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주일을 시달린 제안서 건을 마치고 주말을 앞둔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던 나. 다들 불금이니 뭐니 약속 잡고 신나해도, 나는 그저 피곤했다. 저녁만 간단히 먹고 일찍 자야겠다고 다짐했건만… 밤 11시에 침대에 눕자마자 걸려온 지윤의 전화.
"…그래. 어디서 볼까? 너 지금 어딘데?"
다른 애였다면 피곤하다고, 미안하다며 다음에 보자고 하고 미뤘을거다. 하지만 지윤이 같은 타입은 다르다. 이번에 거절하면 아마도 두 번의 기회는 오지 않으리라.
"강남역? 알았어, 옷 입고 바로 나갈께"
셔츠를 입으며 생각했다. 남자친구랑 헤어지기라도 한 것일까. 그 통통한 녀석. 지윤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지윤의 표정은 많이 힘들어 보였다. 눈가가 퀭한 것이, 울기도 많이 울고 잠도 많이 못 잔 모양이다. 커피도, 술도 다 포기하고 그냥 기분전환 시켜주는 셈치고 차에 태워서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달렸다.
그녀는 계속 울었다. 왜 우는지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울었다. 나 역시 묻는 대신에 물티슈만 건냈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어느새 송내까지 와있었다. 직장인이다보니 당장 내일 출근이 걱정됐다. 그리고 그제서야 새삼 내일이 토요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근심이 하나 풀리자 허기가 졌다. 그리고 뒤늦게 물었다.
"너, 식사는 했니"
지윤은 고개를 저었다.
"먹으러 가자"
"…괜찮아요"
하지만 난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허기져서 그래. 배고파 죽겠다"
지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아, 결국 패스트푸드에서 햄버거 하나씩을 먹기로 했다. 한심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강남 근처에 세워놓고 차에서 이야기하다가 다시 분위기 근사한 곳에라도 갈 것을, 하는 후회부터 들었다. 이게 다 뭔가.
"흠"
역시나 지윤은 콜라만 두 어 모금 빨았을 뿐, 햄버거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차에 올랐고 나는 조금 피곤함을 느꼈다.
"…피곤하다. 쉬러 가자"
여기서 조금이라도 빼는 기색이 보였다면 지체없이 그녀를 그녀의 집으로 데려다 주었을 것이다. 지윤은 역시 말이 없었다. 음악을 틀었다.
하기사, 이미 썸이라고 부르기에도 어색해진 사이가 되어버린 연상의 남자를 물기 젖은 목소리로 불금의 오밤 중에 뜬금없이 불러내놓고 사연 설명조차 없이 허탈하게 돌려세울 정도로 실없는 애는 아니지. 지윤이가.
피곤했지만 모텔에서 자기도, 재우기도 싫었다. 객실을 확인하고, 옛날에 곧잘 가던 레지던스 호텔로 향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라디오의 음악은 한없이 감정을 늘어뜨렸다.
"미안해요"
뭐가 미안하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아마도 계속 징징짜는 자기 모습이 병신같다고 느꼈겠지- 그녀는 나에게 사과했다. 아니, 어쩌면 나에 대한 사과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리고 계속 울었다. 빗소리와 라디오 속 섹소폰 소리, 훌쩍대는 여자의 우는 소리가 썩 듣기 나쁘진 않았다. 문득 그런 내가 변태 같다고 느꼈다.
"네"
이런 상황에서 로비는 고비다. 서로 합의된 상황 속에서 여기까지 와서는 혼자 온갖 걱정 다 하다가 돌아서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피차의 입장 난처하게 만드는 애들. 그렇게 영영 다시 못 볼 사이 만드는 애들. 물론 오늘의 지윤은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편안한 휴식 되십시오"
리셉션의 그녀에게 간단히 목례를 하고, 저쪽에서 멀뚱히 서있는 지윤을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순간 이유없이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지만 간신히 참았다. 뭔가 허무하고 웃겼다.
