돼"
"아냐, 오빠 춥잖아"
하나도 꾸미지 않은 채로, 그저 내가 나오라는 말에 싫다는 군소리 하나 없이 뛰어나오던 너. 아파트 단지 저 너머에서 나를 발견하곤 그토록 환하게 웃으며 뛰어오던 니 모습은….
"아…"
눈물이 그렁그런해져서 그만 앞이 뿌얘지는 김에 차를 길가에 잠깐 세웠다. 기억이 다 뭐라고. 쓸데없이 미화된 기억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해보지만, 음악의 탓인가. 기억은 계속 차오른다.
승미가 씻는 사이에 호기심에 열어본 그녀의 속옷 서랍. 며칠 전 왕창 선물한 속옷들 사이로 문득 그녀의 통장이 보인다. 그토록 억척스럽게 돈 모으는게 참 웃기기도 해서 난 호기심을 못 이기고 열어본다. 그래, 얼마나 모았나보자.
'아…'
그토록 고민하며 안 줄거라고 다짐하더니, 결국 또 보냈다. 남은 잔액 124만원이 이제 그녀의 전재산. 그 아래의 다른 하나는 새로 발급 받았음이 분명한 1500짜리 마이너스 통장. 한참 후의 그 어느 날, 취해서 밑도 끝도없이 "그 돈 내가 어떻게 모은 돈인데…다 싫어 정말" 하고 울먹이던 승미의 등을 두드리던 나.
"의외로 너 부침개 잘 부친다?"
"울 집 제사 지낼 때 장난 아니거든. 나중에 오빠한테 내가 시집 가면 다른건 모르겠는데, 전은 하나도 걱정없다"
"얼, 대단한데? 우리 집은 근데 제사 안 지내"
펜션에서의 그 대화. 대충 흘려보내긴 했지만, 나한테 시집 온다는 말에 참 기뻤었다.
"나? 당장 데이트 비용만 해도 내가 거의 다 대잖아."
해서는 안되는 말을 했다. 그녀를 위한다면서 억지로 마초 연기까지 해가며 돈 못 쓰게 했는데. 그 모든 노력을 단숨에 날리는 생색을 내버렸다. 돈이 아까운 건 진짜 아니었는데. 그냥 나도 확신을 갖고 싶었을 뿐인데. 그저 한번씩, 화가 나면 주체를 못하고 아픈 사람 마음 후벼파고야 마는 나의 그 지독한 독설. 항상 내 인생의 앞 길을 막던 내 답 없는 주둥아리. 찢어 죽여버리고 싶은 내 주둥아리.
한참의 정적이 흐르고 "알았어, 내가 미안해" 하고 힘없이 가방을 짊어지던 너. 그 다음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거 알아? 첫 눈 오는 날 함께 걸으면, 다음 첫 눈 오는 날까지 그 커플 헤어지지 않는대"
"우리 그럼 최소한 1년은 안 헤어지겠네?"
"응"
웃는 얼굴. 하지만 네 얼굴에 희미하게 스쳐 지나간,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네 그 씁쓸한 표정. 무슨 의미였을까.
"중학교 이후로 가족들이랑 한번도 가족들이랑 여행을 가본 적이 없어"
아버지의 사업이 망한 이래로 한번도 가족끼리 어디 여행을 가본 적 없다는 말에 괜히 가슴이 쿡 하고 아팠다. 그냥, 남자친구가 아니라 승미의 남자로서, 그토록 아프시다는 그녀 어머니 허리를 위해 안마기를 보낸 것은 지금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양가 부모님 모시고 우리 여행 꼭 가자"
"응"
"그 새끼 번호 내놔"
흥분한 나는 그녀 앞에서 처음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그만 좀 하라는 승미의 말에도 나는 분이 식지 않았다. 승미가 그런 애가 아니라는 것은 물론 잘 알고 있었다. 정말 그녀의 말 그대로가 분명한데. 그럼에도 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나 자신에 대한 분노였는지도 모른다. 다른 누군가도 그녀를 그렇게나 아끼는데, 그 시간에 나는 다른 여자들 꽁무니나 쫒으며 정신 못 차리고 있었으니까.
