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기는 싫어도 막상 가서 먹다보면 또 은근히 재미있는 것이 회식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회식이 즐거울만큼 나이를 먹었는지도 모르고.
"어 맛있겠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터져나오는 한 마디에 앞자리의 연희씨도 픽 웃는다.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묘하게 좋다.
"많이 드세요"
삼겹살 한 줄을 더 올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네" 하고 어색하게 또 웃는다. 옆 자리의 가영 대리가 입을 연다.
"아, 이게 그거구나. 말로만 듣던 그거"
과일소주 '수나라'를 꺼내어 흔들며 바로 한 병을 깐다.
"자자, 잔들부터 채웁시다"
실장님의 제안에 모두 서둘러 잔들을 채우고, 이윽고 "프로젝트 성공을 자축하며, 위하여!" 하는 실장님의 선창과 함께 모두의 잔이 높이 치솟는다. 자리가 좋다.
'음'
좌 이가영 우 한윤미, 정면에 오연희 캬, 한발 늦게 온 보람이 있다. 여자들끼리 모여앉은 마지막 테이블에 끼어 앉으니 이런 행운이.
"그러니까 딜러들이 그러는거에요. 한번 더 걸어보라고. 재밌잖아요. 어차피 딴 돈, 올인해볼까 싶더라구요"
그러자 가영 대리가 내 팔을 잡으면서 말린다.
"아까워요, 안돼요!"
아니 뭐 지금 건다는 것도 아니고 그때 그랬다는건데 이야기에 참 몰입을 이렇게나. 귀엽네. 윤미씨는 "그럼요, 남자는 올~인이죠" 하고 맞장구를 친다. 흘낏 연희씨의 반응을 살피는데 그녀도 나름 재밌어하는 눈치다.
"그래서 다 걸었어요?"
"그럼요"
물론 과장이다. 소심했던 나는 당시 천 달러 칩 두 개는 냅두고 걸었다. 집에는 가야되니까.
"어떻게 됐어요?"
가영 대리의 말에 나는 왼손에 찬 테그호이어 까레라를 슥 내밀었다.
"이 시계가 바로 그 결과물입니다"
마치 지금 내가 한 방을 터뜨린 듯 와- 하는 탄성이 테이블을 뒤덮는다. 흐, 뭔 도박한게 자랑인가 싶지만 어쨌거나 자고로 아드레날린 분비되는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연희씨의 입가에도 웃음기가 돈다. 분위기는 제법 화기애애해졌지만 이쪽만 히히호호 즐거운 테이블 분위기다. 이곳과 저쪽의 부랄 냄새나는 테이블 분위기가 너무 차이나는 것 같아, 슥 시샘 사기 전에 자리를 이동한다.
"어디가요 김대리 님!"
내가 술잔을 들고 일어서자 가영 대리가 내 팔을 또 붙잡았지만, 슥 "한잔만 돌리고 올께요"하고 귀뜸하자-좋은 향수 냄새가 난다-그녀는 알겠노라고, 얼른 다녀오라고 손짓한다. 조금 취했나. 그보다 이런 성격이었구나.
"좋은 자리 앉아서 말이야, 어? 아주…"
민 차장은 놀린 듯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짖궂은 눈빛으로 또 한잔을 건낸다. 속으로 '그럼 지가 앉던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나는 웃으면서 "어휴, 차장님도 같이 가서 한잔 받으세요" 하고 슥 떠보자 또 곧바로 "내가 무슨…" 하면서 찌그러진다. 아무리 나이를 먹고 직급이 올라가도, 찌질이는 찌질인 것이다. 인생이 그렇다.
언제나 체크무니 셔츠에 곤색 또는 똥색 면바지. 거기에 그나마 구두라도 신으면 좋을텐데 어째 항상 로보트발 같은 조깅화에 검은 백팩.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마 그의 패션은 변한 것이 없으리라. 장가를 간 것이 용하다.
"아 김대리"
실장님이 어느새 다가와 거의 비워진 내 잔을 채운다. 조심스레 잔을 받고 또 한 잔을 올린다.
"요즘 아주 잘하고 있어. 물이 올랐어"
"어휴 아닙니다. 다 믿어주고 칭찬해주시니까 또 흥이 붙어서…허허"
"그래, 잘해봐. 지켜보고 있어. 잘하고 있어. 이제 또 서흥건 터지면 바로 과장 다는거 아냐? 안 그래?"
