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히 들어가세요!"
금요일 밤, 언제나의 영어 스터디 그룹 심야반이 끝나고 무거운 백팩을 든 채 터덜터덜 강남역 쪽으로 향한다. 어느새 11시 13분. 남들은 살과 살이 불타는 금요일이건만 나의 금요일은 그 어느 날보다 차갑고 허무하다.
"컵라면 하나 먹을까"
간만에 발표자로 나서서 긴장하며 대화를 주도해서 그런지, 아까 저녁을 먹었음에도 벌써 뱃 속이 허전하다. 편의점에 들러 라면이나 하나 먹고자 한 블럭 뒤로 돌아 편의점 쪽으로 향한다.
'아…'
나와 정말 같은 인종인가 의심스러운 멋진 사람들. 늘씬하고 마른, 스타일리시하고 멋진 남녀들. 백발마녀라는 단어가 뜬금없이 생각나는, 칼같이 자른 하얀 단발 머리칼에 등이 엄청 깊게 파인 하늘하늘한 블랙 블라우스의 섹시녀는 물론이고 연예인이라도 소화하기 힘들어 보이는 엄청나게 튀는 빨간 색 정장을 입은 엄청난 기럭지의, 눈화장이라도 한 건지 여자보다 예쁜 눈의 남자까지.
그 둘이 조금 심하게 튀었을 뿐, 다른 이들도 어쨌거나 멋지고 퇴폐적인 매력의 남녀들이 약간은 흥분된 표정으로 번쩍이는 클럽의 입구 주변에 서있다. 야하게 입은 누나들도 많다. 물론 실제로는 나보다 동생들이겠지만.
'부럽다'
나도 저렇게 놀고 싶다. 물론 나는 안된다는거 잘안다. 어쨌거나 약간 무서운 그들을 지나 편의점에 들어가 컵라면에 물을 붓는다. 스터디 그룹을 5주째 나가는 중인데 실력이 늘기는 하는건가 잘 모르겠다. 솔직히 윤정씨 때문에 나가는 거였는데 지난 주부터 빠지기로 해서 더더욱 재미없고 하기 싫다. 나도 관둘까.
"개새끼"
누군가가 편의점 문을 격하게 열며 쌍욕과 함께 들어온다. 흘낏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의 그 백발마녀다. 자세히 보니까 백발이라기보다는 푸른빛이 더 강하다. 어쨌든 이쁘다. 퇴폐미라는 단어를 형상화 시키면 저런 얼굴일까. 눈도 엄청 또렷하네. 이목구비 전체가.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잔뜩 화가 난 얼굴도 예쁘다. 새삼 발견했는데 가슴골 사이에도 길게 틈이 있네. 야하다.
문 앞에서 혼자 씩씩대며 숨을 고르던 그녀는 빙 돌아와 음료수 진열대에서 음료를 고르기 시작한다. 스키니한 라인이 무척이나 세련되었다. 지금 이렇게 계속 그녀에게서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예쁘다. 그러나 그게 화근이었다.
"왜요?"
어.
"에?"
가슴이 두근두근. 상상도 못한 타이밍에 갑자기 그녀가 그 또렷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사납게 말을 걸어왔다. 병신같이 네네 하며 목소리를 간신히 틔우고 대답하자, 백발마녀가 물었다.
"왜 사람을 기분 나쁘게 계속 쳐다 보시는데요"
야단났다. 아, 나 그런 사람 아닌데.
"아, 저, 미안해요, 너무 이뻐서."
아, 상상도 못할 정도의 병신 같은 대답이다. 말을 하고 주먹이 절로 쥐어진다. 그녀 역시 작게 "병신"하고 중얼거리더니 탄산수 지그램 하나를 집어들고 저쪽 계산대로 향한다. 스스로 조금 자괴감이 들었다. 병신, 모르는 여자한테 괜히 욕이나 쳐먹고. 부끄러웠다. 입맛이 뚝 떨어져서 반쯤 남은 컵라면을 대충 처리하고 가방을 등에 메었다. 그때였다.
"하 씨!"
