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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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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는 타인의 컴플렉스나 아파할 부분을 말로 적당히 유머스럽게 툭툭 건드려서 어느새 대화의 우위를 점하는 사람이었다. 동아리 모임이 끝나고 집에 와서도 기분이 쉽게 안 풀릴 정도로 짜증나는 말들이었지만 일단은 모두가 빵 터질 정도로 확실한 유머로 포장된 말인데다 사실을 기반으로 한 말이었기에 쉽게 정색을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어색한 웃음만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남자의 화법이 그랬다. 사람 다루는 기술이 그랬다.

그의 말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그것을 애써 부정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음을 지어 보이지만 결국 주변인들은 그 웃음의 의미를 알기 마련이고, 결국 누가 더 센 캐릭터인지 그렇게 판정 도장이 찍혀버린다. 도도한 은영이도, '쎈 캐' 소희도 한 방에 나가 떨어졌다.

게다가 그는 보통 실권에서 멀어지는 4학년임에도 동아리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는 동아리장이었고, 그렇게 리더쉽 측면에서도 '사람들을 어느새 자기 지배 하에 두는 사람'이었기에 아무도 그런 그의 모습에 감히 불평을 늘어놓지 못했다. 싫어하더라도 대놓고 표시할 수 없었다. 잘해야 애써 그와 거리를 두는 것이 한계였다. 그리고 그와 거리를 둔 사람은 결코 모임의 이너써클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가 2학년 3학년 일 때도 이미 선배들은 애써 체면치레만 할 뿐, 그의 눈치를 보는 것이 여실히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우리 동아리의 엄석대였다.

게다가 그런 그의 권력과 능력이 참 싫으면서도… 그의 영도 하에서 총애를 받고 동아리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아이들은 부러웠다. 그렇다. 솔직히 부러웠다. 승희, 진아, 선영… 나와 친하게 지내고, 나와 어딘가 비슷한 색을 갖고 있던 아이들이, 그의 총애를 받으며-정확히 표현하자면 그와 자고 난 뒤- 어느새 동아리 최고의 퀸카로 거듭나는 모습은 거의 질투에 가까운 감정을 유발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울 정도로 괴로웠지만, 동기들이 하나둘씩 멀어져가는 것이 싫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대학교 동아리 따위가 참 무어라고 그런 생각까지 하고, 그렇게 몸까지 바쳐가며 누군가들에게 호감과 선망의 시선을 받으려 노력들을 했는가 싶지만, 사람이 한번 맹목적이 되면 그때부턴 정상적인 사고가 어려운 법이다. 아니, 이런 오지랍 어린 시선도 마찬가지인지 모르겠지만.





동아리 선배





"야, 김지윤"

선배였다. 왜인지 모르게 순간 가슴이 철렁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아, 선배"
"너 요즘 모임 왜 안 나오냐?"

살짝 땀에 젖은 티 너머로 잘 갈라진 가슴근육과 너른 어깨, 실팍한 팔 근육들이 과하지 않게, 딱 섹시할 정도로 세련되게 붙어있는 모습이 제일 먼저 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을 섬뜩하게 하는, 주영이의 말을 빌어 '늑대상'의 날카로운 눈매와 단단한 하관이 묵직하게 들어오는 목소리로 성큼 다가왔다.

"그냥, 요즘 좀 몸이 안 좋아서요"

사실은 니가 보기 부담스러워서. 하지만 결코 그렇게 대답할 수 없다.

"그래? 어디 아퍼?"

툭툭 쏘아대듯 내뱉는 말투가 어느 순간 한없이 자상해진다. 잔뜩 경계했던 마음이 다 풀어질 정도로. 그리고 문득 떠올렸다. 그의 첫 인상 말이다. 섹시한 발목 라인이 주는 동물적 에로틱과 함께 스타일리시하면서도 열정적인 자세, 다정한 말투에 우리 모든 신입 여학우들은 그에게 녹아버렸더랬지.

