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쟁을 피해 외우주 너머로 향한 탈출선은 영원에 가까운 긴 여행 끝에 마침내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행성을 발견해냈다. 인공지능으로 조종되는 탈출선은 탐사 드론이 보내온 정보를 조합하여 최종적으로 기착을 결정했고 착륙을 개시했다.
쿠쿵!
그러나 착륙 지점의 기반이 예상보다 약했기에 균형을 잃은 탈출선의 랜딩 장치 한쪽 다리가 부러졌고, 하드 랜딩 과정에서 재추진 장치와 반중력 장치 및 2번 엔진이 고장나 우주선으로서의 기능은 이제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취이익-
다행히 냉동 모듈에서 기나긴 잠을 자고 일어난 탈출선의 탑승자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다른 장치나 보급품에도 이상은 없었다. 가장 중요한 '인류 재생산 장치'에도 전혀 이상이 없었다. 탑승자들은 그들은 서둘러 이 새로운 행성에서의 생존 기반을 꾸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행성은 대기 중의 산소 농도가 다소 높아, 인류는 탈출선 내의 응급 의료 장치로 이 행성에 맞게 폐 기능을 보완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정착해서 생존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인류의 DNA와 수정란들을 담고 있는 재생산 장치도 자체 인공지능으로 외부 정보를 받아들였다. 이제 새롭게 태어나는 인류는 이 행성에 최적화 된 몸을 갖고 태어날 것이다.
모든 이들은 탐사 드론이 분석해 온 이 행성 내의 위협적인 질병과 세균, 박테리아 및 독성 물질들에 대한 정보를 기반으로 인공지능이 제조한 백신을 접종하였다. 이로서 새로운 행성에서 새로운 문명을 이룩할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었다.
약 500여 명에 이르는, 어쩌면 인류 최후의 생존자들일지도 모르는 이들은 빠르게 행성에 적응해나갔다. 은하계 전체를 무대로 항성간 여행은 물론 최첨단의 과학 문명을 누리고 살던 이들이 이러한 원시행성에서 적응해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위대한 발전을 이룩한 가장 진보된 문명의 후예들인만큼 그들은 눈부신 개척정신으로 자신들의 미래도 개척해나갔다.
생존 인류들은 탈출선에서 꺼내온 거주 모듈로 합숙소를 지었으며, 탐사 드론들이 채취해 온 기초 자원들로 물자를 생산해냈다. 섭취가 가능한 식품과 생물체들을 잘 골라내어 식량도 확보하기 시작했다. 건축 드론들은 탈출선을 중심으로 약 3Km에 걸쳐 이들에게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기지를 건설했다. 이미 아득히 오래 전 생식을 그만둔 인류를 대신하여, 인류 재생산 장치는 새로운 인류 세대의 양산을 시작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500명이던 인구 수는 4,200명으로 늘어났고, 거주 구역은 탈출선을 중심으로 근방 120km로 넓어졌다. 나름 최대한 안정적으로 문명의 개화를 시작했지만 겨우 그 정도가 한계였다. 큰 문제가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문명 부흥의 속도가 너무 더뎠다. 이 거주지 근방에 각종 고급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자원의 부족은 심각한 에너지 위기를 불러왔다. 철이나 구리, 석탄 등, 이 원시행성에서 쉽게 조달 가능한 자원을 통해 만들 수 있는 기초 생산물 이외의 방사능 전지나 중력 제어입자 등 고급 소모품들은 더이상 생산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참혹한 것이었다.
탈출선 내의 보급품이 거의 소진되자, 얼마 남지 않은 소모품의 용처를 두고 생존자들은 격렬한 갈등을 빚었고, 결국 둘로 나뉘어 투쟁을 벌이다 어이없게도 거의 모든 드론과 생산 설비들을 날려버렸다. 인류 재생산 장치가 파괴되지 않은 것은 기적이었지만, 탈출선이 가루가 되었고 거주 모듈도 더이상 제 구실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파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을 전후해서, 전례없는 긴 겨울이 시작되었다. 준비도 부족했고, 그것을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연약했던 그들은 혹한이 시작된 이래로 채 10년도 되지 않아 결국 모두 세상을 떠났다.
