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리의 말에 난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하면 되잖아"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할 사람이 없어"
얼굴 반반하고 옷도 깔쌈하게 입고 다니고 몸매도 삼삼한 니 주변에 참도 남자가 없겠다, 하고 속으로 혀를 끌끌 차고 있노라니 그녀는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진짜 없어. 아니 내가 자자고 하면 달려나올 남자들이야 많겠지. 근데 아무나랑 할 순 없잖아. 한번 잤다고 귀찮고 지저분하게 구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한번이라도 자고 나면 내가 지 여자라도 된 양 행동하는 놈들도 많고, 그게 아니면 반대로 어디가서 나랑 잤다고 몸매가 어떻고 스킬이 어떻고 나불대고 다니는 놈들도 많고, 좀 괜찮은 놈들은 다 여자친구도 있고… 세상에 믿을 남자가 있어야지"
그런가.
"그럼 빨리 애인이나 만들어야겠네"
하지만 이번에도 혜리는 고개를 저었다.
"이젠 남자라는 자체가 지겨워. 피곤해. 다 똑같은 놈들 뿐이야. 그렇잖아도 소개팅 얼마 전에 몇 번 해봤는데, 이젠 나도 나이 먹었다고 남자들이 내 직업부터 묻더라, 연봉 살살 떠보고, 아 진짜 다들 왜 그런지 몰라. 그냥 편하게 서로 좋으면 좋다, 서로의 매력에 끌려서 만나면 안되는건가? 난 남자 연봉이고 직업이고 이딴거 하나도 상관없는데"
"그저 오로지 외모만!"
"아니"
혜리는 한 모음 커피를 더 마시다가 내 말에 웃으며 부정했다.
"오빠 나 외모 안 보는거 잘 알잖아. 선호도 그렇고 민국이 다 얼굴은 완전 좀 아니었잖아. 그냥 나는, 나 좋아해주면 그걸로 되는데, 아 왜 없을까"
글쎄. 니 정도 외모면 솔직히 니 외모만으로도 니 좋아해 줄 사람이 없지 않을텐데. 어쨌든.
"욕구불만이라고 여기저기 막 찔러대지 말고, 조신하게 살어. 니도 이제 슬슬 조심해야 될 나이야"
아저씨 같은 내 말에 혜리는 픽 웃으며 머리를 귀 뒤로 넘긴다.
"오빠도 나이 먹었다고 이제 아저씨 같은 말 하네. 옛날에는 내가 이런 말 했으면 곧바로 나랑 자자고 했을거면서"
아까부터 계속 간보는 것을 슬쩍슬쩍 피하고 있노라니 드디어 이 기집애가 먼저 찔러 들어온다. 귀여운 것. 손바닥 위에서 팔딱거리는 귀여운 새끼 잉어를 보는 기분이다.
"내가 임마, 니랑 왜 자"
어색한 척, 당황하는 척 물러나는 제스쳐를 취하자, 그래도 얘도 이제 나이 먹었다고 쉽게 딸려오지는 않는다.
"내가 뭐가 어때서? 오빤 뭐 이제 아저씨 아닌가?"
'니랑 왜 자'라는 말에 실쭉해진 척 다시 튕기는 그녀. 그리고 여기서는 당연히 숙여주는게 예의다.
"아저씨니까 니처럼 한창 이쁜 애랑 자면 안되는거지"
그 말에 또 좋다고 웃는다.
"에이 오빠 또 이런다. 오빠가 뭐 어때서. 아직 잘 나가잖아. 요즘도 맨날 여자애들이 먼저 오빠랑 막 만나자고 만나달라고 조르고 그래?"
"아 누가 그래. 휴대폰이 아예 시계다 시계. 하루종일 기집애는 커녕 가족한테도 연락 한 통 안 와"
그러자 혜리는 웃으며 다리를 꼰다.
"이제야말로 오빠도 슬슬 장가갈 때가 됐네 그럼. 좋은 시절 다 갔으니까. 결혼은 생각하고 있어? 요즘에 따로 만나는 여자는 있어?"
"없어"
어느새 다 마셔버린 커피의 빨대를 한번 더 빤 그녀는 커피를 다 마셨다는 사실을 깨닫자, 엉망으로 깨물어댄 빨대를 빼내고 뚜껑을 열어 얼음을 깨문다. 큼지막한 얼음을 입 안 가득 습습 돌리는 모습이 묘하게 야하다. 오늘따라 진한 눈화장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이윽고 얼음을 깨문 그녀는 상상 이상으로 와그작 와그작 소리가 나자 입을 가리며 쑥쓰럽게 웃는다.
