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703

서른 한 살의 알바

$
0
0
"오빠 끝나고 같이 가요"
"어? 어어. 그래"

나이 서른에 인턴직 수행 후 정직원 전환 채용 불가 통보를 받고 퇴사한 지 어느덧 7개월째. 반 년이 넘게 놀았다. 실업수당이 있긴 했지만 그것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일자리는 더더욱 없었다.

"4,200원입니다"

삼수 지방대, 학점 평균 2.5, 키 171cm, 안경잡이에, 애기 얼굴에 목 짧고, 배 나오고, 자격증 없음, 토익 점수 없음… 누가 인생을 왜 그따위로 살고 왜 스펙을 그 꼴로 만들었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저 스펙 화려한 남들을 칭찬해 줄 수 밖에. 다만 확실히 나이를 먹고 나니가 그 흔한 알바자리 하나 구하기가 어렵다. 만만하고 순한 인상이라 좋은 첫 인상을 받았다고 해도, 정작 내 나이를 듣고 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마는 것이다.

겨우 구한 곳은 250대가 넘는 대형 PC방 알바자리였다. 10시간 근무에 알바라고는 해도 170만원이나 준다고 하고, 집에서도 가깝고 해서 '이만하면 괜찮겠다' 생각해서 첫 달은 수습 명분으로 120만원만 주겠다는 것도 알겠다고 했다.

일은 상상 이상으로 고되었다. 함께 일하는 알바생은 여럿이었지만 그 모두가 땀범벅이 되도록 일해도 정신없이 바빴다. 손님 나가면 자리 치우고 라면 끓여내고 가져다 주고 손님 오면 기본 냉커피나 녹차 내야하고 카페 코너에서는 커피 내리고 빵 데우고 정산하고…

처음 며칠은 정말이지 군대 시절 생각이 날만큼 고되었다. 집에 오면 씻고 자기 바쁠 정도로. 아무리 수습기간이라고 해도 첫 달 120만원 받자고 이렇게 일하느니 차라리 노가다를 뛰거나 공장 단기 근무를 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나를 언제나 시간되면 PC방으로 자동으로 발걸음 옮기게 만드는 이가 있었으나 그녀가 바로 주아였다.



"어휴 힘들다. 오빠 오늘 수고하셨어요"
"너야말로 고생했지. 그 손님 라면 엎은거 괜찮아?"
"아 이거요. 괜찮아요. 집에가서 빨면 되요"

같은 타임에 일하는 22살짜리 여자애인데 단발머리에 동그란 큰 눈, 날씬한 몸매에 잘 빠진 허리라인…까지 말하는건 좀 변태스럽고, 어쨌거나 예쁜 여동생 같은 애다. 내 나이를 말하자 다들 쭈뼛거리며 "아, 안녕하세요" 하던 다른 어린 남정네 알바생들과 달리 "와 그럼 제일 오빠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라면서 활짝 웃어준 그녀.

고맙지.

아니 그 뿐이 아니다. 워낙에 싹싹한 성격에 착하고 성실하고, 아마 모르긴 몰라도 알바생 남자애들 전부 다 은근히 좋아하는거 같던데. 바빠서 내가 밥 못 챙겨먹고 있으면 어떻게 알고 또 와서 "오빠 가서 라면 하나 끓여먹어요. 제가 하고 있을께요" 하면서 말 걸어주고. 회식이랍시고 저녁팀 애들이 다같이 노래방 간다고 할 때 내가 좀 어린 애들 노는데 끼는 거 같아서 안 가려고 하니까 내 팔뚝을 붙잡고 억지로 데려가서 결국 친해지게 해준 고마운 아이.

까똑!

그 나이 또래 여자애답게 그 바쁜 와중에도 틈만 나면 휴대폰을 붙잡고 뭔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카톡을 해대는 주아.

"남자친구야?"

새벽 3시를 바라보는 새벽 2시 53분에 카톡을 주고 받을 상대가 남친 밖에 더 있겠는가.

