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시키신 분!"
그다지 큰 기대를 하고 나간 것은 아니었다. 익명채팅이라는게 의례 그렇듯이 폭탄이 나오지만 않아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애초에 이 나이에, 뜬금없이 생각나 몇 년만에 접속해 본 익명채팅의 상대와 쿵짝이 잘 맞아 번개를 한다는 자체가 그냥 무언가 웃겼다. 왕년에 잘 나갔던 탑 클래스 여자 연예인과 같은 그녀의 이름만큼이나 묘한 추억을 되살리는 기분이었다. 한 10년을 거꾸로 시간을 돌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하기사, 시간을 거꾸로 돌린 느낌이 드는건 그 뿐이 아니었다. 폰 번호를 던지자 돌아온건 카톡 계정도 아니고 네이트온 계정이었다. 버려도 상관없는 수단을 택한건가, 싶었지만…또 그것도 아니었다. 얼굴이라도 미리 알고 싶어 서로 교환한 네이트온 이메일 정보로 접속해 본 그녀의 싸이월드는 놀랍게도 2014년까지 업데이트 기록이 있었다. 아쉽게도 얼굴이 나온 사진은 없었지만. 사진 찍는걸 좋아하는지 로모 카메라로 찍은 집 근처 풍경사진은 꽤나 감성적이었다. 과연 홍대 사는 여자다운 느낌이랄까.
"흠"
그 흔한 인스타그램이나 페북도 아니고 2014년의 싸이월드라. 그 정도로 변화에 둔감하다면 오히려 매력적이다. 어쨌든 네이트온으로 나눈 30여분의 대화를 통해 드디어 그녀는 나에 대한 경계수치를 낮추고 폰 번호를 넘겨주었으며, 그렇게 급만남이 성사된 것이다.
"어, 탐앤탐스에서 기다리고 있어. 어디쯤이야? 오, 확인"
전화를 받자마자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는 꽤…
"여기"
"반가워!"
그녀의 하얀 스키니진과 가볍게 걸친 청재킷은 완연히 봄을 드러내고 있었고, 어깨를 살짝 덮는 길이의 머리카락과 큰 눈은 귀여웠다.
"어…"
그러고보니 이런 만남이 얼마만인가. 아침에 촉촉히 내린 봄비의 설레임 마냥 내 마음도 묘하게 두둥실 떠오르는 것은 그저 그녀가 기대 이상으로 귀여웠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미안, 많이 기다렸지?"
"아니야, 나도 좀 전에 왔어"
"배고프지?"
"어 뭐 좀 먹자"
첫 만남임에도 스스럼 없이 채팅창에서와 같이 당돌하게 오랜 친구 대하듯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 역시 친구처럼 대하기로 했다.
"여기 근처에 집밥 느낌으로 깔끔하게 나오는데 있거든? 갈래?"
"좋아"
연애는 쉬었어도 핫플레이스 맛집 업데이트만큼은 고독한 미식가 마냥 끊임 없었던 덕분으로 나는 곧바로 출출한 그녀의 뱃속을 달래줄 맛집을 안내했다.
"와 맛있겠다. 진짜 집밥 느낌이네. 메뉴 선택할 필요 없는건 좋다"
네모난 1인용 나무쟁반에 고시히카리 5분도미로 갓 지은 쌀밥에 뜨끈한 북어국, 매콤한 제육볶음, 쌈, 콩, 깍두기의 단촐하면서도 정갈한 식단에 희선은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나 완전 결정장애 수준이거든. 메뉴던 뭐던 하나 고르려면 고민하다가 결국 남이 골라줄 정도로"
"그건 좀 심한데. 왜 그렇게 못 골라?"
내 질문에 두 손으로 제스쳐를 취하면서 한 그녀의 말은 귀여웠다.
"못 가본 길이 더 좋은 길이면 어떡해"
나는 가타부타 대꾸하는 대신 그녀의 물잔을 채워주었다.
"목 많이 말랐나보네"
"나 원래 물 엄청 많이 먹어. 하루에 거의 2리터는 마실걸"
2리터?
"난 일부러 의식하고 많이 먹으려고 해도 쉽지 않던데, 어떻게 그렇게 많이 마셔?"
