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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수지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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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오후 5시, 저녁 8시, 밤 11시, 새벽 2시… 창 밖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방 안을 비추고, 데우고, 다시 어둠이 되어 그 따스함을 빼앗아 갈 때까지 나는 그저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혼자 술을 마시며. 찌글찌글하게.

"병신…그깟 놈의…"

재혁은 오지 않았다. 문자 한 통, 전화 한 통 없었다. 그렇게 끝난 것이다. 그게 그의 연애고, 그게 그 안의 내 가치였을 뿐이다. 그제서야 눈물 한 방울이 눈가에 차 올랐다.

"병신…"

그깟 놈의 섹스가 뭐라고. 앞의 병신은 재혁에게, 뒤의 병신은 그런 놈을 기다린 나 자신에게 한 소리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일어났다. 이제 더이상은 안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다리가 휘청했다. 그럴 수 밖에.

"맥주 두 병도 못 마시는 주제에…"

위스키 반 병을 비웠다. 진작에 안 쓰러진게 대단한 일이다. 헤어진다고 기분내서 그랬나. 병신. 나는 그렇게 다시 침대에 누웠다.






수지







"압구정 로데오 거리쪽으로 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눈을 떠보니 오후 1시 반이었다. 당연히 아빠의 전화가 네 통, 지은 선생님의 전화가 두 통, 갤러리 전화가 한 통이 와있었다. 분명히 어제 몸이 좀 안 좋다고 지각할 수도 있다고 말해놨는데. 솔직히 머리가 찢어질 것처럼 짜증이 났지만 그게 우리 아빠 '비움 갤러리 정용석 대표'의 방식 아니겠는가.

지독하게 꼼꼼하고 철저하며 강압적인 남자….


아빠가 직접 자기 입으로 털어놓고 이혼을 요구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엄마는 끝끝내 아버지 외도의 증거를 잡지 못했으리라.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재혁에게 흥미를 느낀 부분도 그 부분이었다. 사정을 하자마자 그 사용한 콘돔을 들고 화장실로 가져가서 물을 채우고서는 "자 봐, 콘돔에 이상없지? 임신 타령하면 너 죽는다?" 하며 나에게 들이밀던 그 황당한 행동.

다른건 몰라도 어디 가서 다른 여자 배 불려서 올 일은 없겠구나, 하며 왠지 모를 안심을 유발하던 그 행동. 원나잇으로 족했던 만남을 1년을 끌게 된 그 기행. 간신히 내가 피임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그 개짓 다시는 하지마" 하고 중지시킨 그의 그 행동이 어이없지만 나는 마음에 들었다.

뭐, 알고 있었다. 그 주변에 여자가 많다는 것 정도는. 하지만 증거만 없으면, 나에게 걸리지만 않으면 애써 모르는 척 해줄 수 있었다. 사실 어제의 그 일도 "그냥 실수였어" 한 마디만 했더라면, 그래서 여기 와서 미안하다고만 했으면 난 분명히 봐줬을거다. 결국 난 엄마보다도 더 쉬운 여자니까. 이러고 살다가 나도 엄마처럼 암 걸리면 어떡하지 싶을 정도로.

그러나 "그게 왜 미안할 일인데? 우리 결혼했니?" 하며 정색할 재혁의 표정이 지금 먼저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고, 그게 또 그렇게 멋지게 느껴지는 내가 여전히 미친 년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그 순간 거울 속에 비친 미친 년 머리나 좀 어떻게 해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염색 예약 좀 하려구요. 내일 6시 반이요. 네, 지나 선생님이요. 네네, 4617입니다. 맞아요, 네에"

새까맣게 할 생각이다. 지금 내 타들어간 속처럼. 이제 갤러리 일하러 가서 아빠한테 또 한 소리 들을 생각하니 더 스트레스 받는다. 그냥 전시 없을 때만 알바로 나와서 잠깐 얼굴이나 비추라더니, 이제는 숫제 번역부터 청소까지 안 시키는 일이 없다. 아빠 앞에서는 절대적인 을일 뿐인 나. 힘들어 죽을 것 같다. 게다가 이젠 날 웃게 해줄 재혁도 없다. 그게 제일 힘들다.





