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호 씨는 '뉴타입'이라는 말 자체가 올드타입이 되어버린 시대를 살아가는 오타쿠이지만 여전히 그에게 뉴타입은 뉴타입이다.
"뭐랄까, 향수라는 말로 단정짓기에는 아직은 그 안에 아쉬움이 있어요. 설렘이 있단 말이죠"
그의 컬렉션 역시 조금은 올드한 편이다.
"피규어도 모으긴 하지만, 제가 받아들이는 것은 에반게리온까지가 아무래도 한계일까 싶어요. 감성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어느 시점부터의 경향은 글쎄… 좀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더라구요. 저는 '모에'를 받아들이기가 조금 어렵더라구요. 아, 처음에는 좋았죠. 매력적인 캐릭터가 왜 싫겠냐만, 작품의 스토리나 설정 속에서 캐릭터가 빛을 받아야지, 아예 캐릭터를 위해 모든 것이 존재하는 시점에 이르러선 조금, 저는 싫더라구요.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제 취향이 그렇다는 거지"
거기까지 이야기 한 그는 조금 이야기를 돌렸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지엽적인 차원이에요. 그보다 온라인이나 지인 관계 차원에서 작품을 탐구하며 함께 토론하던 문화 자체가 조금은 방향성이 달라진 것 같아요. 아니,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제 기준이니 넘어가죠. 그보다 그 시절 동지들이 온데간데 없다는게 더 아쉽습니다. 저로선. 그 많던 오타쿠들이 다 어디 갔을까요? 요즘 오타쿠들이요? 음, 요즘 친구들은, 묘하게 행동력이 좋은 어린 친구들이 우리들과는 다소 다른 방향에서 왕성하게 오타쿠 활동을 하는 모습은 나름 긍정적인 방향이라고 생각은 합니다. 저와는 좀 다르다는 느낌이지만."
무언가 자신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을 조심스러워 한달까, 어려워한달까 하던 용호씨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저는, 지금이나 그때나 오타쿠로서의 자신을 밖에 크게 드러내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세대이기도 하고 말이죠"
잠시 망설이던 그는 말을 이었다.
"도태라고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국경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싶어요. 여기까지입니다. 저라는 나라의, 제가 허용할 수 있는 취향의 국경은"
"사실 저만 해도 당시로선 한참 부족한 신참 레벨이었죠"
잠자리 안경을 치켜올린 그는 말했다.
"뭐 유명한 이야기로 게임, 만화, 컴퓨터 이 셋 중 하나에 관심 있는 사람은 최소 나머지 둘 중 하나에도 관심이 있다 라는 말이 있어요. 그때 그 시절 이야기지만요. 저는 물론 셋 다였죠. '교양' 공부도 열심히 했구요"
'교양'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그는 부연했다.
"전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반드시 알아두어야 하는 과목 말입니다. 건담은 그야말로 교양 필수 과목 같은 거였죠. 솔직히 말해서 우리 세대만 하더라도 이미 1979년 기동전사 건담을 실제 전편 시청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란바랄이나 마틸다 대위 같은 존재는 대화에 끼기 위해서라도 알아야 했어요. 정작 본편은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건만 스토리와 설정과 모빌슈츠의 주요한 특성 정도는 반드시 꿰어야 했어요. 하다못해 이데온에서 등장인물들이 줄줄히 죽어나간다, 학살의 토미노 같은 정도의 네타는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어야 했어요. 그건 기본이니까요. 영어 배우는데 알파벳 수준의"
그리고 바로 그 부분에서 그가 조금 흥분했다.
