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다국적 제약업체 노바스틱스는 체내의 노화된 세포를 제거하는 기전을 가진 특수화합물 신약에 대한 개발 정보를 전격적으로 발표한다. 물론 동물실험 단계였지만 그 효과는 상당히 극적이라 쥐의 경우 최대 75%의 수명 연장 효과가 있었고, 돼지나 원숭이의 경우 45%의 수명 연장 효과가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조직 및 장기 기능의 노화가 상당히 지체된 것은 물론 근육이나 신장, 혈관 내 염증도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종양이 억제됨은 물론 근위축성 질환에 이르러서는 일부 손상된 조직이 복구되는 효과까지 보였다고 했다.
이후 며칠동안 노바스틱스의 주가는 급등하는데… 여기까지라면 아주 흔한 '밝고 희망찬, 그러나 그 이후 소식은 감감무소식이 되어버리는' 의학 뉴스에 불과한 일. 실제로 이후 근 15년이 지나도록 그 어떤 후속보도나 관련 소식은 없었고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잊혀진지 오래였다.
"ABP20877…"
상당히 술이 많이 들어간 상태였음에도, 박사는 꽤 정확한 발음으로 약물의 코드명을 언급했다.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 인생 최고의 쾌거라고 할 수 있지"
이어진 약 40여분 간의 긴 설명을 적당히 요약하자면, 약물의 효과는 상당히 탁월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의 보도자료 내용은 한치의 과장도 없는 것이었고 연구는 임상에 들어가도 좋은 수준의 결과를 보이고 있었다.
다만 당시 사람들이 흔히 오해했던 것처럼 "생명연장의 꿈"과는 상당히 괴리가 있었다. 우선 신경계나 기억력 등 뇌 조직의 노화에는 거의 전혀 효과가 없었다(오히려 약물의 장기투여시 기억력 퇴행현상까지 보였다). 게다가 후속 연구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미 발생 단계의 종양 억제에는 탁월했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고 나면 오히려 종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부작용을 보여 결국 임상으로의 진행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ABP20877 덕분에 나온 신약만 4개야"
당시 ABP20877가 보여준 효과는 연구소 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수준으로 상당한 것이었기에 다양한 측면에서의 후속 연구가 이어졌고 그 기전과 효과를 활용한 신약이 몇 개나 만들어졌다.
신부전증, 에머리-드레이푸스 근위축증, 크론병, 혈관염증 등에 대한 신약들이 그것이었다. 게다가 그 기전을 활용한 연구 단계의 약물까지 감안하면 그 약물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런가?"
박사는 자신의 잔에 위스키를 채우며 말을 이어갔다.
"돈? 명예? 노벨상이 아니라 더한 뭐를 줘도 그게 어디 마음에 차겠냐고. 사람 목숨을 쭉 늘리는 장수의 꿈이 눈 앞에 왔다가 다시 떠나버린 느낌인데, 신약 몇 개따위. 회사 입장에서나 좋을 일이지 나에게는 간 조절에 실패한 스프에서 고기 몇 점 간신히 건져먹는거나 다름 없는거 아닌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박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근 10년 만에 회사에 요구했지. ABP20877의 진정한 후계 약물 연구를 진행하고 싶다고. 하지만 회사는 이미 노화 방지, 생명 연장 같은 꿈에는 별 관심이 없었어. 치료용 약물, 또는 미용을 위한 약물 연구 쪽을 바랬던거지. 내가 보완하고 새로 연구하고 싶은 분야하고는 완벽하게 지향점이 달랐고, 계속 마찰을 빚다가 새 사장 눈 밖에 났어. 결국 회사를 나오게 됐지. 나보고 탈모 연구를 하던지, 아니면 연구실에 나오지 않아도 좋다는거야. 돈은 유급휴가의 개념으로 계속 지급한다고 약속했지만 내가 사표를 던졌지. 돈이라면 나도 충분히 있었으니까, 그런 굴욕을 당할 이유가 없지"
"그래서…"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법적으로 근 10년 간 동종업계로는 이직이 불가능하니까. 애초에 내가 목표로 하는 수준의 연구를 받아낼 수 있는 회사 자체가 몇 개 안 되기도 하고, 학교쪽으로는 알다시피 내 전과도 있어서…"
"압니다"
나는 짧게 대답했다. 박사는 과거 연구원 시절, 성추행 혐의로 체포되어 집행유예를 받은 바 있다. 촉망받는 핵심 연구원에 대한 노바스틱스의 그늘이 그를 감싸주지 않았다면 그의 커리어와 인생은 아마 거기에서 끝장 났으리라. 물론 이후 대학이나 명망 높은 연구소로의 이직 가능성도 사라진 것은 맞지만.
"그때 날 불러준 곳이 여기 러시아였네"
원래는 고향인 코네티컷으로 돌아가 아무도 부양할 필요가 없는 골든 싱글로서의 화려한 노년을 꿈꾼 그였지만 러시아의 국영 연구소에서 그를 원했다. 무려 푸야친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온 러시아 정보기관 요원과 후스타노비치 러시아 국영 생명공학연구소장의 설득에 박사는 마음을 굳혔다.
