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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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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025년. 미 우주 항공국은 그 창립 이래 가장 큰 과학적 성과를 거둔다. 아쉽게도 그 내용은 그리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엄청난 크기의 소행성을 확인한 것이다.

다각적인 분석이 이루어졌지만 지나치게 큰 운석의 크기는 정확히 13년 뒤 그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여 지구의 생명체 99.999%를 멸절시킬 것을 새삼 확신시켜주었을 따름이었다.

사회의 혼란을 대비하여 처음에는 기밀에 부쳐졌지만, 그것은 옳지 못한 결정이라 믿은 몇몇 나사의 과학자들이 그것을 인터넷을 통해 세상에 공표했고 아마추어 과학자들과 세계 각국의 천문학자들은 그것을 재확인했다.

소행성 충돌이라는 사상 최악의 재앙은 인류 종말을 현실화 했고 그에 대항하기 위한 각국 정부의 많은 의견들이 쏟아졌지만, 결과적으로 말해서 재앙 자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물론 우주선을 만들자거나 비교적 안전한 지대로 꼽히는 세계적 고원지대에 대규모 벙커를 짓자거나 우주 공간, 혹은 성층권 궤도에서 핵무기를 터뜨려보자는 사람들은 여전히 제법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남은 인생 즐기다 가자' 또는 '일단 그때가서 보자고. 맨날 종말론 때마다 이런 적이 한두번이냐고' 라는 식의 반응이었다.





그로부터 13년, 종말의 날





제발 빗나가기를 바라마지 않지만 과학자들의 의견이 맞다면 인류는 앞으로 3일 후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일단 브라질을 중심으로 남미 지역 1/3 이상의 땅은 핵무기 수백만개를 동시에 터뜨린 수준의 충격으로 말미암아 말그대로 '사라져 버리고', 약 4.5시간 내로 우리 한국은 높이 75미터 이상의 거대 쓰나미에 휩쓸리며 거대한 낙진이 앞으로 수십년간 모든 햇볕을 차단시켜 버릴 것이다. 일부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그냥 충돌 즉시 지구의 핵 자체가 파괴되어 지구 자체가 폭파될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건 소수론이다. 개인적으로는 그 소수론쪽이 더 마음에 들지만.

어쨌든 아비규환이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치안 자체가 마비되었고 생존을 위해 운영되던 그나마의 자경단도 반년 전 우리 동네를 덮친 부랑자 집단에게 안팎에서 습격을 받아 괴멸적 피해를 입은 이후로 운영이 중지되어, 원래부터 양아치나 사회 하층민이 많던 우리 동네는 그야말로 지옥이 되어버렸다. 보통 그런 놈들은 진즉에 부자 마을에 가서 원래 주인들 쫒아내고 거기서 눌러 산다는데, 병신같은 우리 동네 양아치들은 동네 건달 습성을 못 버리고 그저 동네 주민들이나 괴롭히고 있다.

원래 동네 건달 출신들이라 인구 규모나 집집마다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제법 이쁘장한 딸내미나 아줌마들을 이미 진작에 그들에게 유린당한지 오래고, 얼마 전 정인로에서 활동하던 건달들이랑 합세한 이후로는 아예 집집마다 돌면서 먹거리나 여자들을 털어갔다. 

동네에 자살한 사람들이나 굶어죽은 사람들의 시체 덕분에 그 썩는 냄새가 그칠 날이 없고 나는 그래서 하루빨리 종말의 그 날이 닥치기만을 기대하고 있다. 물론 나도 죽겠지만 저 새끼들도 뒤질테니까.

어쨌든 나의 유일한 낙은 초단파 네트웍 통신. HAM 무선통신이랑 좀 비슷한데, 그걸 인터넷에 필요한 전파 신호로 변환해서 사용하는… 중장거리 개인화 인터넷 서비스라고 해두자. 굳이 설명하자면 말이다.

