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레토나에서 내린 낡은 진압복의 남자. 전투화에 쌓인 흙먼지는 그 남자가 어떤 지옥을 뚫고 왔는지에 대한 증명이었다.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긴 한숨은, 그는 입초에서 졸며 근무를 서고 있는 한 이경을 보며 어이없는 웃음으로 바뀌었다.
"야"
선 채로 잠든 그 이경은 그러나 쉽게 깨지 않았고, 다시 한번 "야!" 하는 호통 후에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의 눈 앞에 전설의 '보라돌이' 진압복을 입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기절초풍하며, 뒤늦게 경례를 올렸다.
"추, 충성!"
남자는 그 이경에게 "너 뭐야? 신병이 빠져가지고" 하고 물었고, 이경은 더듬거리며 "요즘 하루 6시간씩 근무를 서느라…" 하고 변명을 했고, 뒤늦게 자신이 '변명'을 했다는 사실에 더 크게 놀라며 "아닙니다!" 하고 크게 소리쳤지만, 이미 보라돌이 진압복의 남자는 입초를 지나 경찰서 본관의 경비계로 향하고 있었다.
"충성. 수경, 김박스는…"
"됐담마. 임마야, 수고했다. 으뜨노? 좋~은데 가서 빡세게 구르고 오니까?"
경비계에 기율대 복귀 신고를 하려는 수경 김박스. 경비계장 조만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고, 김박스 역시 피식 웃으며 "간만에 운동도 하고 좋았습니다. 그럼 들어가보겠습니다. 충성" 하고 경례를 올렸다.
"그래, 욕 봤다. 가서 푹 쉬그라"
칠성 경찰서 전경 왕고 수경 김박스. 그는 내무실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꽤나 지친 듯 걸음은 무거웠지만 그 눈빛에는 살기가 어려있었고, 그 한걸음 한걸음에서는 등에 짊어진 더블백 이상의 짬밥 무게가 느껴졌다.
"충성!"
"추, 충성!"
안광이 희번뜩거리는 그의 눈길에 내무실을 드나들던 향하던 이경, 일경들은 지리며 경례를 올려붙었고, 꽤나 지친 얼굴이었지만 박스는 그들의 경계를 하나하나 받아주며 드디어 내무실에 들어섰다.
"어!"
기율대로 끌려갔던 왕고의 복귀. 내무반에 누워있던 두 마리의 물수경 나부랭이, 안일주 류진수는 벌떡 일어서며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아이고 김수갱님 몰골이 이게 뭡니까!"하며 반갑게 맞이했지만, 그들의 너스레는 무시하며 더블백을 내려놓은 김박스는 현 내무반장 조지훈에게 형식 상의 복귀 신고를 했다.
"충성, 신고합니다. 수경 김박스는 200X년 X월 X일 부로… 기율대 무사 복귀를… 신고…합니다"
그리고 그 와중, 미묘한 분위기가 내무실에 흘렀다. 비록 견장을 넘겨 이제는 '열외' 고참이 되었다고는 하나, 바로 직전까지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왕고가 기율대에서의 복귀 신고를 하는 과정에서
"아 신고는 무슨 신고입니까"
식의 반응이 없이, 오히려 당연히 받을거 받는다는 듯 고개까지 치켜들고 복귀신고를 끝까지 받은 조지훈의 모습에 내무실 안의 모두는 살짝 움찔했다. '전' 견장 김박스와 '현' 견장 조지훈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지만, 김박스는 피식 웃으며 "아 힘들다. 이거 더블백 좀 치워줘라"하며 내무반에 드러누웠다.
하지만 내무반장 조지훈은 "아 '똥'이 어딜 바닥에 드러눕습니까. 야들아, 내무실에 똥 떨어졌는데 안 치우냐?" 하며 능글맞게, 그러나 곧 정색하며 김박스를 타박했다.
아직까지도 내무반의 모두가 김박스의 위세를 기억하기에, 농담으로 상황을 넘기기 위해 어색하게 웃는 분위기였지만 곧 "뭐하냐?" 하는 조지훈의 정색 어린 말에 이경 몇몇이 김박스를 일으키러 다가갔다. 그 상황에 상경줄 전체와 물 수경 둘도 불끈했지만 김박스는 "아 됐다 됐다. 알았다. 하, 까칠하네 우리 지후이. 똥은 밥 먹으러 갑니다~" 하며 내무실을 다시 나섰다.
혼자 식당으로 올라와 힘없이 라면을 끓인 김박수 수경 옆으로, 상경줄 막내 정도진이 쪼르르 올라와 반가움을 표시했다.
"김박스 수경님, 얼굴이 진짜 반쪽이 되셨지 말입니다"
그 말에 김박스는 라면을 한 젓가락 후두룩 먹은 뒤 "딱 2주 자리 비웠다고 이젠 너도 말입니다 쓸 짬밥이냐?"하며 피식 웃었다. 그 말에 어색해하던 정도진 상경은 머리를 긁적이다 말했다.
"좀 전에 내무반 이야기, 들었습니다. 하, 진짜 조지훈 수경 너무하지 말입니다"
무심하게 라면을 먹던 김박스. 그는 아무 내색하지 않고 그저 젓가락질만 열심히 할 따름이었고, 정도진 역시 말을 이어나갔다.
"김박스 수갱님 기율대 끌려 가시고… 그 얘기 다 전해 듣고 진짜, 지인짜 저 울었습니다"
김박스의 눈동자에는, 지난 한달의 시간이 마치 주마등처럼 흘렀다.
정확히 한달 전의 새벽 1시 반. 입초를 지키던 수경 조지훈은 꾸벅꾸벅 잠에 빠져들어든 상태였고 마침 인접한 군천서에 볼일이 있어 방문했던 감찰은 아무런 제재 없이 경찰서 안으로 진입했다. 그는 입초의 상태를 보며 혀를 차고는, 곧바로 경찰서 유치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마침 유치장에서 근무를 서고 있던 의경 이상민 상경은 의경 막내 김치선을 갈구다가 뺨을 올려붙이던 순간이었고, 그 장면은 감찰관의 눈에 바로 목격되었다. 마침 당직을 서고 있던 경비계 오동석 경장은 바로 호출되었고, 감찰관은 최근 본청에서의 '전의경 대원들 구타 실태에 관한 특별 단속 및 근무기강 확립 지시'를 운운하며 노발대발했다. 게다가 유치장 내에는 존재해서는 안되는 라이터가 이상민 상경의 근무복 주머니에서 발견됨으로서 상황이 한층 심각해졌다.
이윽고 약 15분 후, 감찰은 관리실태가 엉망이라며 5분대기조 긴급 출동을 점검했다. 다행히 '살아있는 악마의 현신' 김박스 수경의 지휘 하에 5분대기조 전경들은 3분 16초만에 A형 출동대기 태세를 완벽하게 마무리했지만 단단히 독이 오른 감찰은 거기에서 상황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 없었다.