"4천 2백원입니다. 카드 받았습니다. 영수증 필요하세요? 네, 그럼 또 오세요"

가볍게 한숨 돌렸다. 삼일째 출근 중이다. 그렇게 중심가 쪽도 아니건만, 오피스텔 건물이 몇 개 있는 관계로 손님이 많다. 집 근처 편의점보다 시급이 500원 더 세지만, 그 정도 보상으로는 부족하다 싶을 정도로 주인이 깐깐한 편이다. 청소도 수시로 하라고 하고, 진상도 좀 있다. 물론 집 앞 편의점 두고 이 먼 강남의 편의점까지 온 것은 시급보다 다른 이유가 있지만.

두근두근한 기억….

스터디 그룹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우연찮은 인연으로 만난 그녀, 수지. 나는 탄산수 하나를 대신 사주었을 뿐인데-물론 술 취한 그녀를 집에까지 곱게 데려다주기도 했지만-옷이며 신발이며, 몇 십곱으로 돌려 받았다.

그리고 그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버스에서 만난 중학교 동창 대영. 녀석은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말도 안돼"를 연발하며 믿지 않았지만 내가 수지씨와 나눈 카톡 메세지와 내 양 손에 가득 들린 옷가지들을 보여주자, 혀를 찼다.

"카톡 사진 존나 이쁘네. 그럼 이제 둘이 사귀는거냐?"
"사귀긴…. 그저께 처음 알았는데. 그리고 이걸로 끝이지 뭐"

대영은 세상이 이런 병신이 또 있을까, 하는 시선으로 나를 아래 위로 훑다가 입을 열었다.

"고호민 이 새끼 이거, 이거? 야, 남자든 여자든 똑같은거야. 니가 돈이 있다고 쳐봐, 아니 존나 많다고 쳐? 근데 존나 딱 꽃힌 사람이 나타났어. 그럼 제일 빨리 그 사람 마음 훔치는 방법이 뭐겠냐? 뭐겠어. 걍 씨발 돈 쏟아붓는거지. 맛난거 사멕이고, 선물 왕창 안기고, 어? 남자든 여자든 다 똑같은거야. 그럼 새꺄, 니가 그걸 딱 받았으면, 너도 쫌, 아 그래요, 고맙습니다, 하고 끝이야? 이 새끼 이거 날강도네. 그럼 뭘 더해야 돼? 답례? 근데 넌 뭐 쥐뿔 없잖아? 그럼 몸으로 때워야지. 이거, 이거, 이거!"

대영은 내 사타구니 안쪽을 더듬으며 "이거, 이거, 이거"를 강조했다. 나는 정색하며 녀석의 손을 걷어냈다.

"에효 미친 놈아"
"넌 오늘 지금 집에 딱 들어가자마자, 너도 카톡 사진 제일 멋있는걸로 바꾸고, 살짝 간보다가 걔가 존나 심심할 것 같은 시간에 카톡 하나 보내. 그렇다고 무슨 또 모하세요? 이런 병신 질문하지 말고, 옷 사줘서 고맙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아무래도 너무 과하게 받아서 영 마음이 찜찜한데 제가 뭐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요, 하고 훅 들어가라고 훅"

훅- 하면서 과한 동작으로 손을 뻗다가 앞자리 아줌마의 목덜미를 건드린 대영은 "오우" 하고 지가 더 놀라더니 사과하곤, 어느새 내릴 곳이 됐는지 서둘러 일어나며 나에게 주의를 주었다.

"명심해라, 내가 봤을 때 호민이 넌 이번 기회 놓치면 향후 30년 간 솔로탈출 못한다. 장담한다"
"30년이면 완전… 악담을 해라. 잘 가"



…대영의 말이 헛소리 같긴 해도, 그제서야 확실히 너무 과하게 선물을 받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놈 말대로, 단순한 답례가 아니라 좀 이게 그린라이트 같은 거면 좋은거잖아.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정말 잘 아나?

내 하는 짓은 모르는 것 같은데? 왜 굳이 잘 다니던 집 앞 편의점 일자리 관두고, 부랴부랴 3일 만에 왜 이 먼 강남에서 편의점 자리를 구한거지? 그냥, 우연히라도 그녀와 다시 만나길 바래서? 내 삶에서 이렇게까지 과감히 행동력을 발휘한 적이 있던가. 조금이라도, 그녀 곁에 기반을 만들고 싶어서 이 먼 곳에 굳이 편의점 알바 자리를 구한거잖아. 만나고 싶어서, 행동을 하고 있잖아.