"네? 아니요. 친구에요. 저 남자친구 없어요"

남자친구 없어요, 하면서 묘하게 뾰로퉁한 듯한 표정을 짓는 것도 참 귀엽다.

"오빤 여자친구 있어요?"
"아니 없어"
"없어요? 왜요?"

글쎄 여자친구 없는 것도 이유가 있나. 뭐 지난 인턴십 때 썸을 탄 듯한-단순히 내 기준으로- 동기 여자애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대학교 1학년 이래로 지금껏 무려 근 10년간 솔로다. 아 생각해보니 슬프네.

"능력이 없어서 그런가 봐. 이 나이 먹고, 그것도 남자가 알바나 하고 있고. 남들은 장가도 갈 나인데"
"에이, 서른 한 살이 어때서요. 저 아는 오빠들 중에는 아예 놀고 먹는 백수들도 많아요"
"너 22살 아닌가? 그런데 30대 아는 오빠들이 있어?"
"네. 전에 일하던 호프집에서 알바할 때 30대 알바하는 오빠들도 꽤 있었어요"
"그렇구나. 근데 그건 뭐 대부분 창업하기 전에 일 배우려고 일하는 애들이겠지"
"그런가? 여튼 너무 기죽지 말아요. 오빤 대신에 제가 있잖아요 힘내요!"

뭐 거의 모태솔로나 다름 없는 인생을 살긴 했다만, 그래도 이 정도 나이 먹으면 어느 정도 현실을 알게 된다. 어렸을 때야 저런 말 한 마디에 뭔가 설레이고 '얘가 나 좋아하나?'라는 온갖 상상을 다 하게되지만, 그냥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던지는 여자애들이 있다는 것을.

"에이. 흐, 그래도 고마워"

그래, 그래도 저렇게 귀엽고 예쁘장한 애가 '오빠한텐 제가 있으니까요' 라는 말을 듣는데 기분 안 좋은게 더 이상하지.

"날씨가 좀 추워진다. 갈수록"
"그쵸? 으 추워. 오빠 손 좀요"

게다가 먼저 이렇게 손까지 내밀어 손잡고 가는데. 괜한 설레임에 "너 자꾸 이렇게 남자 손 불쑥불쑥 잡고 그러면 남자애들 설레서 막 짝사랑하고 그런다? 조심해" 하고 꼰대같은 척 "아뇨, 오빠한테만 하는 건데요?" 라는 말을 유도하고 싶지만 그게 얼마나 한심스러운 유치한 짓인가는 솔로 인생 10년 망상 연애 10년에 깨우친지 오래다. 그냥 묵묵히 말 없이 손 잡아준 그녀의 고운 손을 느끼고 그거에 고마움을 느끼면 충분한거다.

"어, 다 왔다. 너 이제 이쪽 골목으로 가지?"
"그러네요. 그럼 오빠 잘 들어가세요"
"응, 내일 봐"

묵묵히 아무 말 없이 손을 잡고 걸은지 10분 여. 사실 너무 좋았다. 이상한 생각이라도 했다면 발기까지 했겠지만 다행히 그런 민망한 일은 없었다. 저기 가면서도 계속 뒤돌아보며 손 흔드는 그녀가 참 귀엽다.



"으, 피곤하다"

어느 덧 2주차가 되었다고 몸도 조금은 적응을 했다. 그래도 여전히 눈을 뜨면 한낮이다. 새벽 2시에 끝나고 뒷정리 좀 하고 다음 타임 교대할 때까지 좀 더 옆에서 도와주고 하다보면 그게 또 어느새 한 시간이다. 그 한 시간은 알바비도 안 나오는데. 사실 회사 다닐 때도 보너스 야근은 죽기보다 싫어했는데. 그래서 정직원 전환이 안 됐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 시간동안 주아가 열심히 하는데 나이까지 쳐먹은 내가 휑하니 가버릴 수 없기에 같이 돕다가 보면 그렇게 한 시간을 날리고 집에 와서 씻고 자고 하다보면 어느새 침대에 눕는건 새벽 4시다.