1,000년이 지났다.
"우리리리리리, 까르르르르르호! 우바바바하!"
"우, 디, 파하, 오우쓰후!"
인류 재생산 장치는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었다. 첫 세대가 모두 죽어버린 결과 완전히 교육이 단절된 탓에 문명이 쇠퇴해버린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원시적 삶 속에서 살아남은 인류의 생존력은 전보다 더욱 강해졌다. 이제 인류는 망가진 드론을 대신하여 근방 100km까지 직접 정찰을 나가고 사냥을 나갔다.
더욱 고무적인 일은, 아득히 오랜 세월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던 인류 스스로의 번식행위가 이루어져 이제 인류는 그 스스로 출산을 해나간 것이다. 덕분에 인류 재생산 장치와 함께 종의 생산력은 더욱 증진되었다.
5,000년이 흘렀다.
"쓰후 쓰후!"
기후가 변했다. 이제는 인류가 살 수 없을만큼 냉혹한 추위가 불어닥쳤다. 너무나 오랜 기간 이 곳에 정착해서 산 인류지만 이제 곳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었다. 십만 단위의 인류는 따뜻한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났다. 다른 대부분의 물자는 어떻게든 옮겨서 가져갔지만, 건축 드론도 없이 몇 톤이 넘는 인류 재생산 장치를 옮길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인류에게는 큰 걱정이 없었다. 이제 그 '신의 도구'가 없어도 얼마든지 아이는 낳을 수 있었으니까.
버려진 '인류 재생산 장치'는 여전히 자신이 할 일을 계속했다. 외부의 기온 변화를 감지한 기계는 새롭게 태어날 인류에게 두 번째 DNA 조정을 가했다. 새롭게 태어나는 인류는 기존의 인류보다 조금 체구가 작고, 몸에 털도 많았다. 야생성도 강화되었다. 혹한의 환경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에너지 소모를 줄이기 위해 뇌의 체적이 조금 작아졌다.
"우끼이!"
그로 인한 기능적 손실이 만만치 않았지만 언젠가 이 혹독한 추위가 가신다면 그때는 진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원래의 인류로 돌아갈 수 있도록 DNA에 정교한 프로그래밍이 가해졌다.
그리고 16만 년이 흘렀다.
추위는 더 혹독해졌다. 완연한 빙하기에 접어들었다. 이 행성의 거의 모든 생명체들이 죽어갔다. 개체수는 말할 것도 없고, 종의 수 자체가 줄기 시작했다. 인류 재생산 장치가 '생존이 불가능한 상황' 때마다 가해왔던 인류 종의 유전자 개조도 벌써 12,720회에 이르렀다. 극적으로 뇌의 체적을 줄이고 털로 온 몸을 덮고 야생성을 극도로 강화한 버전조차 살아남기 힘들었다.
당연히 최초로 생산된 '폐만 개조된 인류'는 이미 옛날 옛적에 멸종된지 오래다. 인류 재생산 장치는 인류의 DNA에 점점 더 강화된 기능을 넣기 시작했다. 오랜 개조의 노하우 덕분일까. 인류 재생산 장치는 이 시점을 전후해서 가장 성공적인 결과물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지이잉-
인류 재생산 장치가 점멸하더니 또 한번의 출산이 이루어졌다. 출산구에는 고드름까지 맺혀있었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또 많은 생명이 태어났다.
그로부터 2억 5천만년이 지났다.
서서히 날씨가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한 두 종을 제외하고, 그동안 생산해 왔던 거의 모든 버전의 인류는 그 기나긴 겨울 속에서 덧없이 죽어갔지만 여전히 인류 재생산 장치는 그 역할을 계속하고 있었다.
