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아침부터 미친듯이 폭우가 쏟아지던 그 날, 김박스는 비가 조금 잦아든 오후 느즈막하게 일어나 방 안에 널부러진 소주병을 슥 치우고는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속쓰려"
언제나처럼 인터넷 서핑을 시작하려던 그는 문득 자신에게 날아온 한 통의 이메일을 확인했다. 로마 교황청에서 직접 보내온 한 통의 메일. 친절하게 한글로 번역까지 주석으로 달려있다는 것은 그 정도의 의전과 대우를 할 정도로 김박스가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이기도 했고, 또 그가 그만큼 영어를 못한다는 증명이기도 했다.
[ 안녕하신가! 힘세고 강한 아침, 만일 내게 물어본다면 나는 교황. 당신은 해야한다. 검은 먹물의 지배에 따른 퇴마 대변 글 ] 이라는 서문의 메일. 번역기를 돌린 것으로 추정되는 교황청에서의 메일은 언제나 해독이 쉽지 않았지만 어렵게 어렵게 해석해보면 요점은 김박스가 구마의식을 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마의식. 영화 엑소시스트나 검은 사제들의 그것처럼, 인간의 약한 마음을 파고든 악마들을 쫒아내는 신성한 종교적 의식. 보통은 영화 속 구마의식처럼 두어 사람의 구마 사제들이 엄격하게 정해진 규칙을 지켜서 해야하지만…
가끔은 이처럼, 특수한 방식의 구마 의식을 치를 때도 있다. 이 세상의 악마들은 결코 한 가지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도, 한 가지 방식으로만 쫒아내는 것도 아닌 것이다.
"후우…"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낸 김박스는 메일에 나와있는 주소를 메모지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차 키를 꺼냈다.
"어이구, 작가님 오셨네요"
인천의 어느 허름한 인쇄소. 김박스가 들어서자 주인이 반갑게 맞이했다. 하지만 김박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백화처리 안 한 종이 제단해서 세 권 묶어주세요" 라고 말했다.
주인은 무슨 일인지 대강 알겠다며 "그럼 갱지로 드릴까요" 하며 척척 익숙한 손길로 갱지 한 다발을 꺼내 각각 100장씩 묶어 끈으로 꿰기 시작했다.
"표지는 돼지기름 먹인 기름종이로 하겠습니다"
"예, 그게 좋습니다"
사락사락, 슥슥, 희끗희끗한 백발이 그 베테랑으로서의 솜씨를 증명하듯 곧 15분 만에 갱지 노트 세 권이 준비됐고, 그 책을 건내받은 김박스는 "이 책은 돈 주고 사고 팔지 못하는거 아시죠?" 하며 그대로 가게를 나섰다. 그럼에도 백발의 주인은 전혀 서운한 기색 없이 그저 가게 벽 한 켠에 걸린 소녀의 액자 사진만을 바라보았다.
"염병"
김박스는 연쇄추돌 사상 사고 때문인지 꽉 막힌 길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 것에 욕설을 내뱉으며 혀를 찼다.
"또 지랄 시작이구만"
언제나 그렇다. 구마의식이 시작되면 그 준비 단계에서부터 온갖 기이하고 불길한 일들이 다 생긴다. 구마를 방해하려는 존재가 그를 이미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신의 존재를 믿는다면 악마의 존재도 인정해야 한다. 신이 그렇게나 위대하다면, 악마 역시 그에 준하는 힘이 있다는 것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김박스는 10년 전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별로 놀랄 것 없네. 악마에 의해 일방적으로 귀신 들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스스로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사람들도 있지. 악마의 재능을 얻기 위해서 말일세. 운동이나 예술하는 사람들 중에 그런 케이스가 특히 많은 이유이기도 하네"
정 신부의 설명에 김박스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 왜 음악하는 사람들 중에도 예술을 위해 떨 피우고 뽕 맞고 하는 애들 많잖은가. 하지만 약에 손댄다고 없던 재능이 생기지는 않거든. 음악이야 즉흥적인 악상이 중요하니까 뭐 약의 힘을 일시적으로 빌어서 그럴 수도 있다지만 글은 그렇지가 않으니까. 세상 모든 작가들이 자네처럼 대충 막 써갈기는 타입만 있는게 아니라는 건 자네라도 잘 알겠지"
그의 말에 김박스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창작의 고통'이라는 이름 하에, 글 쓰는 것에서 고통을 느끼며 쥐어짜내듯 글을 쓰는 타입도 분명히 존재하니까 말이다.
"무엇인가를 너무나 간절히 바라다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어린 양을 구원하기 위해 그 손길을 내민단 말일세. 아, 그래, 뭐 믿던 말던 그건 종교적 차원의 이야기니까 일단 따지지는 말게. 어쨌거나, 그런 간절한 바람을 몇 번 외면받다 보면, 그 바램에 원망이나 부정 같은 마음이 섞이기 쉽고, 그러다보면 때때로 악령이나 악마가 들러붙기도 한단 말이지. 자, 그리고 그때 자네가 바로 그 작가라고 치자고. 그러면 눈 앞에 악마가 나타나서 '당신에게 불멸의 명작을 쓸 재능을 빌려줄테니 영혼을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나"
김박스는 단칼에 "그딴 제안 필요없다고 하겠습니다. 똥글에 영혼 담아서 뭐한답니까" 라고 말했다. 정 신부는 "그래. 자네라면 그렇게 하겠지. 하지만 간절히, 정말로 간절히 멋진 글을 쓰기 바라는 작가지망생이나 한물 간 퇴물 작가 같은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 영혼도 쉽게 바친단 말이야. 그리고 악마의 약속이 지켜지면, 결국 언젠가 그 영혼을 바쳐야 되는 때가 온다는 말이지" 하며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한지망, 22세, 지방대 문창과 재학 중, 작가 지망생, 술 좋아함, 주량은 소주 두 병, 주사는 옆에 있는 남자 끌어안기, 스킨십 즐겨함, 아저씨 취향, C컵, 치질, 머리 나쁨, 고집 셈, 경찰 신고 드립 입에 달고 삼"
프로필을 전해들은 김박스는 쓸데없이 디테일한 정보와, 정 신부가 평소 영계 타령을 입게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는 것에서 몇 가지 의혹이 생겼지만, 일단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그런 케이스일세. 동기들보다 떨어지는 문장력 때문에 맨날 교수에게 까이고 동기들에게 무시받으며 고통스러워했단 말이야. 그렇게 고통받고 고민하다가 결국 악마라는 안 좋은 방향의 기적과 조우했지. 그리고 영혼을 팔았어. 잠깐은 좋았겠지. 영혼을 판 대가로 글이 술술 잘 나왔을테니까. 하지만 곧 영혼을 대가로 바칠 날이 다가왔던 거겠지"
정 신부는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매주마다 고해성사를 하던 아이야. 갑자기 3개월이나 나오지 않아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서 원룸에 방문을 했더니, 집 안에 유황 냄새가 나고, 온갖 벌레가 들끓더구만. 그리고 그 머리 나쁜 년이 라틴어를 줄줄 읇는게…"
"구마의식이 필요하겠군요"
정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다 손가락 하나를 흔들었다.
"악령이 들린 것은 맞아. 그렇지만 일반적인 구마의식으로는 소용이 없다네. 이런 케이스는 스스로 영혼을 판 것이라서, 종교의 힘으로는 퇴치가 불가능해. 종교적으로 본다면, 오히려 그녀의 영혼은 지옥 불구덩이 속에서 영원히 고통 받아야 마땅하거든"
"그렇다면?"
눈을 또렷하게 뜬 정 신부는 김박스를 가리켰다.
"이 세상에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존재는 결국 인간 뿐이야. 그 어떤 존재도 감히 신한테 거짓말을 고하지는 않았거든. 악마조차도. 인간만이 신에게 거짓말을 했어. 아담과 이브의 아들인 카인이 최초로 신에게 거짓말을 했지. 덕분에 우리 인류는 거짓말이라는 권능을 얻게 되었다고. 현대인들은 그를 미워할게 아니라 어쩌면 고마워 해야할지도 몰라"
뜬금없이 장광설로 빠지려는 정 신부를 향해 김박스가 조금 지루하다는 시선을 보내자 곧바로 그는 본론으로 돌아왔다.
"어쨌거나, 악마들도 거짓말은 못 해. 진실을 교묘하게 가릴 뿐이지. 녀석들은 인간의 영혼을 대가로 유혹할 때 이런 말을 곧잘 해. '너에게 최고의 글을 쓸 수 있는 재능을 주겠다'라고. 지망이한테도 마찬가지였어. 물론 그것은 그 앞에 '니 인생에서'라는 말이 생략된 표현이야. 왜냐하면 악마는 신이 아니기에,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고, 없는 재능을 부여할 수도 없거든. 그건 신의 권능이니까 말일세. 하지만 어쨌거나 좋은 글에 대한 제안을 하고, 실제로 그의 재능 한도 내에서 최고의 글을 쓸 수 있게 만들어주니까 일단은 거짓말은 아니지"
그리고 갱지로 된 노트 몇 권을 내밀며 정 신부가 말했다.