"아니요, …그냥, 조금"

훅 하고 들어와 내 안색을 살피는 그의 모습에 서둘러 변명을 하며 다시 거리를 확보하지만, 그는 다 안다는 듯 그 특유의 눈빛을 보낸다.

"그럼 조금 쉬고, 금요일에는 꼭 나와. 너 없으니까 모임이 영 재미가 없다. 동아리실에서 보고 싶네. 너 번호 그대로지?"
"네" 
"그래, 그럼 연락할게"

다시 아무렇지 않게 저기로 달려가는 모습에, 그리고 밉지만 남자로서 매력적인 그 모습에 묘한 감정이 엇갈린다.





"아 선배, 아 요즘 왜 안 나왔어요!"
"와 대박. 지윤아!"

간만에 동아리실에 내가 나타나자, 무언가 주전부리들을 집어먹으며 노트북과 장비들을 펴고 있던 후배들과 동기가 나를 반겨주었다. 개강 이래 한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던 내가 거의 방학을 앞두고서 얼굴을 비추자 모두들 마치 돌아온 탕자라도 되는 양 좋아라했다. 내가 후배들에게 이 정도 존재였나? 하고 스스로 반문할 무렵, 일부러 다른 일에 집중하는 척 누군가의 전화를 받으며 창 밖을 바라보던 선배를 발견했다. 그랬겠지. 그의 입김이 있었겠지.

"이게 누구야, 와 지윤아! 이게 얼마만이냐!"

한타임 늦게, 뒤늦게 나를 발견한 척 폰을 내려놓은 그는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나를 그렇게 끌어 안았다. 뭐지? 하고 당황할 무렵 그는 또 아무렇지 않게 모두의 앞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야, 너가 다음 동아리장 해라. 너 밖에 없다"





아무도 없는 기술관 옥상에 온 우리 둘. 담배를 피우며 선배가 말했다.

"알잖아. 솔직히 지금 우리 동아리에 뭘 제대로 아는 애가 누가 있냐? 명색이 사진 동아리인데 승희, 진아, 주아 뭐 이런 애들은 메뉴얼 모드 놓고 사진 찍을 줄도 모르는데"

몇 달 전까지는 그랬었지. 모두의 앞에서 그렇게 핀찬을 주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은 거짓말이다. 그 셋 다 모두 그가 가르쳐줬으니까. 누드 사진 찍으면서.  

"저도 뭐 아나요"

게다가 현실적으로 나는 동아리에 깊게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아니, 마음이야 있지만 이제 나도 곧 4학년인데… 금수저인 그와는 다르다. 취업준비만으로도 정신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동아리.

"모르는건 내가 가르쳐 줄 수 있어. 그건 중요한게 아니야"

'가르쳐 준다'는 말에 승희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한테도 못 보여줄 사진 찍었어. 선배랑" 괜시리 얼굴이 붉어진다. 솔직히 욕심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교내 탑 5 안에 드는 동아리다. 지원금도 빵빵하고, 나중에 경력에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잘은 몰라도. 게다가 나도 이너써클에 들어가고 싶다. 그리고 사진도 배우고 싶고, 그의 프레임 안에서 환상의 나신으로 거듭나고 싶기도 하고. 아니 그건 아니려나. 다만 그저 왠지 모를 '그래서는 안된다'라는 경계만이 나를 막고 있을 뿐이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요"

선배는 어느 틈엔가 내 코 앞으로 얼굴을 들이대고 말했다.

"모르겠냐"

격하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서둘러 고개를 피했다.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과 기회야 바보야 라는 생각이 안에서 충돌했다. 나도 안다. 나 말고도 후보는 얼마든지 있다. 사진 좋아하는 승열이, 사진전 입선한 기찬이, 지원전자 사보 알바까지 했던 규원 선배까지. 아니 규원 선배도 다음 학기에는 졸업반인가. 어쨌든 나보다도 더, 아니 나보다 훨씬 더 적합한 인물들이 많다. 사진은 둘째치더라도 이너써클의 진아도 있고, 주아나 정민이도. 그런데 왜.