계산대의 그녀가 당황과 짜증이 어우러진 목소리로 주머니를 뒤진다. 딱 보아도 지갑이나 카드가 없어진 모양이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잔뜩 골이 나 있는 그녀의 오늘 밤은 정말로 꼬일 대로 꼬이는 모양새다. 그리고 조금 안타깝게 느껴졌다. 대신 결제해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욕 쳐먹을지나 않을까 겁이 난다. 그래도 에라 모르겠다.
"저기, 제가 계산할께요"
백발마녀와 편돌이가 동시에 뭐지 이 병신은, 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소름 돋는 쪽팔림과 싸우며 편돌이만 쳐다보았다. 잠시 백발마녀의 눈치를 살피던 편돌이는 그녀의 제지가 없자 순순히 내 카드를 받아들고 결제를 진행했다.
"천삼백원입니다. 카드 받았습니다. 포인트 있으신가요, 영수증 드릴까요"
모든 질문에 아니요 아니요 하고 대답하던 나는 그제서야 힐끔 백발마녀를 쳐다본다. 나와 거의 눈높이가 비슷한 키 큰 그녀는 조금 화가 누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다. 진짜 섹시하다. 나는 문득 마치 내가 영화 속 한 장면의 어떤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지어지는 미소를 입에 한가득 머금는다. 물론 잘 안다. 그 이상의 무엇이 있기 힘들다는 것 정도는.
함께 편의점을 나오자 문 밖에는 여전히 그 퇴폐미 군단들이 클럽 주변에서 삼삼오오 모여 설레이는 표정으로 웃고 떠들고 있다. 내 인생에 저런 즐거움을 느끼는 날이 올까.
"저기요"
백발마녀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 고맙다는 한 마디 정도는 받을 자격이 있지. 그러나 그녀의 대사는 뜻밖이었다.
"미안한데, 카드 잃어버려서 그런데 택시비 좀 빌려줘요"
조금 당황했지만, 나는 어렵지 않게 지갑에서 만원짜리를 꺼냈다. 한번 도와주는거 두 번이 어렵나. 근데 어디 살지. 혹시 몰라서 만원짜리 한 장을 더 꺼내서 건냈다.
"...."
내가 내미는 만원짜리를 가만히 지켜보던 그녀는 내가 한 장을 더 꺼내자, 가볍게 숨을 내쉬더니 물었다.
"집 어디에요?"
"은평구 쪽에..."
백발마녀는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같이 맥주 한잔 안 할래요?"
사실은 조금 무섭기도 했다. 이렇게 이쁘게 생긴, 조금은 독특하지만 어쨌든 객관적으로 봤을 때 매력적인 여자가 나같은 상찌질이한테 먼저 술 마시자고 제안을 해온다는건 일단 상식적으로 믿기 힘든 일이니까.
"내가 모하는거지 진짜"
혼자 중얼대는 그녀의 말에 나도 공감했다. 나도 뭐하는거지. 집에 가야되는데. 그래도 좀 묘한 기대감이 나를 들뜨게 한다.
"원래 그래요? 아무나 잘 도와줘요?"
근처의 맥주집으로 향한 그녀는 자리에 앉아 주문을 마치자마자 나에게 물어왔다. 마주 앉아 보니까 더 이쁘네. 하,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기는 오는구나. 이런 이쁜 여자랑 같이 술 마시는 날이.
"아니요, 그냥 들어올 때부터 화가 나 있는거 같았는데 지갑도 잃어버린건가 싶어서, 내가 그 입장이면 얼마나 화날까 싶어서. 조금 돕고 싶었어요. 뭐, 그쪽이 이뻐서 더 그런 마음이 들기도 했구요"
같이 오면서 머릿 속으로 정리한 모범 답안을 그녀에게 제시했다. 백발마녀는 내 말을 가만히 듣더니 "후, 미안해요 아까는. 너무 경황이 없어서 고맙다는 말도 못 했어요. 고마워요" 하고 제대로 감사를 표시했다. 보기보다 의외의 면도 있네. 그러나 곧바로 또 물었다.