"러시아 국영 연구소의 소장 자리라는건 미국에서처럼 단순히 위에서 낙하산 타고 내려와 후원금이나 받자고 얼굴마담 하는 자리가 아니야. 거의 정치가나 다름 없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어쨌든 나는 말했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수명을 획기적으로 늘리고자 하는 연구이고, 천문학적인 연구비용이 들 것이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다고 말했더니 그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뭐라던가요"
"거기 연구소 비용은 북해 유전에서 나오는거라고 하더구만. 실패하면 또 다시 해보면 되지 뭐가 걱정이냐고 하더라고. 그래서 바로 마음을 굳혔지.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노바스틱스에 한방 먹이고 싶었어. 내 연구만 할 수 있으면 어디던 상관없었지"
'여기'가 아닌 '거기'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시점에서 박사의 진정한 마음이 조금은 엿보였다. 나는 수첩에 작게 메모를 했다.
"간첩죄니 뭐니 언론에서 시끄럽게 떠들었다지만, 알게 뭔가. 그런 논리라면 90년대에 우리 연구소에만도 넘쳐나던 그 러시아 연구자들은 다 뭐고? 안 그런가?"
"음,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사실 그 문제 때문에 여기 박사님 인터뷰 하러 오는게 두려웠습니다. 지난 주에, 공항에서 출발하기 직전에 편집장님한테 CIA가 따라붙지는 않을까요, 하고 전화로 농담했더니 정색하면서 그럼 CIA에 보고도 안 하고 이런 인터뷰를 진행하는 줄 알았나? 하고 말하더군요. 물론 그것도 농담이었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걱정할 필요 없지만요"
연구실 밖에서 쿵쿵대는 소음이 다시 이어졌지만, 박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신경쓰지 말게" 라는 한마디와 함께 말을 이어나갔다.
"어쨌거나 이 연구소에 처음 왔을 때는 깜짝 놀랐다네. 나쁜 의미에서 말이야. 시설도 너무 낡고, 연구 인력도 너무 적었어. 조금은 '속았다' 같은 감정이 든 것도 사실이지만, 다행히도 푸야친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더구만. 내가 요청하는건 곧바로 지원이 됐어. 그것도 무조건 일주일 안으로. 기자재 운반을 위해서 활주로까지 깔았는데야 더 할 말이 없지"
"대통령의 기대가 컸군요"
그리고 그 말에 박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갑자기 한참을 무언가 말을 잇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위스키잔을 들이키던 그가 말했다.
"처음 2년은 나도 패기만만했지. 보기좋게 ABP20877의 후계 약물을 만들 생각하면서 꿈자리에 들었을 정도로.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어. 드디어 나에게도 온거지. 슬럼프라는게. 아주 뒤늦게 오긴 했지만 말이야"
대학교 연구실의 흔한 노교수들처럼, 박사의 머리도 능력도 정체기가 와버린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가지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만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자본과 권력이 없는 젊은 연구자들. 고고한 학자로서의 명망과 연구실 내의 위계와 권력으로 그들을 짓누르면서 관리과 검토라는 명목 하에 그 아이디어들을 교묘하게 가로채기에 박사는 확실히 정치적인 테크닉도 부족했고, 그 상대들도 군인처럼 생각하고 기계처럼 일하는 러시아 연구원들이었다.
"6개월 정도를 오기로 더 힘써봤지만 지지부진했고, 나는 초조함을 넘어 약간의 강박을 갖게 됐지. 그러다가 결국 솔직하게 소장한테 다 털어놓았네. 연구가 벽에 부딪힌 것 같다고. 그랬더니 소장은 처음에는 웃으면서 너무 초조할 것 없다고, 정 힘들면 다른 연구를 함께 진행해도 좋다고 했는데, 이미 그 정도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어 나는. 그냥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지"
"그랬더니?"
"크게 웃으면서 선택지가 셋이 있다고 하더구만. 하나는 미국으로 돌아가 간첩죄로 미국 감방에서 30년 썩는 것, 또 하나는 횡령죄로 러시아 감방에서 10년 썩는 것, 또 하나는 무어라도 성과를 하나라도 내놓는 것. 사실 그때 알았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말이야. 여기 연구소에 얼마나 큰 돈이 투입됐는지 아냐면서 웃는데…"
"그래서…"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서 솔직함은 미덕이지만, 러시아에서의 솔직함은 자신을 망치는 바보짓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네. 적당히 성공할 듯 하다가 실패하는 식으로 애간장만 태우는 슬픈 천재의 연기를 주욱 했더라면 10년이 아니라 20년, 30년, 내가 죽을 때까지 여기서 아무 성과 없이 밥만 축내도 상관이 없었을거야. 여기는 다 그런 식으로 하니까. 하지만 내 머리는 이미 굳어서 돌이 되어버렸소, 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은 이상 나는 언제 폐기처분 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퇴물이 되어버린 셈이었지. 나는 미-러 간의 외교 마찰을 일으킨 유명인사였고 러시아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협상카드로 쓸 수 있는 좋은 카드에 불과하게 된거야. 그러니 나도 일단 여기 붙어서 살려면 뭐라도 밥값을 내놓아야 했지"
나는 이제서야 근본적인 질문을 물었다.