사정은 어느 나라, 어느 도시나 비슷한 듯 했다. 다들 이렇게 살 바에야 그냥 싹다 죽어버리는게 낫겠다고, 젊은 시절에 좀비 영화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지금 사는 꼴이 딱 그 영화 속 주인공 꼴이라고, 어제 마누라가 갱단에게 몸 팔아서 썩은 옥수수를 좀 얻어왔는데 그 끓인 죽을 또 맛있게 먹고 있는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는 등 절망이 가득한 글들이 가득했다.

개인적으로는 좀 근거리에 있는 놈들이 어디 없을까 기대했지만 적어도 한국쪽 유저는 지지난 달에 전주에 사는 여자애 하나가 전부였다. 물론 그녀를 만나러 간다는건, 걸어서 태평양을 건넌다는 것과 동급의 무모함이다. 그보다 배가 고프다.

"음"

바퀴벌레 배양기에서 한끼 분량의 녀석들을 수제 믹서기에 넣고 팔이 아플 때까지 갈았다. 그리고 거기에 식용유와 간장을 조금 쳐서 씹는다. 맛있냐고 묻는 놈이 있다면 제정신이냐고 되묻겠지만, 일단 배고프면 적당히 먹을만하다.

솔직히 이걸 쓸 일은 없을 줄 알았다. 몇 년 전에 종말론이 새삼 이슈가 되었을 때(몇몇 광신적 종교 단체들이 기승을 부린 것 빼고 인간은 의외로 처음 몇 년 간, 다들 꽤 차분하게들 살았다. 하기사 13년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미친 짓을 하다가 감방에라도 들어가면 그 소중한 13년의 몇 년 분량을 감방에서만 썩어야 하니 얼마나 억울한가) '생존 필수도구'랍시고 인터넷에서 20달러에 팔던 키트를 사놓고 장농 속에 쳐받아두었는데 기적적으로 지지난 달에 떠올린 것이다. 

마침 동네 양아치들이 마지막으로 비축해놓은 건조 쌀 한 푸대를 가져간 통에, 거의 5일을 빗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이 키트에 바퀴들을 잡아넣었는데(아, 하도 동네에 시체들이 즐비해서 벌레들은 상대적으로 구하기 쉽다) 과연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 제법 먹을만큼 녀석들의 수가 불었고, 정말정말 고민하다 눈 딱 감고 먹기 시작한게 지금은 그냥 이게 매일의 끼니다.

하지만 이제 이것도 3일이다. 아 정말 빨리 종말이 왔으면 좋겠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종말에 관한 중세의 기록들을 써놓은 책들을 본 적 있는데 거기에도 당시 하층민들은 오히려 종말을 기원하는 부류까지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해를 못 했는데 지금은 그 마음을 200% 간절히 동감한다.

"야, 한수야"

그리고 그때 우리 아파트를 담당하는 말단 양아치 경일이 복도에서부터 나를 불렀다. 나는 큰 소리로 "네!"하고 대답하며 얼른 노트북과 그에 연결된 핸들형 발전기를 책상 밑으로 숨겼다. 그리고 입을 슥 닦고는 문쪽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네, 302호 김한수"

한경일. 같은 중학교, 그것도 2년 동안이나 같은 반이었던 동창이지만 당시에도 별로 친하지는 않았다. 고등학교에 간 뒤로는 자퇴했다고 들었는데 어쨌든 녀석은 우리 동네 건달조직에 들어갔고 이렇게 우리 아파트 101동 ,102동을 관리하는 녀석이 되었다.

"야, 한수야, 됐고, 뒈지기 전에 좋은 경험 한번 하게 생겼다 너. 오야갸 동네 찌질이들 다 데려오란다"

조금 불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어쨌거나 '좋은 경험'이라니 실낱같은 희망을 가져본다. 나는 검은 아빠 잠바를 챙겨입고 녀석을 따라나섰다.




