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X년. 솔직히 아무도 생각 못했을거다. 이렇게나 빨리 우리 일상에 로봇이 침투하게 될 줄은. 게다가 이토록 치명적일 줄은.
출근증을 찍고 보니 8시 59분. 간신히 지각은 면했지만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은 그 헐떡임을 멈출 줄을 모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까지 헐떡이고 있을 수는 없으니 겨우 참고 7층 사무실에 도착한다.
"안녕, 하십니까. 허억"
모두들 가벼운 목례로 내 인사를 받지만 유일하게 한 명만은 받지 않는다.
"이보세요, 김.중.환.씨"
"네, 후우, 네"
소름끼치도록 건조한 그 목소리의 정체는 바로 우리 사무실의 스타, 인간형 인공지능 관리형 사무 로봇 KMT-21. 이른바 부장 로봇. 내츄럴 보이스 모듈이 내장되었음에도 여전히 고유명사에 관해서는 한자 한자 또박또박 읽어야 하는 구식 발성 시스템이다. 국산이 원래 다 그렇지만, 항상 다 잘 만들어놓고 결정적인 한 두 부분이 엉망이다. 이 로봇도 마찬가지. 어쨌거나 덕분에 이렇게 눈치가 좀 보일 때면 목소리를 또박또박 읽는 효과가 더 강조되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9시까지 출근이라고 딱 9시에 오는게 맞아요? 사회 생활 안 해봤어요? 미리미리 30분 전에 출근해서 업무 확인하고 주변 정리하고 일 시작할 준비해야 되는거 아니에요?"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제껏 10년 여의 사회생활 경력이 있다. 너는 생산된지 5년도 채 안 되지 않았던가.
게다가 적어도 한국식 사회생활을 기준컨데, 과장급 직원이 정시출근했는데 이렇게 모두의 앞에서 대놓고 면박주는 것은 정말로 경우 없는 짓이다. 즉 사회생활을 해봤냐 안 해봤냐 따지기에는 너야말로 사회생활을 좀 더 배워야하는 것이다.
…라지만 그저 힘없는 나는 "주의하겠습니다" 라며 얼굴을 억지로 활짝 펴며(어이없지만 저 놈에게는 안면인식 센서가 있어서 인상을 구기면 그것도 파악한다) 자리로 돌아올 뿐이다.
물론 힘내세요, 하고 메신저로 위로해주는 동료나 부하직원 따위는 없다. 사내 네트워크와 연결된 저 놈이 우리의 대화내역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니까. 개인 프라이버시 침해이자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이지만 어디 우리나라가 그런게 씨알이나 먹히는 나라던가.
점심시간, 우리가 녀석에게서 유일하게 해방되는 시간이다. 구내식당이 있음에도 내가 구내식당을 이용하지 않는 것은 사내 CCTV를 통해 우리의 움직임이나 여가 시간마저 녀석이 감시하기 때문이다.
"씨팔"
나도 모르게 입에서 쌍욕이 수시로 튀어나온다. 엊그제는 집에서도 그랬다. 마누라가 깜짝 놀라 왜 그러냐고 그래서 다 이야기 했더니 눈에 안 나게 잘 하란다. "뭔 사람도 아니고 로보트한테 뭘 어떻게 더 잘해, 같이 술을 마셔 뭘 해" 하고 홧김에 쏘아붙이자 "기름칠이라도 해 줘"란다. 기가 차서 웃었지만 우리 마누라 개그 솜씨에 한번 더 실실 쪼개본다.
그래도 내 맘 아는건 마누라 뿐이라 로보트한테 눈치 보면서 밥 먹지 말고, 나가서 밥 먹으라고 어깨 두들겨 주는 맛에 산다. 내가 "이러다가는 진짜 러다이트 운동이라도 할 판이야" 하고 중얼거리자 "그래, 다이어트도 하고 운동도 좀 하고 그래"하고 받는 통에 답답하기는 해도, 어쨌거나 내 기 살려주는건 마누라 뿐인 것이다. 조금은 후회가 된다. 방통대 가겠다는 것을 말린 것이.
"에휴 이게 다 뭐냐"
화장실에 들려 바지를 추켜세우며 나와서는 테이블에 앉는다. 언제나의 백반집. 처녀 총각 미혼직원들은 그래도 회사 근처 맛집을 돌지만 우리 같은 유부남들은 그저 백반집이다. 천원이라도 아껴야 먹고 살 것 아닌가.
"오늘은 계란후라이 안 줘요?"
"아침에 계란이 안 왔어. 대신에 두부부침 있잖아"
"에이"
백반집 사장님이 미안해하며 웃는다. 강 대리가 한 수저 뜨다 말고 말한다.