"우리 세대는 그런 식의, 전 세대에 대한 리스펙트가 있었어요. 비록 본 적도 없는 작품이건만 그 작품의 '이름값'을 인정했고, 그 작품의 팬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그 작품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했어야 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전 세대의 작품들을 많이 이해하고 그것을 온전히 흡수하면 할수록 서로의 사이에서 좀 더 '인정받는 존재'가 될 수 있었죠"
용호씨는 거기에서 잠깐 말을 멈추고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면 우리 세대의 탓일 수도 있어요. 전 세대의 사람들은, 그러니까 진짜 '올드타입'들은 보노라면 괴수들이 많았거든요. 능력도 특출나서 네임드 수준에 이르면 아예 현업에 종사하거나 어떤 식으로던 관련업종에서 일하거나, 혹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영향력을 끼치거나, 후대에 도움이 될만한 툴들을 직접 자작할 정도의 능력자들이거나. 리스펙트 받을 자격들이 있는 사람들이었죠. 우리 세대도 물론 그런 사람들이 많긴 했지만… 전 세대만큼의 카리스마는 없었죠. 인정합니다. 뭐 이 바닥의 상향평준화가 이루어진 덕분이기도 하구요"
다시 그는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 시절에는 작은 정보도 다 가치가 있었어요. 스텝롤의 스테프 이름과 그 한 명 한 명마다의 필모그라피나 해당 작품과의 에피소드 같은 것 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구요. 그게 바로 오타쿠였어요. 기동전사 Z건담 스텝롤에서 나가노 마모루를 딱 짚은 다음에 엘 가임과 FSS의 디자인 지향성을 Z건담에 연관해서 설명할 수 있으며 판저 프론트와 백사의 나가 이야기는 곁들여서 씹어줄 수 있어야 바로 오타쿠라는 말입니다. 최소한요. 정말 최소한."
'오타쿠'라는 단어가 나오자 그는 조금 흥분하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 세대에게 오타쿠라는건 사회적으로는 오명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는 자부심이기도 했어요. 내가 다른건 몰라도 이 분야에 대해서만큼은 어느 누구랑 이야기해도 정보량에서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실제로 현업에서 종사하는 이들보다도 순수히 장르적 정보에 대해서만큼은 압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자부심 레벨에서는 말입니다. 음, 영화 평론가들 보면 1950년대 영화의 스태프까지 줄줄히 읊잖아요. 비슷합니다"
이후 "그러나" 하고 운을 뗀 그가 고개를 저었다.
"'양산형'들이 쏟아졌어요. 그러니까 우리 시절의 오타쿠들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팬덤에서 한발자국 더 들어온 다음에 조금조금씩 눈치를 살피면서 하나라도 더 어디서 배우고 그렇게 소양을 익혀야 했고, 또 어느 정도 익히더라도 감히 어디가서 아는 체 떠들고 다니기가 힘들었어요. 기라성 같은 올드타입들이 있는데 그 앞에서 주절주절 떠들어봐야 부끄럽기만 하니까. 하지만…"
'역설적으로 에반게리온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키워드를 던진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인터넷 세대들이죠. 잡지의 활자 정보로 정보를 익힌 세대와 이후의 세대가 뒤얽혔어요. 뉴타입과 아니메주를 통해서 조각난 정보들을 기워가며 모자이크를 완성해나가던 세대와 그 이후의, 넘쳐나는 정보에 노출되어 오히려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이후 세대'. 딱히 비판적인 뜻에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만"
나는 미미하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방을 둘러보다가 특촬히어로 가면라이더 피규어를 보여주었다.
"우리 세대만 해도 피규어의 개념은 조금 달랐어요. 저런 류의 피규어는 흔한 것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프라모델이 메인이었어요. 건담이나 뭐 그런. 사실 당장 저부터도, 프라모델은 조립하는 재미가 있으니까 사는 것이었지만 이런 피규어는 원형사들의 걸작들을 제외하고서는 어쨌든 대세까지는 아니었어요. 보통은 가챠 피규어 정도가 보통이었죠. 그런데 그게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바뀌었어요. 정말 앗! 하는 사이에 피규어가 대세가 되었죠. 이런 비닐 피규어 말고, 진짜 피규어가"
비디오 테이프들도 보여주었다.
"이건 제 보물입니다. 이젠 보지도 않지만. 뭐 우리 세대에서는 이미 VCD가 보급되기 시작했거든요. VCD의 시대는 아주 짧았습니다만. 초고속 인터넷이 그 자리를 대신했죠. 아 그에 살짝 앞서 LD도 있긴 했지만 그걸 가진 사람은 아주 드물었어요. 제 주변에도 겨우 두엇 정도"
그리고 그 비디오 테이프 사이에서 팔랑~하고 예쁜 여자 캐릭터 그림이 그려진 A4 용지 하나가 빠져나왔다.
"앗 부끄럽군요. 이건 언젠가 마카로 그린 그림입니다. 요즘에는 잘 안 쓰잖아요. 우리 때만 해도 마카가 주류였는데. 역시 눈 감았다 뜨는 순간 CG가 대세로 치고 올라왔죠. 당시의, 온라인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참 그 조악하기도 한 홈페이지에 가보면 손그림과 CG코너를 따로 운영하고 그랬던 시대에요. 고토-P나 오오야리 아시토…그러니까 Nocchi 같은 양반들이 활동하던 시기 말이죠. 사실 이쯤해서는 올드라는 표현까지 쓰기는 좀 그렇지 않나요? 그렇죠. 이거는 제 보물입니다. 이 정도는 되야 자랑할만하죠"
그가 꺼낸 것은 액자로 만들어진 오바리 마사미의 드라고나 오프닝 셀 원화 한 장이었다.