날씨가 조금 따뜻해짐에 따라서 인류 재상산 장치는 이제 생존력보다 고등생물로서의, 지능과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에 조금 더 무게를 두기 시작했다. '원래의 인류'에 비하면야 아직도 다소 체구도 작고 몸에 털도 많은데다 뇌의 용량도 작았지만, 적어도 진화를 통한 발전 가능성을 다시 DNA에 새겨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몇 년 후, 인류 재생산 장치는 고장이 났다.
가장 발전된 문명의 가장 위대한 기술로 생산된 매우 튼튼한 기계였지만, 지각 변화로 인한 암반 붕괴와 화산 폭발에 의한 용암 노출이라는 상황까지 견딜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10만 년 가까운 시간이 또 흘렀다.
이제는 빙하기가 완전히 끝났다. 대지에는 온갖 동식물이 번성하기 시작하였으며, 과거 인류 재생산 장치가 생산해 냈던 '인간'들은 멸종의 위기를 견뎌내고 종으로서 완전히 그 전성기를 누림으로서 행성의 패권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이제 이 행성 전역에 살지 않는 곳이 없고, 그 개체 수 역시 셀 수 없을만큼 번성했다.
게다가 인류 재생산 장치의 성공은 한 차례에 그치지 않았다.
앞서 말한 인간 종의 완벽한 유전적 성공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두 번째로 성공한 인간 종 원래의 버전에서 자체적인 진화를 해내고 '문명을 이룩'함으로서도 그 누구 못지 않은 거룩한 업적을 이뤄내는데 성공했다.
이족보행을 시작했고 온 몸의 털도 많이 줄어든 이 '두번째 성공'의 인간 종 역시도 행성 곳곳에 퍼져 살기 시작했고, 개체 수도 70억 정도는 되는 셈이니 성적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 폭력성만큼은 버리지 못한 덕분에 그들은 오늘도 '종(種)으로서' 자신보다 더 성공한 또 하나의 인류를 시샘하여 그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곤 한다.
"이 놈의 바퀴벌레가!"
라는 의미불명의 고함과 말이다.
- 끝 -
쿠쿵!
그러나 착륙 지점의 기반이 예상보다 약했기에 균형을 잃은 탈출선의 랜딩 장치 한쪽 다리가 부러졌고, 하드 랜딩 과정에서 재추진 장치와 반중력 장치 및 2번 엔진이 고장나 우주선으로서의 기능은 이제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취이익-
다행히 냉동 모듈에서 기나긴 잠을 자고 일어난 탈출선의 탑승자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다른 장치나 보급품에도 이상은 없었다. 가장 중요한 '인류 재생산 장치'에도 전혀 이상이 없었다. 탑승자들은 그들은 서둘러 이 새로운 행성에서의 생존 기반을 꾸리기 시작했다.
새로운 행성은 대기 중의 산소 농도가 다소 높아, 인류는 탈출선 내의 응급 의료 장치로 이 행성에 맞게 폐 기능을 보완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정착해서 생존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인류의 DNA와 수정란들을 담고 있는 재생산 장치도 자체 인공지능으로 외부 정보를 받아들였다. 이제 새롭게 태어나는 인류는 이 행성에 최적화 된 몸을 갖고 태어날 것이다.
모든 이들은 탐사 드론이 분석해 온 이 행성 내의 위협적인 질병과 세균, 박테리아 및 독성 물질들에 대한 정보를 기반으로 인공지능이 제조한 백신을 접종하였다. 이로서 새로운 행성에서 새로운 문명을 이룩할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었다.
인류 재생산 장치
약 500여 명에 이르는, 어쩌면 인류 최후의 생존자들일지도 모르는 이들은 빠르게 행성에 적응해나갔다. 은하계 전체를 무대로 항성간 여행은 물론 최첨단의 과학 문명을 누리고 살던 이들이 이러한 원시행성에서 적응해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위대한 발전을 이룩한 가장 진보된 문명의 후예들인만큼 그들은 눈부신 개척정신으로 자신들의 미래도 개척해나갔다.