눈뜨면 낮 12시에서 1시 사이. 밥 먹고 세수하고 티비 잠깐 보고 컴퓨터 잠깐하다 보면 또 출근시간이다. 일할 때는 그리도 시간이 안 되는데 알바 기다리는 시간에는 어쩜 이리도 시간이 잘만 흐르는지. 벌써 3시다. 씻을 시간이다.

"으 시원하다"

쏟아지는 샤워 물줄기에 몸을 맡긴다. 시원하면서도 뜨신 물줄기에 몸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끼며 문득문득 불안한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나 뭐하는거지. 남들은 슬슬 직장에서 자리 잡아가고 취업해서 돈도 빵빵하게 벌고, 공고간 중딩 때 친구 중에는 장가 간 놈도 있고 한데. 취업이 안되서 결국 피시방 알바 신세라니. 나이 서른에 이제 서른 하나가 내일 모레인데.

"후우…"

답답한 마음에 절로 한숨이 나온다. 물론 인터넷에 보면 나보다 더한 새끼도 수두룩 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결국 머나먼 남의 이야기 일 뿐이다. 적어도 내 주변에 제대로 된 인간들은 다들 그게 설령 중소기업이던 뭐던 회사 생활을 하고 있다. 그 뿐인가. 연애는? 그래, 직장이야 계약직이나 진짜 내 알바보다도 돈 더 작게 받는 친구도 있을 법도 하지만 그래도 연애는 다들 잘만하던데. 왜 나는 이 모양 이 꼴일까.

가벼운 분노가 코 끝을 스친다. 내 자신이 한심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겠다. 자괴감이 나를 감싼다. 나 정말 뭐하는거지. 나 잘 살고 있는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지. 이 알바는 언제까지 하고 또 어느 직장에 언제 어떻게 취업을 하지.

"모르겠다"

물을 끄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다. 수건에 가리워진 내 시야가, 마치 내 앞날 같다.




"안녕!"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용"

출근하며 인사를 하자 다들 반갑게 맞이한다. 물론 내가 딱히 반가워서라기 보다는 자기들 집에 갈 시간이니까.

"아 형"

현수다. 주간반 알바생. 키가 186이다. 24살이라는데 생긴 것만 보면 이 놈이 나보다 더 형 같다.

"어 왜?"
"잠깐만요"

근데 그다지 썩 얼굴이 밝은 얼굴이 아니다. 게다가 나는 이 놈이랑 딱히 뭐 나눌 이야기가 없는데. 애초에 저번에 노래방 갔을 때 겨우 이름만 좀 아는 사이고. 괜히 안 좋은 느낌이 들었지만 어쨌든 나는 녀석을 따라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형, 담배 피우세요?"
"아니, 안 피워"
"저 한 대 피워도 되죠?"
"어, 그래"

녀석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입에 물고 참 멋있게도 불을 붙인다. 하, 남자가 봐도 그렇게 멋진데. 그 어리숙해보이게 만드는 피시방 알바생 조끼를 벗고 라이더 재킷을 입으니 참 녀석이 새삼 다르게 보인다. 조금 위압감도 들고.

"형 근데 원래 담배 안 피우세요?"
"어? 어. 원래부터 안 피워"
"군대에서도 안 피우신거에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그래도 내가 연장자인데 이렇게 뜸 태우는거 듣기는 싫다.

"어. 근데 나한테 할 이야기가 뭐야?"

그러자 녀석은 담배 한 모금을 참 길게도 빨아들이더니 또 푸하~ 하면서 거칠게도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스키니진이 참 잘 어울리는 녀석이다.

"형, 혹시 주아 좋아해요?"

무슨 이야기 하려는지 알 것도 같다.