새벽 2시를 넘긴 시간에 대뜸 갑자기 일이경 대원들에 대한 1:1 상담을 한다며 경비계 오동석 경장 입회 하에 구타 및 폭력에 대한 상담조사를 실시했다. 물론 단단히 입단속이 되어있는 '아래' 대원들은 결코 입을 쉽게 열지 않았지만 감찰은 집요했다.
"팬티를 제외한 상하의 탈의. 실시"
그리고 일이경 대원의 몸에서 한두개의 멍자국이 발견되었다. 물론 그것들은 구타 이외에도 생활 과정에서 발생한 것도 있지만, 불행하게도 그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니이, 대답 똑바로 안하다가 뒤늦게 누구 하나 입 열면 너도 처벌받는다이?"
감찰관의 협박에도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지만, 이제 전입 한달 차의 눈치 제로 고문관 전경 막내 주영호가 입을 열고 말았다.
"그게…잘못하면…혼나기도…"
"어떻게 혼나는데?"
"… …"
"대답 똑바로 안하나!"
"…머리를 이렇게 쥐어박기도 하고, 발로 걷어차기도 하고…"
오동석 경장은 얼굴을 쓸어내렸고, 감찰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흘렀다. 그리고 감찰은 다시 집요할 정도로 일이경 대원들에 대한 상담조사를, 새벽 5시까지 실시했다. 그리고 모든 실태를 파악한 후 "또 봅시다" 하는 말과 함께 경찰서를 떠났다.
당연히 경찰서는 발칵 뒤집혔고, 일주일간 강도 높은 자체 조사가 실시되었다. 우선은 왕고이자 내무반장 김박스에 대한 최우선적인 혐의가 씌워져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놀랍게도 그는 단 한 차례도 손찌검을 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가 있는 대원이 발견될 경우 얼차례를 주기는 했지만, 폭행을 가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밑으로 박상열 상경, 한동석 상경, 이주민 상경 등은 심각한 구타의 전력이 드러났고, 부분대장 조지훈 수경 역시 상경들에 대한 구타의 증언이 이경들을 통해 드러났다. 마침 지방청에서도 본보기로 그들에 대한 엄중처벌을 경고했고, 서장 역시 진급에 누가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을 감싸는 대신 엄중 처벌을 지시했다.
상황이 안 좋게 흘렀다. 박상열과 한동석에 대한 형사처벌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그때 김박스가 나섰다.
"계장님,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밑에 애들 형사처벌만은 피하게 해주십시오"
"니가 뭘 책임진다꼬? 금 니가 빨간 줄 그을래? 어잉?"
경비계장 조만규도 징계가 예고된 상태. 게다가 상황이 심상찮게 흘렀기에 김박스의 말은 치기 어린 헛소리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아직 자체조사 보고서는 지방청까지 올라가지 않은 상태. 김박스는 그를 설득했다. 여러 명을 처벌하게 되면 관리 책임 역시도 커지고, 결코 일이 좋게 끝날 수 없다. 게다가 상경줄이 처벌을 받게 되면 분위기상 좋게 끝날 수 없다. 하지만 전역 두 달 앞둔 고참의 탓으로 모든 것을 떠넘기게 되면 선처를 기대해 볼 수 있다, 게다가 나는 지방청장 상도 하나 있지 않는데 선처 더더욱 기대해 볼 수 있지 않나, 라는 논리였다.
앉은 자리에서 담배 한 대를 다 태운 고뇌 끝에 조만규는 그 의견에 오케이했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모든게 좋게좋게 끝나라는 법은 없는거 아이가. 니 그러다 빨간 줄 갈 수도 있다. 진짜 후회 안 하나?"
"잘 안되면 후회하겠지만, 잘 되면 군대 무용담 하나 생기는거지 말입니다"
"빙신"
그리고 아주 다행히도, 상황이 참작되어 김박스는 기율대 2주 처분이라는 매우 낮은(?) 처분을 받게 되었다. 기율교육대. 2천년대 초중반까지, 충주의 경찰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바 있는 전의경이라면 모두가 그 이름만으로도 겁을 먹는 2주짜리 전설적인 군기교육대. 물론 전경대나 기동대, 방순대 출신들은 오히려 "기율대에 쉬러간다"랄 정도로 그 자대에서의 지옥같은 갈굼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2주간 한계에 가깝게 굴려대는 훈련량만큼은 무시할 것이 아니었다.
"뭐 새꺄. 그냥 내가 총대 맨거지. 원래 고참이 그런거 책임지라고 있는건데. 맬만 하니까 맨거지"
"아입니다. 그래도 좋게 풀려서 기율대만 다녀온거지, 그때 장난 아니었지 않습니까. 형사처벌 된다 어쩐다 소리 나오는데도 총대 매신거 아닙니까. 조치훈 수경만 해도, 그때 자기는 절대 아니라고, 외려 밑에 상경들, 일경들 이름 다 불었잖습니까. 세상에 수경이 되서 자기 혼자 살자고 11명을 부는게 말이 됩니까"
라면을 어느새 다 비운 김박스는 말했다.
"이 쉐키 고참 뒷담을 다 까네. 그건 됐고, 그보다 왜 이경 나부랭이들이 6시간씩 입초 서는데? 아까 내무반 보니까 인원도 나오는거 같더만"
아까 부대 복귀 당시의 입초 상황을 보고 물었다. 그러자 도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것도 지훈 수경 작품이지 말입니다. 이경은 세 타임, 일경도 세 타임, 상경은 두 타임, 수경은 한 타임씩 근무 서는 걸로. 거기다가 휴가 땜에 두 명 이상 근무 빠지면 이경들 뒤집니다"
그 말에 김박스는 울컥했다.
"이런 우라질. 누가 그딴 식으로 근무를 돌려? 씨발 옛날 김경진이 그 개쓰레기 새끼 왕고 놀음 하던 시절에 하던 거를 다시 한다고? 경비계에서 뭐라고 안 해?"
"요즘 경비계 완전히 관리 손 뗐습니다. 계장님 징계 먹고 진급까지 좆되고, 오 경장님도 권고 처분 받고 나서 완전 두 사람 다 정신머리 나갔다 아입니까"
"후"
도진은 울분에 찬 듯 입을 열었다.
"솔까 만약에 김 수갱님이 총대 안 맸으면 지훈 수경은 원래 견장 안 차는 군번 아닙니까. 바로 일주 수경이 견장 물려 받는거지. 거기다가 애들 보는 앞에서 벌벌 떨면서 이름 다 불어버린 고참이 애들 앞에서 가오 잡는게 말이나 됩니까. 애들 제일 골려먹고 후려친게 자긴데. 지금도 안 좋은 악습 다 부활시킨거 아십니까? 지금 막내들 지난 주 이번 주 다 미싱 돌립니다. 쳐 맞으면서. 아예 안 터졌으면 몰라도, 이거 백퍼 또 터집니다. 그리고 지훈 수경 본인은 또 애들 손 안 댑니다. 상경줄 시키지"
김박스 수경은 젓가락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총대 메고 기율대 다녀오면서 뗀 견장. 후임에게 견장을 물려주고 난 이후 '열외' 고참이 되고나면 뒷방 늙은이가 되어 현행 내무반장을 최대한 존중하고 한발짝 물러서는 것이 암묵적인 룰. 게다가 이제 남은 기간은 한달 남짓. 귀찮게 살아있는 '현재 권력'에 뒷방 늙은이가 설쳐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하지만…
물상경 나부랭이가 이 정도로 불만이 가득차서 미주알 고주알 열외 고참에게 불만을 털어놓을 정도면 상황이 안 봐도 뻔했다. 게다가 자기 손은 더럽히지 않고 후임들만 고생시키는 그의 맏 후임. 상황을 바로 잡을 수 있는건 오로지 '왕고'인 본인 뿐이었다.