"요점은 글이야, 글. 악마가 분명히 말했지. '최고의 글을 쓸 수 있는 재능을 주겠다고'. 그런데 그 눈 앞에서 더 멋지고 대단한 글을 누가 써낸다면, 악마는 거짓말을 한 것이 되네. 결국 영혼을 가져갈 수 없게 되고, 그렇게 악마에게 영혼을 판 사람은 영혼을 되돌려 받을 수 있게 되는거라네"
"그렇군요"라며 고개를 끄덕이던 김박스는 정 신부에게 물었다.
"그럼 전문 작가들한테 맡기면 될 일을 왜 저에게 맡기십니까? 그쪽이 더 확실할텐데"
김박스의 질문에 정 신부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악마랑 조우해야 되는데, 어디 겁쟁이 룸펜 먹물들이 좋다고 하겠어? 그리고 니가 쉽게 싸게 먹히잖아"
결국 김박스는 그렇게, 정 신부의 의뢰를 받아 한지망 양을 구원해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한지망 양 앞에서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라는, 똥내가 진동하는 단편 소설 수십 편을 뚝딱 작성해내서 선보였고, 결국 그 압도적인 똥내에 '최고'라는 타이틀을 포기한 악령은 멀리멀리 사라졌다. 이후 김박스 역시 정 신부의 추천을 받아 로마 교황청에 정식으로 구마 작가로 등록되어, 아시아 각국에서 그 퇴령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만 그렇게 구마의식에 성공한 보람도 없이, 한지망 양은 그 다음 해에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지만, 한지망 양 아버지인 인쇄소 사장님은 여전히 김박스를 '구마 작가님'이라면서 은인처럼 생각하고 모시고 있는 것이다.
"이제 슬슬 준비가 다 된건가"
쓸데없는 생각이 길었다. 막힌 길이 서서히 뚫리자, 김박스는 서둘러 여기저기를 돌며 구마의식에 필요한 도구들을 여기저기 돌며 챙겼다. 준비물은 백화 처리를 하지 않은 갱지로 만든 노트 세 권, 모나미 153 볼펜 두 자루, 핫식스 한 캔, 卍자가 그려져 있는 방석 하나, 아는 박수한테 찾아가서 받아온 부적 하나, 성수 한 병, 마늘 목걸이를 챙겼다. 그리고 교황청에서 온 메일에 적힌 주소를 적은 메모지를 다시 확인했다. 김박스는 차의 속도를 높였다.
"전직 작가라…"
교황청에서 이번에 김박스에게 의뢰한 구마의식의 피의식자는 41세의 여자 전업 작가였다. 김박스는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누구세요?"
허름한 빌라 건물. 김박스는 B102호의 벨을 눌렀고 누구냐는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성령의 힘이 필요하신 분이 있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우리 불교 믿어요" 하고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김박스는 잠시 멍하니 서서 자신이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는가 확인하기 시작했고, 이 주소가 맞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무렵 다시 문이 조금 열렸다.
"미안합니다"
문을 열어준 60대 중후반의 여인은, 이런 못 사는 동네일수록 종교권유가 많다며, 순순히 자신의 착각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안방으로 그를 인도했다. 김박스 역시 "사실 저도 종교는 믿지 않습니다" 라고 덧붙였다. 무신론자가 어떻게 구마의식을 하는지 아줌마는 묻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김박스는 그럴 기회를 주는 대신 그저 안방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흐음"
안방에 사지가 묶인 채 누워있는 피의식자.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건지 앓고 있는 것인지 모를 희미한 신음성을 흘리고 있는 그녀는 41세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준수한 외모였다. 다시 안방을 나와 문을 닫은 김박스는 거실에서 그녀의 모친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전에 주머니에서 부적을 꺼냈다. 아까 박수 무당에게 잠깐 들러 받아온 부적이다. 그것을 안방 문에 붙였다.
"싫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부적을 문에 붙이자마자 잘자고 있던 여자 작가가 눈을 부릅뜨고 비명을 질러대어, 노련한 김박스도 조금은 놀랐지만 그녀의 모친이 박스를 달랬다.
"쟤가 원래 그, 교회를 다녀서, 부적 같은거 싫어해요. 에휴, 지랄맞은 년. 내 그래서 요 앞에 용한 무당한테 받아온 부적도, 그거 갖고 다니면 남자들이 줄줄 따른대도 그렇게 싫다고 싫다고 지미랄 년, 지 애미를 언제까지 부려먹을라고 시집도 안 가고 저러고 있는지 원"
조금 머쓱해진 김박스는 문을 닫고 나와 거실쪽에서 문에 부적을 붙였다. 이로서 그녀의 어머니와 하는 대화를 악마가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모친이 내온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름이 뭡니까"
"나? 조엄마"
"아뇨아뇨, 따님이요"
"아아, 소설이? 윤, 소설이에요"
상대의 공력을 파악하기 위한 정보로서 직업이나 나이 정도는 오픈하지만, 신원보호를 위해 철저히 이름을 가리고 고지되는 교황청의 비밀통신. 그리고 모친으로부터 이름을 듣자 김박스는 그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아, 혹시 그, 베스트셀러 소설…"
"네네"
데뷔작부터 판매부수 15만권을 넘긴 베스트셀러 작가, 윤소설. 그러나 데뷔작 이후로 압박감이 심해진 탓인지 슬럼프에 빠졌고,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 기억 속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던 그녀가 악마에 영혼을 팔았다니.
"이상해진건 요 얼마 전부터였어요"
슬럼프에 빠져 몇 년 동안이나 힘들어했던 그녀가 구원의 실마리를 잡은 것은 종교의 힘이었다. 독실하게 교회에 매일 나가며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던 소설은 요 얼마 전부터 다시 열심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밥도 안 먹었어요 애가"
방에 틀어박혀서 밥도 안 먹고 글을 쓰길래, 처음에는 쟤가 마음 독하게 먹고 차기작 준비하나보다 해서 흐뭇하게 생각했는데, 방에 틀어막히는 것도 어느 정도지 한달이 넘게 씻지도 않고, 밥은 먹는 꼴을 못 봤는데 밥 안 먹냐면 밥은 먹었다고 하고, 그러던 어느 날…
"밥을 차려놔도 먹지도 않길래 기가 막혀서 아주 잠궈놓은 방문을 열쇠로 벌컥 열고 들어갔더니 글쎄…"
어디서 몰려온 것인지 방 안에 쥐떼가 가득했다고. 그리고 그 쥐들을 산채로 머리부터 우적우적 씹어먹고 있던 것. 상상을 하자 그 그로테스크함에 경악한 김박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사실 더 불쾌한 것은 그보다 방금 전까지 마시고 있던 커피잔 바닥에 벌레가 가라앉아었다는 사실이었다. 벌레의 발호. 마귀의 증명이었다.
"아주 그래서, 내가 기겁을 해가지고서는 얘를 병원에도 데려가봤는데 병원에서는 아주 깨끗하대요. 심지어 정신도 멀쩡하고 뭐 뇌파 검사니 뭐니 다 해봤는데 하나도 뭐 이상이 없대는 거에요. 그래서 얘가 뭐에 씌여서 이러나 싶어서 그 용하다는 무당 집에도 한번 몰래 가서 말을 했더니, 아니 그 무당이 대경실색을 해서, 당장 나가라고, 당장 나가라고 아주 오줌을 지리면서 기겁을 해서 뭐 물어보지도 못했어요. 그때 아 이게 뭔 일이 나도 났구나 싶어서 쟤는 저렇게 침대에 사지를 묶어놓고, 그, 동네에 성당에 가서 거기 신부님한테 넌지시 이야기를 했더니 한달인가 지나서 코쟁이 신부님 몇 분이 오셨더라구요. 그래서 소설이랑 이야기를 하더니 고개를 절래절래 젓더라고. 동네 신부님한테 물어보니까, 소설이는 답이 없더래는거에요. 지 스스로가 타락을 했대나 어쨌더나 하면서"
그러면서 눈물을 훔치는 소설의 모친. 자식이 마귀에 씌였다는데, 종교의 힘으로도 구원을 할 수 없다니 그것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이었으리라, 하고 생각한 김박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각종 도구를 들고 온 가방을 다시 쥐며 말했다.
"어쨌든 어머니, 소설씨는 제가 구하겠습니다. 이 집 안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잠시 어디 이웃집에라도 다녀오세요. 구마의식을 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이 집 안에 들어오시면 안됩니다"
"알겠습니다"
소설의 모친이 얼른 집을 나갔고, 김박스는 이제 본격적으로 구마 의식을 준비했다.
현관 앞에 성수를 뿌렸다. 목에는 마늘 목걸이를 걸었다. 특정 종교에 소속되어 있지 않는다는 것은, 반대로 모든 종교의 권능을 빌릴 수 있다는 특권이기도 했다. 안방 문을 다시 열자, 놀랍게도 윤소설 양은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김박스는 안방 문도 잠그었다.