"어? 어어. 뭐. 귀엽고, 착하고, 일 열심히 하고. 귀여운 동생 같기도 하고. 애들 잘 챙기고 좋지"

그러나 현수는 이미 얼굴이 꽤 진지해져있다.

"형, 저 장난으로 묻는거 아니라는거 아시잖아요. 하아,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께요. 형, 저, 주아랑…아이 씨. 이걸 뭐라고 말해야 되지. 형, 저 주아랑 뭐 그렇고 그런 관계인데, 형이 요즘 음, 애들 말 들어보니까 형이 늦게까지 주아 도와주고 막 같이 가고 그런다는데. 형 주아, 여자로서 좋아해요?"

아 씨 뭐야. 짜증나게.

"아니 그러니까, 너랑 주아랑 사귄다는거야?"

그래 이런건 정의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역질문인지 현수는 조금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아니 뭐, 음. 지금은 아닌데, 예전에 그걸 뻔 하기도 했고… 아 여튼 형. 제가 무슨 말 하는지는 아시겠죠? 조금 선 그어주세요. 남자답게. 그리고 형이 솔직히 주아랑 뭐, 그럴… 나이는 아니잖아요?"

아 이런.

"여튼 그러니까, 니가 주아하니까 나보고 좀 비켜달라고?"

얼굴을 쓸어내리던 녀석은 내 한 마디에 잘 정리가 됐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러나 난 녀석이 듣고 싶어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기로 했다.

"니가 무슨 말 하는지는 알겠는데, 이야기 들어보니까 주아랑 뭐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무슨 걔랑 뭘 하는 것도 아니고. 나 걔랑 카톡 한번 한 적 없어. 그래도 내가 나이도 더 먹었는데 혼자 늦게까지 열심히 일 돕고 새벽반이랑 교대할 때까지 일하는거 보기 좀 그래서 도와준게 전부야. 내가 선을 뭐 긋고 어쩔 것도 없어. 그리고 만에 하나, 주아가 좋아해도 니를 좋아하겠지 나같은 놈 좋아하겠냐? 니가 키도 크고 훨 잘 생기고 했는데"

사실은 좀 세게 나가다가 '내가 선을 뭐 긋도 어쩔 것도 없어' 하는 말에 녀석의 표정이 좀 일그러지는데 내가 나도 모르게 쫄았다. 그래서 마지막 말을 덧붙인거다. 그리고 그제서야 녀석도 조금은 기분이 누그러졌는지 담배를 끄더니 하늘 한번 땅 한번 보고 나한테 말했다.

"알았어요. 미안해요 형. 제가 좀 너무 오바한 거 같네요. 미안해요. 그럼 여튼 잘 부탁드려요"

녀석은 갑작스럽게 우애라도 다지자는 듯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두드리고 웃었지만 그게 꽤나 불쾌했다. 마치 암컷을 두고 벌인 수컷들의 싸움에게 이긴 녀석이 진 녀석의 가슴팍 위에 앞발을 올려놓는 기분이었다. 물론 나는 진 수컷의 입장이었고.




"오빠 어디 갔다 왔어요?"

기분이 뭐 같아서 녀석이 내려가고도 한참동안 옥상에 있었다. 그냥 주아와의 관계도 새삼 되짚어 보았다. 나도 모르게 쫄아서 꼬리 내리고 한 말이긴 했지만, 사실 틀린 말도 아니잖는가. 어느 등신 같은 년이 저리도 멋있고 간지나는 새끼가 지 좋아한다는데 그놈 버리고 나를 택하겠는가. 역시나 어제 혼자 설레이고 지랄 안 떤건 잘한 일 같다. 여튼 그런 생각을 하며 시간도 잊은 채 한참을 옥상에 있다가 뒤늦게 문득 막상에서 깨어나니 어느새 알바시간에서 15분이 넘게 늦은 시간이었다.

