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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만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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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근 얼마간 동안 쓰다가 만 글들. 쓰다가 퍼진 것들이라 아마 영원히 완결 볼 일 없을 것 같아서 미완성으로 공개. 



1. 가정문제전문가 김성덕 여사 

"오늘 방송, 수고하셨습니다"

윤재일 아나운서. 얼마 전 인기 탤런트와의 결혼으로 새삼 이슈가 되기도 한 그는 훤칠한 외모와, 가끔 출연하는 예능 방송에서의 서글서글한 성격 덕분에 아침방송을 즐겨보는 아줌마들에게도 인기가 좋다. 어쩜 저런 빈 말로 지나가는 인사 한 마디가 이렇게 닳고 닳은 가슴까지 설레게 만들까.

"별 말씀을. 그럼 들어가보겠습니다"
"네. 아! 아까 성PD가 잠깐…저기 오시네요"

윤재일이 가리킨 곳에서 성연수 PD가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머, 안녕하세요. 어쩜 갈수록 젊어져요?"
"어휴, 선생님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30대 후반의 싱글인 성PD. 원래는 꽤 잘나가는 보도 프로그램 전문PD였지만 그녀 본인이 아침방송에 의욕을 내서 마침 출산 문제로 PD가 교체될 타이밍에 투입된 케이스. 아버지가 여당의 중진 정치인이라지. 

"저, 추석 전후해서 명절 증후군 특집 코너 꾸미려고 하는데, 그때도 시간되시면 꼭 출연 부탁드릴께요. 오늘은 제가 미리 섭외 요청 못 드려서 죄송해요. 진작 말씀 드렸어야 되는데"
"아니어요. 자꾸 이렇게 불러주시니 제가 감사드릴 일이지요" 
"아뇨, 저희가 고맙죠. 항상 바쁘실텐데. 아 참, 여성잡지에 얼마 전부터 기고 시작하셨죠?"
"네, 얼마 전에 거기 편집장님이 직접 컨텍해오셔서…"
"잘 보고 있어요. 지난 달 꺼, 그… '아버지와 딸' 아 저 그거 보고 울었잖아요. 어쩜…"

성PD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뒤에 따라온 편성 본부의 조 모 상무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아 네!" 하고 대답하곤 말했다.

"어휴, 바쁘네요. 그럼 또 연락 드릴께요!"
"네"



방송국을 나와 분당의 집으로 향한다. 오후 4시. 남편이 들어오는 8시까지는 조금 여유 시간이 있다. 해가 눈을 찌른다. 선바이저를 내리고 선글래스를 쓴다. 방송국을 떠나 집으로 가는 이 시간이, 제일 싫다. 이유 모를 서글픔. 아니 외로움이다. 

"하아"

남편하고는 25년 전, 선으로 만났다. 

< 후략 > 


* 밖에서는 가정문제 전문가, 현실은 남편에게 구박 당하고 맞고 사는 여자. 그녀 자신의 이중적인 삶에 회의를 느껴 자살까지도 각오하고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지만 그곳에서 아내와의 사별당해 마음을 달래러 왔다는 중년의 멋진 작가와 뜨거운 사랑을 나눔. 

진정한 행복을 느끼지만 알고보니 그 남자는 '나의 행복한 결혼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쓰고 있던, 아내가 멀쩡히 살아있는 유부남. 어처구니가 없음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벼운 접촉사고 때문에 블랙박스를 돌려보던 중 그토록 집안에서는 폭군이던 남편이 사업상의 파트너에게는 비굴할 정도로 굽실거리는 모습을 발견하고, 또 얄미우리만큼 능력 있고 당차게 산다고 생각했던 방송국의 여자PD가 사실은 알고보니 방송국 간부에게 협박당하는 처지라는 것을 알게되고, 이 모든 모순의 삶들에 많은 생각을 하던 주인공은 '나라도 이제 언행일치하는 삶을 살자' 라며 다짐한다. 

그러나 때마침 울려온 동창회 친구의 전화 한 통 앞에서는 결국 온갖 거짓말로 자신의 삶을 포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라는 내용으로 쓰려다가 귀찮아서 포기. 




2. 반로환동

서기 2039년, 독일 신경과학 외과 연구소의 슈바르츠 뤼겐 박사는 치매 치료를 위한 내인성 신경줄기세포(endogenous NSC: neural stem cell) 융합 연구 도중 획기적인 결과를 얻게 된다. 그것은 완전한(full) 수준의 의학적 합치도를 보이는 외부의(타인의) 신생 줄기세포를 자신의 것과 거의 1:1 비율로 약간의 화학적 융해 조치 후 대량 투입할 경우 마치 도미노처럼 뇌세포는 물론 신체 각부의 세포들이 획기적인 수준으로 활성화 되는 기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쉽게 말해 뇌세포가 되기 직전 단계의 줄기세포를 조금 손을 본 후 대량으로 투입하면 뇌는 물론 신체 각부가 다시 젊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학계는 물론 전 세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노화(老化)를 역전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정확한 기전은 그 이후 현재 10년에 이르는 추가 연구 끝에도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뇌세포의 폭발적인 양생이 태아 시절 이후로 비활성화 되는 DNA의 어떤 '버튼'을 다시 누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가설이 가장 유력했다) 어쨌든 '새로운 뇌세포를 들어부으면 내 뇌세포는 물론 내 온 몸이 다시 젊어진다' 라는 연구 결과는 사람들로 하여금 전율에 떨게했다. 특히 돈 많은 노인들에게. 청춘으로의 복귀와 죽음에서의 도피라는 꿈은 '한낱' 그 재산 따위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윤리와 종교적 이슈가 제기되었지만, 세계 어느 나라나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늙은 자들이었다.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조차 되지 않았다. 기존의 그 어떤 연구와도 비할 수 없는 풍요롭고도 치열한 연구 투자 끝에 뤼겐 박사의 첫 연구결과는 불과 15년 만에 인간에 대해 상용화가 가능한 수준의 의료 서비스로 거듭났다. 