"어휴, 애냐"
입가에 흐르는 침 닦으라고 휴지 몇 장 가져다주니까 받으며 입가를 가린다. 그렇게 얼음 한 조각을 다 먹은 그녀는 입 안이 얼얼한지 아래 턱을 흔들어 본 뒤 "맛있어"하고 활짝 웃는다.
"예전 같으면 소개팅 해 줄 텐데, 요즘 내 주변이 다 연애 중이야. 그래서 내가 더 그런 것도 같아. 승희도 그렇고 수정이도 그렇고, 아예 수절할 것 같던 애들까지 다 연애질이야"
아 그 미녀군단.
"니 친구들이야 이쁘니까. 그 얼굴들을 지금까지 묵혀놓은게 자원낭비지 자원낭비"
혜리는 내 말에 "미녀군단이래" 하고 또 웃다가 말했다.
"내 친구들 중에서 누가 제일 이뻐?"
혜리가 내 여자친구라면 당연히 혜리라고 말했겠지만, 그게 아니니 당연히…
"니가 제일 이쁘지 그래도. 그 중에서는"
…그렇다. 이 자리에도 없는 남을 칭찬해서 뭐하는가. 의미없는 립서비스라도 해주는게 낫지. 혜리는 "어휴 오빠 진짜 아저씨 됐나봐. 옛날에는 전혀 안 그러다가 요새 진짜 완전 느끼해" 하며, 또 좋아라 웃는다.
그녀의 이직 이야기라도 화제를 돌려볼까, 하다가 그냥 지금의 이슈를 이어가 본다.
"요즘에는 너한테 껄떡대는 남자들 없어? 옛날에 그 누구지? 한량들 많았잖아. 외제차 끌고 다니는 놈들"
"아 이제 그런 오빠들 싫어. 언제까지 그러고 살아? 다 양아치들. 이젠 싫어"
난 웃으며 말했다.
"야, 니가 같이 안 놀고 그런 이야기를 해야지, 맨날 그런 놈팽이들이랑 놀던 애가 그러면 그게 말이 되냐"
혜리는 웃으며 혀를 내민다. 그러고보면 참 얘가 은근 애교는 많았지.
"그땐 나도 어렸으니까. 마냥 그런게 멋있어보였지. 근데 이젠 아냐. 그냥 착실하고 듬직하고 나만 바라봐주는 막 그런 남자였으면 좋겠어"
어째 말하는 투가 얘도 슬슬 시집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주변에 만나는 남자 정말 없어? 지금 딱 완전 결혼 생각하고 하는 이야기 같은데?"
"아 진짜 없어 그런거. 오빠야말로 진짜 주변에 여자 없어? 오빠 주변에 여자 없다는게 말이나 되냐"
난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완전히 아저씨 됐는데 뭐. 개털이지. 돈도 없고 슬슬 배도 나오지, 이젠 진짜 답 없다"
"아 오빠 왜 그래 진짜. 아직 한참 현역이구만"
나도 실은 아까 한참 전에 커피를 다 마신 참이었다. 나는 "이제 일어날까?" 하고 그녀를 데리고 까페를 나섰다.
주말의 한낮인데도 오가는 사람이라고는 근처 모델 학원에 다니는 것으로 보이는 쭉쭉이 두엇 뿐이다. 이 일대 상권이 다 죽었다고는 들었지만, 그래도 심할 정도다.
"혜리야, 오빠랑 사귈래?"
가게를 나온지 약 2분 만에, 오늘 날씨 좀 덥다, 슬슬 여름이 오나보네 같은 의미없는 대화를 주고 받다가 먼저 툭 던진 내 말. 뜬금없는 말에 푸하하 하고 분위기 다 깰 정도로 그녀가 웃는다. 뭐야, 이거.
"아 뭐야 오빠 뜬금없이. 약 먹었어?"
약 먹었어는 뭐냐.
"봄이잖아. 너도 막 요즘에 외롭다면서. 그리고 뭐, 내가 좀, 아저씨긴 해도 그래도 막 내가 쓰레기는 아니잖아"
속으로 쓰레기 맞지만, 하고 중얼거려본다. 혜리는 또 어색하게 웃다가 말한다.