"아, 정말 부장님 때문에 미치겠어요"
"왜? 또 보고서 때문에 뭐라고 해?"
밥 먹을 때 회사 이야기야 금기지만, 적어도 그 깡통 새끼 욕하는 것만은 예외다.
"아니 진짜 가끔은 화가 나는게, 아 물론 따지자면 저도 문제지만 세상에 맞춤법을 띄어쓰기까지 다 맞추는 사람이 어딨어요. 맨날 보고서 올리면 정작 내용보다 그런 병신 같은, 아이고 죄송합니다. 여튼 그런 세세한 쓸데없는 거 하나까지 지적당하니 미쳐버리겠어요"
유학파 출신의 강 대리. 탁월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해외업계 동향 보고서를 제작해서 모두에게 회람하곤 했는데, 원래는 그건 딱히 주어진 업무도 아니다. 딱히 업무에 필요한 일도 아니고, 그냥 의례 그 연차 또래들이 그렇듯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그게 우리 팀 내에서 반응이 좋았을 뿐. 그런데 우리 부서에 '부장 로봇'이 도입된 이래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마음 내킬 때 하던 일'이 '무조건 해야하는 일'이 되어버렸고 깐깐한 깡통 대가리답게 숲보다 나무, 아니 나무도 아니고 발 밑의 잡초 하나부터 따지고 드는 통에 스트레스가 폭발하게 된 것이다.
뭐 하기사 나만 해도 요즘 퇴근 시간이 한 시간 이상 늦어지게 된 것은 서식작업 검토 때문이지만, 그래도 나야 숫자만 입력하면 그만이지만 서술의 이슈가 있는 다른 직원들은 강제 국어공부에 시달리고 있다.
"그보다 이번 주말에 등산 어떻게 해요?"
오 대리의 말에 나도 모르게 또 "아 씹" 하는 육두문자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처음 미국에 관리자 로봇이 등장했을 때 의외로 제일 큰 문제가 된 점은 업무처리 능력이 아니라 사람과의 어울림 문제였다. 인간 대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인간 대 기계가 되다보니 직원들이 업무상 고충이나 뚜렷한 답이 없는 사람 사이의 미묘한 문제에 대한 애로사항을 털어놓을 때 로봇이 아예 '그 어디가 문제인건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았던 것이다.
결국 그 이후 모델들은 전 세대의 모델들이 수집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보다 진화된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다움'을 터득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해야하며, 인간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 고충을 느끼고 이럴 때 어떤 감정을 느끼며 어떤 반응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딥러닝.
뒤늦게 우리나라에서도 범정부 차원에서 기업에다가 근 십수조원을 투자해가며 만든 이 국산형 관리자 로봇 역시 비슷한 시스템이 적용되었다. 시범 사업 단계에서 국내 기업 320여 업체에 파견되어 대기업-중견기업-중소기업에 걸쳐 한국인들의 기업문화에 대한 정보를 획득한 것이다.
다만 문제는 너무 많이, 그리고 너무 리얼하게 획득한 것이 문제였다.
우리가 '로봇 상사'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는가에 대한 보완책으로서 스킨십, 릴레이션십에 대한 보완책이 최우선으로 이루어졌다. 이 관리자 로봇은 회식도 한다. 알콜을 입 속에 털어넣고, 그것으로 비상 배터리 충전도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등산도 제안할 줄 안다. 주말 등산 말이다.
"작년에 어땠는 줄 알아?"
'인간과 닮은 로봇'을 만들기 위해, 악습과 폐습까지 딥러닝 시켰다면 대한민국 부장들의 평균 건강상태와 운동능력까지 딥러닝 시켰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운동능력만 태릉 선수촌이냔 말이다.
"작년 말에 나간 한 차장 있잖아. 그 사람이 등산 때문에 관둔거야"
어딜가나 운동신경 둔한 사람 하나씩은 꼭 있다. 그리고 자기가 선천적으로 못하는 일에 취미를 두는 사람은 없다. 한 차장은 지독히도 운동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우리 회사 건물이 한전에 전력소모 집중 관리 건물로 등록되는 바람에 위에서 그 타박을 해도 1층에서 2층 갈 때도 엘리베이터 탄 사람이다. 이해는 한다. 120kg 몸무게 유지하는게 쉬운 일은 아닐테니 말이다.
그런 사람이 등산을, 그것도 지리산 등산을 갔으니 어디 보통이라면 절반이나 올라갔겠는가.
하지만 그런 사람을 기어코 어르고 조르고 꾸짖어가며, 뭐 솔직히 그때 처음으로 '아 이 로봇이 진짜 관리형 로봇이긴 하구나'라는 것을 느끼기는 했다, 정말로 정상까지 데리고 올라간 것이다. 물론 그 이후 4일 휴가를 쓰고 한동안 병원 다니다가 관두었지만 말이다.