"근데 돈 빌려달라는데 왜 2만원이나 줬어요?"
"멀리 살면 택시요금 만원 넘어갈 수도 있잖아요"
"하!"
비아냥인지 감탄인지 모를 톤으로 중얼거리던 그녀는 갑자기 지 휴대폰을 나에게 내밀었다.
"번호 찍어요"
수지
갤러리 사무실을 나와 입구쪽으로 가자, 도슨트 지은 선생님이 "수지씨" 하고 나를 잠깐 붙잡는다.
"아까 대표님이, 오늘 끝나고 먼저 본가에 가 있으라고 하셨어요"
"아빠가요? 왜요?"
"그것까지는 못 들었어요"
"네 알았어요"
짜증난다. 그냥 집에 가서 쉬고 싶은데. 나는 택시를 탔다. 역삼동의 편안한 자취방을 두고, 잠실의 본가로 향한다. 아빠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건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허송세월 그만하고 빨리 복학하던지 아니면 유학을 가던지 하라는 거겠지.
"너무 싫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서 속마음이 입으로 흘러나온다.
예상은 완벽하게 적중했다. 아빠는 복학을 하던지, 유학을 가던지 선택을 하고, 둘 다 안 하면 생활비 지원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월세 120에 생활비 약 250 내외. 휴학생 신분에 따로 돈 들어올 구석 없는 내가 그걸 대처할 수는 없다. 엄마도 캐나다로 가버린 이상 손 벌릴 사람이 없다.
"복학할게요"
그 찐따들과 미친 년들이 가득한 학교로 복학을 해야한다. 상상만 해도 피곤하고 루즈하다. 아빠의 노림수는 명확하다. 얼른 딸내미가 학교 졸업하고 갤러리에서 자리 잡아서 몇 년 일 배우다가 물려받고 자기는 다른 일에 전력투구 하고 싶은 것이다.
"저 집에 가볼께요"
"역삼으로 바로 가는거냐"
"네"
"저녁은 먹고 들어가지"
"생각 없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밖에선 어떨지 몰라도 아빠 앞에서는 그저 고양이 앞의 쥐 같은 착한 딸이다. 꿀꿀한 기분의 전환이 필요해.
"오빠, 오늘 나 기분 안 좋아"
간만에 춤추며 놀고 싶었다. 재혁을 불렀다. 날 보자마자 머리를 보고 놀려댔다. 같이 웃었다. 솔직히 내가 봐도 웃겼다. 이번 주까지만 유지할건데 뭐. 그래도 오늘 처음으로 웃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저 쪽에서 여자애 둘이 재혁을 알아보고는 다가왔다.
"어 오빠? 간만!"
아, 좀 수준 처지는 애들. 성형해도 답 없어서 그냥 가슴부터 깐 년들. 뭐 VASS 죽순이 중에 재혁이 모르는 애도 있을까. 언제나처럼 그러려니, 잘 생긴 남친 둔 죄려니 하고 웃으면서 옆에서 보고 있노라니 재혁의 표정이 조금 이상하다. 그러더니 둘은 자연스럽게 재혁의 손부터 잡고 양쪽에 섰다.
재혁과 다소 내가 거리가 있는 위치에 앉아 있어서, 아마 그 둘은 내 존재를 몰랐던 모양이다. 내 존재를 알았어도 내가 재혁이랑 사귀는 사이인지 어쩐지 알게 뭔가. 아니, 아니다.
"오빠 오늘 멋있다"
오히려 내가 아까부터 재혁과 같이 이야기를 나눈 것을 아는 모양새다. 둘 중에 더 빻은 애가 나를 쳐다보는 것을 보았다. 그 우월감에 찬 어이없는 눈빛. 마치 '이미 이 남자 나랑 잤어~' 하는 식의. 하, 내가 누군 줄 알고.
차갑게 식는 마음을 간신히 미소로 지우며 다가가서 재혁에게 물었다.
"걔들 뭐야?"