"내가 막 외로워 하니까 오빠 또 이런다. 아 됐어. 나 놀리지 마"
그렇다고 "놀리는거 아닌데" 같은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대신에 그녀의 손을 슥 쥐었다. 뭐 사실 그녀의 손이야 예전에도 덥썩덥썩 은근슬쩍 잘 쥐었지만, 오늘처럼은 아니다.
"뭐야 진짜 오빠, 이상해"
하지만 썩 싫은 기색은 아니다. 그렇다고 브레이크 없이 질주할 생각도 없다. 다시 그녀의 손을 살포시 놓아주고 입술을 쭉 내민다.
"난 좀 아냐? 역시 좀 어색하지? 흐"
그리고 30 여년간 삶의 내공이 쌓인 어색한 미소로 씁쓸함을 지어보인다. 그래, 이 또래 여자애들은 이 미소 한 방이면 끝이다. 어색하고 씁쓸한, 난처함과 역시 나는 안되겠지 같은 복잡한 마음, 다가서고 싶지만 많은 제약이 스스로와 모두에게 걸려있어서 차마 더이상의 마음은 표현하지 못하는 어른의 쌉싸름한 마치 흑맥주 같은 맛의 미소.
"어?"
혜리의 얼굴에 순간 당혹감과 연민의 빛이 스친다. 그렇지. 어린 애들과는 다르다. 역시 나름 좌절도 겪어보고 그저 마냥 한창 때의, 어리고 예쁘다는 절대적 무기로 모든 것을 제 맘대로 하던 때의 봄날은 지난 시기의 이 또래 아이들. 즉, 맥주의 진짜 맛을 알만한 나이.
"근데 오빠는 나 여자로 보지도 않잖아"
"그럼 뭐 니는 언제는 나 남자로 봤냐"
그 말에 서로들 빵 터져서 웃다가 "아 정말 할 말 없네. 그건 그러네" 하고 인정하곤 혜리가 말했다.
"알았어. 그럼 이제 우리 뭐 어떻게 하면 돼?"
나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다가 그녀에게 휴대폰을 들어보였다.
"김혜리, 를 혜리 여신으로 호칭부터 바꿔줄께"
"어어어어우 촌스러워! 오빠 나 오빠 여친 안 할래, 안 사귈래!!"
웃으며 팔딱팔딱 뛰는 그녀의 모습에 나 역시 멋적게 웃으며, 새삼스레 오늘따라 예뻐보이는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럼 하면 되잖아"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할 사람이 없어"
얼굴 반반하고 옷도 깔쌈하게 입고 다니고 몸매도 삼삼한 니 주변에 참도 남자가 없겠다, 하고 속으로 혀를 끌끌 차고 있노라니 그녀는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진짜 없어. 아니 내가 자자고 하면 달려나올 남자들이야 많겠지. 근데 아무나랑 할 순 없잖아. 한번 잤다고 귀찮고 지저분하게 구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한번이라도 자고 나면 내가 지 여자라도 된 양 행동하는 놈들도 많고, 그게 아니면 반대로 어디가서 나랑 잤다고 몸매가 어떻고 스킬이 어떻고 나불대고 다니는 놈들도 많고, 좀 괜찮은 놈들은 다 여자친구도 있고… 세상에 믿을 남자가 있어야지"
그런가.
"그럼 빨리 애인이나 만들어야겠네"
하지만 이번에도 혜리는 고개를 저었다.
"이젠 남자라는 자체가 지겨워. 피곤해. 다 똑같은 놈들 뿐이야. 그렇잖아도 소개팅 얼마 전에 몇 번 해봤는데, 이젠 나도 나이 먹었다고 남자들이 내 직업부터 묻더라, 연봉 살살 떠보고, 아 진짜 다들 왜 그런지 몰라. 그냥 편하게 서로 좋으면 좋다, 서로의 매력에 끌려서 만나면 안되는건가? 난 남자 연봉이고 직업이고 이딴거 하나도 상관없는데"
"그저 오로지 외모만!"
"아니"
혜리는 한 모음 커피를 더 마시다가 내 말에 웃으며 부정했다.
"오빠 나 외모 안 보는거 잘 알잖아. 선호도 그렇고 민국이 다 얼굴은 완전 좀 아니었잖아. 그냥 나는, 나 좋아해주면 그걸로 되는데, 아 왜 없을까"
글쎄. 니 정도 외모면 솔직히 니 외모만으로도 니 좋아해 줄 사람이 없지 않을텐데. 어쨌든.
"욕구불만이라고 여기저기 막 찔러대지 말고, 조신하게 살어. 니도 이제 슬슬 조심해야 될 나이야"
아저씨 같은 내 말에 혜리는 픽 웃으며 머리를 귀 뒤로 넘긴다.
