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 신고합니다! 병장 김호구는 2014년 10월 12일부로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전역을 하게 된 김호구.
"쉬어. 허허, 그래. 고생 마이 했다. 으뜻노? 마 이제 세상이 다 니꺼 같나? 그래도 아일걸. 니 나가믄 아 그래도 군대가 편했구나 할껄? 기양 여서 말뚝 박는거 어떻노? 밥 주고 옷 주고 재워주고. 이기 니 나가믄 다 니 돈 주고 해야되는긴데? 허허. 하여간에 마 진짜 수고했다. 짜슥, 니 원래 군대 안 와도 되는데 애국심 하나로 자원해 왔담서? 그래, 그랬으니 얼마나 속으로 씨벌씨벌하며 군 생활 했겠노. 니 2년 국가에 내뻐렸다, 생각말고 힘들 때마다 여서 고생한 생각하고 나가서 살믄 틀림없이 성공한데이"
"감사합니다"
"그래, 욕 봤데이. 가봐라"
대대장의 따스한 한 마디에, 군 생활 2년 내내 김호구의 뇌리를 가득채웠던 '아 미친 새끼. 내가 미쳤었지. 병신새끼. 무슨 생각으로 그런거야 병신새끼야, 왜 자원을 했어. 왜 입대를 했어. 누가 알아준다고 병신새끼야' 하던 후회는 눈 녹듯 사라졌다. 그는 그렇게 전역을 했다.
스트레스 코리아
"공짜폰이요? 음… 스마트폰은 아니고요, 이런 건 있는데. 원래 어르신들 효도폰으로 많이 쓰던건데…"
"이런거 말구요. 스마트폰으로요. 가급적 최신폰으로요"
이제 전역도 했으니 휴대폰도 자유롭게 사용하며 세속의 꿀을 신나게 빨아야지, 하며 신나게 휴대폰 대리점에 들어간 김호구. 하지만 어쩐 일인지 폰팔이들도 영 시큰둥한 반응이다. 게다가 아무리 자기를 호구로 봐도 그렇지 세상에 스마트폰도 아닌 폰을 추천하는건 또 뭐란 말인가.
"사실 저희도 답답하다니까요? 단통법이라고, 새로운 법이 통과가 됐어요. 옛날처럼 그렇게 막 고객님들이 보조급 수십만원씩 받아가면서 휴대폰 저렴하게 구입하시고 이런게 사라졌어요. 저희도 손님들 발길 뚝 끊어져서 죽을 맛입니다. 그렇다고 요금제 비싸게 추천해드리면 저희가 바가지 씌웠다고 욕하시고…"
"알았으니까 그럼 일단 비싸도 그걸로 할께요. 기본요금이 그러니까 10만 9천원이라구요?"
결국 김호구는 최신폰 갤러그 메모4를 거의 100만원에 육박하는 가격에 비싸게 구입했다. 요금제도 꽤나 부담스러웠지만 법이 그렇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세상이 어찌될라고 저런 애미창렬한 법이 통과가 되었는지. 그래도 무한요금제라니까 이걸로 뭐 동영상 같은거 신나게 보면 되겠지. 그걸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
"엄마, 나왔어"
"어휴, 우리 아들 왔어! 장하다, 수고했어!"
하지만 아들 내미가 전역을 하고 왔는데도 그리 엄마 얼굴이 썩 밝지가 않다.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런건 아니고. 니 아빠가 하도 얼마 전부터 우리 테레비 후지다고 갈자고 갈자고 그렇게 난리를 피우는데, 그래 뭐 이제 너도 군대 마치고 오고 했으니까 티비도 좋은거 들여놓고 하자고 해서 그저께 니 아빠랑 바이마트 가서 세일할 때 사왔단 말이야"
그러고보니 거실에 엄청 큰 티비가 놓여있었다.
"와 대박. 장난 아니네? 이거 몇 인치야? 한 50인치 되겠는데?"
"60인치"
심지어 3D기능에 스마트 티비 기능, UHD마크까지 붙어있네. 이걸로 영화 보면 정말 대박일 것 같다.
"근데 왜 표정이 그래? 난 완전 좋은데?"
