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평은 동무인 양의 집에 들렀으나 그저 아우인 균만을 만났을 따름이다
나오는 길에 마침 근래 세간에 명성이 자자한 유 모와 그의 두 아우를 조우하였으되
아쉽게도 그에게서 큰 매력을 느끼지는 못하였다
최주평 전
"어떠하였는가"
광원과 공위는 자못 궁금해하며 유비의 됨됨이를 물었다. 주평은 예양 그의 짧은 수염을 매만지다 뒤늦게 운을 떼었다.
"아직 미숙하였네"
그 말에 광원은 "허허" 하고 웃으며 다시 물었다.
"어떤 점이 미숙하던가"
주평은 평소 광원과 공위의 성격을 알기에 뒤에 이어질 말을 하면 제법 말이 길어지지 않을까 싶었으나 그 역시 말로는 뱃심이 부족한 이가 아니었기에 기탄없이 입을 열었다.
"사람을 구하더군"
공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같은 난세일수록 사람들은 인재를 애타게 구하기 마련이지. 천 명의 병사보다 한 명의 장수가 귀한 법이고, 백 명의 용장보다 한 명의 군사가 귀한 것이 난세니까 말일세"
그러자 곧바로 광원이 공위의 말에 토를 얹었다.
"허허, 그렇지 아니한 시대도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난세일수록 문(文)보다 무(武)가 숭양되는 것이 기본 이치가 아니던가"
공위는 역시 지지않고 대답했다.
"만 명의 무(武)와 또 다른 만 명의 무가 부딪힐 때, 그 둘의 승기를 가르는 것은 결국 군사의 지모이니 난세일수록 문이 더 귀한 법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일세"
"허나 결국 그 문은 기반에 무가 없지 않고서야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마치 지금의 우리가 아무리 공맹의 이치를 깨우치고 한신과 장자방의 지모를 갖추었다 한들 붓을 든 채로 창칼을 든 황건적 졸개 하나를 당해낼 수 있겠는가?"
주평은 갑자기 불붙이 시작한 둘의 의미없는 쟁론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일전에 양이 주평 자신을 포함하여, 이들의 그 모습을 보며 마치 비웃듯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럴는지도 모른다. 일찌기 수경선생의 밑에서 배움을 사사받은 이래 많은 동문들이 관직을 좆아, 대의를 좆아 각지로 흩어지고 남은 것은 이들이 전부다.
모두들 겉으로야 겸양의 미덕을 칭송하지만 결국 스스로에 대한 생각은 모두 하나일 것이리라. 자신들에게 당장이라도 지모를 뽑낼 기회만 주어진다면 앞서 말한 한신과 장량의 재주에 못지 않을 것이라는 자부. 그것은 이 자리에 없는 원직과 공명도 다름이 없으리라. 하기사, 공명은 그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비하지 않았던가.
"자네들이 만약 벼슬길에 오른다면 자사나 태수 정도는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을걸세" 라더니 "그럼 자네는" 하고 묻자 그저 웃기만 하던 양의 모습….
결론이 어찌나던 아무런 의미없는 쟁론을 벌이는 공위와 광원의 모습에서, 매일 밤 이렇듯 의미없는 토론을 즐기는 자신들의 모습을 문득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 주평이었다.
"그런데 자네는 왜 말을 하다 마는겐가"
광원이 물었다. 어느새 둘은 주고받던 논쟁을 그치고 원점으로 돌아와 유비에 대한 주평의 평가를 다시 구하고 있었다. 주평은 "아 미안함세" 하고 다시 운을 떼며 거침없이 유비에 대한 평가를 늘어놓았다.
"비록 그가 아직 천하의 큰 기틀을 마련한 이는 아니라고 하나, 이미 그는 난세의 주역 중 하나일세. 천하에 그 이름을 알린 이가 직접 인재를 구하러 다니는 것은 언뜻 보기에는 주나라 서백의 예를 떠올리게 하지만 결국 조금 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자기 세력의 인재부족을 세상에 고백하는 것과 다름이 없네. 큰 뜻을 품은 이가 자신을 모시고자 하는 선비를 귀히 여기는 것은 옳으나, 이 시골 융중 땅까지 직접 발걸음을 내딛는다니, 그는 그토록이나 한가한 사람이란 말인가. 아니면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는 말인가."
맹공위는 그의 말에 수긍하였다.
"마치, 사람들 입에 미담으로 오르내리길 바라기라도 하는 모습같구먼. 과연, 자네의 말이 그럴 듯 하네. 어쩌면 그 유 모라는 이가 세상에 전하는 이름은 그러한 치장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광원은 이번에도 이의를 제기하였다.