그러자 희선은 "밥맛 떨어지겠지만…" 하고 운을 떼더니 답을 들려주었다.
"너도 변비로 고생하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거야"
나는 피식 웃으며 "나는 그쪽으로는 전혀 걱정이 없는 사람이라서. 오히려 너무 흐름이 좋아서 걱정이라면 걱정일 정도로" 하고 대답했고, 희선은 "나랑 바꾸자!"라는 말로 결국 내 웃음을 터뜨렸다.
만남의 장소를 카페로 정해놓고 정작 커피를 한잔 마시기도 전에 일어나서 밥을 먹어버린 통에 재차 카페로 가기도 뭣하던 차에 희선은 나를 근처의 갤러리로 인도했다.
"나 이거 전시회 보고 싶었거든. 마침 같이 온 김에 봐주라. 어때? 싫어?"
딱히 싫을 이유도 없었고 나 역시 요즘 미술관 다닌지 오래되었구나 하고 새삼 느끼던 차에 우리는 함께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크게 감흥이 없는 추상화 전시라서 조금 아쉬웠지만, 나와 달리 희선은 꽤 마음에 들어하는 느낌이었다.
"그 보라색 숲 그림 있잖아. 너무 좋았어"
"심오한 느낌이 나긴 하더라"
"내가 그래서 좋아하는거야. 그런 뭔가 하루종일 보고 있어도 매 순간순간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아"
하지만 그녀의 기쁨에 찬동하고 있기에 내 뱃 속의 상태는 아쉽게도 그리 좋지 않았다.
"그보다, 근처에 까페 같은거 없나?"
"와 너 진짜 장난 아니구나. 완전 부럽다"
두리번 거리는 내 모습에 희선은 매우 눈치 빠르게도 이미 화장실 찾기 앱을 가동하여 저 앞의 빌딩을 가리켰다.
"1층. 서울시 선정 우수 화장실이라는데"
"휴지가 있어야 할텐데"
"이거라도 써"
가방에서 아쉬운대로 물티슈를 꺼내 건내주는 그녀의 배려에 "고마워"라는 대답과 함께 나는 경보선수마냥 똥꼬를 죄이며 빠르게 걸었다.
"하아…"
덕분에 근심이야 남김없이 시원하게 풀었다만 처음 데이트하는 날에 급똥이라니 이 무슨 참변인가 그 씁쓸함에 새삼 절로 탄식이 났다. 허나 어쩌겠는가. 생리현상인걸. 화장실에서 머리를 다시 좀 다듬고 옷 매무새를 정리하고 나오자 희선은 걱정되는 눈으로 물었다.
"괜찮아?"
"어, 괜찮아"
"다행이네. 아까 막 급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너무…"
"추했지?"
"아니, 너무 급해보여서. 다른 사람들도 다 너 똥 마려운지 알겠더라고"
"아…"
좌절하는 내 표정이 무엇이 그리도 웃긴지 한참을 웃던 그녀는 "우리 영화 보러 안 갈래?" 하고 제안했다. 오늘 꽤 여러 일정 소화하네 하고 생각하던 나는 마침 영화관이면 만약의 급똥 후속타가 들이닥쳐도 여유있게 대처할 수 있겠다 싶어 혼쾌히 응락했다.
"근데 무슨 영화 봐?"
"아트 시네마 봅시당"
묘하게 제목이 익숙하다 싶었더니 사실 이 영화는 몇 년 전에 본 영화였다. 한정 상영으로 특별 재상영을 하는 모양인데, 그런 만큼 그녀도 다시 보는건가 싶어 슥 물었더니 "아니, 보고 싶었는데 못 봤었거든. '언젠가 꼭 영화관에서 보고 싶다' 하는 마음으로 다운로드로도 안 봤어. 넌 봤어?" 하고 말하기에 나 역시 안 본 척 했다.
"기대했던 거보단 좀 별로였지만, 괜찮았어"
영화를 다 보고, 아까 갤러리에서처럼 이런저런 감평을 흘리는 그녀에게 맞장구를 치며 시계를 확인하노라니 어느새 저녁 8시가 다 되어간다. 시간을 보는 나에게 희선은 재차 제의했다.
"저녁 먹으러 갈래?"