생존 인류들은 탈출선에서 꺼내온 거주 모듈로 합숙소를 지었으며, 탐사 드론들이 채취해 온 기초 자원들로 물자를 생산해냈다. 섭취가 가능한 식품과 생물체들을 잘 골라내어 식량도 확보하기 시작했다. 건축 드론들은 탈출선을 중심으로 약 3Km에 걸쳐 이들에게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기지를 건설했다. 이미 아득히 오래 전 생식을 그만둔 인류를 대신하여, 인류 재생산 장치는 새로운 인류 세대의 양산을 시작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500명이던 인구 수는 4,200명으로 늘어났고, 거주 구역은 탈출선을 중심으로 근방 120km로 넓어졌다. 나름 최대한 안정적으로 문명의 개화를 시작했지만 겨우 그 정도가 한계였다. 큰 문제가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문명 부흥의 속도가 너무 더뎠다. 이 거주지 근방에 각종 고급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자원의 부족은 심각한 에너지 위기를 불러왔다. 철이나 구리, 석탄 등, 이 원시행성에서 쉽게 조달 가능한 자원을 통해 만들 수 있는 기초 생산물 이외의 방사능 전지나 중력 제어입자 등 고급 소모품들은 더이상 생산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참혹한 것이었다.
탈출선 내의 보급품이 거의 소진되자, 얼마 남지 않은 소모품의 용처를 두고 생존자들은 격렬한 갈등을 빚었고, 결국 둘로 나뉘어 투쟁을 벌이다 어이없게도 거의 모든 드론과 생산 설비들을 날려버렸다. 인류 재생산 장치가 파괴되지 않은 것은 기적이었지만, 탈출선이 가루가 되었고 거주 모듈도 더이상 제 구실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파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을 전후해서, 전례없는 긴 겨울이 시작되었다. 준비도 부족했고, 그것을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연약했던 그들은 혹한이 시작된 이래로 채 10년도 되지 않아 결국 모두 세상을 떠났다.
1,000년이 지났다.
"우리리리리리, 까르르르르르호! 우바바바하!"
"우, 디, 파하, 오우쓰후!"
인류 재생산 장치는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었다. 첫 세대가 모두 죽어버린 결과 완전히 교육이 단절된 탓에 문명이 쇠퇴해버린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원시적 삶 속에서 살아남은 인류의 생존력은 전보다 더욱 강해졌다. 이제 인류는 망가진 드론을 대신하여 근방 100km까지 직접 정찰을 나가고 사냥을 나갔다.
더욱 고무적인 일은, 아득히 오랜 세월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던 인류 스스로의 번식행위가 이루어져 이제 인류는 그 스스로 출산을 해나간 것이다. 덕분에 인류 재생산 장치와 함께 종의 생산력은 더욱 증진되었다.
5,000년이 흘렀다.
"쓰후 쓰후!"
기후가 변했다. 이제는 인류가 살 수 없을만큼 냉혹한 추위가 불어닥쳤다. 너무나 오랜 기간 이 곳에 정착해서 산 인류지만 이제 곳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었다. 십만 단위의 인류는 따뜻한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났다. 다른 대부분의 물자는 어떻게든 옮겨서 가져갔지만, 건축 드론도 없이 몇 톤이 넘는 인류 재생산 장치를 옮길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인류에게는 큰 걱정이 없었다. 이제 그 '신의 도구'가 없어도 얼마든지 아이는 낳을 수 있었으니까.
버려진 '인류 재생산 장치'는 여전히 자신이 할 일을 계속했다. 외부의 기온 변화를 감지한 기계는 새롭게 태어날 인류에게 두 번째 DNA 조정을 가했다. 새롭게 태어나는 인류는 기존의 인류보다 조금 체구가 작고, 몸에 털도 많았다. 야생성도 강화되었다. 혹한의 환경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에너지 소모를 줄이기 위해 뇌의 체적이 조금 작아졌다.