먼저 씻으라고 했다. 에어컨 바람을 쐬며 호텔에서 창 밖을 내려다 보았다. 비에 젖은 밤의 도시가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미라와 승희가 카톡을 보냈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새 밤 12시 37분. 물론 둘 다 아직 잘 시간이 아니건만 나는 자는 척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오빠 씻으세요"
"어"
아까 물줄기 속에서 훌쩍이는 소리를 들은 듯도 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나는 욕실에 들어가 비와 땀에 촉촉히 젖은 파란 린넨 셔츠를 벗었다. 내 얼굴 역시 조금은 피곤해보였다. 따뜻한 물에 한참을 씻었다.
"흠"
씻고 나오자 지윤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가버린 건가, 했지만 불도 켜지 않은 방에서 아까의 나처럼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말을 건내고 싶었지만 머뭇거리다가 결국 타이밍을 놓치고 한참 후에야 혼잣말 하듯 말을 어렵게 꺼냈다.
"미안, 누구 위로하는건 재주가 없어서"
"고마워요"
경험적 지식이다. 어줍잖은 말을 할 바에야 그냥 입 닫고 있는게 낫다는 것은. 그리고 그 지식에 충실할 따름이고. 눈이 뻐근해짐을 느낄 무렵, 나는 살짝 지윤의 손을 잡았다. 그녀와 함께 침대로 향했다. 우스웠지만 심장이 쿵쾅댔다. 그런 감정이 아닌데.
사락, 마른 이불의 기분 좋은 촉감을 느끼며 누웠다. 우리 둘은 한참을 아무 소리 없이 그렇게 멋적게 천장만 보며 누워있었다. 숨막히는 적막이었다.
"흠"
어른인 척 했지만 결국 나는 애다. 누운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잘자" 하고 말하고선 혼자 "드르렁" 하고 코골이 쇼를 했다. 썰렁한 짓이지만 지윤은 내 손을 다시 꼭 잡아주었다. 난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물었다.
"무슨 일인지 말하기 어렵니"
차라리 누군가에게 말이라도 하면 속이라도 달래지니까. 친한 듯 어색하고, 어색한 듯 친한 나라는 사람과의 관계. 뱉어내고 잊어버려도 상관 없는 관계. 나를 찾은 이유는 그래서가 아니었을까.
"…바보 같죠?"
역시나 흔한 이야기다. 지윤은 동현이라는 그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헤어진 이유는 조금 놀라웠다. 지윤이 바람을 피웠던 것. 그런 타입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사람 일은 과연 모를 일이다. 하기사. 세상에 정해진 '그런' 타입이라는게 어딨나. 다 상황 나름이지.
"그렇구만"
과정 자체는 흔한 이야기였다. 익숙함을 넘어 지루함을 느끼게 되는 남자친구와의 관계. 단순한 권태라고 하기에는 이제 너무 많이 보이는 남친의 단점. 그러던 차에 회사에서 능숙하게 들이대는 타 부서의 수컷 남자, 기태. 그런 놈들 있지. 남자들이 봐도 멋있는 놈들.
남자친구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우두머리 수컷에,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없을 만큼 쉽게 몸을 허락하고 몇 번 더 이어진 만남. 그리고 이럴 때 발현되는 오래 사귄 연인의 놀라우리만치 날카로운 촉.
"솔직히, 조금 놀랐어요"
세 번째 잤을 때 지윤은 알았다고 했다. 기태에게도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정리하고 동현에게 돌아가려고 했단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한번 더 잤다고 했다.
그 즈음해서 난 지윤에게 좀 실망감을 느꼈지만 그것이 무엇에 기반한 감정인가를 잠시 고민하다 혼자 입을 삐죽 내밀었다. 다시 지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 자체는 흥미진진했다. 그냥 집에서 자느라 몰랐다는 그녀의 거짓말을 간파한 동현은 집요하게 추궁했고, 결국 지윤은 모든 사실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동현은 마치 드라마 속 캐릭터마냥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줄줄 흘리다 이별을 선언했고, 차마 그 자리에서 그를 잡지 못한 지윤은 미안하다며, 다시 잘해보고 싶다고 수십통의 메세지를 뒤늦게 보냈다고.