흐. 첫 만남이니만큼 적당히 치고 빠지기를 해도 좋으련만, 마치 10년 만에 만난 친구와 회포를 풀 듯 정말 쉴새없이 무언가를 제안하는 모습이, 내가 조금이라도 지루해보이는 기색이라도 보일라치면 안절부절하는 그 모습이 여우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먹으러 가자"
점심이 다소 단촐한 메뉴였던만큼 저녁은 좀 본격적으로 먹을까 했지만 그녀는 그냥 가까운 카레 체인점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자연스러운 첫 스킨십이었다. 부드러운 손이 좋았고, 난 그 보들보들한 손을 꼭 잡았다.
"몇 분이세요?"
"두 명이요"
저녁식사 시간대가 살짝 지났음에도 번화가답게 가게 안은 만석이었다. 점원은 가게를 둘러보다 마침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는 커플을 발견하고 "금방 치워드리겠습니다. 저쪽 안쪽에 커플석에 앉아주세요"하고 안내했다.
"뭐 먹을래?"
메뉴를 고르며 아쉽게도 손을 떼긴 했지만 이미 그녀도 나도 한번 잡은 손의 온기는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고 결국 나는 메뉴를 고르면서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 희선은 조금 수줍은 듯 피식 웃었지만, 그녀 역시 내 손을 빼지는 않았다.
"벌써 9시 다 되어가네"
식사를 마치고도 이제 슬슬 집에 가야겠지, 하는 아쉬움에 둘 다 한참이나 수다를 떨다가 일어서서 가게를 나왔다. 낮이라면 몰라도 밤에는 아직 청재킷만으로는 조금 추워보여서 "여기서 홍대까지 금방 가지 않아? 추우니까 택시 타고 가" 하고 난 지갑에서 택시비조로 만원짜리를 하나 꺼내주었다.
"아냐 괜찮아. 버스 타고 가도 돼" 라면서 조금 거리가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같이 걷자는 그녀의 손을 나는 다시 잡았다.
"오늘 되게 재밌었어"
새삼 하루를 되새기듯 나를 올려다보며 웃는 희선의 표정에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재밌었어"
머리를 쓸어넘긴 희선은 조금 말이 없더니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이렇게 누구랑, 남자랑 영화 보고 밥 먹고 하는거 거의 2년만이야"
나는 대꾸 대신 손을 꼭 잡았다.
"그래서 오늘 조금 괜히 오버해서 너 무리하게 데리고 다녔는지도 몰라. 피곤했지? 근데 너무 재밌어서 그랬어. 아까 너 화장실 급할 때…"
"아 제발 좀"
또 무엇이 그리 웃긴지 한참을 웃던 희선은 슬그머니 내 팔짱을 끼었다. 아니 어쩌면 아까 여우가 아니라고 했던 말을 취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좋아"
나 역시 연애세포가 많이 죽은 터라 무슨 대꾸가 좋을까 잠시 고민하던 차에 그녀는 불쑥 "우리 또 언제 봐?" 하고 물었다. 애프터 신청의 타이밍이 좀 많이 늦었구나 하고 반성하며 난 "내일 또 시간 돼?"하고 물었다. 희선은 바로 "어!"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가 기다리는 버스가 곧 도착한다는 정류장의 안내판을 보며 나는 계산을 시작했다.
사실… 이 정도로 전개가 빠르고 흐름도 좋은 분위기라면 구태여 질질 끌 것도 없이 그냥 바로 오늘부터 1일 해버리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앞서와 같이 그녀는 한타임 빠르게 나에게 고백을 했다.
"너… 좀 좋은거 같애"
나는 마음 한 구석이 조금 훈훈해지는 것을 느끼며 희선의 손을 다시 꼭 잡았다.
"내일은 더 재미나게 놀자. 그리고 나도 너 좋아"
희선의 얼굴에 화색이 순간 화악 도는 것이 참으로 귀여웠지만 나는 애써 모르는 척, 마침 도착한 버스에 태워보냈다. 그녀를 태워보내고 돌아서는 나 역시 가슴에 벅차오르는 그 참으로 오래간만의 기쁨에, 두근 반 세근 반 뛰는 심장을 그제서야 느꼈다.
그러고보니 아침에 비가 내려서인가, 오늘따라 달도 밝고, 밤하늘의 별도 더 많아보였다.