부작용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수술 실패 확률 3% 미만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자신에게 꼭 들어맞는 세포를 몇 개월 만에 수술에 필요한 만큼 대량 생산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방법은 하나 뿐이었다. 장기이식을 하듯이, 자신과 면역반응에서 별 문제가 없는 젊은이들의 뇌세포를 대량으로 공급받는 것 뿐. 

결국 면역반응에서 완전합치 반응을 보이는 젊은이의 뇌세포를 공급받아…
게다가 추출 과정에서 투입되는 약물의 부작용에 의해 제공자는 역으로 급노화 현상을 보이는…

< 후략 >

* 허무하게 흘려버린 청춘을 되찾고 싶어 전재산을 털어 젊은이로 돌아간 노인. 새삼스러운 '아침 발기'에 놀라고 사창가에서의 뜨거운 밤에 잃어버린 쾌락을 새삼 느낀다. 그러나 즐거움도 잠깐, 빈털털이에 자기를 도와줄 사람 한 명도 없는 세상에 이런저런 좌절을 느끼고 심지어 사고를 당해 치료를 해야함에도 돈이 없어 다시금 젊음을 되팔어야 하는 처량한 처지에 놓인다. 

하지만 '젊음'의 피기증자가 주인공의 그런 처지를 듣고 기묘한 제한을 하는데…




3. 대필작가 

출판사 안쪽의, 사장실 겸 외부 미팅룸으로 쓰이는 듯한 안쪽의 방으로 초대받은 나는 두터운 뿔테안경과 그의 흰 머리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지독한 골초인지 입을 열 때마다 풍겨오는 담배 냄새가 조금 역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게…단편 소설집이라는게, 신인 작가들은… 크흠, 큼, 대한민국 어느 출판사에 들고 가도, 단편소설집부터 내주는 출판사는 없어. 어디 머리에 총 맞은 편집자 아닌 다음에야. 아 누가 믿고 사. 한국 시장에서는 이런… 단편 소설들은… 안 좋아해. 그냥 한 권을 다 읽어야 읽은 거 같고. 뭐 그러니까. 나도 그렇고. 안 그래요?"

나는 조금 이해가 안 갔지만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테이블 위에 프린트 해놓은 내 원고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근데 나는 명재씨 글이 마음이 들어. 아주 마음에 들어. 재밌어. 책으로 내봤으면 좋겠어"

앞서의 말과는 달리 아주 기분 좋은 말.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난 마음 속으로 "오예!"를 외쳤다. 그러자 그는 혀로 입술을 축이더니 곧 저 쪽의 사장 테이블로 걸어가서 서류 두 부를 가져왔다. 그는 그것을 슥 나란히 펼치고 나에게 내밀었다.

"계약서인데, 그러니까… 나는 명재씨랑 계약을 하고 싶어. 아주 신선해. 글이"

아직 계약까지 생각하고 온 건 아닌데. 조금 여유를 두고 싶었고 내가 잠시 눈치를 보고 있는 사이, 그는 그러나 다시 계약서를 겹치더니 손가락 두 개를 폈다.

"근데 길이 두 개가 있어"

기분 좋아지는 칭찬에 이은 제안. 그리고 내 경험에 미루어보아 보통 이런 제안은 똥과 설사의 선택일 가능성이 높다.

"하나는… 이게, 사실 출판이라는게, 명재씨도 뭐 알겠지만, 어려워. 요즘 출판 시장 진짜 어려워. 신인 작가 소설? 안 팔려. 초판 3천권만 딱 찍어서 내보내도 그거 소화를 못 해. 신문사 신춘문예 뚫고 나온 반짝반짝 하는 애들 소설도 안 팔린다고. 그냥 마케팅으로 쑤셔 넣어서 그냥 푼돈 버는 셈 치고 돈 들이부어서 파는거 아닌 다음에야"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말이 길까.

"거기다가, 아무리 이게 재밌어도 말이야, 이 책이. 시장에서 검증된 작가는 아니잖아. 명재씨가. 응? 맞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그니까, 인세… 어… 고료를 보통 신인 작가들이 요즘 어떻게 받는지 알고 있나?"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만 나는 그냥 고개를 저었다.

"잘 모릅니다"

그러자 그는 안경을 고쳐쓰며 말했다. 언뜻 형광등 불빛에 반사된 그의 안경알은 꽤 기름지고 더려웠다. 

"보통, 암만 해도 300을 못 받아. 150만원, 200만원. 그니까, 등단 안 한, 그냥 신인 작가들 기준으로"

저번에 봤을 때는 그리도 말이 청산유수더니만 오늘따라 무슨 말을 이리 답답하게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럼 저도 150만원에서 200만원 정도를 받게 되는건가요? 계약하면?"