"바로 그 부분을 노린 것인지도 모르지. 그렇지 아니한가. 아직도 초야에 묻혀있을 무수한 인재들을 떠올려보게. 그들이 지금 원소의 세력에 들어간들, 혹은 조조의 세력에 들어간들 어디 한 자리라도 꿰어찰 수 있을 듯 싶은가. 허나 그토록 인재를 갈구하는 유비라면 어렵지 않게 자신의 재주를 뽑낼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과연 그다운 말이다. 주평은 가볍게 웃으며 되물었다.
"말이야 그럴싸하다만, 어디 자네라면 유비의 밑으로 들어가겠는가"
말이야 그렇다지만, 어느 누가 강대한 군웅들을 다 마다하고 보잘 것 없는 유비를 따르겠냐는 힐난이었다. 광원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물론 나는 서원직이 아닐세"
그의 말에 공위는 웃음을 터뜨렸고, 주평은 씁쓸하게 웃었다. 서원직. 그는 수경 선생 밑에서 함께 배움을 같이한 교우 중에 가장 마음이 맞는 벗이었다. 여기 함께 자리를 하고 있는 석광원이나 맹공위 모두 범상한 이들은 아니건만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선 글줄 깨나 읽었다는 문사 특유의 고루한 냄새가 났다. 허나 서원직 그는 아니었다. 일찍부터 병법서 읽기를 즐겨하였고 창칼 같은 병장기를 다룸에도 제법 소질이 있었다.
그리고 모두에 앞서 유비를 따라 나섰다. 모두가 말린 일이었다. 허나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자네들은 10년이 지나도 이 방 안에서 공맹의 도를 논하고 있을걸세"
그의 말에 광원은 모욕을 느꼈다며 분개하였고 공위 역시 어디 앞을 두고보자며 혀를 찼다. 채 반 년이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재주를 증명해보였지만 또 곧바로 유비를 버리고 조조에게로 가서 온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효와 충… 고루한 시대의 고루한 갈등이건만 그는 충보다 효를 우선했다.
광원은 어리석다 논했고 공위는 뜻은 이해하나 역시 옳은 일이 아니라고 했다. 양은 이래로 무슨 이유에선지 이 곳의 출입을 끊었다.
하지만 주평은 서원직의 행동을 내심 찬동했다. 난세에 목숨을 바칠 주군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는 하는가, 그들의 정치와 그들의 뜻이 정녕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의 피와 정보다 귀한 것인가, 주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큰 뜻고 큰 기상을 가진 이라고 한들 천하 만 백성의 마음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는 법이다. 애초에 큰 뜻과 큰 기상이라는 자체가 그저 승리한 이에 대한 의미없는 상찬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오히려, 스스로를 영웅이라 칭하는 이들의 할거만 없더라도 이 전란의 시대는 쉬이 끝나버릴 것이다, 폭정은 어차피 오래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설령 누군가가 찬탈자이며 폭군이라 한들, 하나의 기틀만 마련해 줄 수 있다면, 그리하여 폭압으로라도 세상을 하나로 만들 수만 있다면 그를 따르는 것이 진정한 천하 만 백성을 위한 일일 것이다… 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이보게 주평"
공위는 재차 주평의 이름을 불렀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주평은 맹공위의 부름에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아까부터 자꾸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겐가"
하지만 그의 말에 대답을 하기보다 주평은 조금 전의 생각을 이어가고 싶었다. 허나 동탁의 예를 두고보자. 그는 패권을 차지하는 듯 하였지만 역시 폭정은 오래가지 못한다… 이각과 곽사의 난을 비롯하여 여전히 난세는 더 치열해졌을 뿐이다. 그런가. 그렇다면 역시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것이 무어란 말인가'
모두가 수학하던 시절, 수경 선생이 비슷한 질문을 모두에게 내민 적이 있었다. 천하를 거머쥐려는 자가 반드시 모든 것이 앞서 취해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 있겠느냐는.
공명은 법이라 말했고 방사원은 실(實)이라 하였다. 석광원은 덕이라 하였고, 공위는 도라고 대답하였다. 그때 주평은…
"저는 무상(無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제자들의 대답은 그저 웃으며 듣던 수경선생은 그 말에 이유를 되물었다. 주평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였다.