여전히 둘은 우월감에 젖은 얼굴로 나를 '얘 뭐니?' 하듯 나를 아래 위로 훑는다. 훑어봤자 내가 지들보다 더 이쁜건 눈이 있으면 알 수 있다. 여유의 눈빛이 다소 경계로 바뀐다. 그리고 재혁의 말이 결정적이다.
"뭐긴, 먹버당한 년들이지"
둘은 곧바로 "뭐?" 하고 난리를 떨었지만 재혁은 곧바로 "꺼져" 하고 차가운 얼굴로 둘을 치워낸다. 둘은 어이없어 하지만 그 차가운 얼굴에 감히 무어라 더 말을 잇지 못하고는 어버버 거리면서 저쪽으로 사라진다. 진짜로 꺼지는 것도 웃기지만 진짜 웃긴 것은 사실 내 처지다.
"진짜야?"
"어"
짐작은 하지만 걸리지만 않으면 넘어간다. 엄마가 아빠를 이해하는 룰이다. 병신 같지만 나는 그걸 어릴 때부터 보고 배웠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둘은 결국 이혼했지만, 여전히 나는 엄마에게 배운대로 행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좀 이쁜 애들이랑 자지"
"그러게. 미안"
당연히 이런 조각 같은 훤칠한 미남에 외교관 아들이라는 간판이 있다면 주변에 여자가 없는게 더 이상하다. 그냥 나에게 걸리지만 않으면 이해해 줄 수 있다. 하지만 걸린 이상 이야기가 다르다.
"미안, 쓰리썸은 호기심이 가더라"
"하!"
그 흔한 싸대기도 없었다. 그냥 쿨하게 돌아섰다. 그가 나를 잡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때 조금 마음이 아팠다. 그냥 뭔가 정말 안 풀리는 하루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자취방으로 가면 재혁이 찾아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아마 나는 다시 무너질 것이다. 잠실로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어차피 아빠는 잘 시간이다. 그보다 속이 답답했다. 물이라도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만마셔요"
지금 나를 부축하는 이 남자가 재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름도 모르는 상 찌질이다. 그저 이쁜 여자만 보면 헤, 하는 호구이기도 하고. 그게 묘하게 누군가를 연상 시켰지만. 그리고 거기에서 필름이 끊겼다.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그리고 내 방이었다. 혹시나 싶어서 조심조심 확인해 봤지만, 역시 애초에 옷도 안 벗었다. 별 일 없었다. 내가 주소는 제대로 불러준 모양이다. 남자는 나를 우리 집까지 데려다 주고 간 건가. 착하네.
휴대폰을 보니 장문의 문자가 와 있었다.
< 몇 잔 안 마셨는데 갑자기 푹 쓰러져서 놀랬어요. 술 엄청 약하면서 왜 그렇게 센 척 했어요. 그래도 같이 술 마셔서 좋았어요. 술값은 내가 냈어요, 부담스러워하지 말아요. 혹시 몰라서 냉장고에 숙취해소음료도 사다 놨으니까 먹어요. 카드 잃어버렸으면 카드도 얼른 정지 시키구요. 그리고 진짜 이뻐요^^ 그럼 주말 잘 보내요! >
피식 웃었다. 살짝 감동 받을 뻔 했는데 이쁘다는 말에 산통 다 깼다. 그래도 조금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진짜 이런 남자들이 있긴 있구나, 싶었다. 그러고보니 이름도 안 물어봤네. 답문을 보내는 대신에 카톡에 번호추가로 친구 등록을 했다. 이름이 떴다.
고호민. 덮수룩한 머리에 뿔테 안경. 어제 그 남자의 그 찌질한 인상이 새삼 떠오른다. 카톡으로 답장을 보낸다.
< 정수지 : 이제 일어났어요 고마워요... 어제 너무 미안해서 그런데, 혹시 오늘 잠깐 시간 되세요?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네요 >
안 될 리가 없다. 이런 상찌질이에게 주말이 무슨 의미랴. 그리고 내가 나오라면 나오는거지. 냉장고를 열어 물을 마시며 답장을 기다렸다. 그리고 뒤늦게 카드 정지를 시켰다.