"다들 각오해. 엄홍길 대장이랑 같이 산타는 기분이라고 생각하면 돼. 지치지도 않고 계속 올라가니까. 게다가 누구 하나 찍히면 집중관리 당한다고. 군대 조교도 그렇게는 안 해"
"아, 진짜 죽겠네요"
"아, 겁난다 정말"
다들 밥 맛이 다 달아난 표정이다. 하지만 등산은 당장의 문제도 아니다. 사업계획안이 버티고 있잖는가.
시계를 본다. 어느새 밤 11시 23분. 마누라한테 또 카톡 날아온다. 언제 끝나냐고. 12시 좀 넘으면 될 거 같다고 답장 보내고는 다시 모니터로 눈길을 돌린다.
사업계획은 니미럴.
이젠 신물이 다 난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하지만 알고 있다. 해야한다. 찌뿌둥한 몸에 카페인이라도 집어넣고자 일어서자 갑자기 부장 로봇이 부른다. 뭐지. 그저 마냥 교무실로 불리는 불량학생 마냥 겁이 난다.
"김.중.환 씨, 잠시 회의실로"
뜻밖이었다.
"이게 뭡니까?"
부장 로봇이 내민 것은 인사 평가서. 그것도 바로 눈 앞의 이 부장 로봇에 대한 평가서다. 순간 무슨 의미인지 꽤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지만 부장 로봇의 말은 심플했다.
"눈 앞의 그대로입니다. 그동안, 지난 3년 간 저를 보면서 느꼈던 점을 평가 항목에 그대로 기입하시면 됩니다"
나는 생각보다 두툼한, 약 40페이지에 달하는 평가서를 몇 장 넘겨보다가 다시 물었다.
"이거 꼭 지금 해야 되는 겁니까?"
여러 의미를 담은 질문이다. 집에 가서 주말 동안 천천히 해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바로 해야되는 것인지, 사업계획으로 바쁜 와중에 왜 지금 이것을 해야되는지에 대한 약간의 짜증 섞인 질문이랄까.
그리고 그보다 더 묻고 싶은 걸 물었다.
"그런데 이거 왜 하는건가요"
물론 보통이라면 그저 까라면 까야지 정신으로 받아들고 갔겠지만 이미 사업계획안 때문에 스트레스도 상당히 받은 판에 이걸 하라고 내미는 것이 잘 이해가 안 갔다. 무슨 일종의, 뭐 인성 테스트 같은 것인가 같은 의문도 들었고, 뒤가 구린 뭐 그런 건 또 아닌가 싶기도 하고.
로봇의 대답은 이번에도 간단했다.
"다음 달에 저는 여러분과 헤어집니다"
어… 이거 사무실에 알리면 다들 만세 부를 것 같은데. 로봇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전에, 가장 평가에 적합한 직원 하나를 골라 이렇게 평가를 받게 됩니다. 평가서는 지금 당장 작성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한테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집에 가져가신 후, 작성해서, 다음 주까지 HR에 제출하시면 됩니다"
가장 평가에 적합한 직원이라는 말이 흥미로웠다.
"왜 제가 가장 평가에 적합한 직원인가요"
그러나 로봇의 대답은 역시나 간명했다.
"현재 팀원 중 저와 3년 이상 함께 일한 시니어 팀원은 김.중,환 씨가 유일하니까요"
"그렇군요"
뭘 기대한건가 나는.
원래대로라면 오늘도 출근을 했어야 하지만, 와이프도 몸이 안 좋고 어제의 그 평가지도 해야지 싶어서 오늘은 집에 있기로 했다.
"어디보자"
모처럼 마누라는 늦잠 자게 냅뒀고, 딸도 아직 꿈나라에서 헤맬 시간, 나는 거실에서 평가지 문항에 체크를 하고 있었다.
"흠"
귀하와 함께 일한 관리형 로봇의 이름은 무엇인가, 부터 해당 관리형 로봇은 업무 공간에서 자신을 확실히 포지셔닝하고 있었는가, 라는 교차 검증용 질문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어설픈 수준의 답변은 의미가 없다.
"좋아"
토스트를 굽고, 커피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약 1시간에 걸쳐, 그리고 인간 상사를 대상으로 한 평가였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그래서 조금은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까지 느꼈을 정도로 아주 신랄한 평가점수를 내렸다.
"어머, 여보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어, 일 좀 하느라고"
그리고 누가 읽어보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주관식으로 된 총평란에는 짧게, 이렇게 남겼다.