"야후 옥션에서 3만엔에 구입한 거에요. 엄청 싸게 구입한거죠"
그리고는 방 한 구석의 구형 PC를 가리키곤 말했다.
"우리 세대의 한계라는건 이런 부분에서 나온 건지도 모릅니다. 제 전 세대만 해도 결국 PC-98이나 더 나아가서 PC-88을 구입하는 근성이 있었어요. 하지만 우리 세대는 기본적으로 에뮬레이터였죠. 뭐 변명을 해보자면 훌륭한, 어쩌면 원본보다 더 성능적으로 매력적인 면이 있는 대체제가 있는데 굳이 원본을 구입하는 열성을 들인다는 것은 단순한 소유욕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어쨌든 그런 면에서 우리는 '패배한' 세대라고 할 수 있어요. 뭐 그래도 사는 녀석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물론 에뮬레이터나 그 관련 유틸을 제작하던 이들은 나름 존경받았어요. 아, 이거는 98은 아니고 그냥 IBM 애드립 머신이에요. YM3812칩이 들어간. FM 사운드 재현 때문에 어렵게 구입했습니다. 하긴, 그러고보면 우리 세대 타령하는 것도 좀 불공평하긴 한게, 그 무렵의 올드타입들이 지금 제 나이네요. 자금력이 있는 나이죠. 그리도 우리 세대도 다시 요즘에는 이런 레트로 기기들 모으는게 새삼 유행이기도 하죠"
또 무엇을 보여드릴까, 하면서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녹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사실 제일 아쉬운 것은 어떤 '구루'들의 영향력이 사라져버린 것이겠죠. 저만 해도 오타쿠의 한 지향점이랄까…. 우리 세대가 지향점으로 삼을만한 '오피니언 리더' 같은게 있었어요. 외모 같은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외모야 그때나 지금이나 뭐. 허허. 요즘에는 정말 스타일 좋은 오타쿠들도 있는 모양입니다만. 어쨌거나, 우리 세대의 멋진 오타쿠라는건, 정말로 모르는 것도 없고 다 이런 정보는 도대체 어디서 알아보는거지 싶은 뒷 이야기라던가 이런 것을 줄줄히 꿰는 그런 양반들이었어요. 지금이야 인터넷이라도 있지 그런 것도 없는 시대에 말이죠. 하여간 참 놀라웠어요. 뭐 어떤 경우는 니프티서브에서 얻어온 정보라는 걸 나중에 알고 조금 김이 빠지긴 했지만. 여튼 그런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랄까 추종이랄까, 하는 것이 있었단 말이에요. 흠"
그러던 그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뭐 어쨌든 이제와서는 다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에요. 이젠 그런 시대가 다 지나버렸으니까"
마지막으로 무언가 마무리 할 이야기나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묻자 그는 조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다, 너희들은 뭐 어떻게 해라 하는 차원의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단지… 그냥 우리는 그랬다, 라는 것을 말해두고 싶었어요. 그 뿐이에요. 그냥… 그때는 그게 멋진 것,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저와, 저같은 녀석들이 있었을 뿐이라고"
너무 소극적인 마무리 아니냐고 웃으며 묻자 그 역시 웃었다.
"실제로, 요즘의 '이쪽' 녀석들을 보면 대단한 녀석들이 많더라구요. 더이상 저같은 놈들이 이러쿵 저러쿵 할 수 있는 녀석들은 아니에요. 뭐 부분부분 조금은 참견을 하고 싶은 부분이 있긴 하지만, 중요한건 '서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 자체가 달라진 이상 더이상 저희 같은 타입의 오타쿠들은 그저 입 닫고 있는게 좋겠더라구요. 그리고 많이 부럽기도 해요. 만약 제가 사춘기 시절에 지금처럼만 취미 문화가 대우받았더라면 정말 많은 인재들이 빛을 발했을텐데. 흠, 아니 이 이야기는 없는 이야기로 해두겠습니다. 의미 없는 이야기니까요."