"그게 지금 상황과 관계가 있나요?"
박사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ABP20877이 사람 몸에 들어가고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되는 줄 아나"
난 고개를 저었다.
"ABP20877를 만들었지. ABP20877를 기반으로 더 연구되어 나온 신약들이야 세상이 모두 다 알지만 정작 그 원형이 되는 ABP20877은 노바스틱스의 연구실 사람들 이외에는 세상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이니까. 소장한테 ABP20877의 동물 실험 결과를 조작한 보고서를 올렸어. 극비문서로 만들어서 말이지. 러시아는 웃긴 것이, 윗 사람이 '극비'라고 한 마디 붙여놓으면 결코 언급조차 하지 않아. 진실을 밝혀도 처벌을 받게 되니까 말이야. 누가 알지도 못했지만, 설령 안다고 해도 밀고자가 될 수 없다고."
"거기까지는 완전범죄였군요"
"그래. 소장은 마치 오페라 공연이라도 본 것처럼,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거의 30초를 박수를 치더구만"
박사는 문서 몇 개를 열쇠로 잠근 서랍에서 꺼내어 보내주었다.
"하지만 놀라운건 그 다음이지. 동물실험이 완벽히 성공했다는 보고서를 올린 날이 1월 7일이야. 임상이 언제 시작된 줄 아나?"
"글쎄요"
"1월 7일이야"
"보고서를 올린 날, 곧바로 사람에게 실험을 했다는 건가요?"
"그게 무슨 의미인 줄 아나?"
내가 고개를 젓자, 박사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동물 실험을 위해 내가 만든 ABP20877은 고작해야 500ml도 안 돼. 그걸 하루 만에 새로 만들어서 2백 명이 넘는 사람한테 주사한다는건 불가능하지. 결국 그 말은, 그 이전에 ABP20877을 나 몰래 연구소에서 따로 만들어 두었다는 소리라고. 즉, 연구소에서는 내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따로 몰래 감시하고 있었던 거고 ABP20877의 효능도 분명 어느 정도는 파악했을거라는 얘기야"
"그 말은…"
"ABP20877가 결코 완벽한 약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에게 주사했다는거야"
"그러면 결국 사람한테도 문제가 생길텐데, 소장에게도 책임이 가는 것 아닌가요?"
"임상실험은 원래 실패의 부담은 안고 갈 수 밖에 없는거니까 큰 부담은 없지. 게다가 동물실험 결과가 문제 없다는 내 보고서도 있는데 소장이 무슨 걱정인가. 오히려 윗선에 보고할 거리까지 생겼으니 좋은 일이고. 게다가 무엇보다 나도 궁금했어"
"뭐가요"
"ABP20877가 사람 몸에 들어가면 어떤 효과가 나는지가 말이야"
문득 잔이 빈 것을 확인한 나는 위스키 옆의 보드카를 집어들었다.
"저도 한 잔 해야할 것 같네요"
이 세상의 수많은 신약들은 거의 반드시 동물 실험 과정을 거친다. 동물 실험 단계에서 충분히 유의미한 효과와 안전성을 검정받은 약물만이 인간을 대상으로 한 임상실험 단계에 돌입할 수 있다. 그러나 동물 실험 단계에서는 완벽히 성공한 약물조차도 인간에게는 전혀 효과가 없거나 큰 부작용을 일으키는 약물들이 많다.
인간과 동물의 유전자가 다르고, 체내에서 약물이 작용하게 되는 효과와 기전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말은 달리 말하면, 비록 동물에게는 전혀 효과가 없거나 큰 부작용을 만들지라도, 인간에게는 아주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약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말 아닐까.
그렇게 '동물실험 단계에서 실패했다'는 이유로 실은 인간에게 큰 효험이 있을 약임에도 세상에서 묻혀버린 신약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라는거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박사는 한참을 취한 말투로 주절거리고 있었다.
"문제는 ABP20877가 상상 이상으로 인간에게는 효험이 끝장나게 좋았다는거야. 늙은이의 물렁해진 근육이 탄탄해지고, 온 몸의 장기들이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하는데다 말기 암 환자의 종양을 일주일 만에 없애버렸지. 정말로 신이 내린 선물이었다고."