'아직 기계는 인간 따라오려면 멀었다'
그로부터 8년. '부장 로봇'은 여전히 각 기업을 돌며 테스트 중이다. 그러나 대기업을 포함하여 300개가 넘는 기업들이 참여했던 첫 테스트 때와는 달리, 후속 모델은 20개 남짓한 중소기업만 그 시험 운영에 참가하는데 그쳤다. 시험 운영을 했던 거의 모든 기업들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으니까.
"김중환 부장님, 건강검진 차 왔답니다. 15분 뒤에 내려가시면 됩니다"
"아 벌써 왔대?"
내가 상대해야 했던 KMT-21 모델보다 훨씬 진보되었으며, '조직 문화에 관한 블라인드 테스트'인 뢰브너 테스트도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지만 결국 '신형 부장 로봇 KM-23'은 분명하게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그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말이다.
"어디보자, 어 근데 이제 곧 회의시간이잖아?"
그러나 부장 로봇이 망했다고 기업형 로봇 시장이 사그러 들었냐고? 아니.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러면 회의는 1시간 뒤로 미루겠습니다"
"나 하나만 빠지면 되는데 그러지 말고, 그냥 지금 너네들끼리 회의 진행하고 회의록이랑 보고서만 뽑아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밑의 '부하 로봇' 7명은 0.0004초 만에 모든 회의를 마치고 그 내용을 프린터기로 출력해왔다. 60페이지 분량의 두툼한 의사진행록을 말이다.
"오케이. 그럼 난 내려간다"
"네, 다녀오십시오"
인간형 인공지능 실무형 사무 로봇 KMS-17.18,19. 현재 내 부하 직원은 모두 로봇들이다. 17 모델이 넷, 18모델이 둘, 19모델이 하나. 가격도, 업무처리 능력도 숫자 큰 놈들이 더 높다.
KMT-21의 시험 테스트가 종료된 직후, 개발처 측은 곧바로 실무자 역할의 '부하 로봇'들을 내놓았다. 부장 로봇으로 이미 풍부하게 획득한 사무환경의 빅데이터가 있는 만큼, 부하 로봇의 개발은 일사천리로 이루어 진 것이다.
게다가 '모셔야 할 상사'가 아니라 '부려야 할 부하'로서의 로봇은 그 어느 회사에서나 인기만점이었다. 아무리 혹독하게 굴리고 엉만진창으로 대우해도 일말의 미동도 없이 척척 업무만 잘 처리해오는 부하 로봇은 만족도가 매우 높았다.
"후우"
하지만 그때 나는, KMS 시리즈가 또 우리 회사에서 테스트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사무실의 그 열광적인 분위기에 꽤 회의를 느꼈던 사람이다. 과거 부장 로봇에 대해 그토록이나 씹어댄 사람들이, 정작 부하 로봇이 도입되었을 때는 다들 무슨 갑질에 환장한 사람들마냥 로봇을 갈구고 부려먹기 바빴으니까. 그 모습에서 더러운 이중성을 느꼈다고나 할까.
"혈압이 조금 있으시네요"
"운동하고 있습니다"
간호로봇에게 MRCT 전신 스캔을 받았다. 특별한 이상소견은 없고, 혈압이 살짝 높은 정도란다.
다행히 우리 세대까지는 어떻게든 밥줄을 지켜냈다. 하지만 우리 아래, 그리고 우리 동기들은 죄 로봇에 밀려나갔다. 제조업 위주의 노동자 시위 덕분에 정작 현장에서는 로봇의 채용 비율이 35%에 불과하지만 사무직은 그런 제한이 없으니 죄 로봇으로 바뀐 것이다.
"오늘은 무슨 밥을 먹을까"
그래도 부장 로봇은 같이 밥을 먹는 기능이라도 있었는데, 이 부하 로봇들은 그런 것도 없다. 그래서 언제나 난 혼자 밥을 먹는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많은지, 회사 주변 식당가는 거의 1인 테이블 위주의 식당들로 바뀐지 오래다.
신형 부장로봇의 테스트가 끝나면 아마 내 자리도 곧 로봇에게 빼앗길 것이다. 요즘 또래 친구들을 동창회에서 만나면 맨날 하는 이야기가 그거다. 회사 이제 짤리면 뭐 해먹고 사냐고. 나는 작년 말부터 로봇 정비 라이센스 학원을 다니는 중이다.
뭐 상황이 이렇다고 해서 그 옛날 러다이트 운동하던 노동자들마냥 로봇들을 욕하고 부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로봇이 아니었더라도 내 자리를 오래 보전하기는 힘들었을테니까.
언제가는 뺏겼어야 할 자리, 그저 다른 사람 대신 로봇에게 뺏기는 것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어쩌면 그나마 나와 자리를 투고 싸웠어야 할 상대들이 로봇 부하들로 바뀌었기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을 수도, 이렇게 몇 년이라도 버티고 있을 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아직 11시 밖에 안됐는데 벌써 출출하군"
나는 사무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날씨가 새삼 차다고 느꼈다.