"아니 근데 아까… 아랫 집에 아름이네 엄마가 잠깐 와서 보더니 그러는거야. 얼마 줬냐고. 그래서 세일할 때 사서 550만원 주고 샀다고 그랬지. 원래는 거의 600만원짜리라고"
"와 비싸긴 비싸네. 여튼. 근데?"
"아니 근데 아름이네 집은, 걔네도 60인치 샀는데 그 아름이가 인터넷에서 어디 해외 직구인지 뭔지로 우리 집 반값도 안되게 싸게 샀다는거야"
뭐?
"그게 말이 돼? 인터넷이 원래 좀 싸긴 싼데 그래도 같은 제품인데 가격 차이가 그렇게 난다고? 거짓말 말라고 해. 그게 말이 됨?"
"아니 아예 같은 모델은 아니고, 뭐 그건 스마트 티비랑 뭐 쓰리디인가 뭔가 그런 안 쓰는 기능만 빠진거래. 미국 인터넷에서 사면 그렇게 싸단다. 그래도 다 해서 200도 안 줬다는데 어휴 속상해서. 니 애비가 그렇~게 사자고 방방 뛰더니만"
미국 인터넷은 뭐야. 수입하는게 어떻게 더 싸. 세금도 붙고 할텐데. FTA 때문인가? 암만 그래도. 아 모르겠다.
"여튼 됐어. 잘 나오면 그만이지. 그리고 그건 뭐 기능도 빠진거라며. 속상해하지 말어. 됐고 밥이나 줘. 배고프다"
"차려놨어"
김호구는 서둘러 대충 손발만 씻고 옷을 갈아입고는 식탁에 앉았다. 그런데 어째 밥상에 반찬이 죄…
"아니 엄마! 아니 암만 그래도 아들내미가 군대에서 2년 고생하고 왔는데 그 첫 끼니 반찬이 이게 뭐야. 암만 그래도 그렇지"
"어휴, 미안해. 엄마가 어제 할머니 아프다고 해서 다녀오는 통에 장을 못 봤어"
"오늘 아침에라도 마트 가서 장 좀 보고 오지"
"오늘 마트 쉬는 날이잖아. 그래도 엄마가 이거 버스 타고 저 멀리 경원시장까지 가서 고등어 사온거야. 이거라도 먹어"
아…짜증난다. 어째 전역하자마자 하나도 시원시원하게 풀리는게 없는거 같다.
"거기가 어딘데 거기까지 가서 사와. 무릎도 아픈 사람이"
"그래도 니 전역한다는데 밥상에 풀떼기만 있으면 되겠어? 많이 먹어. 두부도 거기 시장 할머니 손두부집에서 사온거야"
아이
"아 거기 가게 더럽다고 몇 번을 말해. 마트 이런데 하고 달라서 막 그냥 파리 날리는데다 그냥 내놓고 파는구만. 길바닥에서"
"시장이 다 그렇지 뭘. 그렇다고 마트 영업도 안 하는데 그럼 어떡해. 주차도 안되서 엄마가 기껏 버스 타고 가서 사온건데"
"알았어 알았어. 어휴"
밥을 다 먹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래, 군대에서 야전 식사 할 때 생각하면 뭐 위생 따질 것도 없지, 하고 생각한 그는 벌러덩 누웠다. 문 밖에서 엄마의 "엄마 잠깐 교회 아줌마들이랑 밖에 좀 다녀올께. 저녁은 라면 끓여먹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던가 말던가, 하고 생각한 순간 집에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흐음"
여자친구라도 있다면 뭐 그녀와 함께 오붓한 시간이라도 보내겠다만 솔로의 외로움은 그저 딸딸이 외에는 답이 없지 않은가. 바지를 내리고 컴퓨터를 켜려던 순간 '아 맞다' 하는 생각과 함께 '무제한 요금제' 생각이 났다.