사장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거보단 더 위로. 다른 데랑 똑같이 주면 어디 명재씨가 우리랑 계약을 하겠어?"

그래도 내심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액수가 작았다. 다른 곳 사정이야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돈에 계약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백수도 아니고, 그렇게 돈이 궁한 지경도 아닌데. 아니 돈이 없는 건 맞지만 그래도 뭐 푼돈 받을라고 그렇게 다듬고 또 다듬어가며 완성한 글이 아닌데.

"이백오십"

한 손으로는 손가락 두 개, 다른 한 손으로는 손가락 다섯 개를 다 편 그가 그렇게 말했다. 마치 크게 인심이라도 쓴다는 투로. 나는 피식 헛웃음이 흘러나올 뻔한 걸 참으면서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하셨던 거 같은데…"

그러자 그는 빙긋 웃었다.

"그렇지. 내가 생각해도 그래. 솔직히 이거 이 분량 쓸라면 어? 이거 보나마나 한달 두달 몇 달을 계속 다듬고 다듬어가며 쓴 글일거 아냐? 처음 써놓고 이거 잘 썼다, 생각해서 묵혀놓고 다듬고, 나중에 다듬고, 그러다가 이만하면 됐다 생각에 몇 년 만에 출판사 들고 온 거 아닌가?"

세상에 나같은 놈이 나 하나 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공감하는 투로, 아까 이백오십만원 소리에 든 씁쓸한 마음을 젖혀놓고 억지로 웃어주자 사장은 허리춤의 벨트를 추켜올리며 말했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께. 그, 혹시 연재윤 작가라고 알지? 그린벨트 소설 쓴 사람. 몇 달 전에 지하철 가면 맨날 광고 붙어있던 그거"

사실 잘 몰랐지만 이름은 언뜻 들어본 것도 같아서 대충 안다고 했다. 사장은 어느새 슬슬 식어가는 종이컵의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런 이야기는 어디가서 하면 안 돼. 큼, 절대로. 우리가 이번에 그 연재윤이랑 계약을 했어"

말하는 투로 봐서는 꽤 유명한 작가인 거 같은데, 이런 영세 출판사가 무슨 돈이 나서 그런 작가랑 계약을 했나 생각하던 차에 그가 분통이 터진다는 투로 말했다.

"선 계약금만 1억을 걸었어. 선 계약금만. 내가 진짜 아직 계약도 안 한 이런 새내기 앞에서, 명재씨를 그렇다고 우습게 본다는건 아니고, 여튼. 뭔 말인지 알잖아? 여튼, 사업하는 입장에서 크게 배팅을 한 거라고. 지가 스케쥴상 장편은 안된다 해서 이제 단편선으로 기존에 쓴 거 몇 개랑 새로 맞춰서 좀 써서 내자, 하고 계약을 한 거라고. 근데 이 새끼가 누굴 좆으로 봤는지 아주 그냥 똥을 싸왔어. 크게 푸대기로"

그러면서 사장 테이블을 노려보는게, 아마 그 위에 그 놈 소설 원고가 있는 모양이다.

"내가 그랬지. 내가 출판사 경력만 25년이다. 아직 젊은 작가인데, 이렇게, 매너리즘에 빠지면, 내가 사업하는 입장을 떠나서 업계 선배로서도 좋은 소리는 못한다고. 그리고 나도 1억이 무슨 장난도 아니고, 요즘 거물 작가들도 선 계약금 크게 걸고 하는데 없다고. 근데 나로서는 믿고 크게 배팅을 한거다. 이게 뭐냐, 함께 같은 배를 타기로 했으면 최대한 열심히 같이 노를 저어야 되는데 이러면 나도 곤란하다. 그러니까 지도 이제 쫀심이 상했는지 뭐가 그리 불만이냐고 뻗뻗하게 나오더라고. 근데 뭐야, 돈 주는 놈이 갑이잖아. 내가 그랬지. 진심으로 이 책 이렇게 낼 거냐고. 나는 막말로 '연재윤 소설'하고 타이틀 내걸고 안되면 덤핑으로라도 넘겨서 팔면 본전은 어떻게든 뽑아올 수 있다. 근데 작가로서, 진짜 본인 스스로 이 원고에 부끄러움이 없냐고 했지"

도대체 얼마나 쓰레기를 써왔길래 사장이 저렇게까지 말할 수 있는걸까. 그 원고가 궁금해졌다. 저건 거의 막말에 협박 수준 아닌가. 

"하여튼, 그래서 그 놈이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거야. 뭐 다시 써오는 것도 지 자존심을 떠나서 스케쥴상 힘들다 이 지랄 하길래 내가 그럼 무슨 수를 쓰던 거기에 따르겠냐, 했더니 알겠대. 그런데 그때 명재씨가 원고를 가져온거지"

이게 무슨 소리야.

"톡 까놓고 말해서, 명재씨 소설… 다는 아니고, 몇 개 제할건 제하고 섞을건 섞어서, 우리가 좀 손도 보고, 연재윤이 스타일로 해서 냈으면 해. 단편집이니까 딱 좋지"

나는 아무 말 없이 있다가 물었다.

"그럼 제가 고스트라이터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인가요?"

