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나는 말했다.
"며칠 아프겠지만 언제나처럼 바쁜 일상 속에서 조금씩 무뎌질테고 그렇게 회복되고 나면, 그러면 다시 좋은 남자 만날테고… 저 같은건… 별로 좋은 기억조차 없이 잊혀지겠죠"
북받쳐오르는 울음을 간신히 가리앉히며 말을 이어나간다.
"더 잘해주고 싶었는데, 좀 더 잘할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게 못했어요. 미안해요. 너무… 너무 마음만 앞서서 많이 서툴고… 알아요. 많이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지켜봐준거.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근데… 더 잘할 수 있었는데… 그게 너무 아쉬워요. 그래서 미안해요"
혜원은 그저 들릴 듯 말 듯, 무어라고 말을 했지만 빗소리에 지워져 그저 입술만 들썩일 뿐이었다. 나는 서서히 뒷걸음질치며 손을 흔들었다.
"즐거웠어요. 고마웠어요"
등을 돌리고는, 쏟아지는 빗줄기 덕분에 흐르는 두 줄기 눈물을 마음껏 흘릴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가슴 속이 새빨갛게 타오르다 못해 잿빛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아프고 아렸지만 아마도 내가 더 아플거라는 생각에 차라리 다행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그만큼 외로웠다.
아침부터 몸이 불덩이 같았다. 이미 눈을 뜬 시간이 보통 같으면 집을 나섰을 시간이다. 서둘러 씻기 시작했다. 물줄기를 맞으며 생각했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지만 역시나였다.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하기사, 나에게나 특별하고 신이 난 만남이지, 그녀에게는 그저 따분하고 실망감만 어린 시간이었으리라.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는 그녀에게, 나라는 사람은 그저 갈수록 실망감만 안겨줄 사람일 따름이었을 것이다. 그저… 짧은 만남이었을지언정, 나에게 그런 행운이 왔음을 감사해야겠지. 씻고 나와 약을 먹었다. 순간 아프다고 하고 하루 결근할까 생각도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늘 미팅건만 세 건이다. 세중, 연성… 생각만 해도 피곤했다.
"고마워"
"요즘 감기 유행하더라구요"
불덩이 같은 열에 어떻게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점심시간에는 밥도 안 먹고 그저 엎드려 잤다. 몸이 흠뻑 젖었고, 마침 숙직실에 놔두었던 셔츠로 갈아입었다. 신입 인턴 정원과 경민 대리가 약을 사다주었다. 그 와중에 "둘이 사귀어?" 하고 농을 던지자 뜻밖에 옆 자리의 재경 선배가 쿡 찌른다. 그랬나. 몰랐지. 뒷북을 쳤네.
약기운이 돌아서일까. 5시가 넘어가자 그제서야 조금 컨디션이 돌아왔다. 몸이 안 좋아 오전 중에 못한 일까지 마무리 짓느라 8시가 넘어서 퇴근했다.
"수고해"
"네, 선배도 잘 들어가세요"
집에 돌아오자마자 몸이 다시 축 쳐졌다. 생각해보니 하루종일 먹은게 알약 8알이 전부였다. 무어라도 먹을까 싶어 냉장고와 싱크대 찬장을 뒤졌지만 먹을만한게 없었다. 관두었다. 그냥 침대에 누웠다. 퇴근 무렵부터 다시 열이 나기 시작했다. 겨우 옷을 벗었다. 하필이면. 꼭 아플 때 혼자다. 언제나 그랬다. 혼자여서 아픈 것인지, 아파서 혼자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플 때는 꼭 혼자였다.
"끄응…"
가방을 뒤졌다. 아까 경민이 사준 약이 있을텐데, 생각했지만 가방에 없었다. 아마 책상 위에 두고 온 모양이다. 절망감이 들었다. 집 어딘가에도 분명 약이 있겠지만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냥 그렇게 자기로 했다. 알람을 맞추고, 그렇게 뻗었다. 역시 혹시 또 연락이 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오지 않았다.
꿈을 꾸었다.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만나면서 저런 웃음 짓는걸 본 기억이 있나 고개가 갸우뚱해질만큼 예쁜 함박웃음이었다. 함께 어딘가에서 물놀이를 하는 꿈이었다. 즐거웠다. 꿈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깰 수가 없었다. 너무 그립고 아쉬워서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엉엉 울며 깼다.
"경일씨, 그거 컨펌 나면 바로 넘겨줘"
"네"
'며칠 아프겠지만 언제나처럼 바쁜 일상 속에서 조금씩 무뎌질테고 그렇게 회복되고 나면…'은 내 이야기였다. 아직 무뎌졌다고 하기에는 많이 멍하고, 많이 무거웠지만, 서서히 받아들여졌다. 나아가는 감기처럼. 애초부터 그녀에게 나는 어울리지 않았다.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너무 많이 아프고, 너무 즐겁고, 너무 그리운 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