어딘가 이 세상 사람의 모습이 아닌 듯한 소설의 표정과 느낌에 김박스는 서늘함을 느꼈지만, 곧 가져온 卍자 방석 위에 앉자 마음이 안정됨을 느꼈다.
그리고 가볍게 대화를 시작했다.
"이름이 뭔가"
윤소설은 고개를 슥 돌리더니 웃었다.
"그쪽에 관심 없어요"
김박스는 순간 발끈했지만 그런 말에 휘말리면 자신도 패배하는 것이다.
"이름이 뭐냐고"
그러자 소설은 또 낄낄대며 시비를 걸어왔다.
"이름 김빡스…엥? 사제가 아니네? 아마추어 소설가, 어디보자, 소설가도 아니네? 인터넷에 이상한 소설 같은거 쓰는 뭐 그런거네. 직업도 변변찮고 돈도 없고, 재수는 지질나게 없고 밤낮으로 딸딸이만 치고 모태솔로에 오타쿠에 등골 브레이커에 얼굴은 빻았고 키는 똥자루에 꼬추도 작고, 너 왜 사니?"
어깨를 으쓱한 김박스. 그러자 소설은 웃으면서 또 입을 열었다.
"구마의식이니 뭐니 하는거 제끼고 이 누나랑 잘래? 누나가 잘해줄께"
41세라고는 믿기지 않는 동안, 훤칠한 키에 들어갈데 들어가고 나올데 나온 몸매. 사실 이제껏 시집을 못 간 것이 이상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외모였으니 김박스는 그 유혹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모습에 소설은 웃으며 "얼른, 누나는 지금 사지가 묶여 있어서 안돼. 니가 올라와서 내 옷 좀 벗겨줘"하고 또 유혹을 해왔다.
방 안은 어느새 사향 냄새로 가득했고 강렬한 성적 충동을 느낀 김박스였지만, 그는 교황청에서 인정받은 구마 작가. 한 마디로 그녀의 제안을 물리쳤다.
"나 게이요"
이번에는 소설이 어깨를 으쓱했다. 김박스는 가방에서 돼지기름 먹인 표지의 갱지 노트와 모나미 153 펜, 핫식스 한 캔을 꺼내어 바닥에 놓았다. 그 모습을 본 소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 알았다. 너, 구마 작가로구나"
하이톤의 목소리가 어느새 쉰 노인의 목소리처럼 되어버린 윤소설…아니 마귀는 무서운 눈빛으로 김박스를 쏘아보며 말했다.
"넌 안돼. 이 년의 영혼은 이미 내꺼라고. 정당한 거래로 내가 얻어낸거야. 이제 이 년의 영혼은 내가 가져갈거야"
김박스는 핫식스를 따며 물었다.
"진짜 니가 최고의 글을 쓰게 해준거 맞아? 진짜 최고 맞냐고. 어디 실력으로 붙어볼까?"
마귀는 대답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후후, 김빡스, 너는 안돼. 얘는 이래뵈도 프로 작가야. 재능이나 실력, 경력, 모두 너를 압도하지. 이 년이 프로 전업 작가라는 것을 뻔히 아는데 왜 너같은 무명 작가를 교황청이 보냈을까. 글쎄, 너도 좀 이상하지 않아? 정말로 이 년의 재주와 니 재주가 붙어서 니가 이길 수 있을까?"
김박스는 생각했다.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정 신부라면 몰라도 교황청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세계에서 은밀하게 활동하는 구마 작가 중에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도 있다. 비록 퇴물이 되었다고는 하나, 전직 프로 작가에게 이런 무명의 작가를 임명해서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로 자신의 문장력을 교황청이 그토록 높게 평가하는걸까? 그럴 리 없다. 아니면 그냥 한국인에게 씌인 악마니까 한국인 구마 작가를 보낸 것? 그것도 아니다. 애초에 코쟁이 신부들도 다녀갔고, 한국인 구마작가 중에도 프로 작가들이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너를 쫒아내는데에는 나 정도면 충분하니까"
에너지 드링크 한 캔을 원샷으로 비워버린 김박스는 말했다. 그렇다. 언젠가 정 신부는 말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신의 뜻이라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느낄 수도, 억울하다고 느낄 수도, 그래서 신을 부정하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마저 더 큰 신의 뜻을 위한 안배일 뿐이라고.
"사람들이 가장 간절하게 신을 찾을 때는 언제일까. 행복할 때? 즐거울 때? 아니. 가장 불행할 때라네. 가장 괴롭고 불행할 때 비로소 신을 찾기 시작하지. 결국 그런거야. 사람들이 신을 믿음으로서 진정으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역설적으로 불행이라네. 신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조차도 결국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는 감정 아니던가. 게다가 극단적인 케이스로, 이교도나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가 존재함으로서 그들의 비판이 신을 믿는 이들이 그릇된 믿음으로 빠지지 않게 되는 효과도 가져오고 말이네. 모든 것은 결국 신의 안배일세. 그렇게 이승에서 고통만 받는다면 그게 무슨 의미냐고? 사후세계에서 충분히 보상해주잖나. 엄마가 공부하라고 때리고 강요하는 것이, 당장에야 서운할지 몰라도 결국 성공한 다음에야 이해를 하게 되는 것처럼, 자네도 언젠가는 이해할걸세"
…뭐, 그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역설적으로 악마의 존재는 신의 존재도 인정하는 것. 그렇다면 아마 오늘 내가 이 악마와 싸우게 되는 것도 그 나름의 안배가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진 김박스였다.
"어리석은 놈"
마귀는 한심하다는 듯 다시 침대에 늘어눕더니 물었다.
"그래, 그럼 뭘로 붙어볼까? 어디, 네가 지면 대신에 네 영혼까지 같이 가져가주랴? 그렇잖아? 니가 이기면 이 년 영혼을 돌려받는데, 그만큼 나도 득 보는게 있어야 하는게 아닐까?"
마귀는 제안을 해왔다. 구마 사제들은 보통 이런 경우 절대로 그들의 제안에 딜하지 말라는 교육을 받는다. 악마와의 거래 자체가 영혼의 순수성을 타락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니까. 대신 그만큼 구마의 난이도가 높아지고, 덕분에 실패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당연한 이야기다. 세상에 어느 한 쪽만 손해보는 딜이 쉽게 이루어질 리 없다.
생각해보라. 만약 진정으로 구마 의식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구마 사제들이 악마를 쫒아내는 일이 실존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위대하고 거룩한 신의 힘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며 그 어떤 포교행위보다 가장 효과적인 포교행위일텐데 왜 교황청에서는 그것을 극도로 비밀로 붙일까? 홍보 효과로 그것만큼 좋은 것이 없을텐데? 악마의 존재와 신의 위대함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왜 철저히 구마 의식과 과정 등을 기밀로 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구마의식 대부분이 실패로 끝나기 때문이다.
신과 대립하며 그를 거역하는 존재가 바로 악마다. 당연히 인간의 힘을 아득히 초월하는 존재들일 수 밖에 없다. 신의 힘을 빌려 마귀와 싸운다 하더라도 인간의 그릇으로 온전히 신의 힘을 담아낼 수는 없다. 성경이나 전설 속에 존재하는, 악마와 직접 대립하고 승리를 거머쥔 위대한 성자들의 이야기들 역시 그들이 '성자'이기 때문인 것이다.
절대 다수의 신부와 사제들은 악마와 싸워서 이길 수 없다. 오늘도 내일도 수많은 구마 사제들은 마귀에게 영혼을 유린당하고, 그들이 구하고자 했던 불쌍한 영혼들도 악마의 손에 잃고 만다. -그것이 설령 '신의 안배'에 의해 그런 것일지라도- 비록 신의 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충분히 강력한 것이 마귀의 능력인 것이다. 그런 판에 최소한의 딜도 없이, 억지에 가까운 "넌 악마니까 닥치고 꺼져" 식의 구마의식 성공률이 높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교황청에서도 항상 구마의식을 비밀에 붙일 수 밖에.
"좋다, 내기를 하지. 종목은 내가 결정하지"
하지만 특정 종교에 소속되지 않은 나같은 구마 작가들은 이야기가 다르다. 얼마든지 악마의 직접적인 딜에 응할 수 있다. 이로서 협상은 간단해진다. 이기면 피의식자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 지면? 내 영혼 날리면 그만인 것이다. 뭐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구마 사제들의 "됐고, 닥치고 꺼져" 식의 깡패같은 요구보다는 마귀 입장에서도 훨씬 납득하기 쉬운 결정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조상들도 도깨비들이랑 내기 많이 했잖은가. 똑같은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소설로 붙는다. 다만 마귀인 너를 자유롭게 풀어주면 내가 무슨 해꼬지를 당할지 모르니까 니가 말을 하면 내가 이쪽 노트에 받아적고, 나는 내 글을 이 노트에 적을 것이다. 최종적인 승부는 이 가운데의 노트에서 분신사바로 오만 잡귀들한테 물어봐서 결정한다. 어떤가?"
"좋다"
마귀도 딜에 응했다. 그리고 그렇게 나의 구마 의식은 시작되었다.