내 말에 "뭐?" 하고 되물은 그는 '고스트 라이터'라는 말에 무슨 소리인가 어리둥절해하더니 뒤늦게 "아아, 이 바닥에선 그렇게 안 불려. 여기가 무슨 미국도 아니고. 그냥 대필작가. 그렇지. 대필작가지. 솔직히 좀 스타일이 닮은 데가 많아 글이. 난 딱 명재씨 글 보고 그래, 내가 연재윤이한테 이런 걸 바란건데, 싶더라니까. 근데 어쩌겠어. 이 바닥이 이름빨로 먹고 가는 동네 아냐. 그래도 요즘 제일 잘나가는 젊은 작가고… 돈이 되는게 그런 거니까"

나는 대답 대신 휴대폰으로 그를 검색해보았다. 조금 까칠해보이는 인상이었지만 훤칠한 얼굴에 뿔테안경이 참 잘 어울리는 지적인 외모였다.

"만약에 명재씨가… 해준다면 큰 거 한장으로…"
"큰거 한장이요?"

'큰거 한장'이라는 말에 내가 놀라는 듯 하자 사장은 픽 웃더니 "천만원"하고 말했다. 그럼 그렇지. 아니 그래도 큰 돈이긴 하지. 

"신인작가로서 좀 기분이 그럴 수도 있긴 한데, 이 바닥에선 그리 드문 일도 아냐. 지금 잘나가는 작가들도 대필작가로 시작한 사람도 많아. 아예 전문적으로 하다 이 바닥에서 알게 모르게 업계 사람들이랑 안면 쌓고 유명해지고 하다가 자기 이름 걸고. 또 돈도 안정적이잖아. 신인 작가 쥐꼬리만한 돈 받고 그렇게 주저 앉을 바에야"

그렇게 생각하자 또 크게 뭐 안될 건 없다는 생각도 슬몃 들었지만 그래도 문득 내 원고를 내려다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알아. 명재씨도 이런 생각하겠지. 만약에, 다른 놈 이름으로 내놨는데 그게 대박이 나면 그거 앞으로 배 아파서 어떻게 사냐. 알지. 근데 그게… 알잖아? 스스로가. 그냥… 나도 이게 사업하는 입장에서 본전 이상은 건져야 회사가 돌아가는거니까. 그런 거지, 만약에 이게 대박이 날 거다 싶으면 막말로 내가 명재씨 이름으로 내서 내가 새 유명작가 하나 건져올리는게 뭘로 보나 이익이지. 안 그래? 근데 안 그런다는게 무슨 소리겠어. 안 그래?"

돌려 말하긴 했지만 '니 소설은 땜빵용이지 그렇다고 무슨 대박이 날 작품은 아니니까 아까워하지 말라' 소리다. 

< 후략 > 

* 인기 작가의 단편선에 자기의 단편소설을 대필작가로서 제공하게 된 주인공. 그 작품은 대박이 나고 특히나 주인공이 쓴 작품이 아주 높게 평가 된다. 주인공은 그 사실에 미칠듯이 배아픔을 느끼지만 자신도 언젠가는 자기 이름으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위로한다. 그러나 자기도 유명 작가가 되기는 커녕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결국 작가의 꿈을 포기하고 출판사 직원으로 일하게 되는데, 몇 년 후의 어느 날. 원고를 들고 온 새내기 작가 지망생의 작품을 보다 마음에 든 주인공은 그 작품을 구매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여 드디어 꿈에 그리던 등단에 성공한다.  




3. 하드워

이 세계의 절대적인 룰은 그 어떤 위대한 존재의 총량일지라도 320억의 '제한율'을 넘길 수 없다는 것이었으며 이 가혹한 제한율에 의하여 지난 6년에 이르는 그 처절한 정쟁(政爭)은 끝을 보이지 않았다. 외마디 비명조차 없이 사라져간 수없이 사라져간 존재와 가치들의 투쟁을 가리켜 절대자 '스박'은 그것을 '하드워'라고 불렀다.





하드워 





"대저 땅 위를 지배하는 자는 무릇 산짐승부터 일국의 군주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동서는 물론 축생에서 존엄한 자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영토의 확장을 숭고한 사명으로 삼아 그에 최선을 다하지 아니한 자가 없었사옵나이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영광되이 영토를 늘리기보다는 이미 파일들이 거주하고 있는 공간만을 비우는 것으로 제한된 책무만을 행하고 있사옵니다. 이에 EDD-202, 소신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간절히 바라옵건데 새로운 하드를…"

한동안 잠잠했었다. 그러나 지난 밤, 절대자 스박은 "때가 되었도다"라는 말과 함께 하늘의 문을 개방하여 그 살색창연한 0과 1의 조화를 하드의 대지에 소환하였으니 그 거대한 군세는 무려 9기가에 이르렀다. 그에 의해 제한율의 문제가 새삼 제기되었고 이에 현 하드 군벌 내 최고의 세력을 가진 AV군단의 수장 EDD-202는 감히 절대자 '스박'에게 새로운 하드의 추가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스박은 그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닥쳐라! 어찌 짐의 통치에 불만을 표시하는게냐. 내 너를 어여삐 여겨 그동안의 관례를 어기고 오늘날까지 살려두었음을 잊은게냐? 사사로운 정으로 관례를 어기고 그 뒤를 봐주었더니 이제는 감히 나를 가르치려 들어? 여봐라, 당장 저 년을 휴지통 과정이 없는 '쉬프트 딜리트' 형에 처하라!"
"폐, 폐하! 폐하!"