"병원까지 데려다 준 것 뿐이라고! 오빠도 연락 안되고 하는데 어떻게 해 그럼!"
"알았으니까 번호부터 내놓으라고, 그 개새끼 번호!"
"아 쫌 진짜 왜 그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 안의 불안을 오히려 역으로 그녀에게 투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이게 다 뭔데, 어? 이거 뭐냐고! 말해봐, 설명해 봐!"
무어라 변명조차 할 수 없는 빼도박도 못하는 바람의 증거들. 분노인지 실망인지 부들부들 몸을 떨던 그녀는 대답을 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에 결국 주저앉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또 적당히 꾸며낸 변명을 읊은 나.
"야, 그거…저기잖아. 저번에 내가 말했던 그, 있잖아. 희준이네 커플 사건 말이야"
하지만 그녀가 패대기 쳐버린 종이쪼가리 틈 사이로 흘러나온 내 이름 박힌 티켓에 그 헛소리는 곧바로 부정당하고, 민망함과 당황스러움에 "하, 그게 승미야. 니가 생각하는 그런게 아니야" 하고 또 다시 둘러대보지만…
"잘있어"
차라리 미안하다고 말이라도 할 것을. 끝까지 어설픈 변명을 둘러대던 나에게 승미는 더이상 얼굴조차 보이지 않고 저기 떨어뜨렸던 가방을 힘없이 든 채 걸어갔다.
"정말 다신 안 그럴거지? 정말이지?"
그 큰 눈에 또 왕방울만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승미. 그렇겠노라며 고개를 끄덕이던 나에게 그녀는 커플링을 나에게 내밀었다.
"하…"
그녀의 통장 잔고를 뻔히 아는 나로선 그 커플링이 새삼 그렇게 가슴이 아팠다. 그 놈의 커플링이, 그게 그녀에게도 그렇게나 모질게 가슴에 박혔던 것일까.
어느새 나는 핸들에 머리를 묻고 울고 있었다. 멍청한 새끼. 그렇게 끔찍히도… 병신.
"미안하다"
나는 눈물을 닦고, 시디를 빼고서는 집으로 차를 몰아갔다. 그럼에도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한 기억들은 멈출 줄을 모른다.
"승미야…"
그녀가 떠나버린 뒤로 혼자 우두커니 길거리 한복판에서 서있던 나.
"하아"
뒤늦게 생각난 그럴듯한 변명거리, 그걸로 무마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번에도 정말 한순간의 실수라고 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았더라면? 정말로, 진짜로 진짜로 이젠 다시는 그런 일 없을거라고 정말 무릎 꿇고 머리를 찍어가면서라도 반성했더라면? 아니 그 날 그 회식에 참여 안 하고 그냥 집으로 갔더라면? 그 전날 승미의 제안대로 그냥 같이 승미 집에서 자고 갔더라면? 그래서 빨래 안 한 옷 때문에 민망해서 회식까진 안 갔더라면? 아니아니 그냥, 그냥….
'승미를 처음 만난 그 카페에서 딱 3분만 일찍 일어났더라면'
그냥…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는 나. 5층의 문이 열리고, 501호에 들어선 난 노을 지는 방바닥에 털썩 앉아 기억을 더듬기 시작한다.
"오육이…일? 삼?"
어느새 기억까지 가물가물해진 숫자들. 기억을 다시 해낸다고 해봐야 그녀의 번호라고 여전히 그대로일까 싶지만 그래도 필사적으로 떠올려 본다.
"씨발"
기억이 나지 않아 머리를 쥐어 뜯어본다. 있을 리 없는, 그녀의 번호라도 어디 적어놓지 않았을까 싶어 책상 서랍을 쓸데없이 뒤져본다.