3시간째, 녀석은 쉬지도 않고 스토리를 읊어내었다. 받아 적으면서도 감탄을 금하기 어려운 놀라운 완성도의 소설이었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 정말로 탐나는 내용이었다.
"왜, 부러워?"
내 눈빛에서 탐욕이 들여다보였는지 소설, 아니 마귀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대단한 재능이군. 이 소설 정말 재밌어"
설령 지금은 슬럼프에 빠져 퇴물이 되었을 지언정 윤소설은, 지 이름처럼 베스트셀러 소설을 써낸 프로작가다. 그런 이의 재능을 바탕으로 쓰는 소설이 재미없을 리 없다. 3시간 동안 쉴새없이 받아적으면서 손이 꽤나 아픈데도, 그 뒷 내용이 궁금해서 쉬지 않고 받아적고 있을 정도다.
"그렇게"
"그, 러어, 케에. 아우 손 아파. 그리고?"
어느새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마귀는 잠시 생각하다 마지막 문장을 불렀다.
"그는 조용히 문을 닫다"
받아적던 김박스는 물었다.
"닫았다 아니야?"
마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닫다"
김박스는 조금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했다.
"문장이 이상하잖아 멍충아"
그러자 마귀는 콧방귀를 뀌며 웃었다.
"너 정말 초보구나. 원래 마귀는 완벽한걸 안 좋아해. 빈틈을 만들어놓는다고. 정과 사, 양과 음, 보름달과 초승달, 몰라?"
"그렇군. 어쨌든 문우을, 다아았, 다. 어우 손 아파. 다 적었다?"
"그래"
그렇게 먼저 마귀의 작품을 완성했다. 마귀는 말했다.
"이거 당장 들고 나가서 출판사에 맡기면 20만권 판매는 보장하지"
마지막의 유혹 아닌 유혹을 해왔지만, 김박스는 지금 이 내기에 자신의 영혼이 걸려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양할께"
이번에는 김박스의 차례였다. 앞서 너무 완벽한 작품을 감상해서였을까. 스스로 위축되어가는 것을 느끼는 그였다. 도입부만 몇 번을 고쳐서 찢어냈는지 모른다. 꽤나 뻐근한 손으로 글씨를 쓰려니 손이 뻐근해서라도 글이 더 잘 안 나왔다. 그저 유난히 똥이 많은 모나미 153 펜의 똥파워가 자신의 똥글에 전달되길 바랄 뿐이었다.
"후우"
그의 머릿 속에서는 여전히 마귀의 말이 맴돌고 있었다. 어째서 프로 작가의 힘을 끌어내어 쓰고 있는 마귀에게 자신과 같은 무명 아마추어 작가를 배정했을까. 그 놈의 '신의 안배'에 내가 희생되는 시나리오라도 들어있나? 걱정과 불신이 머릿 속을 맴도는 것을 느꼈다.
"아, 재미없다 재미없어"
마귀는 누워서 계속 방해를 하고 있었다. 머리는 뱅뱅 돌고, 손은 아프고, 마음은 조여오는 가운데, 결국 김박스는 7시간 만에 소설을 완성해냈다.
"후우"
그 자리에서 담배를 한 대 맛있게 빤 김박스는 떨리는 손을 털어내며 말했다.
"어쨌든 이제 분신사바로 결정을 짓자고"
어쩌면 영혼을 털릴지도 모르는 상황임에도, 김박스는 꽤 자신있어보였다. 마귀는 혀를 차면서 "니 영혼은 지옥으로 데려가도 안 부려먹고 그냥 고문만 존나 시킬거야" 하고 경고했다.
"분신사바 분신사바 오딧세이 그랏세이…"
마귀를 내쫒기 위해 또 다른 잡귀를 불러와 평가를 맡기는 이 기이한 구마의식. 소설의 몸에 들어와있는 마귀가 꽤나 하이레벨의 마귀인지, 오만 잡귀들이 접근을 하지 않았다.
"니 존나 거물인가 보구나"
마귀는 결코 자신의 정체를 발설하지 않는다. 자신의 진짜 이름을 퇴마사나 구마 사제, 구마 작가가 아는 순간 신의 이름을 빌려 명령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녀석은 대꾸하는 대신 "계속 하자고" 하면서 팔목이 묶인 손으로 또다시 나와 함께 펜을 잡고 분신사바를 시작했다.
그러기를 얼마였을까.
"오셨나요?"
라는 김박스의 질문에 펜이 스스슥 그렇다는 쪽으로 움직였다. 혹시나 글도 못 읽는 문맹 잡귀나, 못 배워서 글의 재미를 모르는 미개한 멍청이 귀신일까봐 간단히 신상을 캐보니 서울대학교에 해외 명문 대학원까지 나온 귀신이었다. 마침 전공도 어문학 계통이었다.
"배운 귀신이네. 좋아. 야, 이 소설이 마귀가 쓴 소설이고, 이 소설은 내가 쓴 소설이야. 누가 쓴 글이 더 재미있는지 말을 해보아라"
그 질문을 하자, 잠시 사라락 하는 바람이 한줄기 불었고 약 5분 뒤, 펜이 움직였다.
김...박...스....
김박스의 얼굴 만면에 미소가 피어났고 윤소설, 아니 마귀는 묶인 손발을 바둥거리며 "말도 안돼!"하고 소리쳤다.
"말도 안 돼! 니 따위가 이 년의 소설보다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어! 이 더러운 개자식!"
마귀에게 더럽다느니 하는 말을 들으니 조금 기분이 나빠진 김박스였지만, 어쨌든 승부는 났다. 이제는 물릴 수 없다. 게다가 심판이 되어준 배운 귀신은, 마귀가 호통을 치자 곧바로 도망쳐버렸다.
"자, 내가 이겼으니 넌 소설씨의 영혼을 다시 돌려다오"
김박스의 말에 마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물었다.
"그보다 네 정체가 더 놀랍군. 어떻게 이 년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쪽으로 내가 힘을 썼는데도 더 멋진 작품을 써낸거지? 혹시 네가 무슨 교황청 비밀무기쯤 되는건가?"
김박스는 웃으며 책을 들어보였다.
"자, 보거라"
몇 페이지를 넘겨 보여주자, 놀랍게도 한 권은 처음 몇 장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런 내용도 없었다. 그저 '아 심심하다, 지루하다, 이 병신 같은 일' 같은 푸념만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
"무슨 짓을 한거야? 설마 너?"
경악을 금치 못하는 마귀. 그렇다. 김박스는 심판 잡귀에게 '마귀가 쓴 글을 자신이 쓴 글이라고 말했고, 자신이 쓴 글을 마귀가 쓴 글'이라고 말해서, 심판 잡귀가 김박스를 고르게 만든 것이다.
"거짓말은 인간의 권능이니까"
"이 더러운 사기꾼! 이건 공정하지 않은 결과다! 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더러운 영혼아!"
마귀는 울부짖으며 온갖 욕설을 다했지만, 이미 승부는 물건너간 상태였다.
"너도 어차피 인간의 연약한 마음을 파고 들어 공정하지 못한 거래를 제안한건데 뭘 그리 억울해하나. 소설 몇 개에 영원토록 지옥불구덩이에서 굴려먹을 타락이라니, 그거야말로 진정한 불공정거래지. 어쨌든 진건 진거니까 너도 이제 지옥으로 꺼지거라"
"언젠가 너의 영혼을 꼭 먹어주마"
"그건 니 바람일 뿐이지"
잠시 뒤, 소설씨는 입과 귀에서 검은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커헉, 하고 토해냈다. 내 얼굴과 옷은 물론 책에도 다 피가 튀었고, 이불과 온 방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곧이어 방 안의 기운이 어딘가 점점 밝아지더니 방 안에 튀었던 피 역시 무언가의 환상이었던 듯 전부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윤소설 씨는 곧 "으음"하며 눈을 떴다.
"수고했네"
며칠 뒤, 김박스는 모든 상황을 잘 정리한 후 구글 번역기로 잘 번역해서 로마 교황청에 보고서를 전달했고, 정 신부님께도 보고했다.
"아닙니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겸손하기도. 그보다 그 악마가 썼다는 소설 내용이 궁금하구만. 재밌을 것 같은데. 정말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네"
그러자 김박스는 픽 웃었다.
"저도 아쉽습니다. 윤소설 양이 토한 피가 책에 뿌려지니까, 부정이 탔는지 책이 순식간에 부식되어 다 내용도 알아볼 수도 없게 되었더랬지 뭡니까. 나중에 기억이나 더듬어서 표절해볼까 싶네요. 하하"
정 신부는 김박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쨌든 고맙네. 우리 사제들이 못하는 일을 자네가 해주었으니. 길 잃은 어린 양을 자네가 제대로 돌려놓았어"
"41살이면 어린 양은 아니지 않을까요"
"허허, 저 위의 계신 분이 보시기에 우리 모두는 어린 양이라네. 어쨌든 수고했네"
"네, 감사합니다"
"그럼 잘 가보게"
"그럼 몸 조심 하십시오"
인사를 나누고, 김박스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성당 입구쪽으로 걸어나와, 안을 지그시 바라보며 걸려있는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용히 문을 닫다.