사실은 아까부터 카톡을 보낼까 말까 고민 중이기도 하고.

< 수지씨 안녕하세요, 저 호민이에요ㅎ 엊그제 정말 고마웠어요 근데 암만 생각해도 선물 너무 과하게 받은거 같아서, 제가 밥이나 커피라도 쏘고 싶은데 혹시 시간 가능하실까요? 꼭 오늘 아니더라두 >

멘트는 다 써놨다. 하루를 이 멘트 수정하는걸로 다 보냈다. 단지, 이걸 차마 못 보내고 추가로 두 시간 반을 고민 중일 따름인거지. 아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벌써 그 날부터 3일이나 지났고. 차라리 대영이 말대로 그 날 저녁에 바로 보냈으면 좋았을지도. 아, 답답하다. 그냥 아예 보내지 말까. 아 근데 그러면 또 여기에서 알바를 할 의미가 없잖아.

"후, 그래. 안되면 그만이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어쩌면 나는 그때, 차라리 그녀가 무시했으면, 하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두근거렸다.






"오, 머리색 바꾸셨네요. 잘 어울려요"

후후, 일요일에 내가 사준 옷을 예쁘게 차려입고 나온게 마음에 들었다. 그래, 이래야지. 또 그 놈의 고시생룩으로 나왔으면 아마 난 인사도 안 하고 그대로 돌아서 집으로 가버렸을거다. 또 한가지 마음에 드는건 시킨대로 덮수룩한 머리도 조금은 짧게 잘랐다는거. 여전히 촌스럽긴 하지만. 어디 동네 미용실에라도 간건가. 그러나 그 놈의 뿔테는 여전히 뒤집어 쓰고 있는게 짜증난다. 호민의 칭찬은 무시한 채, 내 하고 싶은 말부터 한다.

"렌즈는 왜 안 꼈어요?"

그러자 호민은 얼굴에 난색을 표했다.

"사실 어제 전화 받고 바로 안경점에 갔거든요? 그래서 렌즈도 일회용으로 끼워봤는데, 빼는게 너무 어렵더라구요. 눈알 긁을 것 같고…미안해요"
"미안할 건 없구요. 그냥 안경 벗으면 훨 나은데 왜 그렇게 고집스럽게 안경 쓰나 싶어서. 그럼 나중에 라식해요 라식"
"라식, 그래야겠네요"

그리고 그 대화를 기준으로 10초 이상 우리 사이의 말이 없었다. 애시당초 딱히 목적이 있어서 만난 것도 아니고. 그냥 마침 약속 없는 날이기도 했고, 이유도 없이 이 찌질이 같은 남자의 데이트 제안이 반가웠다. 온갖 폼 다 내면서 여자애들 카톡 메세지를 백개 넘게 그냥 무시하고 다니는 한량들이 아니라… 어디 평소 하루에 여자랑은 단 한마디도 안 할 것 같은 남자의 소심한 데이트 제안이.

"그래서 오늘 뭐할 생각이에요 우리?"

아마 영화나 보자고 하겠지.

"영화 볼래요? 밀담도 재밌다고 하고, 광주행 보셨어요? 아니면 아주라? 지금이 6시 30분이니까, 제일 빠른게 7시 10분에…"

리스트가 술술 나오는게 미리 검색 좀 해본 모양이다. 그러나 어느 것도 끌리지 않는다.

"영화는 됐고, 그냥 술이나 마시러 가요 우리"
"아… 네. 근데 그 날 보니까 술 잘 못하시던데…"

난 픽 웃었다.

"그냥 가요"
"네"

확실히 고분고분한게 조금은 마음에 든다. 틈만 나면 어떻게든 주도권 가지려는 징글징글한 새끼들이랑은 달라서.






"진짜로요?"

대화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수지씨가 빵 터지며 호기심을 보인다. 그런데 내 나이가 그렇게 웃긴 이야기인가.