"사장님 왔다 가셨어요. 그리고 오빠 어디 갔냐고 막 찾으셨는데. 오빠한테 카톡 보낼라고 해도 저 폰 지금 밧데리 다 되어서"

가는 날이 장날이고 넘어긴 데 돌부리 있더라. 딱 두가지. 근무 시간에 농땡이 피우거나 지각하지 말아라. 그 두 가지를 정말정말 싫어한다던 사장님.

"잠깐 옥상에 다녀왔는데"
"옥상에요? 옥상에는 왜요? 오빠 담배 안 피우시잖아요"
"어 근데 그럴 일이 있었어. 여튼 사장님 많이 화났어?"
"네"

아 씨팔. 항상 이런 식이지. 하긴 인턴십 때도 그랬다. 6개월 동안 딱 한번, 그 전 날에 너무 늦게까지 일한데다 알람 안 맞춰놓고 자서 지각했었는데 그 날이 마침 상무님이 인턴들 격려한다고 아침부터 출근하자마자 자기 사무실로 인턴 직원들 부른 날이었다.

'그랬었지'

인턴이 정신이 너무 헤이한거 아닌가? 라는 소리, 그래도 이번에 뽑은 인턴들 다들 열심히 한다고 평이 아주 좋던데 자네는 그 중에 하나가 아닌가봐? 같은 뼈있는 농담에 죽고 싶었는데. 오늘도 마찬가지다. 밤에 주아랑 둘이서 서비스 알바 한 시간씩 더하면 뭘하는가. 이렇게 사장한테 찍히면 그만이지.

"어어, 어이 31살. 어디 다녀오는거야?"
"네? 아 네 잠깐 급히 전화할 일이 생겨서 옥상에서 좀 하느라. 죄송합니다"

하지만 사장은 좋게좋게 넘어갈 표정이 아니었다.

"아니, 내가 다른거 말한 적 있어? 여기 있는거 출출하면 먹어도 돼. 알바생들 수고하는거 아니까, 여기 있는거 커피도 내려마시고 뭐 빵도 먹고 하라고 내가 했잖아. 근데 딱 두 가지. 농땡이 피우는거랑 지각하는거. 그 두가지만 내가 피해달라고 그렇게 말했잖아. 그런거 너무 싫어한다고. 수습 기간에 한 번이라도 지각하면 안된다고 한 거 기억나지? 내가 거기 뽑은 이유? 나이 많고 그래도 내가 뽑은거, 솔직히 그냥 다른 거 없고 집 가깝고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으니까 지각도 안 하고 다른 어린 애들한테 사회생활 해본 사람이 모범도 좀 보이겠다 싶어서 뽑은건데. 이렇게 할거면 나가. 그냥 오늘 일당까지 챙겨줄께"

아…

"미안합니다 사장님. 근데 제가 좀 중요한 일이 생겨서 전화가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한번만 봐주세요"

사장의 목소리 톤이 좀 높아서, 다른 애들도 다 보고 있고, 심지어 손님들도 보고 있다. 나이 서른 한 살 먹고 알바하는게 자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죄도 아닌데. 남들 앞에서 이렇게 꾸중 먹고 나이 값 못한다는 소리나 듣고, 그러면서도 이게 뭐라고 시원하게 때려치우지 못하고 그래도 굽실거려야 하는 내 처지가 비참했다. 아니 사실 그보다 그냥 인턴십 하던 7명 중에 나 하나만 정직원 전환 불가 통보받던 그 순간의 기억이 떠올라서 코가 시큰했다.

"사장님, 근데 이 오빠 일 되게 열심히 해요. 맨날 끝나고도 1시간씩 장부에도 안 올리는 거 마무리 교대 근무도 하고, 또 지각도 진짜 한번도 안 하고 일 되게 열심히 하는 오빠에요.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그때였다. 듣고 있던 주아가 나서서 내 변호를 해주었다. 다른 애들이라면 몰라도, 주아의 한 마디는 그 무엇보다 강한 효과가 있었다. 그만큼 사장에게도 인정받고 있었고 또 사장도 은근 주아를 이뻐라 하는게, 솔까 눈빛만 보면 이성의 그것이다. 그런 놈이 주아의 말에 강하게 부정할 수가 있겠는가.

