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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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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보는 남자들이 제일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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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슬이의 입에서 나온 말 치고는 조금 파격적이었다. 연애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음에도 주변에 들끓는 남자들이 넘쳐났던 그녀였던 만큼, 굳이 '간 보는 남자'에 목을 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랬고.

"요즘 남자들 왜 그래요?"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나이가 벌써 내년이면 서른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떠올리자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그녀의 모든 것을 다 아는 내 앞에서 보인 모습과 다른 남자 앞에서의 그녀 모습이 또 전혀 다른 모습일지 어찌 아는가. 여자는 요물인데. 

"왜? 요즘에 너 간보는 남자가 있어?"

그러자 그녀는 속이 탄다는 듯 눈 앞의 맥주를 쭈욱 들이키더니 말했다.

"다 그래요 다. 남자들이 시원하게 고백하는 경우도 없고, 그냥 어떻게든 나 자빠트릴 생각만 하는 거 같아요. 연애에는 별로 관심도 없고"

그러고보니 요즘 남녀를 막론하고 잡지에서 하는 연애 타령은 죄다 '썸' 혹은 '책임지려 하지 않는 남자' 썰 뿐이라는 말에도 생각이 미쳤다. 시대의 조류가 바뀌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간잽이들이랑 잠은 잤어?"

순간 말을 하고도 조금 수위를 넘었나, 싶어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다행히 다슬이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눈치였다.

"자긴요. 오빠 나 몰라요? 나 완전 어려운 여자인거?"

그리고 그 말에 더더욱 '간 보는 남자'들의 애타는 마음도 조금은 알 수 있을 법 했다.

"여지를 조금 주면 더 쉽게 고백할 수 있지 않을까? 하긴 여자 입장에서 쉽게 주기도 그렇고. 어렵긴 하겠다"

하기사 그쯤해서는 남자 스킬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구워삶아서 자빠트리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저 열심히 간 보다가 혼자 제 풀에 나자빠지겠지.

"근데 오빠 말 쓰는거 점점 아저씨스러워진다. 준다는게 뭐에요"

킥 웃으며 하는 그녀의 말에 나도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그쯤해서 둘의 술잔이 비었다. 나는 오백 두 잔을 추가로 주문했다. 혼자 한참을 휴대폰 만지작 거리던 그녀가 말했다.

"오빠, 남자가 보기에 나 어때요? 나 이제 매력 없는 여자에요?"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 완전 매력있지. 우리 다슬이 최고지 항상"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진짜 차라리 못생겼다고 하면 자극이라도 되겠네. 아 뭐에요 진짜"

나는 짐짓 정색하며 말했다.

"아니 매력 있으니까 매력 있다고 하지. 너가 만약에 진짜 못 생기고 매력 없으면 애초에 내가 이 자리에 왜 나와 있겠냐?"

그러자 다슬이는 묘한 표정을 짓더니 물었다.

"그럼 만약에 제가 사귀자고 하면 오빠 저랑 사귈 거에요?"

그래, 이런게 문제다. 

"어"

그리고 이건 더더욱 문제다.

"정말로?"

하지만 더 깊숙히 한발 더 내딛는게 또 나다.

"어. 그렇다니까?"

그리고 이쯤해서 그윽한 시선을 한번쯤 쏴주면… 바로 "장난이죠? 푸하하" 하고 오빠 뭐냐며 내 팔뚝을 때리는게 내가 예측한 행동이지만 그녀는 그러는 대신에 조금 시선을 내리며 조용히 되물을 따름이었다.

"사실 저도 오빠 좋아해요"

흐, 그래. 그건 이미 몇 년 전부터 느꼈어. 

"근데 솔직히 우리 사귀는건 좀 웃기잖아요. 그쵸?"

아마도 "아니? 뭐가 웃겨? 누가 웃는데?" 하는 대답을 바라는 질문이겠지만 난 그저 술 한 모금을 더 들이킨 다음 그녀의 이름을 부를 따름이었다.