그의 귀뜸에 나는 순간 입이 귀에 걸릴 뻔한 것을 애써 감추고 "실장님만 믿고 가겠습니다!"하고 바로 그와 러브샷까지 해버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는 질투의 시선을 느낀다. 권력자의 총애란 독이 든 성배와도 같다고 하던가.
'그럼 어떤가'
재미없는 안전빵보다는 살짝 스릴이 섞인 도박이 더 즐거운 법이다. 언제나.
"2차 가자고 2차!"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이제는 2차 빠진다고 그 누구 하나 무어라 하지 않는다. 결국 2차를 가는 것은 노땅들과 술 좋아하는 유부남들 뿐이다. 집에 한 시간이라도 더 늦게 들어갈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들의 작은 기쁨이란 그런 것이겠지.
"그럼 잘들 들어가세요"
"어 내일들 봅시다!"
"안녕히 가세요!"
요란뻑적하게 고깃집 앞에서 한 무리의 멤버들이 흩어지고, 세 여직원들과 나는 같은 방향으로 향한다.
"김 대리님은 집이 어디 쪽이세요?"
윤미씨의 말에 나는 "잠실쪽이에요" 하고 대답하고, 가영 대리는 "아, 맨날 혼자 갔는데 잘 됐다" 라며 좋아한다. 윤미씨와 연희씨가 희미하게 웃는다.
"윤미씨랑 연희씨는 집에 어디 쪽이세요? 가영 대리님은?"
윤미씨는 수유쪽, 연희씨는 동대문이란다. 가영 대리는 신천. 가까웠구나. 역쪽으로 향하면서 도시락 이야기가 나왔다.
"대리님도 도시락은 싸오세요. 그냥 밥만 싸오세요. 반찬은 우리랑 같이 먹어요"
윤미씨의 제안에 "그럼 회사에 햇반이랑 김이랑 스팸 한박스만 사다놓을까요?" 하고 너스레를 떤다. 그러자 "같이 먹어요" 하며 연희씨도 한 마디 거든다. 빈 말로 한 말이지만 진짜 그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 그래도 내일 푹 잘 수 있으니 너무 좋네요"
금요일 회식의 장점이라면 역시 다음 날 푹 잘 수 있다는 것. 마침 난 자리에 나란히 앉아 가노라니 내 팔뚝에 가영 대리의 팔이 맞닿아 있다. 어색한 긴장이 돌지만 그녀도 나도 팔을 떼지는 않는다.
"그러게요. 대리님은 주말에 보통 뭐하세요?"
나는 "그냥 뭐, 집에 있어요. 가끔 친구들이나 만나고 하는데, 친구들도 장가가고 그러니까 이젠 주로 혼자 놀아요" 라고 대답했고, 그러자 가영은 "그렇구나. 여자친구는요?" 하고 또 묻는다.
"있으면 좋겠네요" 하고 웃자, 가영 대리도 웃는다. 휴대폰으로 잠시 카톡을 하는 그녀. 흘낏 보니 단톡방이다. 남친은 아닌가, 싶어 물었다.
"대리님은요? 남자친구 없어요?"
그러자 가영은 "아 저도 없어요. 저 솔로탈출 좀 시켜주세요!"하고 귀엽게 앵앵 거린다. 술이 살짝 들어가서인지, 평소보다 하이텐션이다. 무어라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어느새 슬슬 내릴 타이밍이다.
"내리죠"
일어서는 내 말에 가영 대리는 밖을 흘낏 보더니 "여기 신천역인데요, 대리님 잠실에서 내리시지 않아요?" 하고 묻는다.
"어차피 근처인데요 뭐"
그녀의 집은 내려서 역에서 몇 블록 가면 된단다. 하지만 역에서 내리자마자 그녀의 발걸음은 무거워지고, 그녀를 부축이는 나에게 점점 더 많이 몸을 기댄다.
"조심조심요"
계단에서 혹시 넘어질까 몸을 반쯤 끌어안은 채로 걷는다. 뭐야, 진짜 취했나. 역에서 나와 조금 걷노라니, 어느새 나는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같이 걷고 있다. 아무 말 없이. 조금은 진땀을 흘리며. 차라리 업고 갈까 싶었지만 그래도 그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리님"
큰 길로 걷다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이쪽이 맞나? 하고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순간, 그녀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잡는다.