"아무리 어진 마음을 가진 이라고 한들 혼자만의 뜻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는 법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천의와 민의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그 옳은 나아갈 길을 깨닫게 될 것이며 그것이 곧 순리가 되는 것이니,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는 이는 스스로를 비워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것은 스스로는 결코 영웅도 무엇도 아니라는 무의 도를 깨우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세상은 조조다 유비다 원소다 누구다 각자 영웅을 꼽아대고 있으며 그들 스스로도 자신이야말로 천하를 평안케 할 유일무이한 인재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주평이 보기에는 그 누구도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치(治)의 도는 사람이 욕심을 내어 강제로 취하고자 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수록 오히려 진정한 치의 길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만인이 욕심을 갖지 않는다는 일은 세상에 있을 수 없으니 그저 최소한 자신이 영웅이라는 오만한 발상만큼은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비로소 주평은 왜 유비의 발걸음이 스스로에게 못마땅하게 여겨졌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그 스스로의 몸을 낮추어 서백의 예를 따르는 듯 하지만 애초에 그는 돗자리 장수 출신의 무능한 군벌에 불과할 따름이다. 나이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온전한 제 땅 한 뙤기 없는. 그런 이가 무슨 인재를 모으고 무슨 천하를 통일한다는 말인가. 오히려 그의 그 가망없는 꿈 때문에 죽음으로 몰릴 가련한 군사와 백성들은 누가 위로한다는 말인가.
주평은 씁쓸함을 느꼈다.
"이보게 주평!"
이번에는 광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 오늘 참 이상허이. 어디 몸이라도 불편한겐가. 그렇다면 우리가 자리를 비켜줌세. 여차하면 의원이라도 불러주고"
주평은 그들에게 손을 휘저었다.
"아닐세 아닐세. 내 오늘 상념에 자꾸 젖는다네. 문득 이런 생각을 또 해보게 되네. 만약, 자네들은 공명이 유비에게 정말 간다면 어떻게 될 거라고 보는가"
그러자 공위가 말했다.
"모르긴 해도, 서서 그자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광원도 덧붙였다.
"유비에게는 큰 힘이 되겠지. 하지만 나는 공명이 부디 조정의 녹봉을 먹었으면 하네. 그의 재주는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행정과 조직을 다스릴 때 가장 크게 빛을 발하는 재주일세. 법가를 따르는 그가 아니던가. 그가 만약 이 나라 관리가 아니라 어느 효웅의 밑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결국 이 나라는 둘이나 셋으로 나뉘고 말걸세"
한 나라를 일으키고도 남을 재주… 주평은 그 말에 문득 자신의 재주에 대해 묻고 싶어졌지만, 공명만큼 좋은 평가가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자 공위가 물었다.
"주평 자네는 앞으로 어찌할 셈인가"
주평은 그 말에 대답 대신 방문을 열고 저 멀리 앞의 산을 내다보다… 어렵게 말을 받았다.
"나는 잘 모르겠네. 누가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누가 그르다는 생각도 하지 않네. 단지… 천하의 고통을 누군가 빨리 종식시킬 수만 있다면, 나는 그가 악귀라 하더라도 그를 따르겠네. 그것이 망해가는 한의 조정이던, 그 어떤 천하의 간웅이라 한들 말일세"
그리고 그런 대답을 하면서, 공명의 말을 새삼 떠올렸다.
'자네들이 만약 벼슬길에 오른다면 자사나 태수 정도는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을걸세'
그 말이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자사나 태수가 아니라 어느 작은 마을의 현위라 하더라도, 만약 그들의 뜻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품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가장 큰 뜻이고 가장 옳은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 보기보다 많이 지친 것 같네"
공위가 걱정을 해주었고, 광원과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평은 그들을 배웅하는 대신, 그저 노을이 저물어가는 저 산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모두가 해넘이의 태양을 찡그려가며 바라보지만, 그 아래 저 너머 언덕배기에는 힘들게 고개를 넘어가는 자신의 두 친우들, 즉 난세를 피해 뜻을 접고 있는 가련한 서생들이 있었다. 이러한 세상만 아니었더라도 분명 한 자리를 차지했을 이들이다.
세상 모든 이들이 눈 찌푸려가며 의미없는 태양을 바라보는 대신, 만약 저 두 처량한 서생들, 그리고 만 백성의 고통에 더 주목한다면 그것이 바로 대의일 터인데. 그는 조금 더 숨을 고르며, 앞으로 천하의 패권을 누가 잡을 것인가를 가늠하기로 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대의나 의미없는 명분에 휘둘리지만 않는다면, 길고 짧음을 대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한 쪽으로 기운다면, 나는 그 쪽을 따를 것이다. 그것만이 이 전란의 시대를 일찍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옳은 뜻이라 한들… 그 뜻을 위해 너무 많은 이들이 희생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옳지 못한 일인 것이다.
"허허"
주평은 그제사 비로소 스스로의 뜻을 정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그저 작은 기다림 뿐이었다.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지금도 하고 있는 일이었기에.
- 이후 최주평은 제갈량, 서서, 석도, 맹건 등 자신의 동문, 벗들이 모두 임관할 때까지도 초야에 묻혀 지내다가 가장 늦게 조위에 임관하였으며 호분중랑장과 서하의 태수직을 역임하였다. 그가 임관하던 시기의 조위는 이미 천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때였으며 그는 부패한 관료 출신의 아버지와 달리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폈다고 알려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