어쩌지. 아, 이건 기쁜데 두렵다. 그렇게나 이쁜 여자가 고맙다며 데이트 신청을 해왔다. 아 이건 데이트는 아닌가, 그래도 여튼. 이 정도로 이쁜 여자는 좀 부담스럽다. 나한테는 윤정씨 정도가 딱인데. 아니 그것도 윤정씨한테 미안한 이야기인가. 수수한 스타일.
"진짜 이쁘다..."
정수지. 카톡 프로필 사진만 봐도 이건 거의 연예인 급이다. 어제도 옆 테이블에서 우리 테이블을 계속 힐끔 거리며 그녀와 나를 쳐다보았다.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니까. 저 여자 진짜 이쁘다, 근데 저 찌질이는 뭔데 저런 여자랑 같이 술 마시지. 저 새끼 뭐임? 돈 많은가? 절대 아닌 거 같은데. 그럼 그게 장난 아닌가? 그게 말이 되냐. 등등의 말을 나눴겠지. 나도 그러니까. 알어.
뭘 입고 가지. 하, 이게 그나마 나으려나. 파란 줄무늬 남방과 청바지를 입었다. 옷이 없으니 원. 그래도 이 정도면 아주 썩 나쁜 조합은 아닌 거 같다. 머리는 좀 손 볼까, 왁스라도 바를까 싶은데 어떻게 바르면 좋을지 솔직히 잘 모른다. 운동화가, 아. 강남역에 갈 때는 이게 참 문제다. 옷이 좀 진짜. 후우.
그래, 솔직히 내가 만나자고 한 거고, 이 정도로 신세를 졌으면 당연히 식사라도 한 끼 하는게 맞는건데 그보다 아 이건 좀 진짜 심했다. 같이 다니기 쪽팔릴 정도다.
"저기, 혹시 일부러 그렇게 입은거에요?"
"네? 아, 제 옷이요? 구린가요?"
"네"
조금 당황하는 기색의 얼굴은 조금 귀엽다고 느꼈다. 그러고 보니 또 인사를 잊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보다는 다른게 급했다.
"진짜 미안한데, 같이 옷 좀 보러가요. 사줄께요"
"네?"
강남역 11번 출구 앞에서 만나, 다시 수지씨를 따라 지하 상가를 따라 맞은 편의 10번 출구로 나와 나인세컨즈 매장에 들어갔다. 4층으로 올라가 남성 매장 앞에서 그녀는 나를 흘낏 쳐다보며 물었다.
"옷 사이즈 뭐 입어요?"
"100이요"
그녀는 흘낏 흘낏 나를 바라보며 티 몇 벌과 반바지 한 벌을 골랐다.
"입어봐요. 그리고 입은거 나 보여줘요"
옷을 갈아입으며 도대체 이게 무슨 미친 상황이지, 하고 혼자 중얼거리면서도 그녀에게 핏을 대충 컨펌 받았다. 티 세 벌과 반바지 한 벌을 그녀가 바로 결제했다.
"고마워요"
매장을 나와 인사를 했지만 수지씨는 고개를 저었다.
"몇 군데만 더 들러요"
"아뇨 괜찮아요. 이거만 해도 벌써 10만원 넘는데"
"사줄께요. 부담 갖지 말아요"
그렇게 그녀는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폴더스 매장에서 디디바오 오리지널 운동화 한 켤레, 로퍼 한 켤레, 그리고 자리아 매장에서 셔츠 하나와 발목 길이의 바지 한 벌을 더 선물했다.
"정말 고마워요. 이거 진짜 제가 받아도 되는건지"
쇼핑을 마치고, 자리아 옆의 파스쿠빈 매장에서 한숨 돌리며 옷도 갈아입었다. 대충 생각해봐도 그녀가 오늘 나를 위해 쓴 돈은 기십만원이 넘었다. 어디 갑부집 딸인가.