"여튼 아가리 관리 잘해라"
김박수 수경은 싱크대의 설거지 더미에 다 먹고 난 냄비를 올려놓으며 몸을 돌렸다. 산처럼 쌓여있는 설거지 더미… 이것도 본인이 왕고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이경들이 고참들 근무 대신 서느라 내무실의 일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불과 2주만에 모든 악습이 다시 부활하고 있었다. 악습을 부활시키기는 쉬워도 없애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김박스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훈아"
김박스는 지훈을 따로 불러내어 담배를 건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담배가 있다며 건낸 담배를 거부했다.
"말씀하십쇼"
어색한 분위기. 사실 김박스 본인도,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는게 좋을지에 대해서는 감이 없었다.
"지금 너 방식대로 애들 돌리는거, 좀 아닌거 같다"
하지만 한참동안 지훈은 말이 없었다.
"김박스 수경님… 김 수경님 때문에 애들 관리 많이 힘듭니다. 안 계실 때 애들 잡는거 진짜 힘들었습니다"
"애들 달달 갈군다고 그게 분위기 잡는거 아니잖아"
"각자 방식이 있는거 아닙니까"
순간 김박스는 차라리 그냥 좋게 이야기를 꺼내는 대신 그냥 옛날 옛적, 힘으로 갈구듯이 주저앉히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지훈이는 내무반장이다, 라는 생각에 참았다.
"이대로 애들 굴리다가 또 터지면, 니 어떻게 책임질건데?"
"다 생각이 있습니다"
"니 밑에 애들 희생시킬라고?"
"다 각자의 방식이 있는거 아닙니까"
김박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움찔 놀란 듯 지훈은 뒤로 한발자국 물러섰지만, 김박스는 그저 조용히 몸을 돌려 내무실로 향할 따름이었다.
"다음 주에 검열이다. 다들 각오해라. 지훈아, 알제? 관리 단디해라"
진압검열, 흔히 '짜박'이라 부르는 전의경들의 최대 시련, 육군에게 유격이 있다면 전의경에는 짜박이 있다할만큼 고되고 '구타가 허용된다'는 암묵적인 룰의 고된 훈련과 검열의 시기. 평소 같았다면 철저히 일정과 직접 짠 훈련 계획을 들고 왔을 오 경장이, 그저 일정과 내용이 적힌 공문을 내무반장 조지훈 수경에게 건내고 내무실 밖으로 나갔다.
"너네 다 좆됐다"
슬며시 미소를 짓는 조지훈 수경. 그의 미소에 상경 이하 막내들 전체가 떨기 시작했다. 검열에 대비하여 강도 높은 훈련이 이뤄지는 짜박 기간. 그 과정에서 구타나 얼차려의 권한 역시 무소불휘로 주어지기에,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며 후임들을 자신의 발 아래 놓고 싶어하는 조지훈 수경을 그것을 최대한 이용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막내들은 슬그머니 김박스 수경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딜 츠다보노!"
상경 박상열은 발로 막내줄 태민을 건드리며 위협했고, 녀석은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날 오후부터 즉각적인 진압검열 대비 훈련이 시작되었다. 경찰서 서정을 가볍게 일고 여덟 바퀴 뛰는 것으로 끝나던 평소의 아침 구보와 달리, 온 동네를 돌며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빠른 속도의 구보가 이어졌다. 운동량이 부족한 일부 상경줄에서도 헉헉대는 이들이 속출했고, 몸이 약한 이경 윤식은 낙오까지 하고 말았다. 즉각적인 '응징'이 있었고, 계속해서 이어진 진압검열 훈련에서도 동작을 신속하게 몸에 익히지 못하는 후임들은 구타는 물론, 식사 직후 식당 미싱까지 예정되었다.
"계장님"
경비계에 들어선 김박스 수경의 모습에, 조만규 경사는 "와?" 하고 반가이 그를 맞이했다.
"제가 애들 훈련 좀 더 시켜도 되겠습니까. 일과 후 시간에"
조만규 경사는 눈을 끔뻑이다 물었다.
"니 열외 아이가? 와 열외 고참이 아들 굴리노? 니 그러다 몸 성히 전역 못한데이" 하며 웃던 그는 "알았다. 마 니가 하면 지후이 그 빙시보다 잘하겄지. 이번 훈련, 청에서 빡세게 검열한다카니까는, 단디해라"
"예 알겠습니다"
그러나 계장은 김박스 수경에게 또 물었다.
"지후이 하는 꼴이 눈에 안 차나뵈?"
그러나 김박스는 웃으며 말했다.
"잘합니다. 근데 제가 심심해서요"
오후 7시 반. 근무와 설거지 등을 위한 최소 인원을 제외한 일이경 막내들은 왕고 김박스의 지도 하에 여전히 진압검열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낮의 살벌한 훈련 분위기 대신, 과외하듯 차분한 지도에 일이경들은 조금이나마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낮에 두어 시간을 구르면서 하는 것보다, 지금의 20분 훈련이 더 몸에 착착 배기 시작했다.
"이 동작에서 병신같이 이렇게 휘두르지 말고, 절도있게 딱, 딱, 한 명씩 해봐. 태민이"
"이경 김태민!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그렇지. 이제 되네. 아 깝깝한 쉐리. 하면 되잖아. 다음, 윤식이"
"이경 김윤식! 하나! 둘! 셋! 넷, 넷!"
"아이 쉐키야. 팔을 이렇게 휘두르지 말라고. 뭐 야구 해? 다시"
"이경 김윤식.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그렇지 그렇지. 좋아"
훈련이 끝난 후, 김박스는 녀석들에게 물을 자유롭게 마실 수 있게 했다. 하루종일 물에 굶주렸던 녀석들의 얼굴에 겨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너무 쳐먹으면 퍼지니까 적당히 마셔. 다 마신 새끼들은 딱 10분간 누워서 눈 감고 있어라"
김박스는 그 스스로가 말년에 뭐하는 짓인가, 회의도 들었지만 틀린 짓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언제 본인이 이렇게 자비로워졌는가, 하는 생각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김수갱님, 아까 뭔 지훈 수경이 뭔 소리 한 줄 아십니까"
"뭔데"
다음 날 오후. 도진은 또 얼굴에 한 가득 미소를 갖고 나타나 썰을 풀었다.
"김 수경님 땜에 미치겠답니다. 열외가 말년에 미쳐가지고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왜 헛지랄하는지 모르겠다꼬…"
김박스는 피식 웃었다.