"속쓰려"
언제나처럼 인터넷 서핑을 시작하려던 그는 문득 자신에게 날아온 한 통의 이메일을 확인했다. 로마 교황청에서 직접 보내온 한 통의 메일. 친절하게 한글로 번역까지 주석으로 달려있다는 것은 그 정도의 의전과 대우를 할 정도로 김박스가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이기도 했고, 또 그가 그만큼 영어를 못한다는 증명이기도 했다.
검은 작가
[ 안녕하신가! 힘세고 강한 아침, 만일 내게 물어본다면 나는 교황. 당신은 해야한다. 검은 먹물의 지배에 따른 퇴마 대변 글 ] 이라는 서문의 메일. 번역기를 돌린 것으로 추정되는 교황청에서의 메일은 언제나 해독이 쉽지 않았지만 어렵게 어렵게 해석해보면 요점은 김박스가 구마의식을 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마의식. 영화 엑소시스트나 검은 사제들의 그것처럼, 인간의 약한 마음을 파고든 악마들을 쫒아내는 신성한 종교적 의식. 보통은 영화 속 구마의식처럼 두어 사람의 구마 사제들이 엄격하게 정해진 규칙을 지켜서 해야하지만…
가끔은 이처럼, 특수한 방식의 구마 의식을 치를 때도 있다. 이 세상의 악마들은 결코 한 가지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도, 한 가지 방식으로만 쫒아내는 것도 아닌 것이다.
"후우…"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낸 김박스는 메일에 나와있는 주소를 메모지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차 키를 꺼냈다.
"어이구, 작가님 오셨네요"
인천의 어느 허름한 인쇄소. 김박스가 들어서자 주인이 반갑게 맞이했다. 하지만 김박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백화처리 안 한 종이 제단해서 세 권 묶어주세요" 라고 말했다.
주인은 무슨 일인지 대강 알겠다며 "그럼 갱지로 드릴까요" 하며 척척 익숙한 손길로 갱지 한 다발을 꺼내 각각 100장씩 묶어 끈으로 꿰기 시작했다.
"표지는 돼지기름 먹인 기름종이로 하겠습니다"
"예, 그게 좋습니다"
사락사락, 슥슥, 희끗희끗한 백발이 그 베테랑으로서의 솜씨를 증명하듯 곧 15분 만에 갱지 노트 세 권이 준비됐고, 그 책을 건내받은 김박스는 "이 책은 돈 주고 사고 팔지 못하는거 아시죠?" 하며 그대로 가게를 나섰다. 그럼에도 백발의 주인은 전혀 서운한 기색 없이 그저 가게 벽 한 켠에 걸린 소녀의 액자 사진만을 바라보았다.
"염병"
김박스는 연쇄추돌 사상 사고 때문인지 꽉 막힌 길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 것에 욕설을 내뱉으며 혀를 찼다.
"또 지랄 시작이구만"
언제나 그렇다. 구마의식이 시작되면 그 준비 단계에서부터 온갖 기이하고 불길한 일들이 다 생긴다. 구마를 방해하려는 존재가 그를 이미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신의 존재를 믿는다면 악마의 존재도 인정해야 한다. 신이 그렇게나 위대하다면, 악마 역시 그에 준하는 힘이 있다는 것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김박스는 10년 전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별로 놀랄 것 없네. 악마에 의해 일방적으로 귀신 들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스스로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사람들도 있지. 악마의 재능을 얻기 위해서 말일세. 운동이나 예술하는 사람들 중에 그런 케이스가 특히 많은 이유이기도 하네"
정 신부의 설명에 김박스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 왜 음악하는 사람들 중에도 예술을 위해 떨 피우고 뽕 맞고 하는 애들 많잖은가. 하지만 약에 손댄다고 없던 재능이 생기지는 않거든. 음악이야 즉흥적인 악상이 중요하니까 뭐 약의 힘을 일시적으로 빌어서 그럴 수도 있다지만 글은 그렇지가 않으니까. 세상 모든 작가들이 자네처럼 대충 막 써갈기는 타입만 있는게 아니라는 건 자네라도 잘 알겠지"
그의 말에 김박스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창작의 고통'이라는 이름 하에, 글 쓰는 것에서 고통을 느끼며 쥐어짜내듯 글을 쓰는 타입도 분명히 존재하니까 말이다.
"무엇인가를 너무나 간절히 바라다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어린 양을 구원하기 위해 그 손길을 내민단 말일세. 아, 그래, 뭐 믿던 말던 그건 종교적 차원의 이야기니까 일단 따지지는 말게. 어쨌거나, 그런 간절한 바람을 몇 번 외면받다 보면, 그 바램에 원망이나 부정 같은 마음이 섞이기 쉽고, 그러다보면 때때로 악령이나 악마가 들러붙기도 한단 말이지. 자, 그리고 그때 자네가 바로 그 작가라고 치자고. 그러면 눈 앞에 악마가 나타나서 '당신에게 불멸의 명작을 쓸 재능을 빌려줄테니 영혼을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나"
김박스는 단칼에 "그딴 제안 필요없다고 하겠습니다. 똥글에 영혼 담아서 뭐한답니까" 라고 말했다. 정 신부는 "그래. 자네라면 그렇게 하겠지. 하지만 간절히, 정말로 간절히 멋진 글을 쓰기 바라는 작가지망생이나 한물 간 퇴물 작가 같은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 영혼도 쉽게 바친단 말이야. 그리고 악마의 약속이 지켜지면, 결국 언젠가 그 영혼을 바쳐야 되는 때가 온다는 말이지" 하며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한지망, 22세, 지방대 문창과 재학 중, 작가 지망생, 술 좋아함, 주량은 소주 두 병, 주사는 옆에 있는 남자 끌어안기, 스킨십 즐겨함, 아저씨 취향, C컵, 치질, 머리 나쁨, 고집 셈, 경찰 신고 드립 입에 달고 삼"
프로필을 전해들은 김박스는 쓸데없이 디테일한 정보와, 정 신부가 평소 영계 타령을 입게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는 것에서 몇 가지 의혹이 생겼지만, 일단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그런 케이스일세. 동기들보다 떨어지는 문장력 때문에 맨날 교수에게 까이고 동기들에게 무시받으며 고통스러워했단 말이야. 그렇게 고통받고 고민하다가 결국 악마라는 안 좋은 방향의 기적과 조우했지. 그리고 영혼을 팔았어. 잠깐은 좋았겠지. 영혼을 판 대가로 글이 술술 잘 나왔을테니까. 하지만 곧 영혼을 대가로 바칠 날이 다가왔던 거겠지"
정 신부는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매주마다 고해성사를 하던 아이야. 갑자기 3개월이나 나오지 않아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서 원룸에 방문을 했더니, 집 안에 유황 냄새가 나고, 온갖 벌레가 들끓더구만. 그리고 그 머리 나쁜 년이 라틴어를 줄줄 읇는게…"
"구마의식이 필요하겠군요"
정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다 손가락 하나를 흔들었다.
"악령이 들린 것은 맞아. 그렇지만 일반적인 구마의식으로는 소용이 없다네. 이런 케이스는 스스로 영혼을 판 것이라서, 종교의 힘으로는 퇴치가 불가능해. 종교적으로 본다면, 오히려 그녀의 영혼은 지옥 불구덩이 속에서 영원히 고통 받아야 마땅하거든"
"그렇다면?"
눈을 또렷하게 뜬 정 신부는 김박스를 가리켰다.
"이 세상에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존재는 결국 인간 뿐이야. 그 어떤 존재도 감히 신한테 거짓말을 고하지는 않았거든. 악마조차도. 인간만이 신에게 거짓말을 했어. 아담과 이브의 아들인 카인이 최초로 신에게 거짓말을 했지. 덕분에 우리 인류는 거짓말이라는 권능을 얻게 되었다고. 현대인들은 그를 미워할게 아니라 어쩌면 고마워 해야할지도 몰라"
뜬금없이 장광설로 빠지려는 정 신부를 향해 김박스가 조금 지루하다는 시선을 보내자 곧바로 그는 본론으로 돌아왔다.
"어쨌거나, 악마들도 거짓말은 못 해. 진실을 교묘하게 가릴 뿐이지. 녀석들은 인간의 영혼을 대가로 유혹할 때 이런 말을 곧잘 해. '너에게 최고의 글을 쓸 수 있는 재능을 주겠다'라고. 지망이한테도 마찬가지였어. 물론 그것은 그 앞에 '니 인생에서'라는 말이 생략된 표현이야. 왜냐하면 악마는 신이 아니기에,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고, 없는 재능을 부여할 수도 없거든. 그건 신의 권능이니까 말일세. 하지만 어쨌거나 좋은 글에 대한 제안을 하고, 실제로 그의 재능 한도 내에서 최고의 글을 쓸 수 있게 만들어주니까 일단은 거짓말은 아니지"
그리고 갱지로 된 노트 몇 권을 내밀며 정 신부가 말했다.