"저 말고도 많잖아요. 왜 뜬금없이 전데요"
"누구? 기찬이? 승열이? 걔들은 무뚝뚝하잖아. 사람 다룰 줄 모르고. 걔들이 여자애들 잘 컨트롤 하겠냐? 우리 동아리 애들을?"

그래, 나도 솔직히 걔들이 우리 동아리장을 맡는다면, 하면 앞날이 아득해진다. 성차별적인 단어들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주베충' 승열이, 매력 없는 선배 워너비로 되바라진 기찬… 아마도 동아리 말아먹기 딱 좋을 것이다.

"여자애들도 저보다 괜찮은 애들 많잖아요"
"그건 너가 더 잘 알지 않냐? 답 없다는거?"

파벌. 한 마디로 정리되는 그 무서운 권력관계. 그보다 얽힌 치정관계로 인해 선배가 조직을 떠나는 순간 난리가 날 것은 뻔하다. 불안한 삼각, 사각, 오각, 그리고 그 외곽으로 이어지는 거미줄 같은 관계들. 누군가 동아리를 떠나며 말했던 "여기가 동아리냐, 섹스의 왕국이냐. 더럽다 진짜" 하는 말이 새삼 떠오르는 그 관계들. 그걸 무서운 장악력으로 억누르고 있는 이 남자.

"제가 동아리장이 되어도 마찬가지일거 같은데요 그건. 그리고 당장 전 요즘 활동도 안 했는데. 다들 반발할걸요"
"그건 내가 다 카바쳐준다고. 다음 학기동안 상왕 전하 노릇 한다고"
"하…"

어느새 내 옆에 앉아 내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놓고-그리고 그것을 슥 밀어낸 나-,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을 잇는 그.

"알아 나도. 내가 우리 동아리 이상하게 만들었다는거. 근데 알잖아. 승현 선배랑 중만 선배 그 미친 새끼들 때문에 동아리 공중분해될 뻔한거. 거기다 자인이가 비리건 터뜨리면서 이제 내 기수부턴 올드비들 모임에 부르지도 않는거. 올드비 모임 회보에서 아예 우리는 기수표 자체를 도려냈다고 하대. 진아 걔네 아버지 아니었음 지원금도 나가리 됐을테고. 믿을건 머릿 수 밖에 없고, 사진에 취미도 없는 새끼들 한달만에 다 나갈거 붙잡으려면 뭐 있겠냐. 술이랑 뭐, 노는거지"

뜬금없이 한템포 쉬는 말에 술이랑 섹스, 라고 말하지는 않을까 순간 노심초사했던 스스로가 저주스러워졌다.

"근데 다행히 이젠 동아리도 살아났고 사진에 관심도 있고 잘 찍고, 1학년 때부터 활동한테다 남자 여자애들한테 딱히 모난거 없고…"

은은하게 전해져 오는 그의 향수 냄새에 살짝 거칠어지는 내 콧김을 나는 간신히 숨긴다.

"그리고 누구한테 마음으로 빚 진거 없는 애. 생각해보니까 너 밖에 없더라. 정말로. 우리 동아리 완전 연애의 왕국이라, 다들 CC로 복잡하게 얽혔잖아. 진짜 뭐 딱히 없는건, 내가 이름이라도 기억하는 애들 중엔 너 뿐이야.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나마 올드비들이랑 연락되는 사람 너 밖에 없잖아. 언젠가는 회복해야지. 나는 실패했고, 너대에서 못하면 이제 영원히 우리 동아리는 그 쟁장한 선배들이랑 다 남 되는거야 남. 어떻게 애들 꼬셨나 생각해봐. 현역 작가 올드비들 이름 팔아서 꼬신건데 그거 다 나가리라고. 솔직히 나는 처음부터 성격적으로도 그렇고 우리 동아리 미래를 생각해봐도 그렇고 너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 밖에 없다는 말. 그 말이 묘하게 들렸다. 물론 무슨 뜻에서 한지는 알지만.