"다슬아"
"네, 오빠"

그러고보니 어느새 다슬이도 여자다. 아니 예전부터 여자라고 느꼈지. 내년이면 서른인데. 몸매도 제법 그럴싸하고, 얼굴도 이쁘장하고, 은근 애교 많고 웃음 헤프고, 마음 씀씀히 깊고. 그녀 주변의 그 많은 찌질이들 대신에 내가 연애 했다면 이미 꽤나 괜찮은 추억 많이 만들어줬을 이쁘장한 여자애지. 

"술 더 마실래?"

사실, 진작에 "농담이야" 하고 어느 시점에서는 발을 뺏어야 했다. 실없는 오빠,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매력 없어지는 남자, 마음만 설레이게 해놓고 등 돌리는 남자 등 별별 소리 다 들어봤지만 내가 그녀들에게 그랬던 것은 그만큼 내가 그녀들에게 좋은 남자가 되어주지 못할 것을 내가 잘 아니까 그랬던 것이다. 지독한 이타주의적 이기주의라고나 할까. 아니, 이 말이 지금 맞는 말인가. 조금 취하네. 

여튼, 진작에 적당히 농담이나 몇 마디 더 따먹다가 적당히 관두고 슬슬 택시 태워 집에 돌려보내면서 "오늘 즐거웠어 잘 들어가", "네 오빠두요" 이런 멘트나 주고 받고 치웠어야 하는데 조금 깊게 들어와버렸다. 문제는 이제 여기서는 마음을 받아줘도, 아니면 밀어내도 결국 다 좋은 꼴 보기 힘들거 같다는건데 그래서 나는 말을 돌린거다. 술 한잔 더 할래? 하고.

"오빠. 제가 오늘 너무 이상한 소리 많이 했죠? 미안해요"

그리고 역시 언제나 이런 류의 대화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조금 더 스텝이 빠르다. 태어나고 자라서 슬슬 생리를 시작할 무렵이면 벌써부터 간접 화법을 구하기 시작하는 존재들이니 당연하겠지. 그리고 여기서 여자보다 스텝이 더 빠른 새끼들은 연애 고수가 되거나 혹은 개쓰레기들이 되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발걸음을 옛날보다 많이 늦춘거고.

"아냐, 미안하긴. 우리가 무슨 미안한 대화를 했는데. 내가 너 좋아하고, 너가 나 좋아하는게 미안할 일이야?"

하하, 참. 내가 참 못된 놈인게 이런거다. 크게 마음에도 없으면서 괜히 사람 떠보는 말 던지는거. 다슬이는 머리를 조금 긁적이다 말했다.

"그렇다고 제가 오빠랑 사귀는건 좀 그렇잖아요 진짜"

좀 그렇다는게 내가 좀 거시기해서 그렇다는건지, 아니면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갑자기 연애를 하자는거냐 그건 진짜 좀 민망하다, 라는 말인지 괜히 따져묻고 싶어졌지만 그런걸 따져 묻는건 병신이나 하는 짓이지.

"그럼 서서히 알아갈래?"

라고 말한 순간 나는 내 대가리를 바닥에 짓찧는 것이 어떨까하고 생각했지만 바로 그 어마어마한 오글거림의 병신스러운 대사가 간신히 그녀의 웃음을 불러왔다.

"아 진짜 오빠 대박. 아 이 오빠 왤케 웃겨 진짜"

그리고 그렇게 무사히 그녀는 내 팔뚝을 두들기며 웃었고, 나 역시 어색하게 웃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어색함의 급류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럼 오빠 오늘 너무 잘 먹었어요. 담에 조만간 우리 또 봐요"

다슬의 이별 인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내년에 너 이직하고 또 보자" 하고 인사를 건냈다. 그녀는 택시에 오른 뒤에도 손을 흔들었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등을 돌렸다. 

부담없이, 제법 스무스하게 잘 넘겼다 생각하며 나는 간선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글쎄. 나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즐겼던 것일까. 연거푸 마신 맥주에 부푼 뱃살이 새삼 신경쓰일 무렵, 다슬의 카톡이 도착했다.

[ 세상에서 제일 간 잘 보는 남자, 김박스. 결국 여자 입에서 먼저 고백하게 만드는 나쁜 남자 김박스. 오빠 그럼 잘 들어가요♡ ] 

나는 혼자 실없이 웃으며 답장 대신 바지 주머니 속으로 손을 찔러넣었다. 날씨가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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