"스물아홉이 뭐 어때서요"
"난 무조건 많아야 한 두살 더 위라고 봤는데. 완전 아재였네. 뭐, 티가 안 난 건 아니지만"
"아재는 아닌데"
"맞아요"

사실 놀란건 나다. 물론 처음 봤을 때도 그 푸른빛 도는 백은발 머리카락 때문에라도 나이 짐작이 좀 어렵긴 했지만, 그래도 스물 대여섯 정도 아닐까 싶었는데. 더 어렸다니. 노안이라는건 아니고, 그만큼 뭔가 '센 언니' 느낌이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근데 까만머리 진짜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더 동안처럼 보여요"
"스물셋이 동안이면 몇 살처럼 보인다는 건데요?"
"음, 한 열아홉?"
"이 아저씨 미쳤네"

미쳤네 소리까지 들었는데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그저 헤벌죽 해진다. 저 묘한 웃음이, 가슴을 뛰게하고 엔돌핀을 분출케 한다. 아드레날린인가. 어쨌든, 궁금한거… 물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물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그…"
"그럼 물어보지 말아요. 긴가민가하면"
"아"

그 금요일의 일을 좀 더 묻고 싶었는데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제지 당했다. 음, 말하지 말아야지.

"뭐야, 참, 농담인데, 진짜로 입 닫으면 어떻게 해요. 물어봐요. 아 그리고 말 편하게 해요. 나도 말 편하게 하게"

하지만 수지씨는, 아니 수지는 피식 웃음을 지으면서 뭐든 물어보라고 했다. 뭐 자기도 말 놓는다면서 말 놓으라는데, 그래 여섯 살 차이야 뭐. 그러지. 일단 금요일의 일 대신에 다른거 물어보기로 했다. 예감상 안 좋은 화제 같아서.

"무슨 일 하고 있어? 학생인가?"

뱉고 보니 조금 허무한 질문이었지만,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냥 학교 휴학하고 아빠 일 도와드리고 있어. 갤러리 일"
"갤러리? 아버지가 화가야?"
"아니, 갤러리 운영해"
"아아, 그럼 인사동에 있는 뭐 그런데?"
"응, 압구정 쪽에 있어. 거기서 그냥 청소도 하고, 번역도 하고, 잡부야 잡부. 평소에는 백수나 다름없고"

압구정에서 갤러리 운영하다니. 금수저였구나. 그러니 그렇게 돈을 쿨하게 썼지. 그리고 쿨하게 '잡부'라면서 웃는 모습이 귀엽다.

"그래도 멋있다. 번역 같은 일도 하고, 영어 잘 하나보네"
"쫌 하지. 영어도 좀 하고, 불어도 하고"
"헐"

이쯤해서는 그냥 내가 한없이 초라해진다. 평범한 취준생에 17평 집에서 부모님과 같이 살고, 영어는 토익 700도 간당간당 하고, 학점도 황이고…현재 직업은 편돌이 알바생. 그런데 얘는 금수저에 영어도 잘하고 불어까지 하고, 얼굴도 이쁘고, 부모님이 물려주실 사업도 있고, 강남 살고, 그것도 자취하고….

"아 자취하던데. 그럼 집세는 부모님이 대신 내주는거야?"
"어. 월세랑 관리비, 공과금에 생활비까지"
"헐, 너 금수저구나. 그럼 그게 얼마나 돼?"
"모르지. 근데 월세가 120쯤 되니까 대충 한 300 좀 넘지 않을까? 아니면 400? 대신에 난 아빠가 하라는건 다해야 돼. 경제권 걸고 넘어지면 답 없으니까. 그리고 내가 무슨 금수저야. 얼마나 잘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난 음, 동수저쯤?"

그런 니가 동수저면 나는 아예 흙묻은 손으로 짬 퍼먹는 무(無)수저쯤 되려나. 부럽다. 얼추 한 학기 등록금을 한달 용돈으로 받는구나. 그리고 한편으로 이런 나랑 다른 계급 애랑 혼자 머릿 속에서 상상으로는 고백하고 알콩달콩 연애하고 장차 결혼까지, 아니 결혼까지는 좀 너무 어려서 힘들까 등등 별 생각을 다하며 좋아라 한 지난 며칠이 너무 한심했다.

연애는 무슨 얼어죽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냥 얼른 오늘 집에 가서 이력서 업데이트 하고, 공채 몇 군데 더 써보고, 알바는 일단 여기서 일하기로 했으니까 사장님한테 말해서 한달은 채우고 다시 집 근처에서…

"근데 오빠는 무슨 일 하는데?"

수지는 갑자기 말이 없어진 내 얼굴을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참 귀엽지만, 아까의 그 한없이 사랑스럽던 그녀가 아니라 그저 티비 속 연예인처럼 그냥 멀고 먼 누군가들처럼 느껴진 것은 물론 내 자격지심 때문이려나. 병신. 아니, 그게 현실이겠지. 주제파악이고.