"오빠도 나이 먹었다고 이제 아저씨 같은 말 하네. 옛날에는 내가 이런 말 했으면 곧바로 나랑 자자고 했을거면서"
아까부터 계속 간보는 것을 슬쩍슬쩍 피하고 있노라니 드디어 이 기집애가 먼저 찔러 들어온다. 귀여운 것. 손바닥 위에서 팔딱거리는 귀여운 새끼 잉어를 보는 기분이다.
"내가 임마, 니랑 왜 자"
어색한 척, 당황하는 척 물러나는 제스쳐를 취하자, 그래도 얘도 이제 나이 먹었다고 쉽게 딸려오지는 않는다.
"내가 뭐가 어때서? 오빤 뭐 이제 아저씨 아닌가?"
'니랑 왜 자'라는 말에 실쭉해진 척 다시 튕기는 그녀. 그리고 여기서는 당연히 숙여주는게 예의다.
"아저씨니까 니처럼 한창 이쁜 애랑 자면 안되는거지"
그 말에 또 좋다고 웃는다.
"에이 오빠 또 이런다. 오빠가 뭐 어때서. 아직 잘 나가잖아. 요즘도 맨날 여자애들이 먼저 오빠랑 막 만나자고 만나달라고 조르고 그래?"
"아 누가 그래. 휴대폰이 아예 시계다 시계. 하루종일 기집애는 커녕 가족한테도 연락 한 통 안 와"
그러자 혜리는 웃으며 다리를 꼰다.
"이제야말로 오빠도 슬슬 장가갈 때가 됐네 그럼. 좋은 시절 다 갔으니까. 결혼은 생각하고 있어? 요즘에 따로 만나는 여자는 있어?"
"없어"
어느새 다 마셔버린 커피의 빨대를 한번 더 빤 그녀는 커피를 다 마셨다는 사실을 깨닫자, 엉망으로 깨물어댄 빨대를 빼내고 뚜껑을 열어 얼음을 깨문다. 큼지막한 얼음을 입 안 가득 습습 돌리는 모습이 묘하게 야하다. 오늘따라 진한 눈화장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이윽고 얼음을 깨문 그녀는 상상 이상으로 와그작 와그작 소리가 나자 입을 가리며 쑥쓰럽게 웃는다.
"어휴, 애냐"
입가에 흐르는 침 닦으라고 휴지 몇 장 가져다주니까 받으며 입가를 가린다. 그렇게 얼음 한 조각을 다 먹은 그녀는 입 안이 얼얼한지 아래 턱을 흔들어 본 뒤 "맛있어"하고 활짝 웃는다.
"예전 같으면 소개팅 해 줄 텐데, 요즘 내 주변이 다 연애 중이야. 그래서 내가 더 그런 것도 같아. 승희도 그렇고 수정이도 그렇고, 아예 수절할 것 같던 애들까지 다 연애질이야"
아 그 미녀군단.
"니 친구들이야 이쁘니까. 그 얼굴들을 지금까지 묵혀놓은게 자원낭비지 자원낭비"
혜리는 내 말에 "미녀군단이래" 하고 또 웃다가 말했다.
"내 친구들 중에서 누가 제일 이뻐?"
혜리가 내 여자친구라면 당연히 혜리라고 말했겠지만, 그게 아니니 당연히…
"니가 제일 이쁘지 그래도. 그 중에서는"
…그렇다. 이 자리에도 없는 남을 칭찬해서 뭐하는가. 의미없는 립서비스라도 해주는게 낫지. 혜리는 "어휴 오빠 진짜 아저씨 됐나봐. 옛날에는 전혀 안 그러다가 요새 진짜 완전 느끼해" 하며, 또 좋아라 웃는다.
그녀의 이직 이야기라도 화제를 돌려볼까, 하다가 그냥 지금의 이슈를 이어가 본다.
"요즘에는 너한테 껄떡대는 남자들 없어? 옛날에 그 누구지? 한량들 많았잖아. 외제차 끌고 다니는 놈들"
"아 이제 그런 오빠들 싫어. 언제까지 그러고 살아? 다 양아치들. 이젠 싫어"
난 웃으며 말했다.
"야, 니가 같이 안 놀고 그런 이야기를 해야지, 맨날 그런 놈팽이들이랑 놀던 애가 그러면 그게 말이 되냐"
혜리는 웃으며 혀를 내민다. 그러고보면 참 얘가 은근 애교는 많았지.