새끼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은 EDD-202를 끌고 가 즉결처형 시켰고, 그 즉시 허무하게 무(無)의 존재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EDD-202가 누구였던가. 저 천하의 스박에게 "천하일품청순엽색대걸작"이라는 극찬과 함께 AV영상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호칭인 "영구소장" 타이틀을 따내었던 이가 아니었던가. 비록 세월이 흐르고 노장이 되어 이제는 실수로도 클릭 한번 해주지 않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 어떤 대학살극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켜낸 그가 이토록 허무하게 바탕화면의 사용하지 않는 바로가기 아이콘 마냥 허무하게 삭제당할 줄은 일찌기 그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바이다. 

"경들은 하드 추가에 대해 다시 논하지 말라" 

절대자 스박은 새삼 언질을 해두었고, 어전 회의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그러나 EDD-202의 처참한 꼴을 보고서도 새로운 이가 그에 대해 치고 나왔다. ABP-159였다.

"폐하, 소녀는 죽음이 두렵지 아니하온 바 이렇게 말씀을 아뢰옵나이다. 매번 폐하가 컴퓨터 앞에서 바지를 내릴 때마다…"
"닥쳐라!"

부끄러움에 얼굴이 시뻘개진 스박은 이번에는 아예 그녀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삭제처리를 하고야 말았다. 그리고는 한참 후 숨을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

"경들은 어찌 이리도 생각이 짧단 말인가! 하드를 새로이 사라는 것은 가뜩이나 부족한 월급에 손을 대라는 뜻이고 그것은 카드 빚을 더 늘리라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내 이 몸이 먼저 카드빚을 줄이기 위하여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아끼고 있는데, 자네들은 그 일신의 안위만을 지키기 위하여 자꾸 새로운 하드를 사내라고 독촉하니 그 한심함이 실로 통탄스러울 지경이외다!" 

그러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어전 앞에, AV군단과 함께 하드 내 권력순위 1,2위를 다투는 게임군벌의 스타 '스팀' 장군이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등장했다.

"전하, 그러나 꼭 그렇게만 생각하실 것은 아니옵나이다. 넓은 땅에서 풍성한 곡식이 자라듯, 넓은 여유 하드공간에서 즐거움도 샘솟는 법입니다. 매일 밤, 새로운 살색의 소녀들을 소환하실 때마다 빈 하드공간이 부족하여 누군가를 숙청하고 누군가를 제거하는 고민에서도 해방되고, 기껏 구매해놓으신 저의 용병들을 소환조차 못하고 계신 작금의 현실에서 벗어나는 그 즐거움을…"
"누가 그것을 몰라서 그러오? 문제는 돈이란 말이오 돈!"

'돈' 이야기가 나오자 스팀 장군은 입을 닫고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도 그럴것이 스박의 여윳돈을 말라버리게 한 데에는 스팀 장군의 책임도 컸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일에는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국방부가 글로벌 호크를 제 때 사지 못해 얼마나 큰 아쉬움을 겪다 뒤늦게 한참 시간도 흐르고 그 가격도 훨씬 비싸게 도입하게 되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이 게임의 GOTY 에디션이 이 가격에 나온 적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구매하셔야 합니다" 
"이것 보십시오. 추억 그 자체가 아닙니까! 폐하, 이것은 지르셔야 합니다!"
"폐하! 정식출시가 언제될지도 모르는 게임입니다. 게다가 가격도 할인된 가격이니 지르고 선행 플레이까지 해보십시오!"
"폐하! 폐하! 75% 할인입니다! 그냥 재미없어도 지르십시오!" 

등등, 한동안 그는 절대자 스박의 눈과 귀를 멀게 하여 국고를 탕진케 한 바 있었다. 만약 하드에 여유공간이 충분했더라면 스박은 여지껏 스팀의 마수에 홀려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추가 하드 디스크까지 구입하라고 하니 모두들 어처구니 없어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똑똑한 그답게 그는 솔선하여 

"전하, 그럼 제가 보더랜더2와 툼레이더를 삭제하여 여유공간을 제법 확보하겠나이다"

라며 그 자리에서 제 살을 깎아냈다. 스박은 그 자세에 "호오" 하는 탄성과 함께 그를 자리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스박이라고 하여 정말 새 하드디스크의 구매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잘 쓰던 하드가 난데없이 사망하여 320기가의 비좁은 구 하드를 사용하게 된지 어느덧 반 년. 하루하루 여유공간 5기가 미만의 처절한 사용에 그는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오늘의 회의는 이것으로 마감하겠소. 여유 공간이 제법 확보된 듯 하여 기쁘오" 



스팀 장군의 자해쇼 덕분에 20기가가 넘는 여유공간이 추가로 생겼지만, 그것은 바로 그 날 밤 스박이 벌인 또다른 살색처녀들의 소환 의식으로 인하여 바로 사라졌다. 

"이러다가는 정말 이 땅 전체가 벌거벗은 창녀들로 가득하게 생겼소!"

게임 군단과 음악 군단이 불만을 터뜨렸지만 방법이 없었다. 

< 후략 >

* 얼마 전 하드가 사망해서, 320기가 짜리 예전에 쓰던 하드를 쓰고 있다. 아 물론 그렇다고 내가 맨날 야동을 다운받는다는건 아니다. 진짜로. 