한국형 기업 로봇
출근증을 찍고 보니 8시 59분. 간신히 지각은 면했지만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은 그 헐떡임을 멈출 줄을 모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까지 헐떡이고 있을 수는 없으니 겨우 참고 7층 사무실에 도착한다.
"안녕, 하십니까. 허억"
모두들 가벼운 목례로 내 인사를 받지만 유일하게 한 명만은 받지 않는다.
"이보세요, 김.중.환.씨"
"네, 후우, 네"
소름끼치도록 건조한 그 목소리의 정체는 바로 우리 사무실의 스타, 인간형 인공지능 관리형 사무 로봇 KMT-21. 이른바 부장 로봇. 내츄럴 보이스 모듈이 내장되었음에도 여전히 고유명사에 관해서는 한자 한자 또박또박 읽어야 하는 구식 발성 시스템이다. 국산이 원래 다 그렇지만, 항상 다 잘 만들어놓고 결정적인 한 두 부분이 엉망이다. 이 로봇도 마찬가지. 어쨌거나 덕분에 이렇게 눈치가 좀 보일 때면 목소리를 또박또박 읽는 효과가 더 강조되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9시까지 출근이라고 딱 9시에 오는게 맞아요? 사회 생활 안 해봤어요? 미리미리 30분 전에 출근해서 업무 확인하고 주변 정리하고 일 시작할 준비해야 되는거 아니에요?"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제껏 10년 여의 사회생활 경력이 있다. 너는 생산된지 5년도 채 안 되지 않았던가.
게다가 적어도 한국식 사회생활을 기준컨데, 과장급 직원이 정시출근했는데 이렇게 모두의 앞에서 대놓고 면박주는 것은 정말로 경우 없는 짓이다. 즉 사회생활을 해봤냐 안 해봤냐 따지기에는 너야말로 사회생활을 좀 더 배워야하는 것이다.
…라지만 그저 힘없는 나는 "주의하겠습니다" 라며 얼굴을 억지로 활짝 펴며(어이없지만 저 놈에게는 안면인식 센서가 있어서 인상을 구기면 그것도 파악한다) 자리로 돌아올 뿐이다.
물론 힘내세요, 하고 메신저로 위로해주는 동료나 부하직원 따위는 없다. 사내 네트워크와 연결된 저 놈이 우리의 대화내역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니까. 개인 프라이버시 침해이자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이지만 어디 우리나라가 그런게 씨알이나 먹히는 나라던가.
점심시간, 우리가 녀석에게서 유일하게 해방되는 시간이다. 구내식당이 있음에도 내가 구내식당을 이용하지 않는 것은 사내 CCTV를 통해 우리의 움직임이나 여가 시간마저 녀석이 감시하기 때문이다.
"씨팔"
나도 모르게 입에서 쌍욕이 수시로 튀어나온다. 엊그제는 집에서도 그랬다. 마누라가 깜짝 놀라 왜 그러냐고 그래서 다 이야기 했더니 눈에 안 나게 잘 하란다. "뭔 사람도 아니고 로보트한테 뭘 어떻게 더 잘해, 같이 술을 마셔 뭘 해" 하고 홧김에 쏘아붙이자 "기름칠이라도 해 줘"란다. 기가 차서 웃었지만 우리 마누라 개그 솜씨에 한번 더 실실 쪼개본다.
그래도 내 맘 아는건 마누라 뿐이라 로보트한테 눈치 보면서 밥 먹지 말고, 나가서 밥 먹으라고 어깨 두들겨 주는 맛에 산다. 내가 "이러다가는 진짜 러다이트 운동이라도 할 판이야" 하고 중얼거리자 "그래, 다이어트도 하고 운동도 좀 하고 그래"하고 받는 통에 답답하기는 해도, 어쨌거나 내 기 살려주는건 마누라 뿐인 것이다. 조금은 후회가 된다. 방통대 가겠다는 것을 말린 것이.
"에휴 이게 다 뭐냐"
화장실에 들려 바지를 추켜세우며 나와서는 테이블에 앉는다. 언제나의 백반집. 처녀 총각 미혼직원들은 그래도 회사 근처 맛집을 돌지만 우리 같은 유부남들은 그저 백반집이다. 천원이라도 아껴야 먹고 살 것 아닌가.
"오늘은 계란후라이 안 줘요?"
"아침에 계란이 안 왔어. 대신에 두부부침 있잖아"
"에이"
백반집 사장님이 미안해하며 웃는다. 강 대리가 한 수저 뜨다 말고 말한다.
"아, 정말 부장님 때문에 미치겠어요"
"왜? 또 보고서 때문에 뭐라고 해?"