"대리님!"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나를 올려다본다. 0.5초의 고민 후 나는 곧바로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갠다. 근 1년 만의 여자 입술이다. 나는 가볍게 입술에서 만족하려 했지만 가영의 혀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 조금 놀라 살짝 눈을 뜨자, 이미 그녀는 웃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나는 그녀의 허리를 쓸어내리며 몸을 더 끌어당긴다. 그렇게 꽤 긴 키스를 나눈 후,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근처의 모텔로 향했다. 사실 이미…
아까 내가 신천역에서 내리면서, 아니아니, 이미 둘의 팔이 맞닿아있는데 서로 떼지 않았던 것… 그건 너무 나아간 걸까, 아니 어쩌면 아까 회식자리에서 이미?
이미 결정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아까의 삼인방 중 내 취향을 고르지만 연희씨. 입사 초기부터 눈에 들어온 그녀… 풋풋하고, 아이돌 느낌 나는.
하지만 메기 매운탕 먹고 싶다고 당장 잡은 붕어를 버리는 사람은 없다.
"일반실 육만원 준특실 육만 오천원, 특실 칠만원입니다"
"특실로 주세요"
그깟 돈 만원 때문에 지질한 모습 보일 필요 없다. 그녀와 함께 방에 들어와 또 긴 키스를 나눈다. 머릿 속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스킨십 후, 가영은 먼저 씻으러 들어갔다.
"후우…"
가벼운 한숨과 함께, 모텔의 어둑한 불빛에 나의 머릿 속은 겨우 오버히트 직전에서 식어간다. 곧이어 들려오는 물소리. 어둠 속에서 그렇게 나는 간만에 미소를 짓는다.
앞으로 있을 쾌락보다, 아직 내가 누군가에게 이성으로서 어필이 된다는 사실이 솔직히 더 흐뭇했다. 물론 한편으로는 이 나이 먹고도 아직 이런 만남을 즐기고 있구나 라는 사실에 조금 알 수 없는 자괴감도 들었지만… 어떤가. 조금 더 즐기는 것 뿐인데.
- fin -
"어 맛있겠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터져나오는 한 마디에 앞자리의 연희씨도 픽 웃는다.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묘하게 좋다.
"많이 드세요"
삼겹살 한 줄을 더 올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네" 하고 어색하게 또 웃는다. 옆 자리의 가영 대리가 입을 연다.
"아, 이게 그거구나. 말로만 듣던 그거"
과일소주 '수나라'를 꺼내어 흔들며 바로 한 병을 깐다.
"자자, 잔들부터 채웁시다"
실장님의 제안에 모두 서둘러 잔들을 채우고, 이윽고 "프로젝트 성공을 자축하며, 위하여!" 하는 실장님의 선창과 함께 모두의 잔이 높이 치솟는다. 자리가 좋다.
'음'
좌 이가영 우 한윤미, 정면에 오연희 캬, 한발 늦게 온 보람이 있다. 여자들끼리 모여앉은 마지막 테이블에 끼어 앉으니 이런 행운이.
"그러니까 딜러들이 그러는거에요. 한번 더 걸어보라고. 재밌잖아요. 어차피 딴 돈, 올인해볼까 싶더라구요"
그러자 가영 대리가 내 팔을 잡으면서 말린다.
"아까워요, 안돼요!"
아니 뭐 지금 건다는 것도 아니고 그때 그랬다는건데 이야기에 참 몰입을 이렇게나. 귀엽네. 윤미씨는 "그럼요, 남자는 올~인이죠" 하고 맞장구를 친다. 흘낏 연희씨의 반응을 살피는데 그녀도 나름 재밌어하는 눈치다.
"그래서 다 걸었어요?"
"그럼요"
물론 과장이다. 소심했던 나는 당시 천 달러 칩 두 개는 냅두고 걸었다. 집에는 가야되니까.
"어떻게 됐어요?"
가영 대리의 말에 나는 왼손에 찬 테그호이어 까레라를 슥 내밀었다.