"요점은 글이야, 글. 악마가 분명히 말했지. '최고의 글을 쓸 수 있는 재능을 주겠다고'. 그런데 그 눈 앞에서 더 멋지고 대단한 글을 누가 써낸다면, 악마는 거짓말을 한 것이 되네. 결국 영혼을 가져갈 수 없게 되고, 그렇게 악마에게 영혼을 판 사람은 영혼을 되돌려 받을 수 있게 되는거라네"
"그렇군요"라며 고개를 끄덕이던 김박스는 정 신부에게 물었다.
"그럼 전문 작가들한테 맡기면 될 일을 왜 저에게 맡기십니까? 그쪽이 더 확실할텐데"
김박스의 질문에 정 신부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악마랑 조우해야 되는데, 어디 겁쟁이 룸펜 먹물들이 좋다고 하겠어? 그리고 니가 쉽게 싸게 먹히잖아"
결국 김박스는 그렇게, 정 신부의 의뢰를 받아 한지망 양을 구원해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한지망 양 앞에서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라는, 똥내가 진동하는 단편 소설 수십 편을 뚝딱 작성해내서 선보였고, 결국 그 압도적인 똥내에 '최고'라는 타이틀을 포기한 악령은 멀리멀리 사라졌다. 이후 김박스 역시 정 신부의 추천을 받아 로마 교황청에 정식으로 구마 작가로 등록되어, 아시아 각국에서 그 퇴령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만 그렇게 구마의식에 성공한 보람도 없이, 한지망 양은 그 다음 해에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지만, 한지망 양 아버지인 인쇄소 사장님은 여전히 김박스를 '구마 작가님'이라면서 은인처럼 생각하고 모시고 있는 것이다.
"이제 슬슬 준비가 다 된건가"
쓸데없는 생각이 길었다. 막힌 길이 서서히 뚫리자, 김박스는 서둘러 여기저기를 돌며 구마의식에 필요한 도구들을 여기저기 돌며 챙겼다. 준비물은 백화 처리를 하지 않은 갱지로 만든 노트 세 권, 모나미 153 볼펜 두 자루, 핫식스 한 캔, 卍자가 그려져 있는 방석 하나, 아는 박수한테 찾아가서 받아온 부적 하나, 성수 한 병, 마늘 목걸이를 챙겼다. 그리고 교황청에서 온 메일에 적힌 주소를 적은 메모지를 다시 확인했다. 김박스는 차의 속도를 높였다.
"전직 작가라…"
교황청에서 이번에 김박스에게 의뢰한 구마의식의 피의식자는 41세의 여자 전업 작가였다. 김박스는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누구세요?"
허름한 빌라 건물. 김박스는 B102호의 벨을 눌렀고 누구냐는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성령의 힘이 필요하신 분이 있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우리 불교 믿어요" 하고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김박스는 잠시 멍하니 서서 자신이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는가 확인하기 시작했고, 이 주소가 맞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무렵 다시 문이 조금 열렸다.
"미안합니다"
문을 열어준 60대 중후반의 여인은, 이런 못 사는 동네일수록 종교권유가 많다며, 순순히 자신의 착각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안방으로 그를 인도했다. 김박스 역시 "사실 저도 종교는 믿지 않습니다" 라고 덧붙였다. 무신론자가 어떻게 구마의식을 하는지 아줌마는 묻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김박스는 그럴 기회를 주는 대신 그저 안방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흐음"
안방에 사지가 묶인 채 누워있는 피의식자.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건지 앓고 있는 것인지 모를 희미한 신음성을 흘리고 있는 그녀는 41세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준수한 외모였다. 다시 안방을 나와 문을 닫은 김박스는 거실에서 그녀의 모친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전에 주머니에서 부적을 꺼냈다. 아까 박수 무당에게 잠깐 들러 받아온 부적이다. 그것을 안방 문에 붙였다.
"싫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부적을 문에 붙이자마자 잘자고 있던 여자 작가가 눈을 부릅뜨고 비명을 질러대어, 노련한 김박스도 조금은 놀랐지만 그녀의 모친이 박스를 달랬다.
"쟤가 원래 그, 교회를 다녀서, 부적 같은거 싫어해요. 에휴, 지랄맞은 년. 내 그래서 요 앞에 용한 무당한테 받아온 부적도, 그거 갖고 다니면 남자들이 줄줄 따른대도 그렇게 싫다고 싫다고 지미랄 년, 지 애미를 언제까지 부려먹을라고 시집도 안 가고 저러고 있는지 원"
조금 머쓱해진 김박스는 문을 닫고 나와 거실쪽에서 문에 부적을 붙였다. 이로서 그녀의 어머니와 하는 대화를 악마가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모친이 내온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름이 뭡니까"
"나? 조엄마"
"아뇨아뇨, 따님이요"
"아아, 소설이? 윤, 소설이에요"
상대의 공력을 파악하기 위한 정보로서 직업이나 나이 정도는 오픈하지만, 신원보호를 위해 철저히 이름을 가리고 고지되는 교황청의 비밀통신. 그리고 모친으로부터 이름을 듣자 김박스는 그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아, 혹시 그, 베스트셀러 소설…"
"네네"
데뷔작부터 판매부수 15만권을 넘긴 베스트셀러 작가, 윤소설. 그러나 데뷔작 이후로 압박감이 심해진 탓인지 슬럼프에 빠졌고,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 기억 속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던 그녀가 악마에 영혼을 팔았다니.
"이상해진건 요 얼마 전부터였어요"
슬럼프에 빠져 몇 년 동안이나 힘들어했던 그녀가 구원의 실마리를 잡은 것은 종교의 힘이었다. 독실하게 교회에 매일 나가며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던 소설은 요 얼마 전부터 다시 열심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밥도 안 먹었어요 애가"
방에 틀어박혀서 밥도 안 먹고 글을 쓰길래, 처음에는 쟤가 마음 독하게 먹고 차기작 준비하나보다 해서 흐뭇하게 생각했는데, 방에 틀어막히는 것도 어느 정도지 한달이 넘게 씻지도 않고, 밥은 먹는 꼴을 못 봤는데 밥 안 먹냐면 밥은 먹었다고 하고, 그러던 어느 날…
"밥을 차려놔도 먹지도 않길래 기가 막혀서 아주 잠궈놓은 방문을 열쇠로 벌컥 열고 들어갔더니 글쎄…"
어디서 몰려온 것인지 방 안에 쥐떼가 가득했다고. 그리고 그 쥐들을 산채로 머리부터 우적우적 씹어먹고 있던 것. 상상을 하자 그 그로테스크함에 경악한 김박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사실 더 불쾌한 것은 그보다 방금 전까지 마시고 있던 커피잔 바닥에 벌레가 가라앉아었다는 사실이었다. 벌레의 발호. 마귀의 증명이었다.
"아주 그래서, 내가 기겁을 해가지고서는 얘를 병원에도 데려가봤는데 병원에서는 아주 깨끗하대요. 심지어 정신도 멀쩡하고 뭐 뇌파 검사니 뭐니 다 해봤는데 하나도 뭐 이상이 없대는 거에요. 그래서 얘가 뭐에 씌여서 이러나 싶어서 그 용하다는 무당 집에도 한번 몰래 가서 말을 했더니, 아니 그 무당이 대경실색을 해서, 당장 나가라고, 당장 나가라고 아주 오줌을 지리면서 기겁을 해서 뭐 물어보지도 못했어요. 그때 아 이게 뭔 일이 나도 났구나 싶어서 쟤는 저렇게 침대에 사지를 묶어놓고, 그, 동네에 성당에 가서 거기 신부님한테 넌지시 이야기를 했더니 한달인가 지나서 코쟁이 신부님 몇 분이 오셨더라구요. 그래서 소설이랑 이야기를 하더니 고개를 절래절래 젓더라고. 동네 신부님한테 물어보니까, 소설이는 답이 없더래는거에요. 지 스스로가 타락을 했대나 어쨌더나 하면서"
그러면서 눈물을 훔치는 소설의 모친. 자식이 마귀에 씌였다는데, 종교의 힘으로도 구원을 할 수 없다니 그것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이었으리라, 하고 생각한 김박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각종 도구를 들고 온 가방을 다시 쥐며 말했다.
"어쨌든 어머니, 소설씨는 제가 구하겠습니다. 이 집 안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잠시 어디 이웃집에라도 다녀오세요. 구마의식을 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이 집 안에 들어오시면 안됩니다"
"알겠습니다"
소설의 모친이 얼른 집을 나갔고, 김박스는 이제 본격적으로 구마 의식을 준비했다.
현관 앞에 성수를 뿌렸다. 목에는 마늘 목걸이를 걸었다. 특정 종교에 소속되어 있지 않는다는 것은, 반대로 모든 종교의 권능을 빌릴 수 있다는 특권이기도 했다. 안방 문을 다시 열자, 놀랍게도 윤소설 양은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김박스는 안방 문도 잠그었다.
어딘가 이 세상 사람의 모습이 아닌 듯한 소설의 표정과 느낌에 김박스는 서늘함을 느꼈지만, 곧 가져온 卍자 방석 위에 앉자 마음이 안정됨을 느꼈다.