"근데 진짜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
"훨 낫네요. 그리고 그 안경 좀 벗어봐요"
"저 시력 많이 안 좋은데"
"나가서 렌즈 쓰면 되잖아요"
그렇게까지 내 스타일을 재정비한 그녀는 이제야 속이 좀 풀리는지 "머리만 손질하면 좋을텐데, 그건 됐고 밥 같이 먹어요" 하며 드디어 본론으로 접어들었다.
알아, 오바했다는거. 하지만 어차피 저대로 냅두면 평생 저렇게, 찌질한 스타일로 살 사람이잖아. 한번쯤은 변신하는 것도 좋잖아. 어차피 저 사람도 내 인생에 오지랖 부렸는데, 하는 생각에 조금 과하게 나도 오지랖 부려본거야. 그렇게 합리화 해본다. 하, 꾸며놓고 보니 저렇게 달라지는 것을.
"뭐 먹고 싶어요?"
"저는 뭐든지 다 잘 먹어요!"
해맑은 얼굴로, 니가 좋으면 나도 다 좋아, 식으로 웃는 이 남자. 그래... 유치원 이래 나와 단 한마디로 나눈 남자들의 70%는 의견을 묻는 질문에 저런 표정으로 저런 대답을 해왔지. 호구들.
"의견을 말해요 의견을"
어째 처음 보는 사이에 초장부터 너무 날 서있는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지만 아 어떻게 해. 답 없이 짜증나는데. 이럴 바에야 그냥 무시하고 싶지만 내 집까지 찾아왔던 남자다. 틀어지면 무슨 짓 할지 또 어떻게 알아.
아니.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첫 인상으로 안다. 그래서 뭘 쳐다보냐고 괜한 화풀이도 할 수 있었지. 그냥, 착한 남자만 보면 괜히 날카로운 반응부터 나가는 못된 버릇일 뿐이다.
인정해. 첫 사랑의 후유증이다. 유학 1년 차, 입학 절차부터 꼬여서 반 년을 허송세월 하게 된 나는 그 모든 스트레스와 불안을 준영에게 다 풀었다. 그걸 묵묵히 참아주던 그는 그러나 "넌 없는게 나아!" 라던 나의 막말에, 그날부터 변해갔다. 전화통화 시간이 짧아지고, 빈도가 줄고, 결국 캐묻던 나의 말에 "그래, 나 다른 여자 생겼어" 라던 그. 그렇게 이별 선언을 들었다.
눈물을 비처럼 쏟으며 아무 말 없이 그날 밤 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준영의 집으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려던 찰나 안에서 여자 웃음소리가 들렸다. 도망치듯 건물을 빠져나와 그 추위 속에서 6시간을 기다렸다. 이윽고 그의 새 여자가 그 집을 나서고, 나는 쓰러지기 직전의 몸을 이끌고 준영의 집 문을 두드렸다.
"준영아…"
그러나 그는 세상 다시 없을 차가운 목소리로 나를 밀어냈다. 이러지 말라고. 다리를 붙잡고, 문을 두드리며 울고 또 울었다. 평생 그 어느 순간보다 서럽게 울었다. 그렇게 터덜터덜 걸어나오며 진심으로 그에게 왜 더 잘해주지 못했을까를 후회했다. 그러나 그 마음과는 별개로 그 날 이후 착한 남자만 보면 괜히 더 못되게 행동이 나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이 해요"
아.
"미안요, 그런데 별 생각 없으면, 아무거나 대충 먹으로 가요?"
"그래요"
"어휴!"
"잘 몰라서 그래요"
그래서 그냥 특불등심으로 향했다. 그나마 고기 먹이는게 제일 낫다 싶어서.
"감사해요"
"제가 감사할 일이죠. 그럼 이만"
고기도 먹이고, 인사도 나누고, 더이상은 볼 일이 없다. 물론 99.9%의 확률로 또 저런 남자들은 어디 드라마에서나 나올 어떤 이벤트를 기대하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드라마 속의 그런 일도 그 둘이 선남선녀니까 가능한 일이다.
"네, 잘 들어가세요"
호준의 인사를 뒤로 하고 나는 다시 내 자취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재혁이 다시 와있기를 아주 조금, 기대하며.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