"엄청나군요"
"그래, 노화방지 수준이 아니라 노화 역전 수준이었어. 이건 기적이었다고. 말기 암 환자의, 온 몸에 퍼져버린 종양을 싹 없애버렸으니까. 다 늘어진 80 먹은 환자의 부랄이 자네보다 탱탱해졌단 말일세. 동물 실험 결과에서처럼 치매 환자나 신경계 쪽의 질환에는 전혀 효과가 없었지만 그 외에는 거의 모든 질환에 크던 작던 효험이 있었어. 기적의 신약이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지. 자원자가 폭발했어. 당장 죽음을 앞둔 사람들 입장에서야 설령 큰 부작용이 나중에 온다 하더라도 지금 얼마 간이라도 건강해질 수 있다면 손해보는 건 아니니까 말이네. 위에서도 허가를 내려줬지. 임상 실험의 대상자가 200명에서 4만명으로, 그리고 10만명으로 늘어났네. 불과 1년 새에 말이네"
그만한 효과가 있었다면야, 과연 러시아 의료 당국에서도 조금은 무리수를 둘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네가 온 다음 날부터 일이 터졌지"
그 이후의 뉴스는 나도 호텔에서 뉴스를 보고 알고 있었다. 러시아 전역의 국립 병원에서 환자들의 대규모 소요 사태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다음 날 러시아 전역에서 시위 사태가 벌어졌다는 뉴스를 보았고, 이 연구소에 와서 박사를 만나 인터뷰를 시작하는 순간 그 모든 상황의 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게 저 사람들이군요"
연구실 밖에서 아까부터 문을 쿵쿵대며 두드리고 있는, 온 몸이 터져나가고 썩은 진물이 흐르며 이미 뇌가 정상적인 기능을 하고 있지 않은데도 걸어다니며 생명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존재…. 과거 한 시대 공포물 영화 속에서 우리가 '좀비'라고 부르던 괴물과 지극히 유사한 상태의 존재들을 나는 가리켰다. 박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쉽게 비유를 해보겠네. 우리 인간들의 사회도 수십억의 구성원들이 구성하고 있지만, 다들 제각기 태어나고 성장하고 늙고 죽음으로서 유지가 되지. 누군가는 죽지만 또 누군가는 태어나니까. 다들 라이프 사이클이 달라. 하지만 만약 모든 구성원들이 갑자기 똑같이 똑같은 나이로 젊어진다면 어떨까. 당장은 좋을거야. 모든 사람이 젊으니까 사회에 활력이 넘치겠지. 그러나 결국 그 모두가 언젠가는 늙어버린다고. 그 모두가 노인이 되어버린 세상이 온다면?"
"뜬금없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내 실없는 대답에 박사는 답답하다는 듯이 털어놓았다.
"그게 바로 ABP20877의 부작용이야. 뇌와 신경계 일부를 제외한 전신의 세포를 젊게 만들고, 그 세포 하나하나의 노화도 더디게 만든다? 일시적으로는 좋아. 하지만 결국 문제는 그 모두가 동시에 늙어버린다는거지. 그 과정에서 전신에 다발성 악성 종양이 폭발적으로 양산되고, 지나치게 급속도로 그 상황이 발생함으로서 육체는 사실상 단 며칠 만에 썩어가기 시작해. 그러나 뇌와 신경계는 상대적으로 그나마 상태가 나은 편이지. 곧 어마어마한 통증이 전신으로 전해진다고. 팔다리가 제구실은 못 하지만 어떻게든 움직일 수는 있고, 그렇지만 썩어가. 그러나 그 통증은 하나하나 생생히 실시간으로 전신에 전해지고 그 통증은 이윽고 분노가 되고 발작이 되며 완벽히 이성을 날려버리지. 결국은…"
"좀비군요"
"그래. 다행히 전염성은 없지만 말이야"
나는 물었다.
"임상실험 자원한 환자들이야 그렇다고 치고, 도대체 저 밖의 연구원들은 알만한 놈들이 왜 쓴겁니까"
"말했잖나. 초기 임상단계에서는 신이 내린 약물이나 다름 없었다고. 이런 부작용이 있을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나. 뇌와 신경을 제외한 전신이 젊어진다고. 물론 아랫도리도 마찬가지로. 열일곱살의 물건과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약물이 있는데 자네라면 주사 안 하겠나. 병원 의사들 중에도 스스로한테 주사한 미친 놈들이 있을 정도인데"
거기까지 말한 박사는 "난 좀 누워야겠네" 라며 개인 연구실 한 켠의 침대에 몸을 뉘였다. 나는 흘낏 시계를 보았다. 아까 30분 쯤 전에 전화를 했으니 머지않아 경찰이 출동하리라.
덕분에 우리는 곧 저 미친 연구원들로부터 구조되겠지만, 상황이 여기까지 온 이상 아마 박사는 머지않아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러시아의 법으로 말이다. 사상 최악의 의료 스캔들에 대한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으리라. 한편으로 조금은 안타깝기도 했다.
"ABP20877의 후속 연구는 그럼 이제 그럼 영영 안녕일까요"
누운 채로 박사가 대답했다.