그다지 큰 기대를 하고 나간 것은 아니었다. 익명채팅이라는게 의례 그렇듯이 폭탄이 나오지만 않아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애초에 이 나이에, 뜬금없이 생각나 몇 년만에 접속해 본 익명채팅의 상대와 쿵짝이 잘 맞아 번개를 한다는 자체가 그냥 무언가 웃겼다. 왕년에 잘 나갔던 탑 클래스 여자 연예인과 같은 그녀의 이름만큼이나 묘한 추억을 되살리는 기분이었다. 한 10년을 거꾸로 시간을 돌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하기사, 시간을 거꾸로 돌린 느낌이 드는건 그 뿐이 아니었다. 폰 번호를 던지자 돌아온건 카톡 계정도 아니고 네이트온 계정이었다. 버려도 상관없는 수단을 택한건가, 싶었지만…또 그것도 아니었다. 얼굴이라도 미리 알고 싶어 서로 교환한 네이트온 이메일 정보로 접속해 본 그녀의 싸이월드는 놀랍게도 2014년까지 업데이트 기록이 있었다. 아쉽게도 얼굴이 나온 사진은 없었지만. 사진 찍는걸 좋아하는지 로모 카메라로 찍은 집 근처 풍경사진은 꽤나 감성적이었다. 과연 홍대 사는 여자다운 느낌이랄까.
"흠"
그 흔한 인스타그램이나 페북도 아니고 2014년의 싸이월드라. 그 정도로 변화에 둔감하다면 오히려 매력적이다. 어쨌든 네이트온으로 나눈 30여분의 대화를 통해 드디어 그녀는 나에 대한 경계수치를 낮추고 폰 번호를 넘겨주었으며, 그렇게 급만남이 성사된 것이다.
"어, 탐앤탐스에서 기다리고 있어. 어디쯤이야? 오, 확인"
전화를 받자마자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는 꽤…
"여기"
"반가워!"
그녀의 하얀 스키니진과 가볍게 걸친 청재킷은 완연히 봄을 드러내고 있었고, 어깨를 살짝 덮는 길이의 머리카락과 큰 눈은 귀여웠다.
"어…"
그러고보니 이런 만남이 얼마만인가. 아침에 촉촉히 내린 봄비의 설레임 마냥 내 마음도 묘하게 두둥실 떠오르는 것은 그저 그녀가 기대 이상으로 귀여웠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미안, 많이 기다렸지?"
"아니야, 나도 좀 전에 왔어"
"배고프지?"
"어 뭐 좀 먹자"
첫 만남임에도 스스럼 없이 채팅창에서와 같이 당돌하게 오랜 친구 대하듯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 역시 친구처럼 대하기로 했다.
"여기 근처에 집밥 느낌으로 깔끔하게 나오는데 있거든? 갈래?"
"좋아"
연애는 쉬었어도 핫플레이스 맛집 업데이트만큼은 고독한 미식가 마냥 끊임 없었던 덕분으로 나는 곧바로 출출한 그녀의 뱃속을 달래줄 맛집을 안내했다.
"와 맛있겠다. 진짜 집밥 느낌이네. 메뉴 선택할 필요 없는건 좋다"
네모난 1인용 나무쟁반에 고시히카리 5분도미로 갓 지은 쌀밥에 뜨끈한 북어국, 매콤한 제육볶음, 쌈, 콩, 깍두기의 단촐하면서도 정갈한 식단에 희선은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나 완전 결정장애 수준이거든. 메뉴던 뭐던 하나 고르려면 고민하다가 결국 남이 골라줄 정도로"
"그건 좀 심한데. 왜 그렇게 못 골라?"
내 질문에 두 손으로 제스쳐를 취하면서 한 그녀의 말은 귀여웠다.
"못 가본 길이 더 좋은 길이면 어떡해"
나는 가타부타 대꾸하는 대신 그녀의 물잔을 채워주었다.
"목 많이 말랐나보네"
"나 원래 물 엄청 많이 먹어. 하루에 거의 2리터는 마실걸"
2리터?
"난 일부러 의식하고 많이 먹으려고 해도 쉽지 않던데, 어떻게 그렇게 많이 마셔?"