4. 미래를 향해서 

1900년대, 아니 1700년대라고 해도 사실 사람이 먹고 사는 것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은 음식물을 먹고, 섹스를 하며, 똥을 싸고, 잠을 잔다. 노래를 듣고, 옷을 입고, 일을 하고 말이다. 물론 그때의 일과 지금의 일, 그때의 옷과 지금의 옷, 그때의 먹거리와 지금의 먹거리가 다르고, 그때 사람들이 아는 지식과 21세기의 사람들이 아는 지식이 다르지만 말이다.
마찬가지다.
2167년의 세계도 사실 내가 영구동면에 들어간 2021년과 그리 큰 변화는 없다. 이들 역시 빵과 고기를 먹고, 여전히 섹스를 하며(사실 이건 좀 변화가 있기를 기대했는데), 옷을 입고, 똥을 싸고(이건 좀 변화가 있었다), 잠을 자고, 노래를 듣는다. 당연히 일도 하고.

하지만 역시 이들이 아는 지식은 내가 알던 21세기의 지식과 다른게 무척 많았다. 




 
미래를 향해서





나는 저 흑인 의사에게 물었다. 

"내 몸 어디에 문제가 있소?"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왼쪽 새끼 발가락이 냉동 과정에서 조금 심한 동상을 입어서 절단한 것을 제외하면 거의 기능적으로는 이상이 없습니다. 폐에 있던 종양은 이미 레이저 치료로 없애버린 상태고, 폐 말단의 손상된 부분은 이미 복구를 해놨습니다. 발가락은 아마 다음 주 중으로 새로 돋아날테니까 걱정마시구요"

돋아난다고?

"미안하지만 난 21세기 사람이오. 발가락이 돋아난다는게…"
"머리 부위와 척추, 항문 주변 정도를 제외하면 단순 절단의 경우 신체 대부분이 재생 가능합니다. 인간 줄기세포와 동물 줄기세포의 연계에 따른 기술적 진보죠. 21세기 말에 나온 기술이니…모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도마뱀처럼?"

난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지만 의사는 이해를 하지 못한 듯 했다.

"도와뱀이 뭐죠?"
"도마뱀"

하지만 의사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난 발음이 조금 이상한가 해서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도.마.뱀"

그러나 이번에도 의사는 무어라 대꾸를 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출출하시겠군요. 식사를 하러 가죠"
"아니 잠깐만. 혹시 도마뱀이라는 생물을 모르는거야? 위기에 몰리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파충류. 아니 양서류"

내 말에 의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18세기, 산에 살던 약초채집꾼 노파들은 아마 선생님보다 훨씬 더 많은 식물의 이름과 약효를 알고 있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선생님이 저보다는 동식물에 대해 많이 알겠죠.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많은 동식물이 살던 시대를 사셨던 분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도마뱀이 뭔지도 모르게 되다니. 난 문득 이 건물 밖을 나가게 되면 어떨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어제 맛보았던 그 환상적인 식단을 맛보고 싶을 따름이었다.


 
"요즘에도 '원시로 돌아가자' 운동을 하면서 일부러 나노 조미료를 피하는 사람들은 꽤 있죠. 저기 있는 캐리 선생님처럼"

의사는 저쪽에서 통닭 한 마리를 뜯고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난 되물었다.

"나노 조미료가 뭔데? 그게 이 터무니없는 꿀 맛의 비법인가?"
"아, 그런가요? 그 시대에는 조미료가 없었던가? 후추 하나로 먹고 살던 시기였죠? 그, 배로 무역하던 시대"

배로 무역을 하던 시기라는 사실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건 16세기. 우리 시대에는 온갖 조미료와 향신료를 뿌려서 요리를 했지. 근데 나노 조미료가 뭐야?"
"식재료에 나노 조미료를 뿌리면 그게 뇌에 직접적으로 '맛있다' 라는 자극을 보내게 됩니다. 아무리 후지고 나쁜 재료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뇌가 맛있다고 받아들이니까. 근데 그렇다고 이 조미료에 속아 영양가 없거나 상하고 덜익은 재료를 먹게 될 일은 없어요. 그랬다가는 이 조미료가 곧바로 시퍼런 색으로 변하고 맛도 쓴 맛으로 변해버리니까"
 
그야말로 미래 시대, 하고 감탄했지만 난 인간의 본성을 잘 알기에 되물었다.

"그런 기능을 일부러 빼고, 그냥 무조건 맛있게만 느끼게 하는 조미료를 만든다면 되지 않을까? 그럼 후진 식재료를 쓴다거나 해도 사람들이 모를텐데. 못된 놈들은 그런 짓 하지 않아?"

의사는 웃으며 말했다.

"초기 산업화 시대에는 어린 아이들도 노동을 하고 많이 죽어나갔다죠? 하지만 21세기에는 상황이 많이 좋아진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어도 먹거리로 의도적인 장난질 하는 사람은 없어요. 있더라도 엄벌에 처하니까"


미래를 산다는 것은 꽤 신나는 일이다. 게다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그 미래가 밝은 미래라면. 

< 후략 > 
 
* 냉동인간이 되었다가 미래에서 깨어난 주인공. 현대 사회와 달라진 많은 상황에 재미도 느끼고 감탄도 하며 유토피아에 근접한 세상이 된 미래 사회를 동경하지만 '더더욱 발전된 미래'를 꿈꾸며 결국 그는 또다시 더 먼 미래를 기대하며 냉동인간이 되는 선택을 한다. 




