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소리에 묻혀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작게 들릴 무렵, 수업은 끝났다. 우리 '국민학생'
들의 수업은 그 당시 오전 수업이 마지막이었다.
"엄마!"
친구들은 하나둘씩 정문 앞, 학교 건물 현관 앞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던 엄마를 찾아,
손에 손잡고 돌아갔고 나는 그저 하염없이 비가 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우리 엄마는
올 리 없었다. 지금쯤 회사에서 일하고 계실테니까.
"박수야, 너는 집에 안 가?"
부반장 이다혜. 그녀는 나에게 물었고, 그녀의 엄마도 물었다.
"어머, 엄마 안 오시니? 이 아줌마가 집에 데려다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곧 올 거에요"
그러자 다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잘 가. 다음 주에 보자~" 하며 손을 흔들었고 나는
그녀의 엄마를 향해 인사를 꾸벅했다.
맞벌이를 하고 있는 엄마가 올 리 없었지만, 그냥 다혜 앞에서는 그런 말을 하기 싫었다.
나는 그저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빗줄기가 약해졌다.
"가자"
내 가방을 뒤에서 툭 친 것은, '깍두기' 학수였다. 맨날 도시락 반찬에 깍두기가 빠지지
않아서 별명이 깍두기가 된 놈. 난 녀석이 왜 그렇게 깍두기를 반찬으로 싸왔는지 당시
에는 몰랐다. 그저, '깍두기를 이렇게 좋아하는 놈도 있구나' 했을 뿐이었다.
"먼저 가"
학수랑 같이 집에 가는건 싫었다. 녀석은 피식 웃더니 빗줄기 속으로 몸을 던졌고 뜀박
질로 저 멀리 정문을 지나 빗 속으로 사라졌다. 과연 계주 주자답게 엄청 빨랐다. 난 조금
더 기다리다, 빗줄기가 더 약해지길 기다려 집으로 뛰어갔다.
'으 차가워'
한 여름의 장마비라고 해도, 이제 갓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한참을 달리자 온 몸이 무거
워졌고 비를 흠뻑 머금은 가방은 정말 너무 무거웠다. 서울에 사는 작은 어머니가 사주신
쓰리쎄븐 가방이 처음으로 짜증났다.
'아 참'
6학년 형 호석이 형이 가르쳐 준 길이 생각났다. 공장 뒤 수풀이 우거진 담벼락인데 중간에
큼지막한 개구멍이 있었다. 그 곳을 지나오면 진일전기 공장을 뺑 돌 필요 없이 바로 집으로
갈 수 있었다. 경비원 아저씨한테 걸리면 완전 혼나지만, 이렇게 비가 오는데 아저씨가 경비
실에서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으쌰"
생각보다 구멍은 작았다. 가방을 맨 상태로는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아서 간신히, 네 번의
시도만에 겨우 담벼락 너머로 가방을 던졌고 맨 몸만 쏘옥 빠져나왔다.
"히히"
생각보다 짧은 시간에 집에 도착했다. 연립주택 2층 계단에 올라, 문을 두드리며 "은수야!"
하고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답이 없었다. 자나? 하는 마음에 문을 쿵쿵 더 두드렸
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깊이 잠에 빠져들었나 하는 생각에 문 앞 화분 밑을 더듬었지만
열쇠가 없었다.
'얘가 어디 나갔나?'
덜컥 겁이 났다. 이런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왜 동생이 집에 없지? 다행히 비는 거의 멎었다.
나는 가방을 문 앞에 벗어놓고 밖으로 나갔다.
"은수야!"
엄마가 종종 그러하듯, 은수의 이름을 부르며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비가 거의 그치긴 했지만
이미 하교길에 비에 흠뻑 젖은 나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동생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놀이터에 가도, 정육점에 가도, 옥상에 가도, 희망 아파트 놀이터에 가도 동생은 없었다. 나는
이미 거의 패닉 상태였다. 너무 무서웠다.
'안돼'
학교에서 배운 유괴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 바보 같은 놈이 이상한 아저씨를 따라간 건 아닌지,
어디 밖에 혼자 멀리까지 나갔다가 길을 잃어버린 건 아닌지. 엄마 아빠한테 혼날 생각도 무서
웠다. 동생은 내가 지켜야 하는데. 미안하고 무서워서 눈물이 막 났다.
'엄마한테 말할까?'
엄마가 일하는 경진정밀 공장은 멀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가 놀라고 화나는 모습은 보기 싫었다.
난 동생을 찾아야 했다. 혹시 다시 집에 돌아오지는 않았을까 싶어서 집으로 달려왔지만 여전히
문은 잠겨있었다.
