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늦여름의 한가로운 주말 오후. 나른함이 몰려오는 와중에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녀는 모히또를 반쯤 비운 상태로 테라스 테이블에 널부러진다.
"잡지나 볼까?"
"그래"
노을이 지기 전 부릴 수 있는 마지막 사치, 나는 매장 안 쪽에서 잡지 두 권을 집어 들고 나온다. 그녀는 패션 잡지, 나는 여행 잡지를. 조용히 페이지를 넘기다가도 수시로 서로를 부른다.
"이거 봐봐"
"오, 이쁘다. 얼마야?"
광고 페이지를 보며 히히덕 대고, 칼럼 기사를 보며 의견을 주고 받는다. 각각의 잡지 한 권을 다 보는데 20분 쯤 걸렸을까. 노을에 비친 우리의 얼굴은 마지막으로 환하게 번들거리다가 곧 가게의 야외 조명과 함께 새삼 로맨틱한 분위기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별반의 대화도 없이, 가볍게 손을 잡았다가 휴대폰 보다가를 반복하며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낸다.
"흠"
불과 몇 시간 전의 찌는듯한 무더위를 잊은 것처럼 빠르게 내려가는 온도는 내 팔뚝에 닭살을 꽃피우고, 성큼 다가온 가을은 괜한 초조함으로 마음을 간질인다. 그리고 그 간질임에 안타까움을 느낄 무렵, 내 걱정은 어느새 가을을 싫어하는 너에게 이르고 만다.
"저녁 먹으러 가자"
어둑어둑한 조명 아래서 마지막까지 무엇인가의 기사를 열심히 읽던 그녀가 잡지를 덮으며 말했고, 우리 둘 다 조금은 날씨에 비해 가볍게 입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근처의 식당을 떠올렸다.
"쌀쌀한데 뜨끈하게 참치찌개 먹자"
"그냥 김치찌개 먹을래"
"좋아"
우리의 만남은 매일매일이다. 토요일의 오늘이 지나면 내일도 본다. 월요일도 볼 것이고, 화요일도 볼 것이다. 수요일도 보고, 목요일도 보고, 어쩌면 하루쯤은 다른 약속이나 사정으로 못 볼지 모르지만 금요일에는 다시 볼 것이다. 토요일은 조금 기쁜 마음으로 볼 것이고, 일요일 역시 즐겁게 볼 것이다.
만난지 어느새 1년 남짓 되었지만 그래서 우리는 더 가깝다. 애틋하고 정겹다. 그녀의 약점도 단점도 알지만 그것은 기피하고 싶은 부분이 아니라 보듬고 싶은 부분이다. 네가 울면 내 눈에도 눈물이 맺히고, 네가 웃으면 나도 행복하다.
손을 잡고 땅거미가 깔린 인적 드문 골목길을 지나다 가습적인 뽀뽀를 받는다. 씨익 웃으며 잡은 손에 힘을 준다. 맞잡은 손은 팔짱이 되고, 토요일 밤의 한가로움은 어느새 살짝 들뜬 기분이 된다.
골목길의 가로등 역시 하나둘씩 불이 들어오고, 땅거미가 온전히 저녁의 그늘에 지워질 무렵 우리는 식당에 도착한다.
"김치찌개 두 개요"
"네"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환한 형광등 불빛에 너를 본다. 오목조목 귀여운 네 얼굴은 가게 구석의 브라운관 티비 속 뉴스에 참 다양하게도 표정을 보여주다 뒤늦게 나에게로 시선을 돌려온다.
"아 왜!"
"왜긴 그냥 이뻐서 그러지"
"아저씨처럼 그러지 마"
나는 물컵을 대령하고, 너는 수저를 세팅한다. 식탁 가운데에 휴대용 가스렌지가 놓이고, 초벌로 끓여나온 찌개는 다시 한번 몸을 불사른다.
"오뎅 맛있다"
몇 점 안되는 반찬의 갯수는 반찬 재활용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보글보글 끓는 찌개는 어느새 찾아온 우리의 그리 나쁘지 않은 침묵을 깬다.
"불 좀 줄여"
"어"
괜히 과하게 먹은 것 같다며 혼자 투덜대는 그녀의 손을 잡고, 3분이면 갈 거리의 그녀 집을 빙 돌아 10분에 걸쳐 간다. 산책의 핑계는 쌀쌀한 날씨도 잊게 한다. 아니, 참게 한다.
"내일 이태원 갈까"
사실은 조금 피곤함을 느끼지만 주말에 함께 무엇인가를, 어딘가를 가야만 아쉬움이 덜어지는 이 알 수 없는 초조함은 그러한 제안을 만들고 "음, 고민 좀 해보고" 라는 대답을 받아낸다.
회사 이야기, 연예인 이야기, 친구 이야기, 인터넷에 본 화제의 이야기까지 나누자 드디어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하고, 난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하고는 손 흔들어 준다.
"들어가 멍충아"
잠시 후, 서너번 되돌아 볼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드는 저 위 10층 복도의 네 실루엣에서 웃는 얼굴을 찾아내고는 드디어 그렇게 그녀를 들여보낸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역 근처까지 걸어가노라니, 수많은 커플들의 행복한 얼굴과 차들의 헤드라이트가 내 새콤달콤한 기분에 향긋한 쓸쓸함을 안기니, 그 오묘한 기분에 혼자 피식 웃은 나는 아무래도 내일은 이태원 대신 다른 곳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저기 사거리 지나 골목 쪽에, 우리가 자주 가며 땀 흘리는 거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