"야, 대박. 존나 아 시팔 이 재미나는 걸 왜 이제야 떠올렸을까"

그 위치 덕분에 마을 관리와 경비하기에 유리하고, 결정적으로 예비군 무기고를 겸한 덕분에 정인 3동 주민센터는 마을 양아치들의 아지트가 되었고 주민센터 앞마당에서는 그 무리 150여 명이 날마다 벌이는 온갖 쓰레기짓과 막장 짓의 대향연이 매일같이 벌어진다. 녀석들이 주변 3개 동의 패권을 차지한 이래 불과 6개월 만에 이곳에서 죽어간 동네 사람만 기백명을 넘길거다. 

"오, 또 오네"

보통 무언가 큰 일이 있을 때면 동네 사람들을 주민센터 공터와 그 앞의 대로에 소집해놓고 공지를 하거나 일을 벌이는데, 오늘 불러낸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같은, '젊지만 힘이 약한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끌려나온 한 무리의, 약 스무명 남짓한 '찌질이' 녀석들은 주변 초등학교에서 가져온 듯한 매트를 깔아놓고 그 위에서 여자들과 성행위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동네 양아치 그룹의 리더, 정성모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또 그 특유의 천박한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내가 오늘 너네 찌질이들을 불러모은 이유는, 선물을 좀 하려고. 솔직히 앞으로 3일이면 우리 다같이 뒤질 운명인데 마지막까지 아다로 죽는 것도 좆같지 않냐? 그래서 특별히, 너네들 대접하려고 냄비들을 좀 모아놨다. 쟤들 다 싸고 나면 너네도 이어서해라"

이런 표현이 어떨런지 모르겠지만, 눈 앞에서 몇 수십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동시에 그것을 하고 있는 모습은 충격적이면서도 대단한 광경이었다. 특히 누가 봐도 동정인 것으로 추측되는 몇몇 녀석은 벌써부터 표정이 다양하게 변화했다.

"짜식들아 진짜 너네는 고마운 줄 알아야 돼"

조직의 넘버 투, 양정환이 우리를 보며 웃어제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시선을 앞의 녀석들로 돌렸다. 아니 그 밑에 깔린 여자들로. 그러나 자세히 보니 젊고 예쁜 여자애들이 아니었다. 난 그제서야 새삼 상황을 파악했다. 저들은 누군가의 누나나 여동생이 아닌, 누군가의 엄마나 이모들일 것이라는 것을.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더러운 기분을 안고서. 물론 그 기분은 '그녀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것이었다. 증오를 넘어 환멸과 깊은 좌절에 더 가까운 그 기분은 문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울리고 말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한참을 끅끅대며 울던 나는 그대로 누워 잠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아랫도리의 뻐근한 느낌에 새삼 불쾌함을 느꼈지만 마지막 순간, 그것을 뽑지 않았던 것은 나 자신이라는 사실에 새삼 진저리를 치게 되었다. 생물로서 유전자를 세상에 남기고 싶다는 욕망일 뿐, 하고 스스로를 달래보았지만 달래어지지 않았다.

그제서야 왜 나는 그토록 종말을 갈구하면서 왜 자살이라는 선택은 하지 않았나에 대해 처음으로 의문을 던져보았다. 첫 결론은 그저 나 자신의 약함이었다. 자살한 사람들을 약한 놈들이라며 욕했지만, 사실 그저 내가 자살을 두려워했을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뒤로,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을?

남은 시간도, 남은 자원도, 아니 남겨질 것 자체가 없는데 무엇을 남긴단 말인가. 지구 생태계 자체가 없어지고 인류 문명과 인류 자체가 사라질텐데 무엇을 남겨?

그리고 그 순간 '복수'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나 자신의 나약함이 또 브레이크를 걸었다. 무슨 복수? 그들이 나에게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가.

그저 나에게 섹스의 기회를 주었을 뿐 아닌가. 게다가 마지막까지 즐긴 것은 나 자신 아닌가. 그저 나 자신의 죄책감을 타인에 대한 비난으로 돌리려하는 싸구려 양심일 뿐, 하는 강력한 일침이었다.

다시 나는 축 늘어졌다.