밥 먹을 때 회사 이야기야 금기지만, 적어도 그 깡통 새끼 욕하는 것만은 예외다.
"아니 진짜 가끔은 화가 나는게, 아 물론 따지자면 저도 문제지만 세상에 맞춤법을 띄어쓰기까지 다 맞추는 사람이 어딨어요. 맨날 보고서 올리면 정작 내용보다 그런 병신 같은, 아이고 죄송합니다. 여튼 그런 세세한 쓸데없는 거 하나까지 지적당하니 미쳐버리겠어요"
유학파 출신의 강 대리. 탁월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해외업계 동향 보고서를 제작해서 모두에게 회람하곤 했는데, 원래는 그건 딱히 주어진 업무도 아니다. 딱히 업무에 필요한 일도 아니고, 그냥 의례 그 연차 또래들이 그렇듯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그게 우리 팀 내에서 반응이 좋았을 뿐. 그런데 우리 부서에 '부장 로봇'이 도입된 이래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마음 내킬 때 하던 일'이 '무조건 해야하는 일'이 되어버렸고 깐깐한 깡통 대가리답게 숲보다 나무, 아니 나무도 아니고 발 밑의 잡초 하나부터 따지고 드는 통에 스트레스가 폭발하게 된 것이다.
뭐 하기사 나만 해도 요즘 퇴근 시간이 한 시간 이상 늦어지게 된 것은 서식작업 검토 때문이지만, 그래도 나야 숫자만 입력하면 그만이지만 서술의 이슈가 있는 다른 직원들은 강제 국어공부에 시달리고 있다.
"그보다 이번 주말에 등산 어떻게 해요?"
오 대리의 말에 나도 모르게 또 "아 씹" 하는 육두문자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처음 미국에 관리자 로봇이 등장했을 때 의외로 제일 큰 문제가 된 점은 업무처리 능력이 아니라 사람과의 어울림 문제였다. 인간 대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인간 대 기계가 되다보니 직원들이 업무상 고충이나 뚜렷한 답이 없는 사람 사이의 미묘한 문제에 대한 애로사항을 털어놓을 때 로봇이 아예 '그 어디가 문제인건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았던 것이다.
결국 그 이후 모델들은 전 세대의 모델들이 수집한 기록들을 바탕으로 보다 진화된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다움'을 터득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해야하며, 인간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 고충을 느끼고 이럴 때 어떤 감정을 느끼며 어떤 반응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딥러닝.
뒤늦게 우리나라에서도 범정부 차원에서 기업에다가 근 십수조원을 투자해가며 만든 이 국산형 관리자 로봇 역시 비슷한 시스템이 적용되었다. 시범 사업 단계에서 국내 기업 320여 업체에 파견되어 대기업-중견기업-중소기업에 걸쳐 한국인들의 기업문화에 대한 정보를 획득한 것이다.
다만 문제는 너무 많이, 그리고 너무 리얼하게 획득한 것이 문제였다.
우리가 '로봇 상사'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는가에 대한 보완책으로서 스킨십, 릴레이션십에 대한 보완책이 최우선으로 이루어졌다. 이 관리자 로봇은 회식도 한다. 알콜을 입 속에 털어넣고, 그것으로 비상 배터리 충전도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등산도 제안할 줄 안다. 주말 등산 말이다.
"작년에 어땠는 줄 알아?"
'인간과 닮은 로봇'을 만들기 위해, 악습과 폐습까지 딥러닝 시켰다면 대한민국 부장들의 평균 건강상태와 운동능력까지 딥러닝 시켰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운동능력만 태릉 선수촌이냔 말이다.
"작년 말에 나간 한 차장 있잖아. 그 사람이 등산 때문에 관둔거야"
어딜가나 운동신경 둔한 사람 하나씩은 꼭 있다. 그리고 자기가 선천적으로 못하는 일에 취미를 두는 사람은 없다. 한 차장은 지독히도 운동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우리 회사 건물이 한전에 전력소모 집중 관리 건물로 등록되는 바람에 위에서 그 타박을 해도 1층에서 2층 갈 때도 엘리베이터 탄 사람이다. 이해는 한다. 120kg 몸무게 유지하는게 쉬운 일은 아닐테니 말이다.
그런 사람이 등산을, 그것도 지리산 등산을 갔으니 어디 보통이라면 절반이나 올라갔겠는가.
하지만 그런 사람을 기어코 어르고 조르고 꾸짖어가며, 뭐 솔직히 그때 처음으로 '아 이 로봇이 진짜 관리형 로봇이긴 하구나'라는 것을 느끼기는 했다, 정말로 정상까지 데리고 올라간 것이다. 물론 그 이후 4일 휴가를 쓰고 한동안 병원 다니다가 관두었지만 말이다.