"재밌다"

호민은 나에게 너무나 솔직하게, 자기는 내가 자기 좋아하는건 아닐까? 완전 그린 라이트 아닌가? 생각을 했던 것을 털어놓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동네에 편의점 알바자리까지 잡았다는 말에 푸핫 하고 웃었는데 너무 무안해하길래 사과까지 했다. 

"맞아, 그럴 만 했어. 인정. 오빠가 이상한게 아니지"

그래, 이 남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게, 드라마 같은 인연으로 만나서 여자가 그 다음 날 갑자기 옷 사주고 신발 사주고 선물 왕창 사먹이고 비싼 밥 사주고, 심지어 며칠 뒤에 데이트 신청까지 받아주니 호감 있나, 하고 생각하는게 당연하지.

헤픈 년.

아마 천하의 그 정수지가 이런 찌질이 같은 남자한테 그렇게 퍼주면서 연애한다는 소리 들으면 다들 아주 경악을 할거다. 그리고 생각이 거기에 미친 순간, 정말로 미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헤어지고 병신같이 찌글찌글하게 있는 대신에, 곧바로 다른 남자랑 썸 탄다? 그리고 그 남자한테 돈 쏟아 부어가며 멋진 남자로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 소식을 재혁이 들으면 어떨까. 어떤 반응일지 짐작도 안 간다. 

"잠깐만 그렇게 있어봐요. 오케이, 아 얼굴 안 나오게 사진 찍을테니 그렇게 있어봐요"

생각보다 턱선 이쁘네. 얼굴 갸름하고. 생각보다 진짜 다듬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난 테이블과 건너 편 호민의 얼굴 아래 상반신까지 찍은 사진을 곧바로 내 인스타에 올렸다. 그리고 카톡 상메도 "선수 교체"로 바꿨다. 너무 속보이는 짓이긴 하지만, 대신 의도 전달도 확실히 됐다.




"대박!"

조금 전부터 수지는 "오빠 나 휴대폰 계속해서 미안, 잠깐만" 을 연발하면서, 웃음 가득한 얼굴로 나 대신 휴대폰에 정신을 팔기 시작했다. 

"괜찮아"

그래도 "오빠"라는 호칭이 새삼 흐뭇했다. 무슨 일이 그리도 좋을까.

"뭐 좋은 일 있어?"
"네, 아니, 응"

정신이 팔려있으니 존댓말까지 다시 하는구나. 그럼에도 역시 부연설명 대신 또 한참을 누군가와 카톡을 주고 받은 그녀는 폰을 다시 테이블 한쪽에 뒤집어 놓고-그 와중에도 징징 울려대는 휴대폰이 새삼 하루에 카톡 두어개 올까 말까한 나와 비교됐다- 웃음기 어린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지난 주 금요일 날 기억해?"

아, 묻고 싶었는데 먼저 이렇게 말해주다니.

"어어"

수지는 술술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그 날 남친, 아니 전 남친이지. 그 새끼가 바람 피운거 딱 걸려서 헤어졌어. 그래서 혼자 목 타서 물 마시려는데 그 새끼 차에 지갑이랑 카드랑 다 두고 왔단 말이야. 아 망했다, 하던 차에 오빠가 나 도와준거고. 그래서 뭐… 그 다음부터는 오빠도 다 알거고. 여튼 일요일에 오빠랑 밥 먹고 집에 와서 혼자 울면서 있었는데, 그 새끼는 지금도 내 생각은 하나도 안 할거란 말이야. 그래서 나도 좀 잘 살고 있다 어필하려고. 그래서 오빠 사진 내 인스타에 올렸어"
"니 인스타그램에? 내 사진을?"

휴대폰을 들어 수지가 보여준 화면에는 내 코 아래부터 상반신과 여기 맥주 테이블이 찍힌 사진과 '호민 오빠와 함께' 라는 부연 설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두근두근이라는 태그까지.