그러자 희선은 "밥맛 떨어지겠지만…" 하고 운을 떼더니 답을 들려주었다.
"너도 변비로 고생하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거야"
나는 피식 웃으며 "나는 그쪽으로는 전혀 걱정이 없는 사람이라서. 오히려 너무 흐름이 좋아서 걱정이라면 걱정일 정도로" 하고 대답했고, 희선은 "나랑 바꾸자!"라는 말로 결국 내 웃음을 터뜨렸다.
만남의 장소를 카페로 정해놓고 정작 커피를 한잔 마시기도 전에 일어나서 밥을 먹어버린 통에 재차 카페로 가기도 뭣하던 차에 희선은 나를 근처의 갤러리로 인도했다.
"나 이거 전시회 보고 싶었거든. 마침 같이 온 김에 봐주라. 어때? 싫어?"
딱히 싫을 이유도 없었고 나 역시 요즘 미술관 다닌지 오래되었구나 하고 새삼 느끼던 차에 우리는 함께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크게 감흥이 없는 추상화 전시라서 조금 아쉬웠지만, 나와 달리 희선은 꽤 마음에 들어하는 느낌이었다.
"그 보라색 숲 그림 있잖아. 너무 좋았어"
"심오한 느낌이 나긴 하더라"
"내가 그래서 좋아하는거야. 그런 뭔가 하루종일 보고 있어도 매 순간순간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아"
하지만 그녀의 기쁨에 찬동하고 있기에 내 뱃 속의 상태는 아쉽게도 그리 좋지 않았다.
"그보다, 근처에 까페 같은거 없나?"
"와 너 진짜 장난 아니구나. 완전 부럽다"
두리번 거리는 내 모습에 희선은 매우 눈치 빠르게도 이미 화장실 찾기 앱을 가동하여 저 앞의 빌딩을 가리켰다.
"1층. 서울시 선정 우수 화장실이라는데"
"휴지가 있어야 할텐데"
"이거라도 써"
가방에서 아쉬운대로 물티슈를 꺼내 건내주는 그녀의 배려에 "고마워"라는 대답과 함께 나는 경보선수마냥 똥꼬를 죄이며 빠르게 걸었다.
"하아…"
덕분에 근심이야 남김없이 시원하게 풀었다만 처음 데이트하는 날에 급똥이라니 이 무슨 참변인가 그 씁쓸함에 새삼 절로 탄식이 났다. 허나 어쩌겠는가. 생리현상인걸. 화장실에서 머리를 다시 좀 다듬고 옷 매무새를 정리하고 나오자 희선은 걱정되는 눈으로 물었다.
"괜찮아?"
"어, 괜찮아"
"다행이네. 아까 막 급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너무…"
"추했지?"
"아니, 너무 급해보여서. 다른 사람들도 다 너 똥 마려운지 알겠더라고"
"아…"
좌절하는 내 표정이 무엇이 그리도 웃긴지 한참을 웃던 그녀는 "우리 영화 보러 안 갈래?" 하고 제안했다. 오늘 꽤 여러 일정 소화하네 하고 생각하던 나는 마침 영화관이면 만약의 급똥 후속타가 들이닥쳐도 여유있게 대처할 수 있겠다 싶어 혼쾌히 응락했다.
"근데 무슨 영화 봐?"
"아트 시네마 봅시당"
묘하게 제목이 익숙하다 싶었더니 사실 이 영화는 몇 년 전에 본 영화였다. 한정 상영으로 특별 재상영을 하는 모양인데, 그런 만큼 그녀도 다시 보는건가 싶어 슥 물었더니 "아니, 보고 싶었는데 못 봤었거든. '언젠가 꼭 영화관에서 보고 싶다' 하는 마음으로 다운로드로도 안 봤어. 넌 봤어?" 하고 말하기에 나 역시 안 본 척 했다.
"기대했던 거보단 좀 별로였지만, 괜찮았어"
영화를 다 보고, 아까 갤러리에서처럼 이런저런 감평을 흘리는 그녀에게 맞장구를 치며 시계를 확인하노라니 어느새 저녁 8시가 다 되어간다. 시간을 보는 나에게 희선은 재차 제의했다.
"저녁 먹으러 갈래?"