"이 시계가 바로 그 결과물입니다"
마치 지금 내가 한 방을 터뜨린 듯 와- 하는 탄성이 테이블을 뒤덮는다. 흐, 뭔 도박한게 자랑인가 싶지만 어쨌거나 자고로 아드레날린 분비되는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연희씨의 입가에도 웃음기가 돈다. 분위기는 제법 화기애애해졌지만 이쪽만 히히호호 즐거운 테이블 분위기다. 이곳과 저쪽의 부랄 냄새나는 테이블 분위기가 너무 차이나는 것 같아, 슥 시샘 사기 전에 자리를 이동한다.
"어디가요 김대리 님!"
내가 술잔을 들고 일어서자 가영 대리가 내 팔을 또 붙잡았지만, 슥 "한잔만 돌리고 올께요"하고 귀뜸하자-좋은 향수 냄새가 난다-그녀는 알겠노라고, 얼른 다녀오라고 손짓한다. 조금 취했나. 그보다 이런 성격이었구나.
"좋은 자리 앉아서 말이야, 어? 아주…"
민 차장은 놀린 듯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짖궂은 눈빛으로 또 한잔을 건낸다. 속으로 '그럼 지가 앉던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나는 웃으면서 "어휴, 차장님도 같이 가서 한잔 받으세요" 하고 슥 떠보자 또 곧바로 "내가 무슨…" 하면서 찌그러진다. 아무리 나이를 먹고 직급이 올라가도, 찌질이는 찌질인 것이다. 인생이 그렇다.
언제나 체크무니 셔츠에 곤색 또는 똥색 면바지. 거기에 그나마 구두라도 신으면 좋을텐데 어째 항상 로보트발 같은 조깅화에 검은 백팩.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마 그의 패션은 변한 것이 없으리라. 장가를 간 것이 용하다.
"아 김대리"
실장님이 어느새 다가와 거의 비워진 내 잔을 채운다. 조심스레 잔을 받고 또 한 잔을 올린다.
"요즘 아주 잘하고 있어. 물이 올랐어"
"어휴 아닙니다. 다 믿어주고 칭찬해주시니까 또 흥이 붙어서…허허"
"그래, 잘해봐. 지켜보고 있어. 잘하고 있어. 이제 또 서흥건 터지면 바로 과장 다는거 아냐? 안 그래?"
그의 귀뜸에 나는 순간 입이 귀에 걸릴 뻔한 것을 애써 감추고 "실장님만 믿고 가겠습니다!"하고 바로 그와 러브샷까지 해버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는 질투의 시선을 느낀다. 권력자의 총애란 독이 든 성배와도 같다고 하던가.
'그럼 어떤가'
재미없는 안전빵보다는 살짝 스릴이 섞인 도박이 더 즐거운 법이다. 언제나.
"2차 가자고 2차!"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이제는 2차 빠진다고 그 누구 하나 무어라 하지 않는다. 결국 2차를 가는 것은 노땅들과 술 좋아하는 유부남들 뿐이다. 집에 한 시간이라도 더 늦게 들어갈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들의 작은 기쁨이란 그런 것이겠지.
"그럼 잘들 들어가세요"
"어 내일들 봅시다!"
"안녕히 가세요!"
요란뻑적하게 고깃집 앞에서 한 무리의 멤버들이 흩어지고, 세 여직원들과 나는 같은 방향으로 향한다.
"김 대리님은 집이 어디 쪽이세요?"
윤미씨의 말에 나는 "잠실쪽이에요" 하고 대답하고, 가영 대리는 "아, 맨날 혼자 갔는데 잘 됐다" 라며 좋아한다. 윤미씨와 연희씨가 희미하게 웃는다.
"윤미씨랑 연희씨는 집에 어디 쪽이세요? 가영 대리님은?"
윤미씨는 수유쪽, 연희씨는 동대문이란다. 가영 대리는 신천. 가까웠구나. 역쪽으로 향하면서 도시락 이야기가 나왔다.
"대리님도 도시락은 싸오세요. 그냥 밥만 싸오세요. 반찬은 우리랑 같이 먹어요"
윤미씨의 제안에 "그럼 회사에 햇반이랑 김이랑 스팸 한박스만 사다놓을까요?" 하고 너스레를 떤다. 그러자 "같이 먹어요" 하며 연희씨도 한 마디 거든다. 빈 말로 한 말이지만 진짜 그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 그래도 내일 푹 잘 수 있으니 너무 좋네요"
금요일 회식의 장점이라면 역시 다음 날 푹 잘 수 있다는 것. 마침 난 자리에 나란히 앉아 가노라니 내 팔뚝에 가영 대리의 팔이 맞닿아 있다. 어색한 긴장이 돌지만 그녀도 나도 팔을 떼지는 않는다.