그리고 가볍게 대화를 시작했다.
"이름이 뭔가"
윤소설은 고개를 슥 돌리더니 웃었다.
"그쪽에 관심 없어요"
김박스는 순간 발끈했지만 그런 말에 휘말리면 자신도 패배하는 것이다.
"이름이 뭐냐고"
그러자 소설은 또 낄낄대며 시비를 걸어왔다.
"이름 김빡스…엥? 사제가 아니네? 아마추어 소설가, 어디보자, 소설가도 아니네? 인터넷에 이상한 소설 같은거 쓰는 뭐 그런거네. 직업도 변변찮고 돈도 없고, 재수는 지질나게 없고 밤낮으로 딸딸이만 치고 모태솔로에 오타쿠에 등골 브레이커에 얼굴은 빻았고 키는 똥자루에 꼬추도 작고, 너 왜 사니?"
어깨를 으쓱한 김박스. 그러자 소설은 웃으면서 또 입을 열었다.
"구마의식이니 뭐니 하는거 제끼고 이 누나랑 잘래? 누나가 잘해줄께"
41세라고는 믿기지 않는 동안, 훤칠한 키에 들어갈데 들어가고 나올데 나온 몸매. 사실 이제껏 시집을 못 간 것이 이상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외모였으니 김박스는 그 유혹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모습에 소설은 웃으며 "얼른, 누나는 지금 사지가 묶여 있어서 안돼. 니가 올라와서 내 옷 좀 벗겨줘"하고 또 유혹을 해왔다.
방 안은 어느새 사향 냄새로 가득했고 강렬한 성적 충동을 느낀 김박스였지만, 그는 교황청에서 인정받은 구마 작가. 한 마디로 그녀의 제안을 물리쳤다.
"나 게이요"
이번에는 소설이 어깨를 으쓱했다. 김박스는 가방에서 돼지기름 먹인 표지의 갱지 노트와 모나미 153 펜, 핫식스 한 캔을 꺼내어 바닥에 놓았다. 그 모습을 본 소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 알았다. 너, 구마 작가로구나"
하이톤의 목소리가 어느새 쉰 노인의 목소리처럼 되어버린 윤소설…아니 마귀는 무서운 눈빛으로 김박스를 쏘아보며 말했다.
"넌 안돼. 이 년의 영혼은 이미 내꺼라고. 정당한 거래로 내가 얻어낸거야. 이제 이 년의 영혼은 내가 가져갈거야"
김박스는 핫식스를 따며 물었다.
"진짜 니가 최고의 글을 쓰게 해준거 맞아? 진짜 최고 맞냐고. 어디 실력으로 붙어볼까?"
마귀는 대답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후후, 김빡스, 너는 안돼. 얘는 이래뵈도 프로 작가야. 재능이나 실력, 경력, 모두 너를 압도하지. 이 년이 프로 전업 작가라는 것을 뻔히 아는데 왜 너같은 무명 작가를 교황청이 보냈을까. 글쎄, 너도 좀 이상하지 않아? 정말로 이 년의 재주와 니 재주가 붙어서 니가 이길 수 있을까?"
김박스는 생각했다.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정 신부라면 몰라도 교황청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세계에서 은밀하게 활동하는 구마 작가 중에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도 있다. 비록 퇴물이 되었다고는 하나, 전직 프로 작가에게 이런 무명의 작가를 임명해서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로 자신의 문장력을 교황청이 그토록 높게 평가하는걸까? 그럴 리 없다. 아니면 그냥 한국인에게 씌인 악마니까 한국인 구마 작가를 보낸 것? 그것도 아니다. 애초에 코쟁이 신부들도 다녀갔고, 한국인 구마작가 중에도 프로 작가들이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너를 쫒아내는데에는 나 정도면 충분하니까"
에너지 드링크 한 캔을 원샷으로 비워버린 김박스는 말했다. 그렇다. 언젠가 정 신부는 말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신의 뜻이라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느낄 수도, 억울하다고 느낄 수도, 그래서 신을 부정하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마저 더 큰 신의 뜻을 위한 안배일 뿐이라고.
"사람들이 가장 간절하게 신을 찾을 때는 언제일까. 행복할 때? 즐거울 때? 아니. 가장 불행할 때라네. 가장 괴롭고 불행할 때 비로소 신을 찾기 시작하지. 결국 그런거야. 사람들이 신을 믿음으로서 진정으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역설적으로 불행이라네. 신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조차도 결국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는 감정 아니던가. 게다가 극단적인 케이스로, 이교도나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가 존재함으로서 그들의 비판이 신을 믿는 이들이 그릇된 믿음으로 빠지지 않게 되는 효과도 가져오고 말이네. 모든 것은 결국 신의 안배일세. 그렇게 이승에서 고통만 받는다면 그게 무슨 의미냐고? 사후세계에서 충분히 보상해주잖나. 엄마가 공부하라고 때리고 강요하는 것이, 당장에야 서운할지 몰라도 결국 성공한 다음에야 이해를 하게 되는 것처럼, 자네도 언젠가는 이해할걸세"
…뭐, 그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역설적으로 악마의 존재는 신의 존재도 인정하는 것. 그렇다면 아마 오늘 내가 이 악마와 싸우게 되는 것도 그 나름의 안배가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진 김박스였다.
"어리석은 놈"
마귀는 한심하다는 듯 다시 침대에 늘어눕더니 물었다.
"그래, 그럼 뭘로 붙어볼까? 어디, 네가 지면 대신에 네 영혼까지 같이 가져가주랴? 그렇잖아? 니가 이기면 이 년 영혼을 돌려받는데, 그만큼 나도 득 보는게 있어야 하는게 아닐까?"
마귀는 제안을 해왔다. 구마 사제들은 보통 이런 경우 절대로 그들의 제안에 딜하지 말라는 교육을 받는다. 악마와의 거래 자체가 영혼의 순수성을 타락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니까. 대신 그만큼 구마의 난이도가 높아지고, 덕분에 실패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당연한 이야기다. 세상에 어느 한 쪽만 손해보는 딜이 쉽게 이루어질 리 없다.
생각해보라. 만약 진정으로 구마 의식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구마 사제들이 악마를 쫒아내는 일이 실존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위대하고 거룩한 신의 힘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며 그 어떤 포교행위보다 가장 효과적인 포교행위일텐데 왜 교황청에서는 그것을 극도로 비밀로 붙일까? 홍보 효과로 그것만큼 좋은 것이 없을텐데? 악마의 존재와 신의 위대함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왜 철저히 구마 의식과 과정 등을 기밀로 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구마의식 대부분이 실패로 끝나기 때문이다.
신과 대립하며 그를 거역하는 존재가 바로 악마다. 당연히 인간의 힘을 아득히 초월하는 존재들일 수 밖에 없다. 신의 힘을 빌려 마귀와 싸운다 하더라도 인간의 그릇으로 온전히 신의 힘을 담아낼 수는 없다. 성경이나 전설 속에 존재하는, 악마와 직접 대립하고 승리를 거머쥔 위대한 성자들의 이야기들 역시 그들이 '성자'이기 때문인 것이다.
절대 다수의 신부와 사제들은 악마와 싸워서 이길 수 없다. 오늘도 내일도 수많은 구마 사제들은 마귀에게 영혼을 유린당하고, 그들이 구하고자 했던 불쌍한 영혼들도 악마의 손에 잃고 만다. -그것이 설령 '신의 안배'에 의해 그런 것일지라도- 비록 신의 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충분히 강력한 것이 마귀의 능력인 것이다. 그런 판에 최소한의 딜도 없이, 억지에 가까운 "넌 악마니까 닥치고 꺼져" 식의 구마의식 성공률이 높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교황청에서도 항상 구마의식을 비밀에 붙일 수 밖에.
"좋다, 내기를 하지. 종목은 내가 결정하지"
하지만 특정 종교에 소속되지 않은 나같은 구마 작가들은 이야기가 다르다. 얼마든지 악마의 직접적인 딜에 응할 수 있다. 이로서 협상은 간단해진다. 이기면 피의식자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 지면? 내 영혼 날리면 그만인 것이다. 뭐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구마 사제들의 "됐고, 닥치고 꺼져" 식의 깡패같은 요구보다는 마귀 입장에서도 훨씬 납득하기 쉬운 결정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조상들도 도깨비들이랑 내기 많이 했잖은가. 똑같은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소설로 붙는다. 다만 마귀인 너를 자유롭게 풀어주면 내가 무슨 해꼬지를 당할지 모르니까 니가 말을 하면 내가 이쪽 노트에 받아적고, 나는 내 글을 이 노트에 적을 것이다. 최종적인 승부는 이 가운데의 노트에서 분신사바로 오만 잡귀들한테 물어봐서 결정한다. 어떤가?"
"좋다"
마귀도 딜에 응했다. 그리고 그렇게 나의 구마 의식은 시작되었다.
3시간째, 녀석은 쉬지도 않고 스토리를 읊어내었다. 받아 적으면서도 감탄을 금하기 어려운 놀라운 완성도의 소설이었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 정말로 탐나는 내용이었다.