"뭐였더라"
가슴이 뛰고, 잃어버린 시간들을 만회할, 아니 그렇지 못해도 좋다. 그런 것 따위 바라지도 않는다. 단지, 수없이 상상했던 그녀와의 재회만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돌아와"
천장을 향해 중얼거린 나는 그렇게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눈을 감으며 오늘도 그렇게 휴대폰을 쥔 손을 살며시 놓아버린다.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그녀와의 추억 하나를 떠올리며.
"오빠는 남자치고 눈물이 너무 많아"
영화관에서 빠져 나오는 나에게, 눈물이 그렁그렁한 나를 놀리던 그녀는 슬쩍 내 손을 잡는다.
"그리고 그래서 좋아. 나중에 나 생각하면서 많이 울어줄 것 같아서"
"내가 왜 니 때문에 우는데? 뭐, 니한테 채여서?"
그러자 또 픽 웃던 승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사랑했다, 아니 사랑한다 승미야. 그리고 또 생각해서 미안.
[ 승미에게 ]
매직으로 찍찍 갈겨쓴, 내 필적으로 적힌 문구. 그리고 추억의 이름. 피식 웃으며 다시 넣으려다 문득 시디를 그대로 집어 플레이어에 넣는다. 몇 초의 로딩과 함께 차 안에는 한숨 같은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아…"
그리고 꾹꾹 묻어두었던 추억들이 어느새 차 안에 가득해지고, 신호가 바뀜과 동시에 나는 그 무렵 어딘가의 기억으로 떠나기 시작한다.
기억 속으로
"만약에 어느날 갑자기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오빤 어떻게 할거야?"
부여를 향해 신나게 달리는 차 안에서, 그녀는 뜬금없이 물었다. 쿵작쿵작 음악 소리에 반쯤 묻힌 승미의 말이었지만 귀신같이 그 말을 캐치한 나는 볼륨을 줄이는 대신 음악 소리 이상으로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어쩌긴! 달려가서 붙잡고, 이유를 묻고, 반성하고 사과하고 고쳐서, 다시 마음 돌려서, 처음 만난 그때처럼 정말로 잘해주고 더 멋있고 재밌게 해줘서 꼭 붙들어야지. 절대로, 절대로 안 헤어져! 미쳤나!"
그 말에 그녀가 무어라 대꾸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다음에 흘러나온 신나는 노래에 맞춰 우리 둘 다 몸을 흔들며 터널 속으로 기분좋게 빨려들어간 것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그 아름다웠던 여름 날의 찬란한 햇살이 단박에 터널의 붉은 빛으로 바뀌는 그 짜릿함과…, 선글래스를 벗고 슬쩍 옆자리를 보았을 때, 나를 보고 웃으며 몸을 흔들던 승미의 모습이 내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었으니까.
선한 인상에 웃는 모습이 귀엽고, 못된 표정으로 애교 부릴 때는 또 한없이 고양이 같아지던 그녀. 맨날 그런 장난 좀 치지 말라고 하면 혼자 또 빵 터져서 "오빠 괴롭히는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 하고 좋아죽던 너.
"그래도 잠깐 밥이라도 먹자"
"알았어, 15초만 기다려"
"천천히 와도 돼"
"아냐, 오빠 춥잖아"
하나도 꾸미지 않은 채로, 그저 내가 나오라는 말에 싫다는 군소리 하나 없이 뛰어나오던 너. 아파트 단지 저 너머에서 나를 발견하곤 그토록 환하게 웃으며 뛰어오던 니 모습은….
"아…"
눈물이 그렁그런해져서 그만 앞이 뿌얘지는 김에 차를 길가에 잠깐 세웠다. 기억이 다 뭐라고. 쓸데없이 미화된 기억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해보지만, 음악의 탓인가. 기억은 계속 차오른다.
승미가 씻는 사이에 호기심에 열어본 그녀의 속옷 서랍. 며칠 전 왕창 선물한 속옷들 사이로 문득 그녀의 통장이 보인다. 그토록 억척스럽게 돈 모으는게 참 웃기기도 해서 난 호기심을 못 이기고 열어본다. 그래, 얼마나 모았나보자.