"우끼이!"
그로 인한 기능적 손실이 만만치 않았지만 언젠가 이 혹독한 추위가 가신다면 그때는 진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원래의 인류로 돌아갈 수 있도록 DNA에 정교한 프로그래밍이 가해졌다.
그리고 16만 년이 흘렀다.
추위는 더 혹독해졌다. 완연한 빙하기에 접어들었다. 이 행성의 거의 모든 생명체들이 죽어갔다. 개체수는 말할 것도 없고, 종의 수 자체가 줄기 시작했다. 인류 재생산 장치가 '생존이 불가능한 상황' 때마다 가해왔던 인류 종의 유전자 개조도 벌써 12,720회에 이르렀다. 극적으로 뇌의 체적을 줄이고 털로 온 몸을 덮고 야생성을 극도로 강화한 버전조차 살아남기 힘들었다.
당연히 최초로 생산된 '폐만 개조된 인류'는 이미 옛날 옛적에 멸종된지 오래다. 인류 재생산 장치는 인류의 DNA에 점점 더 강화된 기능을 넣기 시작했다. 오랜 개조의 노하우 덕분일까. 인류 재생산 장치는 이 시점을 전후해서 가장 성공적인 결과물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지이잉-
인류 재생산 장치가 점멸하더니 또 한번의 출산이 이루어졌다. 출산구에는 고드름까지 맺혀있었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또 많은 생명이 태어났다.
그로부터 2억 5천만년이 지났다.
서서히 날씨가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한 두 종을 제외하고, 그동안 생산해 왔던 거의 모든 버전의 인류는 그 기나긴 겨울 속에서 덧없이 죽어갔지만 여전히 인류 재생산 장치는 그 역할을 계속하고 있었다.
날씨가 조금 따뜻해짐에 따라서 인류 재상산 장치는 이제 생존력보다 고등생물로서의, 지능과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에 조금 더 무게를 두기 시작했다. '원래의 인류'에 비하면야 아직도 다소 체구도 작고 몸에 털도 많은데다 뇌의 용량도 작았지만, 적어도 진화를 통한 발전 가능성을 다시 DNA에 새겨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몇 년 후, 인류 재생산 장치는 고장이 났다.
가장 발전된 문명의 가장 위대한 기술로 생산된 매우 튼튼한 기계였지만, 지각 변화로 인한 암반 붕괴와 화산 폭발에 의한 용암 노출이라는 상황까지 견딜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10만 년 가까운 시간이 또 흘렀다.
이제는 빙하기가 완전히 끝났다. 대지에는 온갖 동식물이 번성하기 시작하였으며, 과거 인류 재생산 장치가 생산해 냈던 '인간'들은 멸종의 위기를 견뎌내고 종으로서 완전히 그 전성기를 누림으로서 행성의 패권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이제 이 행성 전역에 살지 않는 곳이 없고, 그 개체 수 역시 셀 수 없을만큼 번성했다.
게다가 인류 재생산 장치의 성공은 한 차례에 그치지 않았다.
앞서 말한 인간 종의 완벽한 유전적 성공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두 번째로 성공한 인간 종 원래의 버전에서 자체적인 진화를 해내고 '문명을 이룩'함으로서도 그 누구 못지 않은 거룩한 업적을 이뤄내는데 성공했다.
이족보행을 시작했고 온 몸의 털도 많이 줄어든 이 '두번째 성공'의 인간 종 역시도 행성 곳곳에 퍼져 살기 시작했고, 개체 수도 70억 정도는 되는 셈이니 성적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 폭력성만큼은 버리지 못한 덕분에 그들은 오늘도 '종(種)으로서' 자신보다 더 성공한 또 하나의 인류를 시샘하여 그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곤 한다.
"이 놈의 바퀴벌레가!"
라는 의미불명의 고함과 말이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