"원래 열외들이 막내들 챙기는거야. 뭣도 모르는 병신들이 왕고 놀이한다고 쳐놀아서 이상하게 괴롭히기나 하는거지. 근데 다른 애들은 뭐래디"
"류 수경만 꿍짝이 맞으니까네 맞장구를 치는데, 다른 고참들은 뒤에서 다 지훈 수경 씹씁니다. 지도 계속 가르치는거 다 틀리는거, 진짜 김박스 수경 아이면 좆될 뻔 했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김박스 수경은 그 말에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지훈이 많이 힘들거다. 근데 지가 왜 힘든지 스스로 느끼면 알겠지. 여튼 너도 이제 내 앞이라고 지훈이 씹지 마라"
"상경! 정도진. 예 알겠씁니다"
정색하며 경계를 마빡에 붙이는 녀석을 보며 김박스는 웃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벌써 이렇게 빠졌으니 나중에 넌 지훈이보다 더 할 새끼야. 넌 내 맏후임이었음 진작에 죽었어"
"제가 김 수경님 땜에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저 견장 달고도 아무도 저 대우 안 해주는거, 밑에 애들이 농담치듯 가라 견장이라고, 김박스 수경님 오시면 돌려줘야 한다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거기에 김 수경님까지 진짜 이래 저 내무반장 대우 안 하면 제가 폭군처럼 지랄하는거 밖에 수 있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사실 모르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본인 스스로가 견장 놀이에 너무 깊숙히 빠진건 아닌가, 그래서 지훈의 고립과 그의 폭주를 더 부추기게 만든 꼴은 아닌가 하는 생각. 하지만 김박스는 말했다.
"니 하나 가오 챙기자고 애새끼들 다 곯아터지게 만들고 빨간 줄 가게 만드는게 맞어? 어차피 난 이제 다음 주면 말년 나간다. 내 지랄… 나는 아직도 니가 완벽히 틀렸다고 말한 적은 없다. 다만 니가 더 생각해보길 바란다. 나는"
전의경 대원 전부의 경례, 그리고 경찰서 맞은 편 티켓다방 '휴' 김양과 오양의 껌 짝짝 씹으며 "오빠야, 쁘쓰 시간 마이 남았으니까네, 크피 한잔 마시고 스울가라" 하는 유혹을 뒤로 하며, 김박스는 서울로의 전역 길에 나섰다. 국가의 의무로부터, 지긋지긋한 칠성 땅을 벗어나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어.
"야"
선 채로 잠든 그 이경은 그러나 쉽게 깨지 않았고, 다시 한번 "야!" 하는 호통 후에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의 눈 앞에 전설의 '보라돌이' 진압복을 입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기절초풍하며, 뒤늦게 경례를 올렸다.
"추, 충성!"
남자는 그 이경에게 "너 뭐야? 신병이 빠져가지고" 하고 물었고, 이경은 더듬거리며 "요즘 하루 6시간씩 근무를 서느라…" 하고 변명을 했고, 뒤늦게 자신이 '변명'을 했다는 사실에 더 크게 놀라며 "아닙니다!" 하고 크게 소리쳤지만, 이미 보라돌이 진압복의 남자는 입초를 지나 경찰서 본관의 경비계로 향하고 있었다.
왕고 : 분노의 권력자
"충성. 수경, 김박스는…"
"됐담마. 임마야, 수고했다. 으뜨노? 좋~은데 가서 빡세게 구르고 오니까?"
경비계에 기율대 복귀 신고를 하려는 수경 김박스. 경비계장 조만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고, 김박스 역시 피식 웃으며 "간만에 운동도 하고 좋았습니다. 그럼 들어가보겠습니다. 충성" 하고 경례를 올렸다.
"그래, 욕 봤다. 가서 푹 쉬그라"
칠성 경찰서 전경 왕고 수경 김박스. 그는 내무실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꽤나 지친 듯 걸음은 무거웠지만 그 눈빛에는 살기가 어려있었고, 그 한걸음 한걸음에서는 등에 짊어진 더블백 이상의 짬밥 무게가 느껴졌다.
"충성!"
"추, 충성!"
안광이 희번뜩거리는 그의 눈길에 내무실을 드나들던 향하던 이경, 일경들은 지리며 경례를 올려붙었고, 꽤나 지친 얼굴이었지만 박스는 그들의 경계를 하나하나 받아주며 드디어 내무실에 들어섰다.
"어!"
기율대로 끌려갔던 왕고의 복귀. 내무반에 누워있던 두 마리의 물수경 나부랭이, 안일주 류진수는 벌떡 일어서며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아이고 김수갱님 몰골이 이게 뭡니까!"하며 반갑게 맞이했지만, 그들의 너스레는 무시하며 더블백을 내려놓은 김박스는 현 내무반장 조지훈에게 형식 상의 복귀 신고를 했다.
"충성, 신고합니다. 수경 김박스는 200X년 X월 X일 부로… 기율대 무사 복귀를… 신고…합니다"
그리고 그 와중, 미묘한 분위기가 내무실에 흘렀다. 비록 견장을 넘겨 이제는 '열외' 고참이 되었다고는 하나, 바로 직전까지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왕고가 기율대에서의 복귀 신고를 하는 과정에서
"아 신고는 무슨 신고입니까"
식의 반응이 없이, 오히려 당연히 받을거 받는다는 듯 고개까지 치켜들고 복귀신고를 끝까지 받은 조지훈의 모습에 내무실 안의 모두는 살짝 움찔했다. '전' 견장 김박스와 '현' 견장 조지훈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지만, 김박스는 피식 웃으며 "아 힘들다. 이거 더블백 좀 치워줘라"하며 내무반에 드러누웠다.
하지만 내무반장 조지훈은 "아 '똥'이 어딜 바닥에 드러눕습니까. 야들아, 내무실에 똥 떨어졌는데 안 치우냐?" 하며 능글맞게, 그러나 곧 정색하며 김박스를 타박했다.
아직까지도 내무반의 모두가 김박스의 위세를 기억하기에, 농담으로 상황을 넘기기 위해 어색하게 웃는 분위기였지만 곧 "뭐하냐?" 하는 조지훈의 정색 어린 말에 이경 몇몇이 김박스를 일으키러 다가갔다. 그 상황에 상경줄 전체와 물 수경 둘도 불끈했지만 김박스는 "아 됐다 됐다. 알았다. 하, 까칠하네 우리 지후이. 똥은 밥 먹으러 갑니다~" 하며 내무실을 다시 나섰다.
혼자 식당으로 올라와 힘없이 라면을 끓인 김박수 수경 옆으로, 상경줄 막내 정도진이 쪼르르 올라와 반가움을 표시했다.
"김박스 수경님, 얼굴이 진짜 반쪽이 되셨지 말입니다"
그 말에 김박스는 라면을 한 젓가락 후두룩 먹은 뒤 "딱 2주 자리 비웠다고 이젠 너도 말입니다 쓸 짬밥이냐?"하며 피식 웃었다. 그 말에 어색해하던 정도진 상경은 머리를 긁적이다 말했다.