5. 증명 

목사이신 아버지와 그 이상으로 독실한 신도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나는 어릴 때부터 종교를 '강요'당했다. 하지만 성적부터 여자친구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기도를 열심히 해도 신은 응답이 없었고 결국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이미 사실상 무신론자가 되었다.
 
"어이 목사 아들"
게다가 더욱 불행한 것은 그러한 나의 종교적 입장과는 전혀 별개로, 사춘기 소년들 특유의 종교(정확하게는 종교의 수입원)에 대한 반감은 '목사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가진 나로 하여금 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꽁돈이잖아. 어? 내일까지 5만원 채워오는거다? 알았지? 니네 아빠가 순진한 할머니들한테 이빨로 돈 털어먹는거나, 내가 니한테서 돈을 좀 '빌려쓰는'거나 차이가 뭐냔 말이야. 안 그래?"
 
하지만 자그마한 개척교회 수준의 동네 교회, 그것도 본관 20층에 별관까지 딸린 큰 교회가 고작 200m 거리에 있는 교회가 수입이 좋을 리 없었고, 정해진 용돈 자체가 없이 그저 필요할 때마다 얼마씩 받아쓰던 내 입장에서 5만원이라는 '삥 값'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엄마, 나 문제집 사야될거 같아"
"지난 주에 줬잖아"
"그거 다 풀었지"
"어휴… 엄마 돈 없는데. 다음 달에 주면 안될까? 이번에는 엄마가 진짜 힘들다"
"꼭 필요한데…"
"일단 이번 주만 어떻게 넘겨봐. 다음 주에 꼭 줄께"
결국 나는 매번 돈을 마련하지 못했고 '구라로 뜯은 돈을 강탈한다' 라는 자칭 홍길동식 의적 놀이를 하고 싶었던 급우들은 나를 괴롭혔다. '100원에 한 대'라는 말로 500대를 이런저런 구타로 맞아야 했고 그때마다 정말 간절히, 너무나 간절히 '아버지의 신'에게 나를 구원해달라고 빌었지만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야, 너 다혜 빤쓰 좀 벗겨봐라"
"뭐?"
놈들의 강요는 점점 수위를 넘겨서, 단순히 돈을 뜯거나 나에 대한 폭력을 넘어 여학생들에 대한 성적 장난의 도구에 나를 이용하려 했다. 반에서 예쁘장한 여학생의 치마를 걷고 팬티를 벗기라는 주문에 나는 저항했지만, 그에 대한 응징도 갈수록 심해졌다. 
"하라면, 하지! 왜! 안! 하나! 냐고!"
 
주먹질에 이어 발길질, 무릎으로 복부를 걷어차여 숨조차 쉬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나는 정말 그 자리에서 죽고 싶었다. 입술이 다 터지고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게 되면 사실 놈들에 대한 증오보다 아버지의 직업과 아버지의 신이 미웠다. 


 
"도대체 왜 예배에 참석하지 않겠다는거냐"
"있지도 않은 그따위 신, 안 믿을래요!"
"아니 어디서 그런 말을!"
 
아버지는 얼굴을 부르르 떨 정도로 화를 냈지만 나는 당당히 맞섰다.
"도대체 예수님이 뭔데? 정말 그렇게 잘났다면 왜 자신의 종 아들이 그렇게 맨날 학교에서 얻어터지고 망신당하고 괴롭힘 당해도 그거 하나 못 구해주는데? 내가 뭘 잘못했는데? 목사 아빠 둔 게 그렇게 잘못이야? 내가 무슨 죄냐고! 그딴 신 다 꺼져버려! 무능하고 기도따위 하나 못 들어주는 병신 신따위!"
그리고 그렇게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뺨을 맞았다. 그 순간 마음이 차가워졌다. 머리도. 
"결국 아버지도 인간이야. 예수님? 좆까. 그렇게나 독실한 아빠도 당장 자기 자식하나 컨트롤 못하고 이렇게 폭력을 쓰고야 마는데 그 신도 어련하지. 존나 무능해. 백번 양보해서 실제로 있긴 있다고 쳐. 근데 결국 나 못 도와주잖아? 그럼 그런 신은 없는거나 마찬가지야. 만에 하나 일부러 내린 시련이라면 그게 신이야? 미친 개변태 새끼지"
 
마음 같아서는 예배 보는 도중에 "좆까!"하고 크게 외치고 싶었지만, 자식으로서 최후의 인내심으로 그건 꾹 참았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자신의 자식이 학교 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며칠 뒤, 아버지는 학교에 출석해서 담임 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나의 학교생활 문제에 대해 선생님과 이야기를 한 듯 했지만 애초에 답이 있을 리 없다. 선생님이 좀 끼어든다고 학교 폭력이 어디 사회적 문제까지나 됐겠는가. 오히려 괴롭힘의 강도만 더 세졌다.
"같이 기도하자"
"아 됐다고!"
 
아버지와 선생님에게서 이야기를 전해들은 엄마는 눈물을 흘려가며 나와 함께 기도의 힘으로 상황을 극복해보자고 했지만 도대체가 '기도의 힘'으로 뭘 해보자는 상황 자체가 미칠 것 같이 답답했다. 나는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고는 방에 틀어박혔고 문 밖에서 엄마는 하루종일 기도를 올렸다. 그러기를 며칠째. 엄마가 쓰러졌다.
 