"그건 아닐거야. 어제 러시아 국방부랑 정보기관에서 나온 사람들이 남은 샘플 들고 갔거든. 잘하면 무기로 쓰일지도"
무거운 분위기로 가라앉은 가운데, 저 멀리서 싸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박사를 위로할 말을 찾던 도중 문득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박사의 꿈은 완성된 셈이 아닌가. 죽음을 초월한 존재, 죽음에도 되돌아 온 존재 '좀비'를 약학적으로 창조했으니 '생명연장의 꿈'은 이미 이룬 거나 아니냔 말이다. 물론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야 없지만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조직 및 장기 기능의 노화가 상당히 지체된 것은 물론 근육이나 신장, 혈관 내 염증도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종양이 억제됨은 물론 근위축성 질환에 이르러서는 일부 손상된 조직이 복구되는 효과까지 보였다고 했다.
이후 며칠동안 노바스틱스의 주가는 급등하는데… 여기까지라면 아주 흔한 '밝고 희망찬, 그러나 그 이후 소식은 감감무소식이 되어버리는' 의학 뉴스에 불과한 일. 실제로 이후 근 15년이 지나도록 그 어떤 후속보도나 관련 소식은 없었고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잊혀진지 오래였다.
생명연장의 꿈
"ABP20877…"
상당히 술이 많이 들어간 상태였음에도, 박사는 꽤 정확한 발음으로 약물의 코드명을 언급했다.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 인생 최고의 쾌거라고 할 수 있지"
이어진 약 40여분 간의 긴 설명을 적당히 요약하자면, 약물의 효과는 상당히 탁월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의 보도자료 내용은 한치의 과장도 없는 것이었고 연구는 임상에 들어가도 좋은 수준의 결과를 보이고 있었다.
다만 당시 사람들이 흔히 오해했던 것처럼 "생명연장의 꿈"과는 상당히 괴리가 있었다. 우선 신경계나 기억력 등 뇌 조직의 노화에는 거의 전혀 효과가 없었다(오히려 약물의 장기투여시 기억력 퇴행현상까지 보였다). 게다가 후속 연구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미 발생 단계의 종양 억제에는 탁월했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고 나면 오히려 종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부작용을 보여 결국 임상으로의 진행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ABP20877 덕분에 나온 신약만 4개야"
당시 ABP20877가 보여준 효과는 연구소 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수준으로 상당한 것이었기에 다양한 측면에서의 후속 연구가 이어졌고 그 기전과 효과를 활용한 신약이 몇 개나 만들어졌다.
신부전증, 에머리-드레이푸스 근위축증, 크론병, 혈관염증 등에 대한 신약들이 그것이었다. 게다가 그 기전을 활용한 연구 단계의 약물까지 감안하면 그 약물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런가?"
박사는 자신의 잔에 위스키를 채우며 말을 이어갔다.
"돈? 명예? 노벨상이 아니라 더한 뭐를 줘도 그게 어디 마음에 차겠냐고. 사람 목숨을 쭉 늘리는 장수의 꿈이 눈 앞에 왔다가 다시 떠나버린 느낌인데, 신약 몇 개따위. 회사 입장에서나 좋을 일이지 나에게는 간 조절에 실패한 스프에서 고기 몇 점 간신히 건져먹는거나 다름 없는거 아닌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박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근 10년 만에 회사에 요구했지. ABP20877의 진정한 후계 약물 연구를 진행하고 싶다고. 하지만 회사는 이미 노화 방지, 생명 연장 같은 꿈에는 별 관심이 없었어. 치료용 약물, 또는 미용을 위한 약물 연구 쪽을 바랬던거지. 내가 보완하고 새로 연구하고 싶은 분야하고는 완벽하게 지향점이 달랐고, 계속 마찰을 빚다가 새 사장 눈 밖에 났어. 결국 회사를 나오게 됐지. 나보고 탈모 연구를 하던지, 아니면 연구실에 나오지 않아도 좋다는거야. 돈은 유급휴가의 개념으로 계속 지급한다고 약속했지만 내가 사표를 던졌지. 돈이라면 나도 충분히 있었으니까, 그런 굴욕을 당할 이유가 없지"
"그래서…"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법적으로 근 10년 간 동종업계로는 이직이 불가능하니까. 애초에 내가 목표로 하는 수준의 연구를 받아낼 수 있는 회사 자체가 몇 개 안 되기도 하고, 학교쪽으로는 알다시피 내 전과도 있어서…"
"압니다"
나는 짧게 대답했다. 박사는 과거 연구원 시절, 성추행 혐의로 체포되어 집행유예를 받은 바 있다. 촉망받는 핵심 연구원에 대한 노바스틱스의 그늘이 그를 감싸주지 않았다면 그의 커리어와 인생은 아마 거기에서 끝장 났으리라. 물론 이후 대학이나 명망 높은 연구소로의 이직 가능성도 사라진 것은 맞지만.
"그때 날 불러준 곳이 여기 러시아였네"
원래는 고향인 코네티컷으로 돌아가 아무도 부양할 필요가 없는 골든 싱글로서의 화려한 노년을 꿈꾼 그였지만 러시아의 국영 연구소에서 그를 원했다. 무려 푸야친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온 러시아 정보기관 요원과 후스타노비치 러시아 국영 생명공학연구소장의 설득에 박사는 마음을 굳혔다.