그리고 이틀이 또 지났다. 과학자들의 예언, 아니 예측이 맞다면 오늘 저녁 9시 쯤, 100미터가 넘는 엄청난 쓰나미가 한반도를 덮칠 것이다. 그 전에 이미 엄청난 굉음을 동반한, 지구 전체에서 관측이 가능한 폭발과 빛, 그리고 먼지구름이 세상을 뒤덮을 거라고 했다. 난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려다가…

'그래'

마음을 바꾸었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바퀴벌레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 수백마리의 바퀴벌레들이 흩어져 어디론가 움직이는 모습은 몇 년 전이었다면 공포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았겠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잘 가거라'

방생을 한 셈인가. 나는 실없이 한참을 웃다가 다시 컴퓨터를 켰다. 아니 켜기 시작했다. 전기가 끊어진지 오래인 요즘 세상에 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가발전기를 돌리는 수 밖에 없는데, 전에 쓰던 페달형 발전기를 빼앗긴 이후로는 이 핸디형 자기발전기로 한 시간 남짓 팔 아프게 돌리다보면 10분 정도 컴퓨터를 돌릴 수 있는 전원이 생산되었다. 

띠- 딩디디디딩-

마이크로소프트의 마지막 OS, '윈도우N2'가 부팅되었고 사전에 매크로 해둔대로 QIR 프로그램을 통해 175 통신방에 접속이 되었다. 과연 마지막 날답게 그 어느 때보나 사람들의 접속이 많았다. 혹여나 한국 사람이 없을까 싶어 새삼 검색란에 국적 탭에서 KOREA를 검색해봤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인터넷 강국 한국 다 좆까라"

힘들게 전기를 생산하다 알배긴 팔에게 다 미안할 지경이었지만 하기사, 한국 사람이 있으면 또 뭐 어쩔건데. 또 나름 컴퓨터까지 돌릴 수 있는 여유 있는 새끼들이 마지막 날에 컴퓨터하고 있을까. 다른 뭘해도 하지. 나는 컴퓨터를 덮었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십수년 전에도 그랬지. 종말의 날에는 무엇을 할까. 하고. 그때도 할 일 없이 인터넷이나 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며 낄낄댔는데 정말로 그렇게 되다니.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다시 가랑이 사이가 불끈했지만 그런 내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는 총소리를 들었다. 익숙한 소리다. '녀석'들이 재미로, 그리고 별 말도 안되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을 공개총살할 때 지독하게도 들었다.

지금 난데없이 그 총소리가 연달아 울려퍼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봤지만, 아무래도 떠오르는 가장 위험한, 그리고 유력해보이는 이유는 '마지막 날이니 온갖 미친 짓 다 해보고 죽자'라는 생각을 녀석들이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것이 대학살극은 아닐까'하는 생각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아까 '밥'을 먹고 체력이라도 비축해둘걸, 그래야 도망이라도 잘가지 하는 후회를 했지만, 그럴 시간에 창밖을 내다보는게 먼저였다. 그리고 역시나 오토바이 소리와 어디에 대고 쏘는 것인지 연발로 총기를 난사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아무래도 내 예상이 틀림없지 싶었다.

'씨팔'

어차피 죽을 거고, 죽음을 예상하며, 죽음을 기대했지만 그건 종말의 순간에 그러고 싶은거지 녀석들의 손에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왔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느꼈던지 다들 웅성대면서도 집 밖으로 나오는 듯 했다. 그리고 녀석들이 만약 정말로 학살극을 원한다면 아마도 그 첫번째, 두번째 순서는 우리 아파트가 되기 쉬웠다. 사람들이 모여 사니까. 나는 오토바이 소리들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비상계단쪽을 향해 뛰었다.




"헉…헉…헉…"

불행하게도 나의 예감은 완벽히 적중했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옆 골목 후미진 곳으로 돌아나오자마자 단지 안으로 향하는 오토바이들의 소리가 들렸고 이어 총소리와 비명소리들이 어지러히 울려펴졌다. 천하에 죽일 놈들.