흐. 첫 만남이니만큼 적당히 치고 빠지기를 해도 좋으련만, 마치 10년 만에 만난 친구와 회포를 풀 듯 정말 쉴새없이 무언가를 제안하는 모습이, 내가 조금이라도 지루해보이는 기색이라도 보일라치면 안절부절하는 그 모습이 여우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먹으러 가자"
점심이 다소 단촐한 메뉴였던만큼 저녁은 좀 본격적으로 먹을까 했지만 그녀는 그냥 가까운 카레 체인점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자연스러운 첫 스킨십이었다. 부드러운 손이 좋았고, 난 그 보들보들한 손을 꼭 잡았다.
"몇 분이세요?"
"두 명이요"
저녁식사 시간대가 살짝 지났음에도 번화가답게 가게 안은 만석이었다. 점원은 가게를 둘러보다 마침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는 커플을 발견하고 "금방 치워드리겠습니다. 저쪽 안쪽에 커플석에 앉아주세요"하고 안내했다.
"뭐 먹을래?"
메뉴를 고르며 아쉽게도 손을 떼긴 했지만 이미 그녀도 나도 한번 잡은 손의 온기는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고 결국 나는 메뉴를 고르면서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 희선은 조금 수줍은 듯 피식 웃었지만, 그녀 역시 내 손을 빼지는 않았다.
"벌써 9시 다 되어가네"
식사를 마치고도 이제 슬슬 집에 가야겠지, 하는 아쉬움에 둘 다 한참이나 수다를 떨다가 일어서서 가게를 나왔다. 낮이라면 몰라도 밤에는 아직 청재킷만으로는 조금 추워보여서 "여기서 홍대까지 금방 가지 않아? 추우니까 택시 타고 가" 하고 난 지갑에서 택시비조로 만원짜리를 하나 꺼내주었다.
"아냐 괜찮아. 버스 타고 가도 돼" 라면서 조금 거리가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같이 걷자는 그녀의 손을 나는 다시 잡았다.
"오늘 되게 재밌었어"
새삼 하루를 되새기듯 나를 올려다보며 웃는 희선의 표정에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재밌었어"
머리를 쓸어넘긴 희선은 조금 말이 없더니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이렇게 누구랑, 남자랑 영화 보고 밥 먹고 하는거 거의 2년만이야"
나는 대꾸 대신 손을 꼭 잡았다.
"그래서 오늘 조금 괜히 오버해서 너 무리하게 데리고 다녔는지도 몰라. 피곤했지? 근데 너무 재밌어서 그랬어. 아까 너 화장실 급할 때…"
"아 제발 좀"
또 무엇이 그리 웃긴지 한참을 웃던 희선은 슬그머니 내 팔짱을 끼었다. 아니 어쩌면 아까 여우가 아니라고 했던 말을 취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좋아"
나 역시 연애세포가 많이 죽은 터라 무슨 대꾸가 좋을까 잠시 고민하던 차에 그녀는 불쑥 "우리 또 언제 봐?" 하고 물었다. 애프터 신청의 타이밍이 좀 많이 늦었구나 하고 반성하며 난 "내일 또 시간 돼?"하고 물었다. 희선은 바로 "어!"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가 기다리는 버스가 곧 도착한다는 정류장의 안내판을 보며 나는 계산을 시작했다.
사실… 이 정도로 전개가 빠르고 흐름도 좋은 분위기라면 구태여 질질 끌 것도 없이 그냥 바로 오늘부터 1일 해버리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앞서와 같이 그녀는 한타임 빠르게 나에게 고백을 했다.
"너… 좀 좋은거 같애"
나는 마음 한 구석이 조금 훈훈해지는 것을 느끼며 희선의 손을 다시 꼭 잡았다.
"내일은 더 재미나게 놀자. 그리고 나도 너 좋아"
희선의 얼굴에 화색이 순간 화악 도는 것이 참으로 귀여웠지만 나는 애써 모르는 척, 마침 도착한 버스에 태워보냈다. 그녀를 태워보내고 돌아서는 나 역시 가슴에 벅차오르는 그 참으로 오래간만의 기쁨에, 두근 반 세근 반 뛰는 심장을 그제서야 느꼈다.
그러고보니 아침에 비가 내려서인가, 오늘따라 달도 밝고, 밤하늘의 별도 더 많아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