'아…'
그토록 고민하며 안 줄거라고 다짐하더니, 결국 또 보냈다. 남은 잔액 124만원이 이제 그녀의 전재산. 그 아래의 다른 하나는 새로 발급 받았음이 분명한 1500짜리 마이너스 통장. 한참 후의 그 어느 날, 취해서 밑도 끝도없이 "그 돈 내가 어떻게 모은 돈인데…다 싫어 정말" 하고 울먹이던 승미의 등을 두드리던 나.
"의외로 너 부침개 잘 부친다?"
"울 집 제사 지낼 때 장난 아니거든. 나중에 오빠한테 내가 시집 가면 다른건 모르겠는데, 전은 하나도 걱정없다"
"얼, 대단한데? 우리 집은 근데 제사 안 지내"
펜션에서의 그 대화. 대충 흘려보내긴 했지만, 나한테 시집 온다는 말에 참 기뻤었다.
"나? 당장 데이트 비용만 해도 내가 거의 다 대잖아."
해서는 안되는 말을 했다. 그녀를 위한다면서 억지로 마초 연기까지 해가며 돈 못 쓰게 했는데. 그 모든 노력을 단숨에 날리는 생색을 내버렸다. 돈이 아까운 건 진짜 아니었는데. 그냥 나도 확신을 갖고 싶었을 뿐인데. 그저 한번씩, 화가 나면 주체를 못하고 아픈 사람 마음 후벼파고야 마는 나의 그 지독한 독설. 항상 내 인생의 앞 길을 막던 내 답 없는 주둥아리. 찢어 죽여버리고 싶은 내 주둥아리.
한참의 정적이 흐르고 "알았어, 내가 미안해" 하고 힘없이 가방을 짊어지던 너. 그 다음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거 알아? 첫 눈 오는 날 함께 걸으면, 다음 첫 눈 오는 날까지 그 커플 헤어지지 않는대"
"우리 그럼 최소한 1년은 안 헤어지겠네?"
"응"
웃는 얼굴. 하지만 네 얼굴에 희미하게 스쳐 지나간,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네 그 씁쓸한 표정. 무슨 의미였을까.
"중학교 이후로 가족들이랑 한번도 가족들이랑 여행을 가본 적이 없어"
아버지의 사업이 망한 이래로 한번도 가족끼리 어디 여행을 가본 적 없다는 말에 괜히 가슴이 쿡 하고 아팠다. 그냥, 남자친구가 아니라 승미의 남자로서, 그토록 아프시다는 그녀 어머니 허리를 위해 안마기를 보낸 것은 지금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양가 부모님 모시고 우리 여행 꼭 가자"
"응"
"그 새끼 번호 내놔"
흥분한 나는 그녀 앞에서 처음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그만 좀 하라는 승미의 말에도 나는 분이 식지 않았다. 승미가 그런 애가 아니라는 것은 물론 잘 알고 있었다. 정말 그녀의 말 그대로가 분명한데. 그럼에도 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나 자신에 대한 분노였는지도 모른다. 다른 누군가도 그녀를 그렇게나 아끼는데, 그 시간에 나는 다른 여자들 꽁무니나 쫒으며 정신 못 차리고 있었으니까.
"병원까지 데려다 준 것 뿐이라고! 오빠도 연락 안되고 하는데 어떻게 해 그럼!"
"알았으니까 번호부터 내놓으라고, 그 개새끼 번호!"
"아 쫌 진짜 왜 그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 안의 불안을 오히려 역으로 그녀에게 투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이게 다 뭔데, 어? 이거 뭐냐고! 말해봐, 설명해 봐!"
무어라 변명조차 할 수 없는 빼도박도 못하는 바람의 증거들. 분노인지 실망인지 부들부들 몸을 떨던 그녀는 대답을 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에 결국 주저앉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또 적당히 꾸며낸 변명을 읊은 나.