"왜, 부러워?"
내 눈빛에서 탐욕이 들여다보였는지 소설, 아니 마귀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대단한 재능이군. 이 소설 정말 재밌어"
설령 지금은 슬럼프에 빠져 퇴물이 되었을 지언정 윤소설은, 지 이름처럼 베스트셀러 소설을 써낸 프로작가다. 그런 이의 재능을 바탕으로 쓰는 소설이 재미없을 리 없다. 3시간 동안 쉴새없이 받아적으면서 손이 꽤나 아픈데도, 그 뒷 내용이 궁금해서 쉬지 않고 받아적고 있을 정도다.
"그렇게"
"그, 러어, 케에. 아우 손 아파. 그리고?"
어느새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마귀는 잠시 생각하다 마지막 문장을 불렀다.
"그는 조용히 문을 닫다"
받아적던 김박스는 물었다.
"닫았다 아니야?"
마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닫다"
김박스는 조금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했다.
"문장이 이상하잖아 멍충아"
그러자 마귀는 콧방귀를 뀌며 웃었다.
"너 정말 초보구나. 원래 마귀는 완벽한걸 안 좋아해. 빈틈을 만들어놓는다고. 정과 사, 양과 음, 보름달과 초승달, 몰라?"
"그렇군. 어쨌든 문우을, 다아았, 다. 어우 손 아파. 다 적었다?"
"그래"
그렇게 먼저 마귀의 작품을 완성했다. 마귀는 말했다.
"이거 당장 들고 나가서 출판사에 맡기면 20만권 판매는 보장하지"
마지막의 유혹 아닌 유혹을 해왔지만, 김박스는 지금 이 내기에 자신의 영혼이 걸려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양할께"
이번에는 김박스의 차례였다. 앞서 너무 완벽한 작품을 감상해서였을까. 스스로 위축되어가는 것을 느끼는 그였다. 도입부만 몇 번을 고쳐서 찢어냈는지 모른다. 꽤나 뻐근한 손으로 글씨를 쓰려니 손이 뻐근해서라도 글이 더 잘 안 나왔다. 그저 유난히 똥이 많은 모나미 153 펜의 똥파워가 자신의 똥글에 전달되길 바랄 뿐이었다.
"후우"
그의 머릿 속에서는 여전히 마귀의 말이 맴돌고 있었다. 어째서 프로 작가의 힘을 끌어내어 쓰고 있는 마귀에게 자신과 같은 무명 아마추어 작가를 배정했을까. 그 놈의 '신의 안배'에 내가 희생되는 시나리오라도 들어있나? 걱정과 불신이 머릿 속을 맴도는 것을 느꼈다.
"아, 재미없다 재미없어"
마귀는 누워서 계속 방해를 하고 있었다. 머리는 뱅뱅 돌고, 손은 아프고, 마음은 조여오는 가운데, 결국 김박스는 7시간 만에 소설을 완성해냈다.
"후우"
그 자리에서 담배를 한 대 맛있게 빤 김박스는 떨리는 손을 털어내며 말했다.
"어쨌든 이제 분신사바로 결정을 짓자고"
어쩌면 영혼을 털릴지도 모르는 상황임에도, 김박스는 꽤 자신있어보였다. 마귀는 혀를 차면서 "니 영혼은 지옥으로 데려가도 안 부려먹고 그냥 고문만 존나 시킬거야" 하고 경고했다.
"분신사바 분신사바 오딧세이 그랏세이…"
마귀를 내쫒기 위해 또 다른 잡귀를 불러와 평가를 맡기는 이 기이한 구마의식. 소설의 몸에 들어와있는 마귀가 꽤나 하이레벨의 마귀인지, 오만 잡귀들이 접근을 하지 않았다.
"니 존나 거물인가 보구나"
마귀는 결코 자신의 정체를 발설하지 않는다. 자신의 진짜 이름을 퇴마사나 구마 사제, 구마 작가가 아는 순간 신의 이름을 빌려 명령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녀석은 대꾸하는 대신 "계속 하자고" 하면서 팔목이 묶인 손으로 또다시 나와 함께 펜을 잡고 분신사바를 시작했다.
그러기를 얼마였을까.
"오셨나요?"
라는 김박스의 질문에 펜이 스스슥 그렇다는 쪽으로 움직였다. 혹시나 글도 못 읽는 문맹 잡귀나, 못 배워서 글의 재미를 모르는 미개한 멍청이 귀신일까봐 간단히 신상을 캐보니 서울대학교에 해외 명문 대학원까지 나온 귀신이었다. 마침 전공도 어문학 계통이었다.
"배운 귀신이네. 좋아. 야, 이 소설이 마귀가 쓴 소설이고, 이 소설은 내가 쓴 소설이야. 누가 쓴 글이 더 재미있는지 말을 해보아라"
그 질문을 하자, 잠시 사라락 하는 바람이 한줄기 불었고 약 5분 뒤, 펜이 움직였다.
김...박...스....
김박스의 얼굴 만면에 미소가 피어났고 윤소설, 아니 마귀는 묶인 손발을 바둥거리며 "말도 안돼!"하고 소리쳤다.
"말도 안 돼! 니 따위가 이 년의 소설보다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어! 이 더러운 개자식!"
마귀에게 더럽다느니 하는 말을 들으니 조금 기분이 나빠진 김박스였지만, 어쨌든 승부는 났다. 이제는 물릴 수 없다. 게다가 심판이 되어준 배운 귀신은, 마귀가 호통을 치자 곧바로 도망쳐버렸다.
"자, 내가 이겼으니 넌 소설씨의 영혼을 다시 돌려다오"
김박스의 말에 마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물었다.
"그보다 네 정체가 더 놀랍군. 어떻게 이 년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쪽으로 내가 힘을 썼는데도 더 멋진 작품을 써낸거지? 혹시 네가 무슨 교황청 비밀무기쯤 되는건가?"
김박스는 웃으며 책을 들어보였다.
"자, 보거라"
몇 페이지를 넘겨 보여주자, 놀랍게도 한 권은 처음 몇 장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런 내용도 없었다. 그저 '아 심심하다, 지루하다, 이 병신 같은 일' 같은 푸념만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
"무슨 짓을 한거야? 설마 너?"
경악을 금치 못하는 마귀. 그렇다. 김박스는 심판 잡귀에게 '마귀가 쓴 글을 자신이 쓴 글이라고 말했고, 자신이 쓴 글을 마귀가 쓴 글'이라고 말해서, 심판 잡귀가 김박스를 고르게 만든 것이다.
"거짓말은 인간의 권능이니까"
"이 더러운 사기꾼! 이건 공정하지 않은 결과다! 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더러운 영혼아!"
마귀는 울부짖으며 온갖 욕설을 다했지만, 이미 승부는 물건너간 상태였다.
"너도 어차피 인간의 연약한 마음을 파고 들어 공정하지 못한 거래를 제안한건데 뭘 그리 억울해하나. 소설 몇 개에 영원토록 지옥불구덩이에서 굴려먹을 타락이라니, 그거야말로 진정한 불공정거래지. 어쨌든 진건 진거니까 너도 이제 지옥으로 꺼지거라"
"언젠가 너의 영혼을 꼭 먹어주마"
"그건 니 바람일 뿐이지"
잠시 뒤, 소설씨는 입과 귀에서 검은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커헉, 하고 토해냈다. 내 얼굴과 옷은 물론 책에도 다 피가 튀었고, 이불과 온 방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곧이어 방 안의 기운이 어딘가 점점 밝아지더니 방 안에 튀었던 피 역시 무언가의 환상이었던 듯 전부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윤소설 씨는 곧 "으음"하며 눈을 떴다.
"수고했네"
며칠 뒤, 김박스는 모든 상황을 잘 정리한 후 구글 번역기로 잘 번역해서 로마 교황청에 보고서를 전달했고, 정 신부님께도 보고했다.
"아닙니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겸손하기도. 그보다 그 악마가 썼다는 소설 내용이 궁금하구만. 재밌을 것 같은데. 정말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네"
그러자 김박스는 픽 웃었다.
"저도 아쉽습니다. 윤소설 양이 토한 피가 책에 뿌려지니까, 부정이 탔는지 책이 순식간에 부식되어 다 내용도 알아볼 수도 없게 되었더랬지 뭡니까. 나중에 기억이나 더듬어서 표절해볼까 싶네요. 하하"
정 신부는 김박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쨌든 고맙네. 우리 사제들이 못하는 일을 자네가 해주었으니. 길 잃은 어린 양을 자네가 제대로 돌려놓았어"
"41살이면 어린 양은 아니지 않을까요"
"허허, 저 위의 계신 분이 보시기에 우리 모두는 어린 양이라네. 어쨌든 수고했네"
"네, 감사합니다"
"그럼 잘 가보게"
"그럼 몸 조심 하십시오"
인사를 나누고, 김박스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성당 입구쪽으로 걸어나와, 안을 지그시 바라보며 걸려있는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용히 문을 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