그렇게 인터뷰를 마무리 지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잊혀진, 그리고 '어른이 되기 위해서' 가장 즐거웠던 스스로의 과거 흔적을 지워버려야 했던 시대의 마지막 올드타입 오타쿠 세대의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뭐랄까, 향수라는 말로 단정짓기에는 아직은 그 안에 아쉬움이 있어요. 설렘이 있단 말이죠"
그의 컬렉션 역시 조금은 올드한 편이다.
"피규어도 모으긴 하지만, 제가 받아들이는 것은 에반게리온까지가 아무래도 한계일까 싶어요. 감성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어느 시점부터의 경향은 글쎄… 좀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더라구요. 저는 '모에'를 받아들이기가 조금 어렵더라구요. 아, 처음에는 좋았죠. 매력적인 캐릭터가 왜 싫겠냐만, 작품의 스토리나 설정 속에서 캐릭터가 빛을 받아야지, 아예 캐릭터를 위해 모든 것이 존재하는 시점에 이르러선 조금, 저는 싫더라구요.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제 취향이 그렇다는 거지"
거기까지 이야기 한 그는 조금 이야기를 돌렸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지엽적인 차원이에요. 그보다 온라인이나 지인 관계 차원에서 작품을 탐구하며 함께 토론하던 문화 자체가 조금은 방향성이 달라진 것 같아요. 아니,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제 기준이니 넘어가죠. 그보다 그 시절 동지들이 온데간데 없다는게 더 아쉽습니다. 저로선. 그 많던 오타쿠들이 다 어디 갔을까요? 요즘 오타쿠들이요? 음, 요즘 친구들은, 묘하게 행동력이 좋은 어린 친구들이 우리들과는 다소 다른 방향에서 왕성하게 오타쿠 활동을 하는 모습은 나름 긍정적인 방향이라고 생각은 합니다. 저와는 좀 다르다는 느낌이지만."
무언가 자신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을 조심스러워 한달까, 어려워한달까 하던 용호씨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저는, 지금이나 그때나 오타쿠로서의 자신을 밖에 크게 드러내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세대이기도 하고 말이죠"
잠시 망설이던 그는 말을 이었다.
"도태라고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국경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싶어요. 여기까지입니다. 저라는 나라의, 제가 허용할 수 있는 취향의 국경은"
올드타입
"사실 저만 해도 당시로선 한참 부족한 신참 레벨이었죠"
잠자리 안경을 치켜올린 그는 말했다.
"뭐 유명한 이야기로 게임, 만화, 컴퓨터 이 셋 중 하나에 관심 있는 사람은 최소 나머지 둘 중 하나에도 관심이 있다 라는 말이 있어요. 그때 그 시절 이야기지만요. 저는 물론 셋 다였죠. '교양' 공부도 열심히 했구요"
'교양'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그는 부연했다.
"전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반드시 알아두어야 하는 과목 말입니다. 건담은 그야말로 교양 필수 과목 같은 거였죠. 솔직히 말해서 우리 세대만 하더라도 이미 1979년 기동전사 건담을 실제 전편 시청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란바랄이나 마틸다 대위 같은 존재는 대화에 끼기 위해서라도 알아야 했어요. 정작 본편은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건만 스토리와 설정과 모빌슈츠의 주요한 특성 정도는 반드시 꿰어야 했어요. 하다못해 이데온에서 등장인물들이 줄줄히 죽어나간다, 학살의 토미노 같은 정도의 네타는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어야 했어요. 그건 기본이니까요. 영어 배우는데 알파벳 수준의"
그리고 바로 그 부분에서 그가 조금 흥분했다.
"우리 세대는 그런 식의, 전 세대에 대한 리스펙트가 있었어요. 비록 본 적도 없는 작품이건만 그 작품의 '이름값'을 인정했고, 그 작품의 팬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그 작품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했어야 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전 세대의 작품들을 많이 이해하고 그것을 온전히 흡수하면 할수록 서로의 사이에서 좀 더 '인정받는 존재'가 될 수 있었죠"
용호씨는 거기에서 잠깐 말을 멈추고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면 우리 세대의 탓일 수도 있어요. 전 세대의 사람들은, 그러니까 진짜 '올드타입'들은 보노라면 괴수들이 많았거든요. 능력도 특출나서 네임드 수준에 이르면 아예 현업에 종사하거나 어떤 식으로던 관련업종에서 일하거나, 혹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영향력을 끼치거나, 후대에 도움이 될만한 툴들을 직접 자작할 정도의 능력자들이거나. 리스펙트 받을 자격들이 있는 사람들이었죠. 우리 세대도 물론 그런 사람들이 많긴 했지만… 전 세대만큼의 카리스마는 없었죠. 인정합니다. 뭐 이 바닥의 상향평준화가 이루어진 덕분이기도 하구요"
다시 그는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 시절에는 작은 정보도 다 가치가 있었어요. 스텝롤의 스테프 이름과 그 한 명 한 명마다의 필모그라피나 해당 작품과의 에피소드 같은 것 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구요. 그게 바로 오타쿠였어요. 기동전사 Z건담 스텝롤에서 나가노 마모루를 딱 짚은 다음에 엘 가임과 FSS의 디자인 지향성을 Z건담에 연관해서 설명할 수 있으며 판저 프론트와 백사의 나가 이야기는 곁들여서 씹어줄 수 있어야 바로 오타쿠라는 말입니다. 최소한요. 정말 최소한."