"그러게요. 대리님은 주말에 보통 뭐하세요?"
나는 "그냥 뭐, 집에 있어요. 가끔 친구들이나 만나고 하는데, 친구들도 장가가고 그러니까 이젠 주로 혼자 놀아요" 라고 대답했고, 그러자 가영은 "그렇구나. 여자친구는요?" 하고 또 묻는다.
"있으면 좋겠네요" 하고 웃자, 가영 대리도 웃는다. 휴대폰으로 잠시 카톡을 하는 그녀. 흘낏 보니 단톡방이다. 남친은 아닌가, 싶어 물었다.
"대리님은요? 남자친구 없어요?"
그러자 가영은 "아 저도 없어요. 저 솔로탈출 좀 시켜주세요!"하고 귀엽게 앵앵 거린다. 술이 살짝 들어가서인지, 평소보다 하이텐션이다. 무어라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어느새 슬슬 내릴 타이밍이다.
"내리죠"
일어서는 내 말에 가영 대리는 밖을 흘낏 보더니 "여기 신천역인데요, 대리님 잠실에서 내리시지 않아요?" 하고 묻는다.
"어차피 근처인데요 뭐"
그녀의 집은 내려서 역에서 몇 블록 가면 된단다. 하지만 역에서 내리자마자 그녀의 발걸음은 무거워지고, 그녀를 부축이는 나에게 점점 더 많이 몸을 기댄다.
"조심조심요"
계단에서 혹시 넘어질까 몸을 반쯤 끌어안은 채로 걷는다. 뭐야, 진짜 취했나. 역에서 나와 조금 걷노라니, 어느새 나는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같이 걷고 있다. 아무 말 없이. 조금은 진땀을 흘리며. 차라리 업고 갈까 싶었지만 그래도 그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리님"
큰 길로 걷다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이쪽이 맞나? 하고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순간, 그녀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잡는다.
"대리님!"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나를 올려다본다. 0.5초의 고민 후 나는 곧바로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갠다. 근 1년 만의 여자 입술이다. 나는 가볍게 입술에서 만족하려 했지만 가영의 혀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 조금 놀라 살짝 눈을 뜨자, 이미 그녀는 웃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나는 그녀의 허리를 쓸어내리며 몸을 더 끌어당긴다. 그렇게 꽤 긴 키스를 나눈 후,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근처의 모텔로 향했다. 사실 이미…
아까 내가 신천역에서 내리면서, 아니아니, 이미 둘의 팔이 맞닿아있는데 서로 떼지 않았던 것… 그건 너무 나아간 걸까, 아니 어쩌면 아까 회식자리에서 이미?
이미 결정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아까의 삼인방 중 내 취향을 고르지만 연희씨. 입사 초기부터 눈에 들어온 그녀… 풋풋하고, 아이돌 느낌 나는.
하지만 메기 매운탕 먹고 싶다고 당장 잡은 붕어를 버리는 사람은 없다.
"일반실 육만원 준특실 육만 오천원, 특실 칠만원입니다"
"특실로 주세요"
그깟 돈 만원 때문에 지질한 모습 보일 필요 없다. 그녀와 함께 방에 들어와 또 긴 키스를 나눈다. 머릿 속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스킨십 후, 가영은 먼저 씻으러 들어갔다.
"후우…"
가벼운 한숨과 함께, 모텔의 어둑한 불빛에 나의 머릿 속은 겨우 오버히트 직전에서 식어간다. 곧이어 들려오는 물소리. 어둠 속에서 그렇게 나는 간만에 미소를 짓는다.
앞으로 있을 쾌락보다, 아직 내가 누군가에게 이성으로서 어필이 된다는 사실이 솔직히 더 흐뭇했다. 물론 한편으로는 이 나이 먹고도 아직 이런 만남을 즐기고 있구나 라는 사실에 조금 알 수 없는 자괴감도 들었지만… 어떤가. 조금 더 즐기는 것 뿐인데.
-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