"야, 그거…저기잖아. 저번에 내가 말했던 그, 있잖아. 희준이네 커플 사건 말이야"
하지만 그녀가 패대기 쳐버린 종이쪼가리 틈 사이로 흘러나온 내 이름 박힌 티켓에 그 헛소리는 곧바로 부정당하고, 민망함과 당황스러움에 "하, 그게 승미야. 니가 생각하는 그런게 아니야" 하고 또 다시 둘러대보지만…
"잘있어"
차라리 미안하다고 말이라도 할 것을. 끝까지 어설픈 변명을 둘러대던 나에게 승미는 더이상 얼굴조차 보이지 않고 저기 떨어뜨렸던 가방을 힘없이 든 채 걸어갔다.
"정말 다신 안 그럴거지? 정말이지?"
그 큰 눈에 또 왕방울만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승미. 그렇겠노라며 고개를 끄덕이던 나에게 그녀는 커플링을 나에게 내밀었다.
"하…"
그녀의 통장 잔고를 뻔히 아는 나로선 그 커플링이 새삼 그렇게 가슴이 아팠다. 그 놈의 커플링이, 그게 그녀에게도 그렇게나 모질게 가슴에 박혔던 것일까.
어느새 나는 핸들에 머리를 묻고 울고 있었다. 멍청한 새끼. 그렇게 끔찍히도… 병신.
"미안하다"
나는 눈물을 닦고, 시디를 빼고서는 집으로 차를 몰아갔다. 그럼에도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한 기억들은 멈출 줄을 모른다.
"승미야…"
그녀가 떠나버린 뒤로 혼자 우두커니 길거리 한복판에서 서있던 나.
"하아"
뒤늦게 생각난 그럴듯한 변명거리, 그걸로 무마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번에도 정말 한순간의 실수라고 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았더라면? 정말로, 진짜로 진짜로 이젠 다시는 그런 일 없을거라고 정말 무릎 꿇고 머리를 찍어가면서라도 반성했더라면? 아니 그 날 그 회식에 참여 안 하고 그냥 집으로 갔더라면? 그 전날 승미의 제안대로 그냥 같이 승미 집에서 자고 갔더라면? 그래서 빨래 안 한 옷 때문에 민망해서 회식까진 안 갔더라면? 아니아니 그냥, 그냥….
'승미를 처음 만난 그 카페에서 딱 3분만 일찍 일어났더라면'
그냥…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는 나. 5층의 문이 열리고, 501호에 들어선 난 노을 지는 방바닥에 털썩 앉아 기억을 더듬기 시작한다.
"오육이…일? 삼?"
어느새 기억까지 가물가물해진 숫자들. 기억을 다시 해낸다고 해봐야 그녀의 번호라고 여전히 그대로일까 싶지만 그래도 필사적으로 떠올려 본다.
"씨발"
기억이 나지 않아 머리를 쥐어 뜯어본다. 있을 리 없는, 그녀의 번호라도 어디 적어놓지 않았을까 싶어 책상 서랍을 쓸데없이 뒤져본다.
"뭐였더라"
가슴이 뛰고, 잃어버린 시간들을 만회할, 아니 그렇지 못해도 좋다. 그런 것 따위 바라지도 않는다. 단지, 수없이 상상했던 그녀와의 재회만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돌아와"
천장을 향해 중얼거린 나는 그렇게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눈을 감으며 오늘도 그렇게 휴대폰을 쥔 손을 살며시 놓아버린다.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그녀와의 추억 하나를 떠올리며.
"오빠는 남자치고 눈물이 너무 많아"
영화관에서 빠져 나오는 나에게, 눈물이 그렁그렁한 나를 놀리던 그녀는 슬쩍 내 손을 잡는다.
"그리고 그래서 좋아. 나중에 나 생각하면서 많이 울어줄 것 같아서"
"내가 왜 니 때문에 우는데? 뭐, 니한테 채여서?"
그러자 또 픽 웃던 승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사랑했다, 아니 사랑한다 승미야. 그리고 또 생각해서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