"걔가 읽긴 읽었어?"
"네"
뭐 딱히 사람에게 멋대로 기대를 한다거나 그런 타입은 아니지만, 그래도 첫 인상, 이미지라는게 있는 법이라 나도 모르게 지윤의 이미지를 특정한 느낌으로 고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기사 애초에 그냥 쌩 쑥맥 같은 여자애였다면 내가 호감 갖지도 않았으리라.
이야기가 끝나고, 고개를 슥 그녀쪽으로 돌리자 놀랍게도 그녀는 눈물 어린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한없이 섹시… 아니 야했다. 그래 표현적으로 '야했다'.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도 잠시, 난 지윤에게 입을 맞추었다.
"아…"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지윤은 뜨거운 여자였다. 아마도 그 기택이라는 남자에게 배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아직은 조금 서툴지만 다듬으면 훌륭해질 몸놀림으로 나를 받아들였다. 정말로 간만이었다. 이런 느낌.
잠이 올락말락할 무렵, 다시 천장을 바라보던 우리. 난 지윤에게 말했다.
"아마 연락 올거야"
한참을 말없이 멍하니 있던 지윤은 되물었다.
"정말 올까요"
"어"
확신한다. 전재산을 걸라고 해도 걸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갑과 을은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곳에 있는게 아니다.
"지윤아"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잡았다. 다시 그녀의 옆으로 몸을 일으킨 나. 그리고 결정적인 한 마디를 전해줄까 말까 하다가 그냥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진짜 선택권은 동현이 아니라 너에게 있는거야. 그리고 그 선택을 확신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 그런데 이미 넌 아마…'
거기까지 생각하곤 역시 말을 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입을 닫은 채로 살포시 떨리는 지윤의 속눈썹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저 너와 나의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오늘 밤이 더 즐거울 수 있도록.
"…그래. 어디서 볼까? 너 지금 어딘데?"
다른 애였다면 피곤하다고, 미안하다며 다음에 보자고 하고 미뤘을거다. 하지만 지윤이 같은 타입은 다르다. 이번에 거절하면 아마도 두 번의 기회는 오지 않으리라.
"강남역? 알았어, 옷 입고 바로 나갈께"
셔츠를 입으며 생각했다. 남자친구랑 헤어지기라도 한 것일까. 그 통통한 녀석. 지윤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지윤의 표정은 많이 힘들어 보였다. 눈가가 퀭한 것이, 울기도 많이 울고 잠도 많이 못 잔 모양이다. 커피도, 술도 다 포기하고 그냥 기분전환 시켜주는 셈치고 차에 태워서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달렸다.
그녀는 계속 울었다. 왜 우는지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울었다. 나 역시 묻는 대신에 물티슈만 건냈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어느새 송내까지 와있었다. 직장인이다보니 당장 내일 출근이 걱정됐다. 그리고 그제서야 새삼 내일이 토요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근심이 하나 풀리자 허기가 졌다. 그리고 뒤늦게 물었다.
"너, 식사는 했니"
지윤은 고개를 저었다.
"먹으러 가자"
"…괜찮아요"
하지만 난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허기져서 그래. 배고파 죽겠다"
지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아, 결국 패스트푸드에서 햄버거 하나씩을 먹기로 했다. 한심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강남 근처에 세워놓고 차에서 이야기하다가 다시 분위기 근사한 곳에라도 갈 것을, 하는 후회부터 들었다. 이게 다 뭔가.
"흠"
역시나 지윤은 콜라만 두 어 모금 빨았을 뿐, 햄버거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차에 올랐고 나는 조금 피곤함을 느꼈다.