"후우, 여튼 그럼 한번 좋게 넘어갈테니까 나이값 좀 하자고. 잘하자. 응? 여튼 나 간다"
"네"

사장은 마치 조금 전의 현수마냥 또 내 어깨를 두 번 두드리고 PC방을 나섰다. 내 표정이 별로 안 좋았던지, 다른 녀석들 그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리고 주아가 말을 걸었다.

"오빠, 화장실 가서 세수 한번 하고 오세요. 눈물이 그렁그렁해요. 여기 휴지"

무슨 소리야. 어? 하는 순간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나 지금 사장 말에 상처받고 눈물까지 터진거야? 와. 뭐야. 백수생활 몇 달 했다고 나 유리멘탈 된거야? 대박. 완전 부끄럽다. 끝이다. 싫은 소리 한 마디 들었다고 눈물까지 터지고, 와 나 정말 나이 값 못했네.



하루종일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 주아는 여전히 빵이며 음료며 나한테 가져와서는 "오빠 이거 먹고 해요. 출출하죠" 하며 말도 걸고 챙겨도 주었지만 나는 사무적으로 대했다. 그냥 내가 그럴 기분도 아니었고, 현수 생각도 좀 났고 해서. 그리고 그렇게 정신없이 일에만 집중하니 시간도 잘 갔다. 그리고 그날만큼은 서비스 야근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새벽 2시 땡치자마자 "그럼 나 먼저 가볼께" 하고 나섰다. 아, 주아한테도 "나 먼저 갈께" 하고 인사는 했다. 인사는.

"후우"

집에 가는 길. 오늘 얇게 입어서인가, 아니면 아직까지 기분이 영 별로라서일까. 추웠다. 마음이 시렸다. 그냥 확 다 때려치울까. 나 정말 뭐하고 있는거지. 멍하니 딴 생각을 하다가 횡단보고 신호까지 한번 놓쳤다. 컨디션이 별로였다.

"오빠!"

그때 누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주아였다.

"어, 주아. 오늘은 일찍 나왔네?"

그러자 주아가 웃으며 말했다.

"오빠랑 같이 안하려니까 너무 힘들어서 그냥 나머지는 하던 말던 새벽반 애들한테 맡겼어요. 알 빠야?. 나도 이제 서비스 야근 안 할래요. 오빠한테 하는거 보니까 사장님한테 정 떨어졌어"

말이라도 고맙다. 하지만 난…

"주아야"
"네 오빠"

어쩌면 참 저렇게 대답 한 마디를 해도 똘똘하고 당찬 느낌으로 할까.

"그냥 이건 그냥 묻는건데. 너 혹시 주간반에 현수랑 사귀어?"

그리고 내 말에 화들짝 놀란 그녀. 정말 사귀는 거였나.

"오빠 혹시 아침에 늦게 온거 현수 오빠 때문이었어요?"

눈치 말도 안되게 빠르다. 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라 그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나.

"어? 어. 현수가 자기 너랑 썸타는 사이인데 내가 끼어들어서 좀 그렇다고 그러던데"

사내로서 이런 말을 여자한테 털어놓는건 좀 비겁하다는 생각마저 들지만 어쨌거나 확인하고 싶었다. 확인해서 뭐 어쩔건데?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내 기분은 지금 그딴거 알게 뭐냐. 그냥 알고 싶은 것을 알고 싶을 뿐이다.

"오빠"

주아는 꽤 단호한 표정이다.

"그래보여요?"
"잘 모르겠는데"

그러자 주아는 아무 말 없이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제가 현수 오빠 좋아한거 맞는데요, 제가 대시해도 그냥 그저 그렇게 나오고, 또 주변에 다른 언니들도 많고 그런거 같아서 제가 마음 접었거든요. 근데 그러니까 그때부터 막 저한테 관심 보이고 그래서…"

그랬구먼.