"다들 각오해. 엄홍길 대장이랑 같이 산타는 기분이라고 생각하면 돼. 지치지도 않고 계속 올라가니까. 게다가 누구 하나 찍히면 집중관리 당한다고. 군대 조교도 그렇게는 안 해"
"아, 진짜 죽겠네요"
"아, 겁난다 정말"
다들 밥 맛이 다 달아난 표정이다. 하지만 등산은 당장의 문제도 아니다. 사업계획안이 버티고 있잖는가.
시계를 본다. 어느새 밤 11시 23분. 마누라한테 또 카톡 날아온다. 언제 끝나냐고. 12시 좀 넘으면 될 거 같다고 답장 보내고는 다시 모니터로 눈길을 돌린다.
사업계획은 니미럴.
이젠 신물이 다 난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하지만 알고 있다. 해야한다. 찌뿌둥한 몸에 카페인이라도 집어넣고자 일어서자 갑자기 부장 로봇이 부른다. 뭐지. 그저 마냥 교무실로 불리는 불량학생 마냥 겁이 난다.
"김.중.환 씨, 잠시 회의실로"
뜻밖이었다.
"이게 뭡니까?"
부장 로봇이 내민 것은 인사 평가서. 그것도 바로 눈 앞의 이 부장 로봇에 대한 평가서다. 순간 무슨 의미인지 꽤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지만 부장 로봇의 말은 심플했다.
"눈 앞의 그대로입니다. 그동안, 지난 3년 간 저를 보면서 느꼈던 점을 평가 항목에 그대로 기입하시면 됩니다"
나는 생각보다 두툼한, 약 40페이지에 달하는 평가서를 몇 장 넘겨보다가 다시 물었다.
"이거 꼭 지금 해야 되는 겁니까?"
여러 의미를 담은 질문이다. 집에 가서 주말 동안 천천히 해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바로 해야되는 것인지, 사업계획으로 바쁜 와중에 왜 지금 이것을 해야되는지에 대한 약간의 짜증 섞인 질문이랄까.
그리고 그보다 더 묻고 싶은 걸 물었다.
"그런데 이거 왜 하는건가요"
물론 보통이라면 그저 까라면 까야지 정신으로 받아들고 갔겠지만 이미 사업계획안 때문에 스트레스도 상당히 받은 판에 이걸 하라고 내미는 것이 잘 이해가 안 갔다. 무슨 일종의, 뭐 인성 테스트 같은 것인가 같은 의문도 들었고, 뒤가 구린 뭐 그런 건 또 아닌가 싶기도 하고.
로봇의 대답은 이번에도 간단했다.
"다음 달에 저는 여러분과 헤어집니다"
어… 이거 사무실에 알리면 다들 만세 부를 것 같은데. 로봇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전에, 가장 평가에 적합한 직원 하나를 골라 이렇게 평가를 받게 됩니다. 평가서는 지금 당장 작성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한테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집에 가져가신 후, 작성해서, 다음 주까지 HR에 제출하시면 됩니다"
가장 평가에 적합한 직원이라는 말이 흥미로웠다.
"왜 제가 가장 평가에 적합한 직원인가요"
그러나 로봇의 대답은 역시나 간명했다.
"현재 팀원 중 저와 3년 이상 함께 일한 시니어 팀원은 김.중,환 씨가 유일하니까요"
"그렇군요"
뭘 기대한건가 나는.
원래대로라면 오늘도 출근을 했어야 하지만, 와이프도 몸이 안 좋고 어제의 그 평가지도 해야지 싶어서 오늘은 집에 있기로 했다.
"어디보자"
모처럼 마누라는 늦잠 자게 냅뒀고, 딸도 아직 꿈나라에서 헤맬 시간, 나는 거실에서 평가지 문항에 체크를 하고 있었다.
"흠"
귀하와 함께 일한 관리형 로봇의 이름은 무엇인가, 부터 해당 관리형 로봇은 업무 공간에서 자신을 확실히 포지셔닝하고 있었는가, 라는 교차 검증용 질문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어설픈 수준의 답변은 의미가 없다.
"좋아"
토스트를 굽고, 커피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약 1시간에 걸쳐, 그리고 인간 상사를 대상으로 한 평가였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그래서 조금은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까지 느꼈을 정도로 아주 신랄한 평가점수를 내렸다.
"어머, 여보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어, 일 좀 하느라고"
그리고 누가 읽어보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주관식으로 된 총평란에는 짧게, 이렇게 남겼다.
'아직 기계는 인간 따라오려면 멀었다'
그로부터 8년. '부장 로봇'은 여전히 각 기업을 돌며 테스트 중이다. 그러나 대기업을 포함하여 300개가 넘는 기업들이 참여했던 첫 테스트 때와는 달리, 후속 모델은 20개 남짓한 중소기업만 그 시험 운영에 참가하는데 그쳤다. 시험 운영을 했던 거의 모든 기업들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으니까.