하지만 당장의 한 고비를 피했다고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점점 더 녀석들은 마지막의 광기를 향해 치달을 테니까. 나중에는 끔찍하게 잔인한 장난을 칠지도 몰랐다.

도망치는 와중에 깨진 유리 조각 하나를 챙기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최악의 순간이 되면, 자살하기로 명심했다. 나는 조심조심 발소리를 죽이면서 골목길을 빠져나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헉…헉…"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목적지가 없었다. 어디로, 무엇을 향해 달려야 하나. 어차피 이 세상 어디에도 구원의 동산은 없다. 오늘 오후 9시가 되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 아, 과학자들의 다수설이 사실이고 미리 생존의 준비를 한 사람들이라면 며칠 정도는 버틸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상황이 마지막에 이르면 지구의 대기구성성분이 바뀌어 대기 중의 용존산소량이 인간이 사는데 적합하지 않게 바뀐다고 했다. 산소 없이 살 수는 없으니 모두 다 죽는 길 뿐이다.

'그럼 난 어딜 향해 뛰고 있는거지'



어느새 나는 신정동까지 이르렀다. 여기까지 오면서 두어 차례 부랑아 집단을 마주치긴 했지만 그들은 별로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기사 삶의 마지막 날인데 미친 짓 하고 싶은 놈들이 대다수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걷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 양아치들 수준의 미친 놈들이 그리 흔하진 않을테지.

그리고 한숨 돌리며 땀을 닦으려는 순간, 나는 2층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던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서둘러 커튼을 치고 나의 시선을 피했지만, 나는 사람이 그리웠다. 병신 집단의 미친 놈들이 아니라, 정말 멀쩡한 인간이.
 
"잠끄…"

하지만 난 크게 소리치려는 것을 멈추었다. 다른 어떤 부랑아들이 나를 지금 발견하면 또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몰랐다. 나는 그저 조심히, 그 여자의 집 호수를 확인한 뒤, 그 맨션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 그녀의 문 앞에서 똑똑 문을 두드렸다.

"잠깐만요"

문득 대학생 시절, 창명대 역 앞에서 헌팅을 시도하려던 추억이 떠올랐다. 너무 예쁜 여대생을 보고, 한참을 주저하다 뒤늦게 말을 걸었지만 "저기…" 하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를 피하던 여자의 생각이.

"무서운 세상이지만, 저 나쁜 사람 아니에요. 아까 저 봤으면 제 모습만 봐도 알거 아니에요"

어처구니 없는 말이지만, 지금껏 살면서 내 외모에 공포감이나 두려움을 느낀 사람은 없을 거라고 씁쓸하게 자부하기에 그 말은 분명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창가에서 내 모습을 제대로 보았다면. 몇 번을 불러도 한참을 대답없던 문 안쪽에서 드디어 대답이 있었다.

"무슨 용건이신데요"

나는 반갑게 대답했다.

"사람이 그리워요"

다시 생각해보면 꽤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문장이었지만 내가 아차하고 생각하기도 전에 문이 빼꼼히 열렸다. 사실 문에 들어서면서, 그리고 집 주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내가 기대했던 것은 정말 원초적인 것이었다. 그저 죽음의 그 순간까지 이렇게 예쁜 애랑 질펀하게 하다 죽을 수 있다면 후회가 없겠다 싶은 생각.

본능의 저열함에 새삼 좌절했지만 아마 사실 종말을 앞둔 99.99%의 남자는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이 맨션에 살던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내가 마지막 생존자에요"

수라의 시대의 살고 있는 사람답게 그녀의 말을 또 위험하게 받아들이고 순간적으로 경계했지만 그녀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 동네 양아치 두목 애인이었거든요. 근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렇게 병이 걸려서"

그녀는 별 스스럼 없이 노 팬티 차림의 바지를 벗으며 가랑이를 벌렸고, 음부 주변에는 척 보아도 범상치 않은 돌기와 울긋불긋한 화농성 종기들이 보였다.