"러시아 국영 연구소의 소장 자리라는건 미국에서처럼 단순히 위에서 낙하산 타고 내려와 후원금이나 받자고 얼굴마담 하는 자리가 아니야. 거의 정치가나 다름 없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어쨌든 나는 말했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수명을 획기적으로 늘리고자 하는 연구이고, 천문학적인 연구비용이 들 것이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다고 말했더니 그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뭐라던가요"
"거기 연구소 비용은 북해 유전에서 나오는거라고 하더구만. 실패하면 또 다시 해보면 되지 뭐가 걱정이냐고 하더라고. 그래서 바로 마음을 굳혔지.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노바스틱스에 한방 먹이고 싶었어. 내 연구만 할 수 있으면 어디던 상관없었지"
'여기'가 아닌 '거기'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시점에서 박사의 진정한 마음이 조금은 엿보였다. 나는 수첩에 작게 메모를 했다.
"간첩죄니 뭐니 언론에서 시끄럽게 떠들었다지만, 알게 뭔가. 그런 논리라면 90년대에 우리 연구소에만도 넘쳐나던 그 러시아 연구자들은 다 뭐고? 안 그런가?"
"음,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사실 그 문제 때문에 여기 박사님 인터뷰 하러 오는게 두려웠습니다. 지난 주에, 공항에서 출발하기 직전에 편집장님한테 CIA가 따라붙지는 않을까요, 하고 전화로 농담했더니 정색하면서 그럼 CIA에 보고도 안 하고 이런 인터뷰를 진행하는 줄 알았나? 하고 말하더군요. 물론 그것도 농담이었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걱정할 필요 없지만요"
연구실 밖에서 쿵쿵대는 소음이 다시 이어졌지만, 박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신경쓰지 말게" 라는 한마디와 함께 말을 이어나갔다.
"어쨌거나 이 연구소에 처음 왔을 때는 깜짝 놀랐다네. 나쁜 의미에서 말이야. 시설도 너무 낡고, 연구 인력도 너무 적었어. 조금은 '속았다' 같은 감정이 든 것도 사실이지만, 다행히도 푸야친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더구만. 내가 요청하는건 곧바로 지원이 됐어. 그것도 무조건 일주일 안으로. 기자재 운반을 위해서 활주로까지 깔았는데야 더 할 말이 없지"
"대통령의 기대가 컸군요"
그리고 그 말에 박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갑자기 한참을 무언가 말을 잇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위스키잔을 들이키던 그가 말했다.
"처음 2년은 나도 패기만만했지. 보기좋게 ABP20877의 후계 약물을 만들 생각하면서 꿈자리에 들었을 정도로.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어. 드디어 나에게도 온거지. 슬럼프라는게. 아주 뒤늦게 오긴 했지만 말이야"
대학교 연구실의 흔한 노교수들처럼, 박사의 머리도 능력도 정체기가 와버린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가지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만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자본과 권력이 없는 젊은 연구자들. 고고한 학자로서의 명망과 연구실 내의 위계와 권력으로 그들을 짓누르면서 관리과 검토라는 명목 하에 그 아이디어들을 교묘하게 가로채기에 박사는 확실히 정치적인 테크닉도 부족했고, 그 상대들도 군인처럼 생각하고 기계처럼 일하는 러시아 연구원들이었다.
"6개월 정도를 오기로 더 힘써봤지만 지지부진했고, 나는 초조함을 넘어 약간의 강박을 갖게 됐지. 그러다가 결국 솔직하게 소장한테 다 털어놓았네. 연구가 벽에 부딪힌 것 같다고. 그랬더니 소장은 처음에는 웃으면서 너무 초조할 것 없다고, 정 힘들면 다른 연구를 함께 진행해도 좋다고 했는데, 이미 그 정도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어 나는. 그냥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지"
"그랬더니?"
"크게 웃으면서 선택지가 셋이 있다고 하더구만. 하나는 미국으로 돌아가 간첩죄로 미국 감방에서 30년 썩는 것, 또 하나는 횡령죄로 러시아 감방에서 10년 썩는 것, 또 하나는 무어라도 성과를 하나라도 내놓는 것. 사실 그때 알았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말이야. 여기 연구소에 얼마나 큰 돈이 투입됐는지 아냐면서 웃는데…"
"그래서…"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서 솔직함은 미덕이지만, 러시아에서의 솔직함은 자신을 망치는 바보짓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네. 적당히 성공할 듯 하다가 실패하는 식으로 애간장만 태우는 슬픈 천재의 연기를 주욱 했더라면 10년이 아니라 20년, 30년, 내가 죽을 때까지 여기서 아무 성과 없이 밥만 축내도 상관이 없었을거야. 여기는 다 그런 식으로 하니까. 하지만 내 머리는 이미 굳어서 돌이 되어버렸소, 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은 이상 나는 언제 폐기처분 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퇴물이 되어버린 셈이었지. 나는 미-러 간의 외교 마찰을 일으킨 유명인사였고 러시아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협상카드로 쓸 수 있는 좋은 카드에 불과하게 된거야. 그러니 나도 일단 여기 붙어서 살려면 뭐라도 밥값을 내놓아야 했지"
나는 이제서야 근본적인 질문을 물었다.