"고민해볼게요"

한참을 눈을 감고 있던 난 그렇게 말했다. 선배가 더 다그치진 않을까 싶었지만, 의외로 쿨하게 그는 일어섰다.

"고맙다. 잘 생각해보고, 말해줘. 그리고 혹시 오늘 언제 끝나냐?"
"이따가 2시에 강의 하나 더 있어요"
"그럼 끝나면 전화해. 집까지 태워다 줄게"

태워다 준다는 말에 잠깐 또 고민했지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언제나의 검은 자켓을 입은 그의 모습은 새삼 멋졌다. 운전을 하며 살짝 걷어올린 소매도.

"지윤이 넌 남자 안 사귀냐? 너 내가 알기로…, 주변에 뭐, 남친 좀 사귀었어?"

알기로는 없지 않냐, 라고 말하려던 것 같은 그는 말하는 도중 어설프게 말을 바꿨다. 나는 솔직히 인정했다.

"고3 이후로 남친 없었어요"

썸을 탄 남자는 조금 있었지만, 하고 덧붙이려다 구차해지는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또 그가 무언가 조소를 퍼붓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고 어디가서 그 이야기를 떠들지는 않을까 싶어 아차 싶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하기사 생각해보니 그가 또 남 없는 자리에서 뒷담화 한 기억은 없는 것도 같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냐. 넌 얼굴도 이쁘고 스타일도 좋은데. 대시 많이 받았을 줄 알았는데. 남자들이 바보네"

생각해보니 그와 이 정도의 사적인 대화라는 나누는 것도 정말 오래간만, 그것도 단 둘이 나누는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그는 뜻밖의 말로 나를 띄웠다. 하지만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얼른 그에게 바톤을 넘긴다.

"선배는 지금 사귀는 사람 있어요?"

무슨 대답이 나올지 궁금했다. 학교의 누군가 이름이 나올지.

"아니, 없어"

이후의 내 묵묵무답이 항의나 의구심 어린 눈총으로 느꼈던지 덧붙였다.

"1학년 신입생 아리 있지. 걔한테 들이대다가 까였어"

아, 진아가 말했던 선배가 공들인다는 그 신입생이 걔였나.

"왜요?"
"왜긴, 애들이 모르겠냐. 내 소문이랑, 사실들 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 문으로 시선을 옮기다가 물었다.

"사실이에요? 사진… 가르쳐준거? 누드 사진으로?"
"뭐?"

선배는 '누드 사진'이라는 말에 피를 토하듯 놀라더니 말했다.

"너도 그 이야기 믿냐? 아 승희 그 기집애 진짜 아…"

다소 오버하는 톤의 말에 연기일까 싶어 그를 자세히 바라보았지만, 그는 꽤 리얼하게 괴로워하고 있었다.

"내 진짜 어디까지 말해야 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진아랑 잠깐 사귈 때, 승희가 그거 질투한건 너도 알거야"

당사자에게 이런 이야기 듣는 것은 아마도 우리 과 전체를 통틀어 내가 처음 아닐까.

"알아, 솔직히. 여자애들. 하, 이 죽일 놈의 인기…가 아니라, 무슨 내가 우리 동아리의 숨은 흑막처럼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하는거 안다고. 남자애들도 술 쳐먹고 나한테 밤에 울면서 전화하는 애들도 있는데 뭐. 근데 잘 생각해봐. 나 진아랑 잠깐 사귈 때 내가 어떻게 했냐? 너도 봤잖아. 근데 왜 그런 이상한 소문이 도는거야. 내가 무슨 카사노바라고. 찌질이면 찌질이지"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과 너무 다른 이야기를 하기에 나는 곧바로 되물었다.