"김중환 부장님, 건강검진 차 왔답니다. 15분 뒤에 내려가시면 됩니다"
"아 벌써 왔대?"
내가 상대해야 했던 KMT-21 모델보다 훨씬 진보되었으며, '조직 문화에 관한 블라인드 테스트'인 뢰브너 테스트도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지만 결국 '신형 부장 로봇 KM-23'은 분명하게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그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말이다.
"어디보자, 어 근데 이제 곧 회의시간이잖아?"
그러나 부장 로봇이 망했다고 기업형 로봇 시장이 사그러 들었냐고? 아니.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러면 회의는 1시간 뒤로 미루겠습니다"
"나 하나만 빠지면 되는데 그러지 말고, 그냥 지금 너네들끼리 회의 진행하고 회의록이랑 보고서만 뽑아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밑의 '부하 로봇' 7명은 0.0004초 만에 모든 회의를 마치고 그 내용을 프린터기로 출력해왔다. 60페이지 분량의 두툼한 의사진행록을 말이다.
"오케이. 그럼 난 내려간다"
"네, 다녀오십시오"
인간형 인공지능 실무형 사무 로봇 KMS-17.18,19. 현재 내 부하 직원은 모두 로봇들이다. 17 모델이 넷, 18모델이 둘, 19모델이 하나. 가격도, 업무처리 능력도 숫자 큰 놈들이 더 높다.
KMT-21의 시험 테스트가 종료된 직후, 개발처 측은 곧바로 실무자 역할의 '부하 로봇'들을 내놓았다. 부장 로봇으로 이미 풍부하게 획득한 사무환경의 빅데이터가 있는 만큼, 부하 로봇의 개발은 일사천리로 이루어 진 것이다.
게다가 '모셔야 할 상사'가 아니라 '부려야 할 부하'로서의 로봇은 그 어느 회사에서나 인기만점이었다. 아무리 혹독하게 굴리고 엉만진창으로 대우해도 일말의 미동도 없이 척척 업무만 잘 처리해오는 부하 로봇은 만족도가 매우 높았다.
"후우"
하지만 그때 나는, KMS 시리즈가 또 우리 회사에서 테스트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사무실의 그 열광적인 분위기에 꽤 회의를 느꼈던 사람이다. 과거 부장 로봇에 대해 그토록이나 씹어댄 사람들이, 정작 부하 로봇이 도입되었을 때는 다들 무슨 갑질에 환장한 사람들마냥 로봇을 갈구고 부려먹기 바빴으니까. 그 모습에서 더러운 이중성을 느꼈다고나 할까.
"혈압이 조금 있으시네요"
"운동하고 있습니다"
간호로봇에게 MRCT 전신 스캔을 받았다. 특별한 이상소견은 없고, 혈압이 살짝 높은 정도란다.
다행히 우리 세대까지는 어떻게든 밥줄을 지켜냈다. 하지만 우리 아래, 그리고 우리 동기들은 죄 로봇에 밀려나갔다. 제조업 위주의 노동자 시위 덕분에 정작 현장에서는 로봇의 채용 비율이 35%에 불과하지만 사무직은 그런 제한이 없으니 죄 로봇으로 바뀐 것이다.
"오늘은 무슨 밥을 먹을까"
그래도 부장 로봇은 같이 밥을 먹는 기능이라도 있었는데, 이 부하 로봇들은 그런 것도 없다. 그래서 언제나 난 혼자 밥을 먹는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많은지, 회사 주변 식당가는 거의 1인 테이블 위주의 식당들로 바뀐지 오래다.
신형 부장로봇의 테스트가 끝나면 아마 내 자리도 곧 로봇에게 빼앗길 것이다. 요즘 또래 친구들을 동창회에서 만나면 맨날 하는 이야기가 그거다. 회사 이제 짤리면 뭐 해먹고 사냐고. 나는 작년 말부터 로봇 정비 라이센스 학원을 다니는 중이다.
뭐 상황이 이렇다고 해서 그 옛날 러다이트 운동하던 노동자들마냥 로봇들을 욕하고 부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로봇이 아니었더라도 내 자리를 오래 보전하기는 힘들었을테니까.
언제가는 뺏겼어야 할 자리, 그저 다른 사람 대신 로봇에게 뺏기는 것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어쩌면 그나마 나와 자리를 투고 싸웠어야 할 상대들이 로봇 부하들로 바뀌었기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을 수도, 이렇게 몇 년이라도 버티고 있을 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아직 11시 밖에 안됐는데 벌써 출출하군"
나는 사무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날씨가 새삼 차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