"좀 전에 내무반 이야기, 들었습니다. 하, 진짜 조지훈 수경 너무하지 말입니다"
무심하게 라면을 먹던 김박스. 그는 아무 내색하지 않고 그저 젓가락질만 열심히 할 따름이었고, 정도진 역시 말을 이어나갔다.
"김박스 수갱님 기율대 끌려 가시고… 그 얘기 다 전해 듣고 진짜, 지인짜 저 울었습니다"
김박스의 눈동자에는, 지난 한달의 시간이 마치 주마등처럼 흘렀다.
정확히 한달 전의 새벽 1시 반. 입초를 지키던 수경 조지훈은 꾸벅꾸벅 잠에 빠져들어든 상태였고 마침 인접한 군천서에 볼일이 있어 방문했던 감찰은 아무런 제재 없이 경찰서 안으로 진입했다. 그는 입초의 상태를 보며 혀를 차고는, 곧바로 경찰서 유치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마침 유치장에서 근무를 서고 있던 의경 이상민 상경은 의경 막내 김치선을 갈구다가 뺨을 올려붙이던 순간이었고, 그 장면은 감찰관의 눈에 바로 목격되었다. 마침 당직을 서고 있던 경비계 오동석 경장은 바로 호출되었고, 감찰관은 최근 본청에서의 '전의경 대원들 구타 실태에 관한 특별 단속 및 근무기강 확립 지시'를 운운하며 노발대발했다. 게다가 유치장 내에는 존재해서는 안되는 라이터가 이상민 상경의 근무복 주머니에서 발견됨으로서 상황이 한층 심각해졌다.
이윽고 약 15분 후, 감찰은 관리실태가 엉망이라며 5분대기조 긴급 출동을 점검했다. 다행히 '살아있는 악마의 현신' 김박스 수경의 지휘 하에 5분대기조 전경들은 3분 16초만에 A형 출동대기 태세를 완벽하게 마무리했지만 단단히 독이 오른 감찰은 거기에서 상황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 없었다.
새벽 2시를 넘긴 시간에 대뜸 갑자기 일이경 대원들에 대한 1:1 상담을 한다며 경비계 오동석 경장 입회 하에 구타 및 폭력에 대한 상담조사를 실시했다. 물론 단단히 입단속이 되어있는 '아래' 대원들은 결코 입을 쉽게 열지 않았지만 감찰은 집요했다.
"팬티를 제외한 상하의 탈의. 실시"
그리고 일이경 대원의 몸에서 한두개의 멍자국이 발견되었다. 물론 그것들은 구타 이외에도 생활 과정에서 발생한 것도 있지만, 불행하게도 그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니이, 대답 똑바로 안하다가 뒤늦게 누구 하나 입 열면 너도 처벌받는다이?"
감찰관의 협박에도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지만, 이제 전입 한달 차의 눈치 제로 고문관 전경 막내 주영호가 입을 열고 말았다.
"그게…잘못하면…혼나기도…"
"어떻게 혼나는데?"
"… …"
"대답 똑바로 안하나!"
"…머리를 이렇게 쥐어박기도 하고, 발로 걷어차기도 하고…"
오동석 경장은 얼굴을 쓸어내렸고, 감찰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흘렀다. 그리고 감찰은 다시 집요할 정도로 일이경 대원들에 대한 상담조사를, 새벽 5시까지 실시했다. 그리고 모든 실태를 파악한 후 "또 봅시다" 하는 말과 함께 경찰서를 떠났다.
당연히 경찰서는 발칵 뒤집혔고, 일주일간 강도 높은 자체 조사가 실시되었다. 우선은 왕고이자 내무반장 김박스에 대한 최우선적인 혐의가 씌워져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놀랍게도 그는 단 한 차례도 손찌검을 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가 있는 대원이 발견될 경우 얼차례를 주기는 했지만, 폭행을 가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밑으로 박상열 상경, 한동석 상경, 이주민 상경 등은 심각한 구타의 전력이 드러났고, 부분대장 조지훈 수경 역시 상경들에 대한 구타의 증언이 이경들을 통해 드러났다. 마침 지방청에서도 본보기로 그들에 대한 엄중처벌을 경고했고, 서장 역시 진급에 누가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을 감싸는 대신 엄중 처벌을 지시했다.
상황이 안 좋게 흘렀다. 박상열과 한동석에 대한 형사처벌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그때 김박스가 나섰다.
"계장님,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밑에 애들 형사처벌만은 피하게 해주십시오"
"니가 뭘 책임진다꼬? 금 니가 빨간 줄 그을래? 어잉?"
경비계장 조만규도 징계가 예고된 상태. 게다가 상황이 심상찮게 흘렀기에 김박스의 말은 치기 어린 헛소리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아직 자체조사 보고서는 지방청까지 올라가지 않은 상태. 김박스는 그를 설득했다. 여러 명을 처벌하게 되면 관리 책임 역시도 커지고, 결코 일이 좋게 끝날 수 없다. 게다가 상경줄이 처벌을 받게 되면 분위기상 좋게 끝날 수 없다. 하지만 전역 두 달 앞둔 고참의 탓으로 모든 것을 떠넘기게 되면 선처를 기대해 볼 수 있다, 게다가 나는 지방청장 상도 하나 있지 않는데 선처 더더욱 기대해 볼 수 있지 않나, 라는 논리였다.
앉은 자리에서 담배 한 대를 다 태운 고뇌 끝에 조만규는 그 의견에 오케이했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모든게 좋게좋게 끝나라는 법은 없는거 아이가. 니 그러다 빨간 줄 갈 수도 있다. 진짜 후회 안 하나?"
"잘 안되면 후회하겠지만, 잘 되면 군대 무용담 하나 생기는거지 말입니다"
"빙신"
그리고 아주 다행히도, 상황이 참작되어 김박스는 기율대 2주 처분이라는 매우 낮은(?) 처분을 받게 되었다. 기율교육대. 2천년대 초중반까지, 충주의 경찰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바 있는 전의경이라면 모두가 그 이름만으로도 겁을 먹는 2주짜리 전설적인 군기교육대. 물론 전경대나 기동대, 방순대 출신들은 오히려 "기율대에 쉬러간다"랄 정도로 그 자대에서의 지옥같은 갈굼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2주간 한계에 가깝게 굴려대는 훈련량만큼은 무시할 것이 아니었다.
"뭐 새꺄. 그냥 내가 총대 맨거지. 원래 고참이 그런거 책임지라고 있는건데. 맬만 하니까 맨거지"
"아입니다. 그래도 좋게 풀려서 기율대만 다녀온거지, 그때 장난 아니었지 않습니까. 형사처벌 된다 어쩐다 소리 나오는데도 총대 매신거 아닙니까. 조치훈 수경만 해도, 그때 자기는 절대 아니라고, 외려 밑에 상경들, 일경들 이름 다 불었잖습니까. 세상에 수경이 되서 자기 혼자 살자고 11명을 부는게 말이 됩니까"
라면을 어느새 다 비운 김박스는 말했다.