"그럼 내 동기 여자애들 중에 잔 애 한 명도 없어요? 진아 빼고"

선배는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없어. 맹세코. 내가 거짓말이면 당장 오늘 벼락 맞고 뒤진다"




"너도 기억나지? 정우 선배. 그 비원아이즈 했던 예리랑 같이 속옷 쇼핑몰 낸거. 그 선배가 승희 통해서 연락한거야. 모델이랑 포토그래퍼 필요한데 도와줄 수 있냐고. 승희 걔 좀 원래 슴부심 있잖아"
"많죠"
그래. 지가 오케이 한 거고, 나도 뭐 그래도 선배 부탁 받아서 하는 알바고 페이도 괜찮고, 무엇보다 정우 선배 통해서 나는 다시 어떻게 올드비들이랑 좀 잘 해보고 싶은 거도 있었고. 그래서 한건데, 그땐 이미 진아랑도 깨졌을 때고. 둘이 모텔에서 찍는데, 하다가… 아, 이건 좀 진짜. 말해도 되나 싶은데, 여튼 승희가 나 좋아했던건 알지?"
"알아요"
"그래서 승희가, 도발을 했어. 갑자기 브라 풀어버리고. 근데 거기서 내가 막 이상하게 대하는 것도 그렇고, 막말로 거기서 내가 정색하면 일이 이상하게 꼬일 수도 있지 않겠냐? 걔 자존심도 그렇고. 그래서 먼저 승희야, 너 가슴 이쁘다. 기왕 촬영도 거의 끝나가는데, 누드 사진 찍지 않을래, 한거지"

하.

"근데 둘이 안 잤다고요?"
"어 안 잤어. 잤으면 솔직히 걔가 지금 우리 동아리 남아있겠냐. 걔 성격에? 웃으면서 찍고, 나중에 걔가 그러더라. 오바해서 미안하다고"
"그래도 안 잤다는건 안 믿기는데"
"그때 찍은 사진 실시간으로 다 남았어. 모텔 나오면서 내가 이거 재수없음 큰일 나겠다 싶어서 찍은 사진들도 있고. EXIF 보면 알잖아"

그거야 어떻게는 방법은 많고, 또 꼭 그 날이 아니었더라도 볼 거 본 사이에 또 다른 날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어떻게 아냐고 묻고 싶기도 했지만 문득 내가 그거에 궁금해 할 이유도 권리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꼬치꼬치 캐물은 내 질문들이 문득 속마음을 드러낸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우리 둘 다 말이 없어졌다.

"지윤아, 저기냐?"

그리고 마침 집 앞에 도착했다. 원룸촌 골목에 있는 천에 사십짜리 작은 원룸. 주차도 가능하지만 이제껏 내 칸에는 한번도 그 누가 주차한 적이 없는 내 집.

"선배"

오후 5시 54분. 지금도 눈에 선하다. 차에서 내리기 직전, 차창 밖의 골목길을 바라보던 그 순간을. 노을이 지면서 골목길엔 소슬한 바람이 부는 그 시간. 뱃 속이 조금 출출할 시간. 보일러를 켜놓지 않아 조금 방이 추울 그 시간. 그러나 그걸 이유라고 하기에는 그 다음 내가 한 말이 너무나도 이해가 가지 않는 그 말. 왜 그랬을까. 그냥 혼자 끙끙 앓던 고민이 조금은 해소된 탓? 아니면 지금이 아니라면 영원히 없다는 조바심이 든 탓? 어쨌거나 난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

"라면 먹고 갈래요?"

