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구, 사모님. 벌써 지치셨어? 허허, 참. 자, 이거로 땀 닦으시고"
상구 아재는 오늘도 그만의 피앙새 조 여사님께 지극정성이다. 험한 길이면 손 잡아주고, 목 마를 참이면 물통 내밀고, 땀 흐를라 치면 손수건 내밀고.
"감사합니다"
하지만 새 것처럼 빨았음에도 노총각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나오는 손수건에 조 여사는 그저 간신히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 땀 방울 몇 개만 닦아내고는 얼른 돌려준다. 마음에 안 차는건 그것 뿐이 아니다. 목 마르다고 물통을 내밀라치면 지 쳐마시던 생수병을 주둥이 닦는 시늉도 안 하고 그대로 내미는데 그게 어디 입을 대고 싶겠으며, 험한 길에 내미는 손은 어찌나 그리도 조물딱 거리는지 때 안 나올까 민망스럽다.
다행히 그나마 키 하나는 훌쩍 한 것이 죽은 전 남편에 비해 머리통 하나는 더 큰 셈이지만, 꾀죄죄한 행색도 그렇고, 보신탕 집을 운영한다는 것도 그렇고 이혼한 마누라와의 이혼 사유가 불륜이라는 소문에 영 마음이 내키지를 않는다.
"아 그러면 잠깐 만나다가 재미 보고 시마이치면 되지 무슨 걱정이랴 글쎄?"
같은 등산 모임의 수원댁 강 여사는 그런 재미로 등산 모임 다니는거지 정말 산 타러 등산 다니나? 하고 옆구리를 쿡쿡 찌르지만 당최 마음에 드는 외모가 아닌걸 어떡한단 말이냐. 차라리 진짜 마음에 내키는건 근엄한 인상의 모임장 차 대장님이건만, 그 사람은 천성이 목석인지라 세상에 여 회원님들께 빈 말 한번 섣불리 던지는 격이 없다. 그게 또 매력인 것이고.
"오늘 어디 또 하산하시면서 좋은 데 안 가실람요?"
상구 아재가 어느새 또 조 여사와 강 여사의 곁으로 다가와 은근하게 묻는다. 거절을 할까 무슨 변으로 거절을 할까 고민하던 차, 강 여사가 먼저 시원하게 질러버린다.
"막걸리 한 사발 해야지, 어찌 그냥 간대유. 안 그랴?"
"어후… 나는 좀…"
하지만 강 여사와 상구 아재가 짝짝꿍이 맞아 양 옆구리를 꿴다.
"아이 조 여사님 오늘은 못 빠지십니다. 벌써 몇 회차 모임인데 여지껏 한번을 뒷풀이를 안 와요 글쎄"
"맞어, 다들 어울려서 한 사발하는거지. 자자, 오늘 조 여사님도 뒷풀이 참여하신다니까, 다들 오늘은 절~대로 못 빠집니다. 아시겠죠?"
푼수떼기 강씨 아지매가 크게 소리를 지르고, 다들 얼씨구나 하는 분위기가 되어 결국 빼도박도 못하게 하산길 그대로 언제나의 뒷풀이 모임 장소로 향한다. 조 여사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어휴 어휴 괜찮습니다. 이미 많이 마셨어요"
"아, 우리 조 여사님이 술이 많이 약하시구나. 어휴, 그럼 딱, 이 딱 한잔만 받으시고 나머지는 제가 흑기사 하겠습니다. 자, 원 샷!"
마지막 잔 마지막 잔 하면서 벌써 들이킨게 네 사발이다. 조 여사는 취기가 바짝 올라 이제는 아까부터 술 깨려고 쥐고 있던 등산 폴마저도 힘없이 놓치고 겨우 눈꺼풀만 힘들게 뜨고 있다.
"오늘 힘 좀 쓰셔야겠네"
"예끼"
그 모습을 강 여사는 상구 아재의 팔뚝을 툭 치며 눈치를 주었지만 말이 그렇지 사실 상구 아재도 본디 그리 험하게 구르는 사람은 아니다. 불륜으로 이혼한 것은 맞지만 바람을 피운 것은 본인이 아니라 전 와이프 년이고, 동생 미자한테 맡겨 미국 유학까지 보낸 애들 뒷바라지 하느라고 다른 여자한테는 지난 13년간 눈길 한번 준 역사가 없다. 물론 몸이야 몇 번 줬지만 말이다. 아무리 밤이 외로워도 그건 그만큼 낮에 열심히 일 안한 탓이려니 하고 살던 그에게 살랑살랑 봄바람을 틔운 것은 같은 동네 지역상인 연합회끼리 뭉친 등산회, '상록 등산회' 덕분이다.
원체 산을 좋아하던 차상록이 형님을 모임장으로 세워놓고, 그 오른팔 격으로 나 박상구가 사무장을 하고, 인테리아방 형득이 성을 총무로 놓고, 상인 연합회 사람 중에 갈만한 사람 꼬셔다가 일요일 아침 일찍 산에 올라 낮 되기 전에 내려오며 술 한잔 딱 하고 이제 장사할 사람 하고 옛다 오늘은 황이다 싶으면 문 닫는게 이 상록 등산회의 모임 성격이렸다.