"그게 지금 상황과 관계가 있나요?"
박사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ABP20877이 사람 몸에 들어가고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되는 줄 아나"
난 고개를 저었다.
"ABP20877를 만들었지. ABP20877를 기반으로 더 연구되어 나온 신약들이야 세상이 모두 다 알지만 정작 그 원형이 되는 ABP20877은 노바스틱스의 연구실 사람들 이외에는 세상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이니까. 소장한테 ABP20877의 동물 실험 결과를 조작한 보고서를 올렸어. 극비문서로 만들어서 말이지. 러시아는 웃긴 것이, 윗 사람이 '극비'라고 한 마디 붙여놓으면 결코 언급조차 하지 않아. 진실을 밝혀도 처벌을 받게 되니까 말이야. 누가 알지도 못했지만, 설령 안다고 해도 밀고자가 될 수 없다고."
"거기까지는 완전범죄였군요"
"그래. 소장은 마치 오페라 공연이라도 본 것처럼,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거의 30초를 박수를 치더구만"
박사는 문서 몇 개를 열쇠로 잠근 서랍에서 꺼내어 보내주었다.
"하지만 놀라운건 그 다음이지. 동물실험이 완벽히 성공했다는 보고서를 올린 날이 1월 7일이야. 임상이 언제 시작된 줄 아나?"
"글쎄요"
"1월 7일이야"
"보고서를 올린 날, 곧바로 사람에게 실험을 했다는 건가요?"
"그게 무슨 의미인 줄 아나?"
내가 고개를 젓자, 박사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동물 실험을 위해 내가 만든 ABP20877은 고작해야 500ml도 안 돼. 그걸 하루 만에 새로 만들어서 2백 명이 넘는 사람한테 주사한다는건 불가능하지. 결국 그 말은, 그 이전에 ABP20877을 나 몰래 연구소에서 따로 만들어 두었다는 소리라고. 즉, 연구소에서는 내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따로 몰래 감시하고 있었던 거고 ABP20877의 효능도 분명 어느 정도는 파악했을거라는 얘기야"
"그 말은…"
"ABP20877가 결코 완벽한 약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에게 주사했다는거야"
"그러면 결국 사람한테도 문제가 생길텐데, 소장에게도 책임이 가는 것 아닌가요?"
"임상실험은 원래 실패의 부담은 안고 갈 수 밖에 없는거니까 큰 부담은 없지. 게다가 동물실험 결과가 문제 없다는 내 보고서도 있는데 소장이 무슨 걱정인가. 오히려 윗선에 보고할 거리까지 생겼으니 좋은 일이고. 게다가 무엇보다 나도 궁금했어"
"뭐가요"
"ABP20877가 사람 몸에 들어가면 어떤 효과가 나는지가 말이야"
문득 잔이 빈 것을 확인한 나는 위스키 옆의 보드카를 집어들었다.
"저도 한 잔 해야할 것 같네요"
이 세상의 수많은 신약들은 거의 반드시 동물 실험 과정을 거친다. 동물 실험 단계에서 충분히 유의미한 효과와 안전성을 검정받은 약물만이 인간을 대상으로 한 임상실험 단계에 돌입할 수 있다. 그러나 동물 실험 단계에서는 완벽히 성공한 약물조차도 인간에게는 전혀 효과가 없거나 큰 부작용을 일으키는 약물들이 많다.
인간과 동물의 유전자가 다르고, 체내에서 약물이 작용하게 되는 효과와 기전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말은 달리 말하면, 비록 동물에게는 전혀 효과가 없거나 큰 부작용을 만들지라도, 인간에게는 아주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약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말 아닐까.
그렇게 '동물실험 단계에서 실패했다'는 이유로 실은 인간에게 큰 효험이 있을 약임에도 세상에서 묻혀버린 신약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라는거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박사는 한참을 취한 말투로 주절거리고 있었다.
"문제는 ABP20877가 상상 이상으로 인간에게는 효험이 끝장나게 좋았다는거야. 늙은이의 물렁해진 근육이 탄탄해지고, 온 몸의 장기들이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하는데다 말기 암 환자의 종양을 일주일 만에 없애버렸지. 정말로 신이 내린 선물이었다고."