"…피곤하다. 쉬러 가자"
여기서 조금이라도 빼는 기색이 보였다면 지체없이 그녀를 그녀의 집으로 데려다 주었을 것이다. 지윤은 역시 말이 없었다. 음악을 틀었다.
하기사, 이미 썸이라고 부르기에도 어색해진 사이가 되어버린 연상의 남자를 물기 젖은 목소리로 불금의 오밤 중에 뜬금없이 불러내놓고 사연 설명조차 없이 허탈하게 돌려세울 정도로 실없는 애는 아니지. 지윤이가.
피곤했지만 모텔에서 자기도, 재우기도 싫었다. 객실을 확인하고, 옛날에 곧잘 가던 레지던스 호텔로 향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라디오의 음악은 한없이 감정을 늘어뜨렸다.
"미안해요"
뭐가 미안하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아마도 계속 징징짜는 자기 모습이 병신같다고 느꼈겠지- 그녀는 나에게 사과했다. 아니, 어쩌면 나에 대한 사과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리고 계속 울었다. 빗소리와 라디오 속 섹소폰 소리, 훌쩍대는 여자의 우는 소리가 썩 듣기 나쁘진 않았다. 문득 그런 내가 변태 같다고 느꼈다.
"네"
이런 상황에서 로비는 고비다. 서로 합의된 상황 속에서 여기까지 와서는 혼자 온갖 걱정 다 하다가 돌아서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피차의 입장 난처하게 만드는 애들. 그렇게 영영 다시 못 볼 사이 만드는 애들. 물론 오늘의 지윤은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편안한 휴식 되십시오"
리셉션의 그녀에게 간단히 목례를 하고, 저쪽에서 멀뚱히 서있는 지윤을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순간 이유없이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지만 간신히 참았다. 뭔가 허무하고 웃겼다.
먼저 씻으라고 했다. 에어컨 바람을 쐬며 호텔에서 창 밖을 내려다 보았다. 비에 젖은 밤의 도시가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미라와 승희가 카톡을 보냈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새 밤 12시 37분. 물론 둘 다 아직 잘 시간이 아니건만 나는 자는 척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오빠 씻으세요"
"어"
아까 물줄기 속에서 훌쩍이는 소리를 들은 듯도 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나는 욕실에 들어가 비와 땀에 촉촉히 젖은 파란 린넨 셔츠를 벗었다. 내 얼굴 역시 조금은 피곤해보였다. 따뜻한 물에 한참을 씻었다.
"흠"
씻고 나오자 지윤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가버린 건가, 했지만 불도 켜지 않은 방에서 아까의 나처럼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말을 건내고 싶었지만 머뭇거리다가 결국 타이밍을 놓치고 한참 후에야 혼잣말 하듯 말을 어렵게 꺼냈다.
"미안, 누구 위로하는건 재주가 없어서"
"고마워요"
경험적 지식이다. 어줍잖은 말을 할 바에야 그냥 입 닫고 있는게 낫다는 것은. 그리고 그 지식에 충실할 따름이고. 눈이 뻐근해짐을 느낄 무렵, 나는 살짝 지윤의 손을 잡았다. 그녀와 함께 침대로 향했다. 우스웠지만 심장이 쿵쾅댔다. 그런 감정이 아닌데.
사락, 마른 이불의 기분 좋은 촉감을 느끼며 누웠다. 우리 둘은 한참을 아무 소리 없이 그렇게 멋적게 천장만 보며 누워있었다. 숨막히는 적막이었다.
"흠"
어른인 척 했지만 결국 나는 애다. 누운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잘자" 하고 말하고선 혼자 "드르렁" 하고 코골이 쇼를 했다. 썰렁한 짓이지만 지윤은 내 손을 다시 꼭 잡아주었다. 난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물었다.