"할므니! 할므니!"
난 옆집 문을 두드렸다. 경신이 할머니네 집이다. 내가 문을 몇 번 두드리자 할머니가 나왔다.
"어이쿠 이거 물에 빠진 쌩쥐네? 은수가 우산 안 가져주던? 경신아, 여기 수건 하나 가져와라"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경신이 누나를 시켜 수건을 가져와 내 머리를 닦아주며 물었다.
"은수가 우산 안 가져다 줬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물었다. "은수가 정주 국민학교 갔어요?" 하고. 경신이 할머니는
"그랴, 은수 못 만났냐?" 하고 되물었다. 나는 머리를 닦던 수건을 할머니에게 다시 주고는 그
대로 학교를 향해 달렸다.
'멍청한 새끼'
도대체 시키지도 않은 짓을 왜하냔 말이다. 이제 겨우 일곱살인 새끼가 어딜 학교에 와. 그러
다가 유괴범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추워'
아까만 해도 비가 뜨신 비였는데, 비가 차가웠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은수가 보고 싶었다.
그냥 왠지 울컥 눈물이 났다.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추웠다. 왠지 눈물이 마구 샘솟
았다. 너무너무 엄마가 보고 싶었다.
'추워…'
비가 너무 추웠다. 그래도 계속 뛰니까 조금 덜 추웠다. 학교까지 가는 길이 이렇게 멀었나.
숨이 차서 걷기 시작했다. 너무 추웠다. 이빨이 달달 떨렸다. 은수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은수야…'
제발 학교 앞에 있어라. 이제 거의 다왔다. 지나가던 아줌마 하나가 "어머, 애가…" 하며 나
에게 무어라 말했지만 귀를 막고 달렸다. 듣기 싫었다. 그냥 은수만 제발 보고 싶었다. 나는
울고 있었다. 너무너무 은수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교문 앞에 은수는 없었다.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엄마…"
눈물이 났다. 울음이 났다. 큰일났다. 은수가 없어졌다. 유괴범에게 끌려간 건가? 엄마한테
빨리 알려야 했다. 아무리 혼나도 좋았다. 은수만 찾을 수 있으면 된다. 그때였다.
"형아!"
은수였다. 운동장 오른편, 미끄럼틀 밑에서 노란 우산을 들고 있던 은수가 뛰어왔다. 또 눈물이
났다.
"야이 멍청한 새끼야!"
나는 달려오는 은수의 뺨을 쳤다. 한번도 때린 적이 없는 동생이다. 하지만 때려야 할 거 같았다.
"멍청한 새끼야! 누가 우산 가져다 달래! 니가 엄마야?"
은수는 맞마자자 인상이 찌그러지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난 우는 동생을 또 때렸다.
"니가 잘했어? 왜 울어!"
엄마처럼 혼내켰다. 은수가 울자 나도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난 형이었다. 은수는 찔끔 울더니,
이 멍청한 새끼는 울면서도 나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울었다.
"비 많이 오니까, 형아 비 맞을 거 같아서…"
멍청한 새끼. 그치만 나도 눈물이 났다. 그래도 나는 형이니까 동생 앞에서 울면 안 됐다.
"뚝!"
나는 동생을 다그치며 우산을 내가 들었다. 은수는 바지가 다 젖었다. 감기 걸릴 거 같았다. 난
은수에게 말했다.
"빨리 집에 가자"
은수는 그 말에 울음을 뚝 그치고 내 손을 잡았다. 손이 찼다. 미안했다. 눈물이 났다. 그렇지만
너무너무 고마웠다. 은수가 이렇게 무사하다는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때린게 미안했다.
"형 많이 기다렸어?"
은수는 고개를 저으며 "형아 학교 미끄럼틀 밑에서 우산 쓰고 있었어. 조금 기다렸어" 하고 대답
했다. 멍청한 새끼. 도대체 누가 우산을 가져다 달라고 했냐고. 그치만 고마웠다.
"은수 배고프지?"
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집에 가서 밥 차려줄께. 빨리 밥 먹자. 집에 있지 왜 여기까지 왔어. 앞으로 다시는 그러
지마. 알았어? 다시는 형이 전화하기 전에 학교로 오지마. 알았어?"
나는 거듭 당부하고 은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말했다.
"아까 때린 건 미안해. 근데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때린거야. 알았어?"
은수는 또다시 말을 잘 들었고 나는 비에 흠뻑 젖은 은수의 손을 꽉 잡았다. 사랑하는 동생, 세상
에서 제일 사랑하는 내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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