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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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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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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을 앞둔 어느 연휴 속의 일요일.

굳이 집 앞에 새로 생긴 카페에 이미 몇 세대 전의 무겁고 낡은 맥북과 새로 산 책 한 권을 들고 나와 시간을 때우는 것은, 처음 머릿 속에 상상하며 기대한 것보다 훨씬 후지고 허세스러운 일이다.

허세라는 표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건 후지고 쿨하게 보이지 않다는 점에서, 오늘의 나에게는 그 단어가 갖는 부정적 뉘앙스를 완벽하게 반영한 정확한 사용이다.

게다가 남들처럼 우아하게 커피 한 잔, 혹은 커피 두 잔으로 간단히 모니터에만 집중하는 대신, 커피 두 잔에 샌드위치에 이어 브라우니를 하나 더, 거기에 베이글까지 먹어버리면 이미 우아함 따위하고는 수천만 광년쯤 떨어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고야 만다.

결정적으로 가게 창가에 슬쩍 비치는, 혹은 노트북의 모니터가 꺼졌을 때 비치는 찌질하고 한심한 몰골에 이르러서는 아예 이 모든 행동 전반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은 처참한 실패담의 완성이다.

어느 비평가들의 평점 높은 다양성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이 카페를 기점으로 시작되는 어떤 우연의 만남이나 삶의 큰 변화, 혹은 드라마틱한 시작의 가능성은 방금 전의 모니터 속에 비친 내 모습으로 완전히 제로가 되었다고 보아도 좋다.

결국 이 시점에서는 '허세'라는 표현조차 과분한, '궁상'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행동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명절을 앞두고 냉장고 속에 가득 든 맛있는 음식들을 두고 기어코 카페까지 기어나와 헛돈이나 쓰며 입 안에 단맛만 가득 남기는 이 한심스러운 작태는 경제적 관념을 기준으로 본다면 새삼 '궁상'이라는 표현조차 과분하다.

노트북을 펴놓고 기껏 한다는 것도 입꼬리조차 미동하지 않는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글을 수시간째 보고 있는 것 뿐이며, 이 한가로움을 넘어 의미없는 시간 흘려보내기를 조금이라도 가치 있게 보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머리를 굴려보지만 사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옛날에, 학창 시절에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인터넷에서 불법 다운 받은 영화를 보는 중이었는데, 자막 완성도가 상당히 낮았다. 번역의 뉘앙스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번역을 하다가 말다 하다가 말다 하는 식이라 중간중간 번역이 안 된 영자막이 죽 나오는 것이다.

특히 무어라 단어 하나를 몇 번이고 주인공이 반복을 하는데, 화면 속의 상황이나 주인공들의 행동으로 그게 무슨 뜻인지는 대충 짐작이 가지만 일단 확실치 않으니까 스톱 시켜놓고 결국 인터넷에서 그 뜻을 검색했다.

그리고 그때 생각을 했다. 그런 식으로, 화장실에서 큰일을 볼 때라도, 그럴 때라도 사전으로 한 두 단어씩만 이라도 외우는 식이면 그게 10년 20년 뒤에는 꽤 많이 공부가 되지 않을까 하는.

뭐 물론 실패했다. 똥을 쌀 때마다 사전을 편다는 것도 우스운 일일 뿐더러, 똥이 마려울 때마다 사전부터 찾는 것도 웃긴 일이고, 그렇다고 화장실 선반에 사전을 비치해놓는 것도 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뜩이나 습기에 취약한 것이 책인데다 화장실 선반에 두기에는 무겁고 컸다. 무엇보다 화장실에 비치해놓아서야 정말 다른 이유로 사전을 펴야할 때 방으로 들고 오는 것도 찝찝하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생활 속 남는 짜투리 시간의 유의미한 활용에 대해서 종종 고민도 하고 이런저런 아이디어도 내보았지만 딱히 그게 큰 실효를 거둔 적은 없다. 거의 없다. 그나마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이라면 블로그질인데, 그것 역시도 어느 시점을 기준해서는 짜투리 시간의 활용을 넘어서 내 시간을 할애해가면서 해야하는 어떤 '일'이 되고 이런저런 귀찮은 짓까지 되어버린 시점에서 결국 '짜투리 시간의 활용'이라는 목적은 완벽하게 실패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주말에 한가로이 카페에서 커피나 마시며 노트북을 켜놓고 이런저런 딴 짓이나 하는 것도, 설령 그 꼴이야 좀 우습다 하더라도 그 본인이 만족을 느낀다면 딱히 나쁠 것이 없을텐데 스스로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인 관점에서 먼저 생각이 드니 결국 못할 짓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가만히 앉아있노라니 머릿 속에 수많은 안 좋은 생각들, 특히 내가 지금까지 저지른 수많은 잘못들과 그것이 불러오는 죄책감, 무력함, 자괴감, 분노, 실망, 걱정 같은 안 좋은 감정들이 가슴을 무겁게 내리누르게 되니 더더욱 그렇다.

그냥…

주말에 여자친구와 함께 나가서 카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하며 커피 한잔 마시고, 잡지도 보고, 미술관에 가서 전시도 관람하고, 맛있는 저녁 먹고, 기분 좋은 엔딩의 영화도 보고.

그런 일상. 언제나처럼 당연했던 그런 시간들이 아주 멀게만 느껴지고 지나간 삶의 어느 한 장면처럼만 느껴지는 오늘에 이르러서야 혼자 카페에 앉아 불 꺼진 모니터를 눈물 글썽이며 쳐다보고 있는 찌질이의 지극히도 한심스럽고 한가로운 오늘이 되어버린 것이다.

누가 본들 어떠하겠냐만 누가 볼새라 눈물을 슥 훔쳐내고, 순간적으로 북받쳐오른 감정을 그렇게 찔끔 한 방울로 흘려보내고 나면 상당히 괜찮아 진다. 당장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만큼 괜찮아진다. 대단히 차분해지고, 머리도 맑아진다.

그저 카페에 앉아 노트북 펴놓고 이것저것 돼지처럼 쳐먹었을 뿐, 그 어떤 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그것이 허세에서 궁상, 궁상에서 자괴감으로 변했다가 눈물 한방울과 함께 담담하게 웃으며 지금의 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원래의 나로 다시 돌아온 것처럼 모든 것이 그렇다.

그리고 나서는 또 노트북 화면 구석에서 오늘이 일요일이 아닌 월요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혼자 실없이 웃는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저 나는 오후 3시의 카페에 혼자 앉아있었을 뿐인데도 무려 하루라는 날짜마저 변했다. 그것이 그저 나 혼자만의 착각임에 불과할지 몰라도, 어쨌거나 나라는 사람의 기준으로서는 하루라는 시간이 지금 이 순간 변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 상상 이상으로 빠르고 격렬하게. 나는 그냥 그 자리에서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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