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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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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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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또 어디에 돈 빌려줬대!"

전화기 너머로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고 있는 여동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알았어, 혜윤아 일단 진정하고, 주말에 내려가서 이야기 하자. 오빠가 알아서 처리할께. 울지 말고, 엄마 잘 챙기고, 응" 하고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옥상에 올라 간만에 담배를 입에 물었다. 금연 5일차, 어쩌면 이번에는 좀 더 길게 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이럴 때 담배라도 없으면 자살 충동이 들 것 같아서 약 대신이다 치고 입에 물었다.

"쓰후"

그게, 참 얄궂은 것이다. 차라리 나쁜 인간 같으면 인연이라도 끊고 살텐데. 모자란 인간이라 문제인 것이다. 뭐 그게 그거지만 말이다. 모자라서, 사람 말에 잘 넘어가서, 사탕발림에 약해서, 집도 날리고 평생 고생해서 모은 돈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날리고, 마누라는 평생 고생시키다 못해 반 병신 만들고, 나는 빚덩이에 여동생은 대학도 못 갔더랬지. 참 잔인한 일이다. 대가리가 나쁘다는 것은.

"흐"

역시 모자란건 죄다. 세상에 대가리 나쁜건 정말 큰 죄다. 대가리 좋은 새끼는, 설령 나쁜 놈이라고 해도 다음 행동이 예측이라도 된다. 하지만 모자란 인간은 다르다. 어느 날 갑자기, 터무니 없이, 상상도 못했던 방식으로 일을 터뜨린다. 심지어 같은 방법으로 몇 번씩이나.

"빵"

머릿 속으로 저 건물 아래서 폭탄이 터지는 상상을 하다가 입으로 빵, 소리까지 내본다. 차라리 확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 말고, 그 인간 말이다. 이 세상에 나를 창조한 그 인간. 나는 속으로 나에게 몇 수백 수천번을 타일렀다. 어쨌든 아버지니까, 그래도 핏줄이니까, 하는 생각으로 미래도 포기하고, 참고, 또 가끔은 측은하다는 생각도 해보고, 어떻게든 타일러도 보고, 갖은 수를 써보았지만….

모자란 인간은 답이 없다. 나는 건물 옥상 한 켠의 파이프를 의자 삼아 앉았다. "집집마다 그런 사람 하나씩은 꼭 있어"하고 애써 나를 달래던 지원이가 생각났다.

"병신 같은 년"

하필이면 나같은 새끼를 만나서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미안함에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고개를 저으며 털어냈다. 그녀와 헤어지고서, 단 한번도 붙잡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았다.

"…참, 그게, 돈이 뭐라고…참, 돈이…"

그리고 그 혼잣말에 설움이 돋아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한 것을 참았다. 모자란 사람이 싫다. 나라고 해서 용 빼는 재주 없다. 결국 나같은 새끼랑 만나봐야, 그 여자 인생만 불쌍해지는 법이다.

"빙신"

애비 돈 이야기하다가 뜬금없이 또 혼자 지 연애 문제로 질질 짠다. 병신같이. 병신 새끼. 그보다 어쨌든 이번에는 좀 질이 안 좋은 것 같다. 혜윤이 말로는 당장 확인된 것만 8백이란다. 그리고 지가 좀 아빠를 다그쳐보니까 2천이 어쩌고 또 하는데, 그게 원금인지 이자인지가 확실치 않단다.

그 돈을 집어넣으면 달달히 4백씩 준다던가. 참, 그 달콤한 소리만 들으면 이성이 저 멀리 어디론가 날아가버리기라도 하는건지. 얼마 전에 티비 보니까 그런 말도 나오긴 하더라. 중장년 이후의 남자들이 돈으로 뻘 투자 하는 것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의 발로라고. 나 아직 안 죽었어, 내 능력으로 돈 딱딱 들어오게 만들거라고, 하는 마음. 그 병신같은 마음. 안되는 바가지가 갑자기 딱 붙기라도 한 줄 아는건가.

"후우"

알게 뭐냐. 어쨌든 기왕 꼬인 팔자 한번 더 꼬였을 뿐이다. 월세 보증금 빼고, 금리 올리는 대신에 추가 대출 한 천만원만 더 내고, 그 다음에 모자라는 것은 휴대폰 소액대출 내고…. 잘 되면 말이지. 내일은 휴가를 내고 은행 좀 다녀와야겠다.

"아, 진짜 피곤하다"

피로가 몰려왔다. 눈을 비비며 오후의 따가운 햇살에 시름을 흘려보낸다. 담배 연기와 함께. 어떻게든 되겠지, 어떻게든. 안되면 뒤지면 되는거고, 하고 눈물 그렁그렁 찡그린 눈으로 촛점 없이 저 아래를 내려다보며 되새긴다.

언제나 해왔던대로, 그 '어떻게든'과 '안되면 까짓거 관두면, 뒤지면 그만'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슥 일어선다. 그보다 이번 달 생활비는 있으려나. 그렇잖아도 월급 들어오는 날, 주말에는 집에 고기나 좀 사들고 간만에 찾아가봐야겠다.

"5시…"

오늘은 아무래도 야근을 할 것 같다. 그리고 차라리 그게 편하다. 꽁초를 짓이겨 끄고, 나는 터덜터덜 사무실로 향했다. 일렁였던 마음은 벌써 안정이 됐다. 어차피 한두번 겪은 일이 아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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