"흐"

그 와중에도 수지 폰 속의 카톡은 쉴새없이 "호민 오빠가 누구야?" 하는 류의 알림을 알려왔다. 이렇게 예쁜 금수저 애들은, 일상이 헐리웃 스타 같겠지. 미드 가십맨에 나오는 뭐 그런 것처럼. 일상을 가따부따 떠들어 줄 호사가들도 있을테고. 그럼 나도 거기에 조연쯤으로 출연하는건가. 조금은 흐뭇하면서도 문득 애들 장난 연애질에 괜히 도구로 쓰이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건가. 지금 상황이 그쯤 되는건가. 내 속도 모르고 수지는 "사진 잘 나왔지?" 하고 웃으며 다시 친구들의 카톡에 답장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어떨까.

그래도 나쁘지 않은거 아닌가. 이렇게 이쁜 애랑 어떤 핑계로든 좀 더 만날 수 있다면. 어차피 뭐, 나같은 놈이 이런 애랑 뭘 연애를 할 것도 아니구, 같이 다니면서 좀 배울 거도 배우고 얻을 것도 얻으면.

미친 놈아, 정신 안 차려?

그렇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하면서 일자리 알아봐야 되는데, 연애 노름질에, 그것도 뭐 남의 연애 노름질에…

헤어졌다는데?

뭐 바람 피워서 헤어진 놈이라고 하면 확실히 다시 만나지는 않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다면 썸 타는 역할의 배우로서, 뭐 그렇다고 내가 진짜 시간 뺏겨가며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 뭐…. 아니 내가 지금 혼자 너무 깊게 들어가는건가. 가만히 잘 생각해보면 그냥 새 남자 만나 썸 타면서 바람 피워 헤어진 전 남친한테 복수의 자랑질 하는 것 뿐 아닌가?

등등의 생각을 하며 멍하니 내 폰만 바라보고 있노라니, 수지가 말했다.

"오빠도 맥주 한 잔 더 마실래?"

마시는건 좋은데, 문제는 내가 아니라…, 에 모르겠다. 





"원래 술이 그렇게 약해?"
"응, 약해"
"너 같은 사람은 술 마시면 안돼"

약하다면서 해실해실 웃는 모습이 하…, 그래. 연애고 나발이고 그냥 이런 아는 동생 하나 정도 있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래, 여친까진 아니더라도 여사친 하나 정도는 좋잖아.

"근데 오빠 은근 옆구리에 살 좀 있네? 살 빼"
"아 어딜 만지는거야, 이거 성추행이야"

맥주 500cc 한 개에 칵테일 반 잔 마셨다고 다리 후들거리는게 눈에 보이던 수지. 다행히 지난 번처럼 푹 쓰러지기 전에 거기서 멈췄지만 얼굴이 시뻘건개 취한 모습이 역력하다. 수지 집도 바로 근처고 하니 바래다 주기로 했는데, 술취한 그녀의 입 김이 훅훅 느껴지니 손만 잡고 가는데도 심장이 쿵쾅댄다. 심지어 은근히 거기까지 반응이 올락말락하다. 허, 기가 막혀서 가방으로 서둘러 앞을 가리고 걷노라니….

"오빠는 참 좋은 사람 같아. 매력은 한 개도 없지만. 아니 있어. 있는데 사람들이 잘 몰라주지만. 맞지?"
"아, 진짜 진상이다 진상이야"

속으로 푹 찔려 들어오는 말에 난 가슴이 뜨끔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충 아무 말이나 떠들어댔다. 그리고 또 사실은 '있어'라는 말에 너만은 알아주었으면 좋겠네,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다 왔어"
"응"

어느새 어깨까지 감아가며 나에게 무게를 실어오던 수지는 자신의 오피스텔 앞에서 정신을 번쩍 차린 듯 똑바로 섰다. 그리고 날 정면으로 보며 말했다.

"오늘 놀아줘서 고마워. 아니었으면 엄청 우울했을거야"

그 말에 나도 웃었다. 그래, 연애고 뭐고, 전 남친이고 뭐고… 그냥, 이렇게 너처럼 예쁜 애랑 같이 놀았으니 그걸로 좋았다 나는.

"나야말로 고맙지. 음… 그러면 들어가서, 쉬어"
"응"

무언가 한두마디 더 붙이고 싶었지만,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아 그렇게 말을 꿀꺽 삼키고 돌아섰다. 내일부터는 다시 공부도 좀 하고, 취업 준비도 더 하고, 뭐, 내일 또 스터디니까 것도 좀 신경 쓰고. 흐.

"호민 오빠!"

그리고 그때 등 뒤에서 수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토요일에, 할 거 없으면 같이 영화 보자"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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