"그래서 무리에서 버려졌고, 목숨만 건져서 이렇게 원래 살던 곳으로 왔어요"

문을 들어서며 했던 생각을 조금 수정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제가 살던 곳에서는, 지금 대학살극이 벌어졌어요. 양아치들이 사람들을 마구 학살 중이라서 도망쳤어요"
"우리 동네도 며칠 전에 이미 그랬어요"

바지를 다시 추켜입은 그녀는 말했다.

"뭐 좀 먹을래요? 통조림이라도 줄까요?"

그리고 그 말에 순간 나는 지난 얼마간동안 먹어댔던 바퀴벌레들이 떠올라 엉엉 울고 말았다. 




내 울음에, 서로 경계하던 그녀와의 어색함이 단번에 풀어졌다. 그녀는 얼른 식사를 준비해서 나에게 대접했고, 몇 달만에 참치캔과 햇반을 맛 본 나는 먹으면서 또 울었다. 그 모습에 귀엽다며 내 나이를 물은 그녀는, 29살이라는 내 나이를 듣고 조금 놀래는 눈치였다.

"한참 연하라고 생각했는데, 동갑이었네. 어쨌든 마지막 만찬이니까 마음껏 먹어. 배터지게"

하지만 너무 오랫만의 제대로 된 식사라, 위장이 늘어나지 않아 그리 얼마 많이 먹지도 못했다. 그녀는 이 모두가, 자기를 버리며 조직의 보스가 준 것들이라고 했다.

"걔들은 잘 먹었어. 요리사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먹었는데 뭐. 마지막에 나 두고 가면서 몇 박스를 줬는지 몰라. 어쨌든 지가 마누라로 삼고 데리고 살던 년이니까, 미안했던 모양이지"

식사를 마친 후, 그녀는 나를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인연은 인연이네. 인생 마지막 날을 함께하는 남자라니. 그런데 어쩌나. 여기가 이 모양이라"

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아니, 내가 아파서 못 한다고"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먼저 "나 원래 룸방 뛰던 여자야. 벌 받은 모양이지"라며 웃었다. 별로 바라지도 않았는데 혼자 김치국 마신다고 생각한 그 순간, 그녀는 "바지 벗어봐"라는 말과 함께 얼굴을 내 하반신으로 향했다.



통성명을 나누었다. 그녀의 이름은 강혜선. 별로 지나간 이야기들은 털어놓을 것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기에 우리는 그저 가만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아마, 이런 세상이 아니라면 우리가 만날 일은 없었겠지?"

나의 말에 그녀는 웃으며 "누가 '우리'인데?"하고 되물었다. 새삼 내가 혼자 너무 기분에 취해서 앞서나갔나 싶어 대답이 궁해졌지만 혜선은 또 한번 크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귀엽다 너. 뭐, 우리 맞지. 인생 마지막 날에 같은 침대 누워 죽는 사이인데 무슨 사이도 그거보다 더 깊은 사이도 없겠네"

그 말에 실없이 실실 웃던 나는 창 밖으로 지는 노을과 함께, 귀를 찢는 듯한 무서운 폭음 , 그리고 마치 갑자기 해가 다시 떴나 싶을 정도로 온 세상이 순간적으로 새하얘지는 듯한 선명한 빛을 보았다. 그 엄청난 눈부심에 눈을 감았지만 지축을 뒤흔드는 진동마저 가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진동의 근원이 지구 반대편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새삼 이 무시무시한 재앙의 스케일을 깨달았다.

"걱정마. 이 건물 내진설계야. 특별히 고르고 골라서 내가 이 건물로 들어온거라고"

엄청난 진동의 스케일에 주변 건물들 몇 채가 무너지는지 끼기기긱 하는 소리와 무서운 파쇄음들이 연이어 들려왔다. 내가 나도 모르게 떨기 시작하자 혜선은 내 배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나는 아무런 대답 대신, 그녀를 그렇게 끌어안았다.

세상이 이렇게 끝나갈지, 내가 인생 마지막이 이런 모습일지, 정말로…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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