"이 쉐키 고참 뒷담을 다 까네. 그건 됐고, 그보다 왜 이경 나부랭이들이 6시간씩 입초 서는데? 아까 내무반 보니까 인원도 나오는거 같더만"
아까 부대 복귀 당시의 입초 상황을 보고 물었다. 그러자 도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것도 지훈 수경 작품이지 말입니다. 이경은 세 타임, 일경도 세 타임, 상경은 두 타임, 수경은 한 타임씩 근무 서는 걸로. 거기다가 휴가 땜에 두 명 이상 근무 빠지면 이경들 뒤집니다"
그 말에 김박스는 울컥했다.
"이런 우라질. 누가 그딴 식으로 근무를 돌려? 씨발 옛날 김경진이 그 개쓰레기 새끼 왕고 놀음 하던 시절에 하던 거를 다시 한다고? 경비계에서 뭐라고 안 해?"
"요즘 경비계 완전히 관리 손 뗐습니다. 계장님 징계 먹고 진급까지 좆되고, 오 경장님도 권고 처분 받고 나서 완전 두 사람 다 정신머리 나갔다 아입니까"
"후"
도진은 울분에 찬 듯 입을 열었다.
"솔까 만약에 김 수갱님이 총대 안 맸으면 지훈 수경은 원래 견장 안 차는 군번 아닙니까. 바로 일주 수경이 견장 물려 받는거지. 거기다가 애들 보는 앞에서 벌벌 떨면서 이름 다 불어버린 고참이 애들 앞에서 가오 잡는게 말이나 됩니까. 애들 제일 골려먹고 후려친게 자긴데. 지금도 안 좋은 악습 다 부활시킨거 아십니까? 지금 막내들 지난 주 이번 주 다 미싱 돌립니다. 쳐 맞으면서. 아예 안 터졌으면 몰라도, 이거 백퍼 또 터집니다. 그리고 지훈 수경 본인은 또 애들 손 안 댑니다. 상경줄 시키지"
김박스 수경은 젓가락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총대 메고 기율대 다녀오면서 뗀 견장. 후임에게 견장을 물려주고 난 이후 '열외' 고참이 되고나면 뒷방 늙은이가 되어 현행 내무반장을 최대한 존중하고 한발짝 물러서는 것이 암묵적인 룰. 게다가 이제 남은 기간은 한달 남짓. 귀찮게 살아있는 '현재 권력'에 뒷방 늙은이가 설쳐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하지만…
물상경 나부랭이가 이 정도로 불만이 가득차서 미주알 고주알 열외 고참에게 불만을 털어놓을 정도면 상황이 안 봐도 뻔했다. 게다가 자기 손은 더럽히지 않고 후임들만 고생시키는 그의 맏 후임. 상황을 바로 잡을 수 있는건 오로지 '왕고'인 본인 뿐이었다.
"여튼 아가리 관리 잘해라"
김박수 수경은 싱크대의 설거지 더미에 다 먹고 난 냄비를 올려놓으며 몸을 돌렸다. 산처럼 쌓여있는 설거지 더미… 이것도 본인이 왕고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이경들이 고참들 근무 대신 서느라 내무실의 일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불과 2주만에 모든 악습이 다시 부활하고 있었다. 악습을 부활시키기는 쉬워도 없애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김박스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훈아"
김박스는 지훈을 따로 불러내어 담배를 건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담배가 있다며 건낸 담배를 거부했다.
"말씀하십쇼"
어색한 분위기. 사실 김박스 본인도,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는게 좋을지에 대해서는 감이 없었다.
"지금 너 방식대로 애들 돌리는거, 좀 아닌거 같다"
하지만 한참동안 지훈은 말이 없었다.
"김박스 수경님… 김 수경님 때문에 애들 관리 많이 힘듭니다. 안 계실 때 애들 잡는거 진짜 힘들었습니다"
"애들 달달 갈군다고 그게 분위기 잡는거 아니잖아"
"각자 방식이 있는거 아닙니까"
순간 김박스는 차라리 그냥 좋게 이야기를 꺼내는 대신 그냥 옛날 옛적, 힘으로 갈구듯이 주저앉히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지훈이는 내무반장이다, 라는 생각에 참았다.
"이대로 애들 굴리다가 또 터지면, 니 어떻게 책임질건데?"
"다 생각이 있습니다"
"니 밑에 애들 희생시킬라고?"
"다 각자의 방식이 있는거 아닙니까"
김박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움찔 놀란 듯 지훈은 뒤로 한발자국 물러섰지만, 김박스는 그저 조용히 몸을 돌려 내무실로 향할 따름이었다.
"다음 주에 검열이다. 다들 각오해라. 지훈아, 알제? 관리 단디해라"
진압검열, 흔히 '짜박'이라 부르는 전의경들의 최대 시련, 육군에게 유격이 있다면 전의경에는 짜박이 있다할만큼 고되고 '구타가 허용된다'는 암묵적인 룰의 고된 훈련과 검열의 시기. 평소 같았다면 철저히 일정과 직접 짠 훈련 계획을 들고 왔을 오 경장이, 그저 일정과 내용이 적힌 공문을 내무반장 조지훈 수경에게 건내고 내무실 밖으로 나갔다.
"너네 다 좆됐다"
슬며시 미소를 짓는 조지훈 수경. 그의 미소에 상경 이하 막내들 전체가 떨기 시작했다. 검열에 대비하여 강도 높은 훈련이 이뤄지는 짜박 기간. 그 과정에서 구타나 얼차려의 권한 역시 무소불휘로 주어지기에,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며 후임들을 자신의 발 아래 놓고 싶어하는 조지훈 수경을 그것을 최대한 이용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막내들은 슬그머니 김박스 수경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딜 츠다보노!"
상경 박상열은 발로 막내줄 태민을 건드리며 위협했고, 녀석은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날 오후부터 즉각적인 진압검열 대비 훈련이 시작되었다. 경찰서 서정을 가볍게 일고 여덟 바퀴 뛰는 것으로 끝나던 평소의 아침 구보와 달리, 온 동네를 돌며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빠른 속도의 구보가 이어졌다. 운동량이 부족한 일부 상경줄에서도 헉헉대는 이들이 속출했고, 몸이 약한 이경 윤식은 낙오까지 하고 말았다. 즉각적인 '응징'이 있었고, 계속해서 이어진 진압검열 훈련에서도 동작을 신속하게 몸에 익히지 못하는 후임들은 구타는 물론, 식사 직후 식당 미싱까지 예정되었다.
"계장님"
경비계에 들어선 김박스 수경의 모습에, 조만규 경사는 "와?" 하고 반가이 그를 맞이했다.
"제가 애들 훈련 좀 더 시켜도 되겠습니까. 일과 후 시간에"
조만규 경사는 눈을 끔뻑이다 물었다.
"니 열외 아이가? 와 열외 고참이 아들 굴리노? 니 그러다 몸 성히 전역 못한데이" 하며 웃던 그는 "알았다. 마 니가 하면 지후이 그 빙시보다 잘하겄지. 이번 훈련, 청에서 빡세게 검열한다카니까는, 단디해라"
"예 알겠습니다"
그러나 계장은 김박스 수경에게 또 물었다.
"지후이 하는 꼴이 눈에 안 차나뵈?"
그러나 김박스는 웃으며 말했다.