"그땐 나도 어렸으니까. 마냥 그런게 멋있어보였지. 근데 이젠 아냐. 그냥 착실하고 듬직하고 나만 바라봐주는 막 그런 남자였으면 좋겠어"
어째 말하는 투가 얘도 슬슬 시집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주변에 만나는 남자 정말 없어? 지금 딱 완전 결혼 생각하고 하는 이야기 같은데?"
"아 진짜 없어 그런거. 오빠야말로 진짜 주변에 여자 없어? 오빠 주변에 여자 없다는게 말이나 되냐"
난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완전히 아저씨 됐는데 뭐. 개털이지. 돈도 없고 슬슬 배도 나오지, 이젠 진짜 답 없다"
"아 오빠 왜 그래 진짜. 아직 한참 현역이구만"
나도 실은 아까 한참 전에 커피를 다 마신 참이었다. 나는 "이제 일어날까?" 하고 그녀를 데리고 까페를 나섰다.
주말의 한낮인데도 오가는 사람이라고는 근처 모델 학원에 다니는 것으로 보이는 쭉쭉이 두엇 뿐이다. 이 일대 상권이 다 죽었다고는 들었지만, 그래도 심할 정도다.
"혜리야, 오빠랑 사귈래?"
가게를 나온지 약 2분 만에, 오늘 날씨 좀 덥다, 슬슬 여름이 오나보네 같은 의미없는 대화를 주고 받다가 먼저 툭 던진 내 말. 뜬금없는 말에 푸하하 하고 분위기 다 깰 정도로 그녀가 웃는다. 뭐야, 이거.
"아 뭐야 오빠 뜬금없이. 약 먹었어?"
약 먹었어는 뭐냐.
"봄이잖아. 너도 막 요즘에 외롭다면서. 그리고 뭐, 내가 좀, 아저씨긴 해도 그래도 막 내가 쓰레기는 아니잖아"
속으로 쓰레기 맞지만, 하고 중얼거려본다. 혜리는 또 어색하게 웃다가 말한다.
"내가 막 외로워 하니까 오빠 또 이런다. 아 됐어. 나 놀리지 마"
그렇다고 "놀리는거 아닌데" 같은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대신에 그녀의 손을 슥 쥐었다. 뭐 사실 그녀의 손이야 예전에도 덥썩덥썩 은근슬쩍 잘 쥐었지만, 오늘처럼은 아니다.
"뭐야 진짜 오빠, 이상해"
하지만 썩 싫은 기색은 아니다. 그렇다고 브레이크 없이 질주할 생각도 없다. 다시 그녀의 손을 살포시 놓아주고 입술을 쭉 내민다.
"난 좀 아냐? 역시 좀 어색하지? 흐"
그리고 30 여년간 삶의 내공이 쌓인 어색한 미소로 씁쓸함을 지어보인다. 그래, 이 또래 여자애들은 이 미소 한 방이면 끝이다. 어색하고 씁쓸한, 난처함과 역시 나는 안되겠지 같은 복잡한 마음, 다가서고 싶지만 많은 제약이 스스로와 모두에게 걸려있어서 차마 더이상의 마음은 표현하지 못하는 어른의 쌉싸름한 마치 흑맥주 같은 맛의 미소.
"어?"
혜리의 얼굴에 순간 당혹감과 연민의 빛이 스친다. 그렇지. 어린 애들과는 다르다. 역시 나름 좌절도 겪어보고 그저 마냥 한창 때의, 어리고 예쁘다는 절대적 무기로 모든 것을 제 맘대로 하던 때의 봄날은 지난 시기의 이 또래 아이들. 즉, 맥주의 진짜 맛을 알만한 나이.
"근데 오빠는 나 여자로 보지도 않잖아"
"그럼 뭐 니는 언제는 나 남자로 봤냐"
그 말에 서로들 빵 터져서 웃다가 "아 정말 할 말 없네. 그건 그러네" 하고 인정하곤 혜리가 말했다.
"알았어. 그럼 이제 우리 뭐 어떻게 하면 돼?"
나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다가 그녀에게 휴대폰을 들어보였다.
"김혜리, 를 혜리 여신으로 호칭부터 바꿔줄께"
"어어어어우 촌스러워! 오빠 나 오빠 여친 안 할래, 안 사귈래!!"
웃으며 팔딱팔딱 뛰는 그녀의 모습에 나 역시 멋적게 웃으며, 새삼스레 오늘따라 예뻐보이는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