'오타쿠'라는 단어가 나오자 그는 조금 흥분하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 세대에게 오타쿠라는건 사회적으로는 오명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는 자부심이기도 했어요. 내가 다른건 몰라도 이 분야에 대해서만큼은 어느 누구랑 이야기해도 정보량에서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실제로 현업에서 종사하는 이들보다도 순수히 장르적 정보에 대해서만큼은 압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자부심 레벨에서는 말입니다. 음, 영화 평론가들 보면 1950년대 영화의 스태프까지 줄줄히 읊잖아요. 비슷합니다"
이후 "그러나" 하고 운을 뗀 그가 고개를 저었다.
"'양산형'들이 쏟아졌어요. 그러니까 우리 시절의 오타쿠들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팬덤에서 한발자국 더 들어온 다음에 조금조금씩 눈치를 살피면서 하나라도 더 어디서 배우고 그렇게 소양을 익혀야 했고, 또 어느 정도 익히더라도 감히 어디가서 아는 체 떠들고 다니기가 힘들었어요. 기라성 같은 올드타입들이 있는데 그 앞에서 주절주절 떠들어봐야 부끄럽기만 하니까. 하지만…"
'역설적으로 에반게리온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키워드를 던진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인터넷 세대들이죠. 잡지의 활자 정보로 정보를 익힌 세대와 이후의 세대가 뒤얽혔어요. 뉴타입과 아니메주를 통해서 조각난 정보들을 기워가며 모자이크를 완성해나가던 세대와 그 이후의, 넘쳐나는 정보에 노출되어 오히려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이후 세대'. 딱히 비판적인 뜻에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만"
나는 미미하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방을 둘러보다가 특촬히어로 가면라이더 피규어를 보여주었다.
"우리 세대만 해도 피규어의 개념은 조금 달랐어요. 저런 류의 피규어는 흔한 것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프라모델이 메인이었어요. 건담이나 뭐 그런. 사실 당장 저부터도, 프라모델은 조립하는 재미가 있으니까 사는 것이었지만 이런 피규어는 원형사들의 걸작들을 제외하고서는 어쨌든 대세까지는 아니었어요. 보통은 가챠 피규어 정도가 보통이었죠. 그런데 그게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바뀌었어요. 정말 앗! 하는 사이에 피규어가 대세가 되었죠. 이런 비닐 피규어 말고, 진짜 피규어가"
비디오 테이프들도 보여주었다.
"이건 제 보물입니다. 이젠 보지도 않지만. 뭐 우리 세대에서는 이미 VCD가 보급되기 시작했거든요. VCD의 시대는 아주 짧았습니다만. 초고속 인터넷이 그 자리를 대신했죠. 아 그에 살짝 앞서 LD도 있긴 했지만 그걸 가진 사람은 아주 드물었어요. 제 주변에도 겨우 두엇 정도"
그리고 그 비디오 테이프 사이에서 팔랑~하고 예쁜 여자 캐릭터 그림이 그려진 A4 용지 하나가 빠져나왔다.
"앗 부끄럽군요. 이건 언젠가 마카로 그린 그림입니다. 요즘에는 잘 안 쓰잖아요. 우리 때만 해도 마카가 주류였는데. 역시 눈 감았다 뜨는 순간 CG가 대세로 치고 올라왔죠. 당시의, 온라인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참 그 조악하기도 한 홈페이지에 가보면 손그림과 CG코너를 따로 운영하고 그랬던 시대에요. 고토-P나 오오야리 아시토…그러니까 Nocchi 같은 양반들이 활동하던 시기 말이죠. 사실 이쯤해서는 올드라는 표현까지 쓰기는 좀 그렇지 않나요? 그렇죠. 이거는 제 보물입니다. 이 정도는 되야 자랑할만하죠"
그가 꺼낸 것은 액자로 만들어진 오바리 마사미의 드라고나 오프닝 셀 원화 한 장이었다.