"근데 저도 이제는 '오빠가 좋긴 하지만 그건 동료로서 좋은 거고 이성으로서 좋은건 아니다. 그러니까 그만 따라다녔으면 좋겠다, '하고 말았거든요. 그 이후로는 잠잠해졌다가, 얼마 전부터 다시 현수 오빠가 막 들이대는건데, 이제는 오빠한테까지 그랬네요"

그랬구나.

"존나 짜증나는 새끼네"
툭하고 내뱉은 한 마디. 조금 과했나 싶었지만 주아는 공감했다.

"저 그냥 관둘까봐요. 너무 힘들어요. 어떡하죠? 오빠, 그냥 오빠가 내 남친 할래요?"

무슨 소리야 그건 또

"그럼 현수 오빠가 저한테 막 집착하고 그런거 벗어날 수 있잖아요. 솔직히 저도 오빠 좋고. 오빠는 저 안 좋아요?"

아 얘 이거 무슨 소리야 진짜.

"주아야"
"네 오빠"
"너 진짜 내가 좋아?"

나이 서른 하나 먹도록 여자애가 먼저 나를 이렇게 좋다고 고백한건 처음이거든.

"네 좋아요"




나는 다음 날, 현수를 불렀다.

"형, 하실 말씀이 뭐에요?"

어제까지만 해도 그래도 뭔가 형이라고 좀 대우를 하는 듯한 자세였지만 오늘은 말만 존댓말이지 표정이나 자세는 숫제 지 부하한테 하는 듯 했다. 그 고압적인 태도가 싫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 어제 주아랑 사귀기로 했다"

그리고 그 말에 녀석은 처음에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또 표정이 굳었다가 이번에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가 말했다.

"형, 그거 진짜에요? 둘이 사귀기로 한거? 진짜?"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녀석은 처음에는 "하 씨팔" 하고 웃더니만, 곧 다시 격렬한 분로를 터뜨리곤 "씨발!" 하면서 담배를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솔직히 좀 쫄았다. 하지만 의외로 녀석은 그게 끝이었다. 하기사 지 여자친구도 아닌데 뭐 어쩔 건가. 녀석은 내 대답 따윈 듣지도 않고 먼저 내려가버렸다. 이번에는 나도 금방 내려왔다.

"어떻게 된 거에요?"

주아는 현수가 내려오더니 쓰레기통도 걷어차고 소리를 지르더니 나갔다고 했다. 그래서 주아는 내가 뭐 위에서 얻어맞기라도 한 줄 알았단다.

"그냥 너랑 나랑 사귀기로 했다니까 씨발씨발 하면서 욕 한 마디 하더니 내려가던데?"
"네? 그게 끝?"
"응"
"뭐야, 대박 허무해"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다. 더이상은 혼자가 아니다. 끔찍하리만치 본인이 한심한 상황이지만, 그 대신 여자친구가 생겼다. 그것도 10살 가까이 어린 여자친구가. 착하고 똑부러지는 애다. 예쁘다. 설레인다.

"정말 이래도 좋을까"

하지만 설레임 이면으로 나의 내일이 두렵다. 남들은, 친구들은 하나둘씩 자리 잡아 가고 있는데 나는 알바나 전전하고 있다. 어리디 어린, 함께 미래를 꿈꾸기에는 너무 어린 여자친구까지 만들었다. 돈은? 취업 준비는?

글쎄. 어쩌면 좋을까. 주아의 [ 오빠 사랑해 ] 카톡 메세지를 보며 사르르 눈을 감는다. 평소에 비하면 일찍 눈을 감는 셈이지만, 별로 손해본다는 기분은 없다. 눈을 뜨고 있는 것보다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더 편안하다. 현실도, 미래도.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703

Trending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