"잘합니다. 근데 제가 심심해서요"
오후 7시 반. 근무와 설거지 등을 위한 최소 인원을 제외한 일이경 막내들은 왕고 김박스의 지도 하에 여전히 진압검열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낮의 살벌한 훈련 분위기 대신, 과외하듯 차분한 지도에 일이경들은 조금이나마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낮에 두어 시간을 구르면서 하는 것보다, 지금의 20분 훈련이 더 몸에 착착 배기 시작했다.
"이 동작에서 병신같이 이렇게 휘두르지 말고, 절도있게 딱, 딱, 한 명씩 해봐. 태민이"
"이경 김태민!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그렇지. 이제 되네. 아 깝깝한 쉐리. 하면 되잖아. 다음, 윤식이"
"이경 김윤식! 하나! 둘! 셋! 넷, 넷!"
"아이 쉐키야. 팔을 이렇게 휘두르지 말라고. 뭐 야구 해? 다시"
"이경 김윤식.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그렇지 그렇지. 좋아"
훈련이 끝난 후, 김박스는 녀석들에게 물을 자유롭게 마실 수 있게 했다. 하루종일 물에 굶주렸던 녀석들의 얼굴에 겨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너무 쳐먹으면 퍼지니까 적당히 마셔. 다 마신 새끼들은 딱 10분간 누워서 눈 감고 있어라"
김박스는 그 스스로가 말년에 뭐하는 짓인가, 회의도 들었지만 틀린 짓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언제 본인이 이렇게 자비로워졌는가, 하는 생각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김수갱님, 아까 뭔 지훈 수경이 뭔 소리 한 줄 아십니까"
"뭔데"
다음 날 오후. 도진은 또 얼굴에 한 가득 미소를 갖고 나타나 썰을 풀었다.
"김 수경님 땜에 미치겠답니다. 열외가 말년에 미쳐가지고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왜 헛지랄하는지 모르겠다꼬…"
김박스는 피식 웃었다.
"원래 열외들이 막내들 챙기는거야. 뭣도 모르는 병신들이 왕고 놀이한다고 쳐놀아서 이상하게 괴롭히기나 하는거지. 근데 다른 애들은 뭐래디"
"류 수경만 꿍짝이 맞으니까네 맞장구를 치는데, 다른 고참들은 뒤에서 다 지훈 수경 씹씁니다. 지도 계속 가르치는거 다 틀리는거, 진짜 김박스 수경 아이면 좆될 뻔 했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김박스 수경은 그 말에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지훈이 많이 힘들거다. 근데 지가 왜 힘든지 스스로 느끼면 알겠지. 여튼 너도 이제 내 앞이라고 지훈이 씹지 마라"
"상경! 정도진. 예 알겠씁니다"
정색하며 경계를 마빡에 붙이는 녀석을 보며 김박스는 웃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벌써 이렇게 빠졌으니 나중에 넌 지훈이보다 더 할 새끼야. 넌 내 맏후임이었음 진작에 죽었어"
"왕년의 독사 김박스 수경님 옛날 옛적에 돌아가시고 이제는 부처 김박스만 남았다는 소문 이미 백년 전에 들었습니다"
"좆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진압검열은 성공리에 마무리 되었다. 인접서 3개의 전경대 대원들이 함께 모여 검열을 받았는데, 칠성 경찰서는 그 중에서도 최고 평점을 받았다. 전원에게 특박 1일씩이 부여되었다. 공식적인 최고의 수훈은 내무반장 조지훈이었지만, 그걸 인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김빡스 수경님… 저한테 자꾸 왜 이러십니까"
이번에는 조지훈이 김박스를 따로 불러냈다. 김박스가 그저 웃기만 하자, 조지훈이 말했다.
"열외 고참이라고 최대한 대우해드리는데, 자꾸 이렇게 나대시면 저도 곤란하지 말입니다. 아니 제가 솔직히 애들 갈군게 저 하나 좋으라고 그런거 아니잖습니까"
김박스는 그저 그 말에 코웃음을 칠 따름이었다. 그제서야 조금 찔렸는지, 지훈은 "그리고 저도 솔까 옛날에 당한게 있는데, 그거 물려주면 안됩니까? 글고 김박스 수경님도 저 덕분에 편한거 있지 않았습니까" 하고 부연해서 말을 했다. 그러나 김박스는 "지랄하네 미친 새끼가"라는 운과 함께 반박했다.
"내가 언제 니 귀싸대기 한 대라도 때린 적 있냐. 손끝 하나 댄 적 있냐. 그리고 권력 휘두르고 싶으면 새꺄 모범을 보인 다음에 휘두르던가. 니 좆대로 니 편한대로만 하면 어디 제대로 돌아갈거 같애?"
"좆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진압검열은 성공리에 마무리 되었다. 인접서 3개의 전경대 대원들이 함께 모여 검열을 받았는데, 칠성 경찰서는 그 중에서도 최고 평점을 받았다. 전원에게 특박 1일씩이 부여되었다. 공식적인 최고의 수훈은 내무반장 조지훈이었지만, 그걸 인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김빡스 수경님… 저한테 자꾸 왜 이러십니까"
이번에는 조지훈이 김박스를 따로 불러냈다. 김박스가 그저 웃기만 하자, 조지훈이 말했다.
"열외 고참이라고 최대한 대우해드리는데, 자꾸 이렇게 나대시면 저도 곤란하지 말입니다. 아니 제가 솔직히 애들 갈군게 저 하나 좋으라고 그런거 아니잖습니까"
김박스는 그저 그 말에 코웃음을 칠 따름이었다. 그제서야 조금 찔렸는지, 지훈은 "그리고 저도 솔까 옛날에 당한게 있는데, 그거 물려주면 안됩니까? 글고 김박스 수경님도 저 덕분에 편한거 있지 않았습니까" 하고 부연해서 말을 했다. 그러나 김박스는 "지랄하네 미친 새끼가"라는 운과 함께 반박했다.
"내가 언제 니 귀싸대기 한 대라도 때린 적 있냐. 손끝 하나 댄 적 있냐. 그리고 권력 휘두르고 싶으면 새꺄 모범을 보인 다음에 휘두르던가. 니 좆대로 니 편한대로만 하면 어디 제대로 돌아갈거 같애?"
김박스는 지훈을 똑바로 쏘아보며 말했다. 그러자 지훈은 무언가 복받치듯 씩씩대며 말했다.
"제가 김 수경님 땜에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저 견장 달고도 아무도 저 대우 안 해주는거, 밑에 애들이 농담치듯 가라 견장이라고, 김박스 수경님 오시면 돌려줘야 한다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거기에 김 수경님까지 진짜 이래 저 내무반장 대우 안 하면 제가 폭군처럼 지랄하는거 밖에 수 있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사실 모르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본인 스스로가 견장 놀이에 너무 깊숙히 빠진건 아닌가, 그래서 지훈의 고립과 그의 폭주를 더 부추기게 만든 꼴은 아닌가 하는 생각. 하지만 김박스는 말했다.