"야후 옥션에서 3만엔에 구입한 거에요. 엄청 싸게 구입한거죠"
그리고는 방 한 구석의 구형 PC를 가리키곤 말했다.
"우리 세대의 한계라는건 이런 부분에서 나온 건지도 모릅니다. 제 전 세대만 해도 결국 PC-98이나 더 나아가서 PC-88을 구입하는 근성이 있었어요. 하지만 우리 세대는 기본적으로 에뮬레이터였죠. 뭐 변명을 해보자면 훌륭한, 어쩌면 원본보다 더 성능적으로 매력적인 면이 있는 대체제가 있는데 굳이 원본을 구입하는 열성을 들인다는 것은 단순한 소유욕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어쨌든 그런 면에서 우리는 '패배한' 세대라고 할 수 있어요. 뭐 그래도 사는 녀석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물론 에뮬레이터나 그 관련 유틸을 제작하던 이들은 나름 존경받았어요. 아, 이거는 98은 아니고 그냥 IBM 애드립 머신이에요. YM3812칩이 들어간. FM 사운드 재현 때문에 어렵게 구입했습니다. 하긴, 그러고보면 우리 세대 타령하는 것도 좀 불공평하긴 한게, 그 무렵의 올드타입들이 지금 제 나이네요. 자금력이 있는 나이죠. 그리도 우리 세대도 다시 요즘에는 이런 레트로 기기들 모으는게 새삼 유행이기도 하죠"
또 무엇을 보여드릴까, 하면서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녹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사실 제일 아쉬운 것은 어떤 '구루'들의 영향력이 사라져버린 것이겠죠. 저만 해도 오타쿠의 한 지향점이랄까…. 우리 세대가 지향점으로 삼을만한 '오피니언 리더' 같은게 있었어요. 외모 같은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외모야 그때나 지금이나 뭐. 허허. 요즘에는 정말 스타일 좋은 오타쿠들도 있는 모양입니다만. 어쨌거나, 우리 세대의 멋진 오타쿠라는건, 정말로 모르는 것도 없고 다 이런 정보는 도대체 어디서 알아보는거지 싶은 뒷 이야기라던가 이런 것을 줄줄히 꿰는 그런 양반들이었어요. 지금이야 인터넷이라도 있지 그런 것도 없는 시대에 말이죠. 하여간 참 놀라웠어요. 뭐 어떤 경우는 니프티서브에서 얻어온 정보라는 걸 나중에 알고 조금 김이 빠지긴 했지만. 여튼 그런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랄까 추종이랄까, 하는 것이 있었단 말이에요. 흠"
그러던 그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뭐 어쨌든 이제와서는 다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에요. 이젠 그런 시대가 다 지나버렸으니까"
마지막으로 무언가 마무리 할 이야기나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묻자 그는 조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다, 너희들은 뭐 어떻게 해라 하는 차원의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단지… 그냥 우리는 그랬다, 라는 것을 말해두고 싶었어요. 그 뿐이에요. 그냥… 그때는 그게 멋진 것,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저와, 저같은 녀석들이 있었을 뿐이라고"
너무 소극적인 마무리 아니냐고 웃으며 묻자 그 역시 웃었다.
"실제로, 요즘의 '이쪽' 녀석들을 보면 대단한 녀석들이 많더라구요. 더이상 저같은 놈들이 이러쿵 저러쿵 할 수 있는 녀석들은 아니에요. 뭐 부분부분 조금은 참견을 하고 싶은 부분이 있긴 하지만, 중요한건 '서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 자체가 달라진 이상 더이상 저희 같은 타입의 오타쿠들은 그저 입 닫고 있는게 좋겠더라구요. 그리고 많이 부럽기도 해요. 만약 제가 사춘기 시절에 지금처럼만 취미 문화가 대우받았더라면 정말 많은 인재들이 빛을 발했을텐데. 흠, 아니 이 이야기는 없는 이야기로 해두겠습니다. 의미 없는 이야기니까요."
그렇게 인터뷰를 마무리 지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잊혀진, 그리고 '어른이 되기 위해서' 가장 즐거웠던 스스로의 과거 흔적을 지워버려야 했던 시대의 마지막 올드타입 오타쿠 세대의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