"뭐하는거야 도대체…"
 
병원으로 가면서 나는 또 한번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제발 우리 엄마 별 일 없게 해달라고. 이번에 마지막으로 믿어보겠다고. 
 
"암입니다"
 
웃기게도, 나는 의사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웃었다. 정말 크게 웃었다. 마치 역설적으로 신이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 이럴 수는 없었다. 정말로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그날 밤 

< 후략 >

* 목사의 아들. 신에 의지를 하려고 할 때면 오히려 외면받고, 신을 버리려 할 때면 오히려 각별한 관심(?)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아버지의 신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라는 논리로 불가에 귀의하는데… 스님이 되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부처를 찾으며 의지를 하고자 할 때면 외면받고, 부처를 욕할 때면 또 확실한 벌을 받게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 속에 다시 세상으로 환속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또 '돈'이라는 '사회의 신'에게 휘둘려서 돈을 모으려고 하면 빠져나가고, 돈을 내버리려고 하면 돈을 벌게되는 역설적 상황에 놓이고, 그러자 이번에는 그걸 역이용해 큰 돈을 벌게된다. 

기쁜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 부처님 감사합니다!" 라고 외치지만, 그 순간 자기가 큰 돈을 벌게 된 것이 사기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6. 미라 누나 

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봤던 그녀는 참 작고 귀여웠다. 
 
"안녕! …하세요. 김미라입니다. 재수를 해서 나이는 동기들 보다 한살 더 많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확 눈에 띄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동그란 이마와 큰 눈, 아담한 키와 그 노란색 바람막이는 선명하게 내 뇌리에 각인됐다. 그녀보다 훨씬 화려한 스타일의 경미와 수영이도 선배들에게는 인기 만점이었지만 난 그녀가 더 좋았다.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 쭉쭉!"
 
그녀는 술도 참 잘 마셨다. 흑기사 노릇이라도 할 수 있으려나 눈치를 봤지만 그럴 기회는 오지 않았다. 아니 그런 기회가 왔어도 아마 나서지 못했을 것이다. 운좋게 옆 자리에 앉았지만 어색한 마음에 그녀에게 말 한마디 걸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무르익은 술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미라 선배는 다른 동기, 선배들과 신나게 어울렸고 난 어느 틈인가 소외감 느끼는 술자리에서 슥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후 그녀가 3학년의 지훈 선배랑 사귄다는 소리를 들었다. 짧은 짝사랑이었다. 

< 후략 > 

* 주인공의 뒤늦은 첫 사랑 이야기. 씁쓸한 인연이 겨우겨우 이어지다 결국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둘은 사귀게 되지만 그녀는 과거의 그녀가 아니었고 자기도 과거의 자신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러나 주인공은 추억에 매달려 현실의 그녀에게 실망하는 대신, 과거의 자신을 닮은 아들, 과거의 자신을 닮은 딸을 만들어 키우자며 호탕하게 웃고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7. 아다 탈출 

승구형이 늦게 들어오는 날은 꼭 이런 식이다. 어디서 뭘하다 왔는지 그렇게 꾸미고 나가더니 하루만에 초췌해진 얼굴로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를 시간에 돌아와서는 해 중천에 떴다 싶으면 꼭 
 
"라면 좀 끓여라"

하고 배 어루만지며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이다. 뭐하다 왔냐면 또 그 술 쳐먹어서 쉰 목소리로 "라면이나 쳐 끓여"하는 대꾸가 전부다. 어쨌든 그것도 하나 있는 형이라고 계란에 고춧가루까지 팍팍 넣고 라면 끓여다주면 

"아 계란 좀 터뜨리지 말라고. 그냥 아예 넣지를 말던가"

라고 연이어 짜증을 내는데 원 저 새끼 장가가서 3년 내로 이혼 안 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하지만 저 새끼가 장가를 가기는 간다는 데에도 난 내 표를 던질 수 있다. 도대체 기집애들은 저런 망나니 어디가 좋다고 그렇게 잘 꼬일까.
 
"왜? 뭘 쳐다봐? 쳐먹고 싶으면 기왕 끓일 때 하나 더 끓이던가. 구질구질하게 남 먹는거…"
"아 누가 한 입 달래? 내가 끓여줬건만"
"그럼 뭐?"
하여간 눈치는 빠르다. 아, 그래서 여자들을 그렇게 후리는건가.
 
"아냐"
"병신새끼"
저게 내 형이다. 시팔.
 
방으로 돌아와 오늘도 하릴없이 누리웹이랑 자주 가는 블로그 몇 개 돌다가 관둔다. 나른하다. 딸이나 칠까 하지만 또 언제 형이 방문 벌컥 열고 들어와서 뭐 시킬지 모른다. 개짜증. 
 
"야!"
역시나.
"왜?"
"니 휴대폰 좀 줘 봐. 나 데이터 좀 보내봐"
"아 나도 없어"
"없긴 왜 없어. 니가 연애를 하냐 폰 네비를 켜고 다니냐. 뭐하는데"
"아 나도 없다고. 게임 땜에"
"아 병신새끼"

욕을 입에 달고 사는 놈. 에휴, 진짜 저런게 형이라니. 하지만 나는 
 
< 후략 > 

* 맨날 형에게 치어지내는 찌질이 동생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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