미친 년. 개또라이 년. 아 죽일 년. 병신 미친 년. 아, 미친 년. 가슴이 미친듯이 쿵쾅대며, 내가 감히 그런 대사를 먼저 말했다는 사실에 난 얼굴이 단번에 새빨개졌다. 뭔데 미친 년아. 그리고 미친듯이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저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후"

가벼운 한숨. 천 년과도 같은 5초가 흐르고, 선배는 입을 열었다.

"아니"

나는 곧바로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고 싶었다. 아, 시팔 내일부터 학교 어떻게 다니지. 휴학해야 되나, 자퇴해야 되나. 아 미친 년, 진짜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이게 꿈이 아닐까 간절하게 눈을 뜨고 또 떠봤다. 그렇게 자살하고 싶은 3초가 더 흐르고, 선배는 말을 이었다.

"혹시 짜파게티 있냐"

안전벨트를 풀고 바로 도망치듯 뛰어나가는 개그 캐릭터가 될 건가, 미안해요 라고 말하며 우는 비련의 캐릭터를 연기할까 고민했지만 그의 뒷 말에 나는 아득해지던 정신머리가 단번에 돌아왔다.

"네?"
"어제 저녁도 라면이고 오늘 점심도 라면 먹었어. 어제 기찬이랑 술 먹고 출출해서 라면 먹고, 오늘 아침에 또 해장라면 먹었지. 근데 저녁도 라면이면 너무 불쌍하잖아. 짜파게티라도 끓여줘라"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선배"

선배는 주차권은 없지만 어느새 뒤를 돌아보며 주차를 시작했고, "뭔 말인지 알아" 하고 내 말에 대답하며 말했다.

"내가 좀 매력적이긴 한데, 그래도 잠부터 자는건 너무 진도 빠르지 않냐?"

난 새빨개진 얼굴로 "나 그런 말 한거 아닌데" 하고 어설프게 둘러댔지만, 선배는 주차를 마치고 내 손을 잡았다.

"신입생 환영회 때 기억나냐"

아 그 날.

"선배가 나 똥배 나왔다고 놀린 날이요?"
"어. 기억하네? 그 날 승현이, 그 선배도 아닌 미친 새끼가 너한테 술 계속 먹이길래 내가 그랬잖아. 쟤 똥배 보라고. 배 터지겠다고, 그만 먹이라고"

아….

"그래서 그런 거였어요?"
"어. 너 그 날 나 아니었음 무슨 일 당했을지 모른다. 하, 조금만 빨리 그런거 알았어도 정미, 서윤이 걔들도 다 그런 일 없었을텐데"

이번에는 내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거 알아요? 나 거기선 웃었는데, 그 날 집에 가서 운거? 내 컴플렉스 지적당해서 완전 오빠 한동안 죽도록 미워한거?"
"알아. 그리고 그 이후로 너 일주일만에 살 독하게 빼온 거도 알고"

다 지켜보고 있었구나.

"오빠"

이번에는 내 눈빛에 부담을 느낀 것인지 선배는 서둘러 벨트부터 풀었다.

"얼른 가자. 짜파게티 끓…"

그러나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고, 나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그의 머리를 잡고 입을 들이댔다. 자세가 이상해서 제대로 입술을 맞추지도, 그다지 로맨틱하지도 않은 키스였지만, 그러고 싶었다.

"좋아해요"

휴학 기간까지 합해 근 5년간 저 멀리 방치해놓았던 그 짝사랑, 모처럼 몸에 붙는 옷까지 입어가며 혼자 훅 불타오른 바로 그 날 개망신과 함께 짜게 식어버린 그 마음을 이제서야 이렇게, 전달했다. 선배는 잠시 멍하니 있더니 혼자 또 픽 웃었다.

"너 진짜 무드없다. 그리고 그게 박치기지 키스냐. 야, 이거 무효로 쳐. 담에 제대로 해. 내가 제대로 가르쳐준다. 됐고 빨리 짜파게티 끓여"
"알았어요"

나는 신이 나서 차에서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꽤 답 없는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기대가 됐다. 내 서툰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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