"무슨 일인지 말하기 어렵니"
차라리 누군가에게 말이라도 하면 속이라도 달래지니까. 친한 듯 어색하고, 어색한 듯 친한 나라는 사람과의 관계. 뱉어내고 잊어버려도 상관 없는 관계. 나를 찾은 이유는 그래서가 아니었을까.
"…바보 같죠?"
역시나 흔한 이야기다. 지윤은 동현이라는 그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헤어진 이유는 조금 놀라웠다. 지윤이 바람을 피웠던 것. 그런 타입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사람 일은 과연 모를 일이다. 하기사. 세상에 정해진 '그런' 타입이라는게 어딨나. 다 상황 나름이지.
"그렇구만"
과정 자체는 흔한 이야기였다. 익숙함을 넘어 지루함을 느끼게 되는 남자친구와의 관계. 단순한 권태라고 하기에는 이제 너무 많이 보이는 남친의 단점. 그러던 차에 회사에서 능숙하게 들이대는 타 부서의 수컷 남자, 기태. 그런 놈들 있지. 남자들이 봐도 멋있는 놈들.
남자친구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우두머리 수컷에,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없을 만큼 쉽게 몸을 허락하고 몇 번 더 이어진 만남. 그리고 이럴 때 발현되는 오래 사귄 연인의 놀라우리만치 날카로운 촉.
"솔직히, 조금 놀랐어요"
세 번째 잤을 때 지윤은 알았다고 했다. 기태에게도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정리하고 동현에게 돌아가려고 했단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한번 더 잤다고 했다.
그 즈음해서 난 지윤에게 좀 실망감을 느꼈지만 그것이 무엇에 기반한 감정인가를 잠시 고민하다 혼자 입을 삐죽 내밀었다. 다시 지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 자체는 흥미진진했다. 그냥 집에서 자느라 몰랐다는 그녀의 거짓말을 간파한 동현은 집요하게 추궁했고, 결국 지윤은 모든 사실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동현은 마치 드라마 속 캐릭터마냥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줄줄 흘리다 이별을 선언했고, 차마 그 자리에서 그를 잡지 못한 지윤은 미안하다며, 다시 잘해보고 싶다고 수십통의 메세지를 뒤늦게 보냈다고.
"걔가 읽긴 읽었어?"
"네"
뭐 딱히 사람에게 멋대로 기대를 한다거나 그런 타입은 아니지만, 그래도 첫 인상, 이미지라는게 있는 법이라 나도 모르게 지윤의 이미지를 특정한 느낌으로 고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기사 애초에 그냥 쌩 쑥맥 같은 여자애였다면 내가 호감 갖지도 않았으리라.
이야기가 끝나고, 고개를 슥 그녀쪽으로 돌리자 놀랍게도 그녀는 눈물 어린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한없이 섹시… 아니 야했다. 그래 표현적으로 '야했다'.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도 잠시, 난 지윤에게 입을 맞추었다.
"아…"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지윤은 뜨거운 여자였다. 아마도 그 기택이라는 남자에게 배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아직은 조금 서툴지만 다듬으면 훌륭해질 몸놀림으로 나를 받아들였다. 정말로 간만이었다. 이런 느낌.
잠이 올락말락할 무렵, 다시 천장을 바라보던 우리. 난 지윤에게 말했다.
"아마 연락 올거야"
한참을 말없이 멍하니 있던 지윤은 되물었다.
"정말 올까요"
"어"
확신한다. 전재산을 걸라고 해도 걸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갑과 을은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곳에 있는게 아니다.
"지윤아"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잡았다. 다시 그녀의 옆으로 몸을 일으킨 나. 그리고 결정적인 한 마디를 전해줄까 말까 하다가 그냥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진짜 선택권은 동현이 아니라 너에게 있는거야. 그리고 그 선택을 확신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 그런데 이미 넌 아마…'
거기까지 생각하곤 역시 말을 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입을 닫은 채로 살포시 떨리는 지윤의 속눈썹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저 너와 나의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오늘 밤이 더 즐거울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