"니 하나 가오 챙기자고 애새끼들 다 곯아터지게 만들고 빨간 줄 가게 만드는게 맞어? 어차피 난 이제 다음 주면 말년 나간다. 내 지랄… 나는 아직도 니가 완벽히 틀렸다고 말한 적은 없다. 다만 니가 더 생각해보길 바란다. 나는"
"뭘 생각해 보란 말입니까"
"좆잡고 생각을 해 봐 새끼야"
김박스 말년 수경와 조지훈 내무반장의 갈등은 그 날 이후로 다시 표면 위로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김박스는 그 날 이후로 완벽히 열외 고참으로서 조용히 지냈을 따름이고, 조지훈 역시 약 2주간 좆같이 돌리던 시스템을 과거 김박스 치세 시절의 공평한 시스템으로 다시 돌렸다.
물론 한번 발생한 구타의 열기가 쉽게 식지는 않았다. 조지훈 전역 이후, 그리고 몇 달 후 정도진 체제 하에서 또 한번의 구타 사건으로 내무반장이 기율대를 가는 일이 발생한 이후로는 때마침 터진 육군의 조 일병 사건을 전후해서 시스템이 많이 발전적으로 변했다는 소식이 들리긴 했지만 말이다.
김박스의 말년 휴가 이틀 전, 전라도 지역에서의 대규모 시위 때문에 지역 내 전경대/기동대/방순대의 부재를 틈타 농민연합회 칠성 지부의 폭력 시위를 3개 인접서의 경찰 직원들과 5대기 조 등의 오합지졸 연합으로 막아내는 과정에서 김박스는 대열이 무너지는 와중에 막내들 셋을 구했고, 조지훈은 그런 김박스를 구했다.
그리고 또 얼마의 시간이 흘러 드디어 김박스가 말년 휴가를 다녀오고, 전역 전날 밤 그는 말했다.
"이래저래 그동안 똥폼도 많이 잡고, 병신 짓도 많이 해서, 뒤돌아 보면 참 부끄럽다. 너네도 다 돌아 생각해보면 느낄걸. 게다가 나가보면 누구 하나 알아주지도 않는 군생활이다. 그래도… 나는 어차피 끌려온거, '잘'은 못해도 '열심히'는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욕심이 후임들 더 고생시키고 욕나오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간다. 남은 군생활 빡세게 잘하고, 마지막으로 일단 내가 보기에 너네가 좀 많이 부족한 거 같아서 일단 계장님한테 앞으로는 매일 출동 훈련을 해야된…"
"막내들 뭐하냐, 김박스 수경님 쳐 맞고 싶단다. 밟아드려라"
"충성! 신고합니다. 수경 김박스는, 200x년 x월 x일 부로,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충!성!"
"충성. 어이고, 수고했다"
전역 날 아침. 김박스는 많은 이의 축복 속에, 그리고 몇몇 후임들의 낯 간지러운 진심 고백 속에 경찰서를 등 뒤로 했다. 다들 한마디씩 덕담을 하며 이별을 기하던 도중, 애증의 맏후임 조지훈은 김박스에게 물었다.
"형, 그런데 진짜 저번에… 나보고 뭘 생각해보라는거? 난 이제껏 그 답을 잘 모르겠는데"
그러자 김박스는 웃으며 말했다.
"니 좆에 물어보세요. 흐, 새끼. 내가 바란 그대로 잘 해줬다. 고맙다. 그리고 너도 이제 말년이니까 몸 조심 잘하고… 니 말년 나오면 연락해라"
"그래요 형, 잘가. 아 존나 부럽다"
"그래, 잘 있어라. 야들아, 형 간다!"
김박스 말년 수경와 조지훈 내무반장의 갈등은 그 날 이후로 다시 표면 위로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김박스는 그 날 이후로 완벽히 열외 고참으로서 조용히 지냈을 따름이고, 조지훈 역시 약 2주간 좆같이 돌리던 시스템을 과거 김박스 치세 시절의 공평한 시스템으로 다시 돌렸다.
물론 한번 발생한 구타의 열기가 쉽게 식지는 않았다. 조지훈 전역 이후, 그리고 몇 달 후 정도진 체제 하에서 또 한번의 구타 사건으로 내무반장이 기율대를 가는 일이 발생한 이후로는 때마침 터진 육군의 조 일병 사건을 전후해서 시스템이 많이 발전적으로 변했다는 소식이 들리긴 했지만 말이다.
김박스의 말년 휴가 이틀 전, 전라도 지역에서의 대규모 시위 때문에 지역 내 전경대/기동대/방순대의 부재를 틈타 농민연합회 칠성 지부의 폭력 시위를 3개 인접서의 경찰 직원들과 5대기 조 등의 오합지졸 연합으로 막아내는 과정에서 김박스는 대열이 무너지는 와중에 막내들 셋을 구했고, 조지훈은 그런 김박스를 구했다.
그리고 또 얼마의 시간이 흘러 드디어 김박스가 말년 휴가를 다녀오고, 전역 전날 밤 그는 말했다.
"이래저래 그동안 똥폼도 많이 잡고, 병신 짓도 많이 해서, 뒤돌아 보면 참 부끄럽다. 너네도 다 돌아 생각해보면 느낄걸. 게다가 나가보면 누구 하나 알아주지도 않는 군생활이다. 그래도… 나는 어차피 끌려온거, '잘'은 못해도 '열심히'는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욕심이 후임들 더 고생시키고 욕나오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간다. 남은 군생활 빡세게 잘하고, 마지막으로 일단 내가 보기에 너네가 좀 많이 부족한 거 같아서 일단 계장님한테 앞으로는 매일 출동 훈련을 해야된…"
"막내들 뭐하냐, 김박스 수경님 쳐 맞고 싶단다. 밟아드려라"
"충성! 신고합니다. 수경 김박스는, 200x년 x월 x일 부로,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충!성!"
"충성. 어이고, 수고했다"
전역 날 아침. 김박스는 많은 이의 축복 속에, 그리고 몇몇 후임들의 낯 간지러운 진심 고백 속에 경찰서를 등 뒤로 했다. 다들 한마디씩 덕담을 하며 이별을 기하던 도중, 애증의 맏후임 조지훈은 김박스에게 물었다.
"형, 그런데 진짜 저번에… 나보고 뭘 생각해보라는거? 난 이제껏 그 답을 잘 모르겠는데"
그러자 김박스는 웃으며 말했다.
"니 좆에 물어보세요. 흐, 새끼. 내가 바란 그대로 잘 해줬다. 고맙다. 그리고 너도 이제 말년이니까 몸 조심 잘하고… 니 말년 나오면 연락해라"
"그래요 형, 잘가. 아 존나 부럽다"
"그래, 잘 있어라. 야들아, 형 간다!"
전의경 대원 전부의 경례, 그리고 경찰서 맞은 편 티켓다방 '휴' 김양과 오양의 껌 짝짝 씹으며 "오빠야, 쁘쓰 시간 마이 남았으니까네, 크피 한잔 마시고 스울가라" 하는 유혹을 뒤로 하며, 김박스는 서울로의 전역 길에 나섰다. 국가의 의무로부터, 지긋지긋한 칠성 땅을 벗어나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