"엄청나군요"
"그래, 노화방지 수준이 아니라 노화 역전 수준이었어. 이건 기적이었다고. 말기 암 환자의, 온 몸에 퍼져버린 종양을 싹 없애버렸으니까. 다 늘어진 80 먹은 환자의 부랄이 자네보다 탱탱해졌단 말일세. 동물 실험 결과에서처럼 치매 환자나 신경계 쪽의 질환에는 전혀 효과가 없었지만 그 외에는 거의 모든 질환에 크던 작던 효험이 있었어. 기적의 신약이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지. 자원자가 폭발했어. 당장 죽음을 앞둔 사람들 입장에서야 설령 큰 부작용이 나중에 온다 하더라도 지금 얼마 간이라도 건강해질 수 있다면 손해보는 건 아니니까 말이네. 위에서도 허가를 내려줬지. 임상 실험의 대상자가 200명에서 4만명으로, 그리고 10만명으로 늘어났네. 불과 1년 새에 말이네"
그만한 효과가 있었다면야, 과연 러시아 의료 당국에서도 조금은 무리수를 둘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네가 온 다음 날부터 일이 터졌지"
그 이후의 뉴스는 나도 호텔에서 뉴스를 보고 알고 있었다. 러시아 전역의 국립 병원에서 환자들의 대규모 소요 사태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다음 날 러시아 전역에서 시위 사태가 벌어졌다는 뉴스를 보았고, 이 연구소에 와서 박사를 만나 인터뷰를 시작하는 순간 그 모든 상황의 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게 저 사람들이군요"
연구실 밖에서 아까부터 문을 쿵쿵대며 두드리고 있는, 온 몸이 터져나가고 썩은 진물이 흐르며 이미 뇌가 정상적인 기능을 하고 있지 않은데도 걸어다니며 생명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존재…. 과거 한 시대 공포물 영화 속에서 우리가 '좀비'라고 부르던 괴물과 지극히 유사한 상태의 존재들을 나는 가리켰다. 박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쉽게 비유를 해보겠네. 우리 인간들의 사회도 수십억의 구성원들이 구성하고 있지만, 다들 제각기 태어나고 성장하고 늙고 죽음으로서 유지가 되지. 누군가는 죽지만 또 누군가는 태어나니까. 다들 라이프 사이클이 달라. 하지만 만약 모든 구성원들이 갑자기 똑같이 똑같은 나이로 젊어진다면 어떨까. 당장은 좋을거야. 모든 사람이 젊으니까 사회에 활력이 넘치겠지. 그러나 결국 그 모두가 언젠가는 늙어버린다고. 그 모두가 노인이 되어버린 세상이 온다면?"
"뜬금없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내 실없는 대답에 박사는 답답하다는 듯이 털어놓았다.
"그게 바로 ABP20877의 부작용이야. 뇌와 신경계 일부를 제외한 전신의 세포를 젊게 만들고, 그 세포 하나하나의 노화도 더디게 만든다? 일시적으로는 좋아. 하지만 결국 문제는 그 모두가 동시에 늙어버린다는거지. 그 과정에서 전신에 다발성 악성 종양이 폭발적으로 양산되고, 지나치게 급속도로 그 상황이 발생함으로서 육체는 사실상 단 며칠 만에 썩어가기 시작해. 그러나 뇌와 신경계는 상대적으로 그나마 상태가 나은 편이지. 곧 어마어마한 통증이 전신으로 전해진다고. 팔다리가 제구실은 못 하지만 어떻게든 움직일 수는 있고, 그렇지만 썩어가. 그러나 그 통증은 하나하나 생생히 실시간으로 전신에 전해지고 그 통증은 이윽고 분노가 되고 발작이 되며 완벽히 이성을 날려버리지. 결국은…"
"좀비군요"
"그래. 다행히 전염성은 없지만 말이야"
나는 물었다.
"임상실험 자원한 환자들이야 그렇다고 치고, 도대체 저 밖의 연구원들은 알만한 놈들이 왜 쓴겁니까"
"말했잖나. 초기 임상단계에서는 신이 내린 약물이나 다름 없었다고. 이런 부작용이 있을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나. 뇌와 신경을 제외한 전신이 젊어진다고. 물론 아랫도리도 마찬가지로. 열일곱살의 물건과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약물이 있는데 자네라면 주사 안 하겠나. 병원 의사들 중에도 스스로한테 주사한 미친 놈들이 있을 정도인데"
거기까지 말한 박사는 "난 좀 누워야겠네" 라며 개인 연구실 한 켠의 침대에 몸을 뉘였다. 나는 흘낏 시계를 보았다. 아까 30분 쯤 전에 전화를 했으니 머지않아 경찰이 출동하리라.
덕분에 우리는 곧 저 미친 연구원들로부터 구조되겠지만, 상황이 여기까지 온 이상 아마 박사는 머지않아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러시아의 법으로 말이다. 사상 최악의 의료 스캔들에 대한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으리라. 한편으로 조금은 안타깝기도 했다.
"ABP20877의 후속 연구는 그럼 이제 그럼 영영 안녕일까요"
누운 채로 박사가 대답했다.
"그건 아닐거야. 어제 러시아 국방부랑 정보기관에서 나온 사람들이 남은 샘플 들고 갔거든. 잘하면 무기로 쓰일지도"
무거운 분위기로 가라앉은 가운데, 저 멀리서 싸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박사를 위로할 말을 찾던 도중 문득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박사의 꿈은 완성된 셈이 아닌가. 죽음을 초월한 존재, 죽음에도 되돌아 온 존재 '좀비'를 약학적으로 창조했으니 '생명연장의 꿈'은 이미 이룬 거나 아니냔 말이다. 물론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야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