처음에야 다들 부부동반에다 뭐다 장비도 사고 신나게들 함께 올랐지만 엉덩이 무거운 마나님들이 매주 산에 오를 리 없고, 여튼 누구 하나가 산에 오르면 하나는 가게를 봐야하니 그 몫은 온전히 마나님들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어느덧 거무튀튀한 사내 예닐곱명이 별 말도 없이 산에 오르는 것 뿐인데 그게 무슨 재미겠으며, 뭘 먹어도 무슨 놈의 도락이 있겠으랴. 결국에 놀기 좋아하는 형득이 성이 이래저래 비탈길마다 손 뻗치고, 내가 여사님들 모신다는 회원모집 전단지도 산 어귀의 나무마다 붙이고 해가며 회원들을 끌어모으다가 강 여사님이 먼저 들어오고, 이후 조 여사님이 들어온 것이다.
"자자, 여기서 뻗을 것이 아니고, 다들 이제 2차로 노래방 어떻습니까?"
평소 같으면 점잔만 빼도 부족한 상록이 형님이 오늘따라 흥이 오르셨는지 연거푸 사발 석 잔을 받아드시더니 이제는 2차로 노래방까지 선창한다.
"다른 분도 아니고 상록이 형님이 가자는데 가야죠 그럼! 안 그렇습니까?"
"어휴, 오후에 오늘 가게 문 열어야 되는데, 어쩔 수 없지? 오야가 가자는데!"
모두들 흥이 났다.
"마으음은 하나이오~ 느으낌도 하나으요~ 그대마니 저엉말 내 쓰아랑인데~ 눈물이 나네요오~ 내 나이가 으때쓰어~ 싸랑하기, 딱! 좋은, 나이이인데에에에에~♪"
그래, 오승근의 내 나이가 어때서. 세상에 이 노래만큼이나 우리네 꺾어진 백살 인생들 마음을 짠하게 울리는 노래가 또 있단 말이냐. 부르고 또 부르고, 들어도 또 들어도 기가 맥히게 공감의 탄성이 터져나온다. 그래. 내 나이가 뭐 어때서. 마누라 앞세우고 나이 마흔에 홀애비가 된 이래 10년을 공방신세지만 평생을 주변에 정에 굶주린 적은 없이 살았다.
아침마다 거울을 봐도 훤한 신수에 아들 또래에 비해서도 부족함이 없는 키빼기, 젊은 시절부터 가다마이 하나는 기가 막하게 잘 어울린다는 소리 듣는 뽐새에 나이 든다고 정에 굶주리랴, 허지만서도 아들 흔들릴까봐, 내가 연애질 할 나이도 아닌데, 그런 생각에 그저 꾹 참고 살았다. 낚시와 바둑이면 족하지 뭐한다고 횡사한 마누라 앞세운 놈이 누구한테 정 붙이랴.
하지만 아들내미 서울대학교 떡 하니 보내놓고 나니 그저 허탈함만 남았다. 아들 내미 똘똘하게 잘 키웠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나이 쉰에 죽는 날까지 앞으로도 30년이다. 그러던 차에 만든게 상인조합 동생들 모아 만든 산악회다. 재밌기도 재밌다만, 저 수더분한 강여사. 복스러운 뺨이 참으로 어쩜 그리 죽은 경훈이 엄마를 닮았을까. 그때 문득 느꼈다. 그래, 내 나이가 어떠랴.
"어느 날 우우연히~ 거울 속에 비추어지이이인, 내 모쓰블 바라보면서어어어~"
상구는 아주 잔뜩 신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요 몇 달을 그렇게나 눈치보며 공 들인 조 여사님이 글쎄 함께 손을 잡고 빙글빙글 춤을 함께 추지 뭔가. 그래, 좋다. 신난다.
"어휴, 대장님도 나오세요!"
그렇지, 그렇지.
"허허, 이거 참, 허허"
강 여사님이 먼저 내 곁으로 오더만 손을 붙잡으며 노래방 중앙으로 이끈다. 땀이 줄줄 흐른다. 경훈이 엄마, 아니 옥자와 처음 연애할 때도 이랬더랬지.
"오늘은 상록이 오빠라고 불러도 되지요?"
손으로 허리를 감아오는 강 여사님의 과감함에 그만 나는 얼굴이 빨개지고야 만다.
"세월아 비켜라라아아아아~ 내 나이가 어때서어~"
총각 시절부터 노래라면 아주 세상에 빼놓을 데가 없었다. "우리동네 카수", "세원정밀 가수왕" 소리 듣고 살던 나 형득이지만, 그래도 세상에 이리도 흥겨운 무대도 드물다. 우리 상록이 형님이 강 여사님과 춤을 추고, 상구도 조 여사님과 춤을 추지 뭔가. 더 목소리를 높여 부른다.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에에에에, 사랑하기이 딱! 좋은 나인데에에에에~아 형님, 아우야, 사모님들, 오늘 조~은 하루 되십시다이!"
아싸 신이 난다. 아주 나도 제대로 난다. 나는 노래가 끝나기가 무섭게 다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형님, 아우, 오늘 아주 흥 제대로 올려줄테니까, 어디들, 신나게들 달려보자고. 언제든, 언제까지 혼자 살 수는 없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