"어차피 다 쓰지도 못할 LTE 데이터, 야동이나 보면서 쓰자고"
그는 기억을 더듬어 간만에 해외 스트리밍 야동 사이트를 접속했다. 하지만 그의 눈 앞에 나타난건 살색창연한 동서양의 육덕진 이쁜이들이 아닌, 시퍼러딩딩한 warning.or.kr 사이트 뿐이다. 짜증을 겨우 인내하며 다른 사이트들 몇 개를 접속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 씨팔 다 막혔네"
아니 당최 다 큰 성인이 포르노 좀 보겠다는게 나라에서 막을 일까지나 되나? 여기가 무슨 중국이야 이슬람 국가야. 그렇다고 정말 성을 금기시하는 나라라면 또 몰라, 아침 저녁으로 티비에서는 아이돌 년들이 똥꼬치마에 탱크탑 입고 젖과 궁뎅이 흔들며 따먹어 달라고 몸부림 치고, 어디 번화가라도 나가면 키스방에 안마방이 온 천지에, 어디 음지로는 오피에다 뭐에다 매춘 업소들이 수두룩한데다가 어디 온 천지에 모텔 방은 대낮에도 방이 없는 섹스 코리아 주제에 무슨 온라인만 꽁꽁 틀어막고, 그나마 온라인이라도 제대로 틀어막으면 몰라, 어차피 토렌트 돌리고 웹하드 들어가면 야동이 수천 테라로 있어서 온 조선 남자가 야동 한번 안 본 새끼가 없는 나라 주제에 이게 뭔 개뻘짓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지랄 염병 병신 코리아"
애국심 충만해서 전역한지 하루만에 애국심 다 날아가고 짜증 대폭발이다. 딸딸이고 지랄이고 흥이 다 깨졌다. 게임으로도 스트레스나 풀어볼까 하고 접속을 한다. 오늘은 간만에 밤까지 달려야겠다.
"허허"
…라고 생각했지만 한 2년 손을 뗐다가 접속하니 게임에 피로도 시스템이니 뭐니 하면서 두 시간 남짓 플레이 하니까 더이상 플레이하기 힘든 패널티들이 적용이 된다. 거기에다 온갖 과금 시스템이 붙어서 돈 안 지르면 게임도 제대로 하기 힘들어졌다. 군대 입대 전 고딩 때는 무슨 셧다운이다 뭐다 하면서 지랄하더니 이제는 이런 걸로 지랄인가.
"관두자"
게임을 끄고 다시 침대에 누워 친구들 번호를 등록하고 코코아톡으로 말을 걸어본다. 진용이 이 덕후 새끼부터.
[ 야, 나 전역했다 ]
답장을 기다리자 한 1분여 있다가 바로 답장이 온다.
[ 아 ㅊㅋㅊㅋ 너 벌써 전역했냐? 그럼 조만간 술 한잔 달려야지? ]
[ ㅇㅇ. 야 근데 2년 사이에 세상 왜 이렇게 바뀌었냐. 좆같은 사단장 때문에 싸지방도 제대로 이용 못하는 부대에서 개뺑이 치고 2년 생활하고 왔더니 세상이 다 좆같아 졌다ㅋㅋㅋ 나라가 왜 이 모양이냐 2년 동안 죽어라 지킨 나라인데 ]
[ ㅋㅋㅋ적응하기 힘들지? 그래도 너 정치인 욕하고 그럼 안된다 잡혀간다ㅋㅋㅋ ]
[ 무슨 개소리야 ]
[ 정부에서 코코아톡 이런거 다 감시한대 ]
[ 무슨 음모론이야 병신아. 야, 됐고 어디 알바 자리 없냐? 노가다라도 뛸까? ]
[ 노가다는 얼어뒤질. 막일꾼은 조선족들이랑 같이 일해야 됨. 글구 나 이미 취업했다 ]
[ 학교는? ]
[ 지잡 나와서 어딜 취업한다고. 걍 자퇴하고 지혁이 형 따라서 공장 취업했다. 월급 220씩 나옴. 꿀ㅋ ]
[ 올... 정규직? ]
[ ㅇㅇ. 계약직 사무직 취업한다고 지랄싸느니 이게 나아보이더라. 생각 있음 말해라. 여기 사람 존나 모자란다 ]
[ 그래. 여튼 조만간 보자 ]
[ ㅇㅇ ]
그렇구나. 그래도 진용이는 빨리 인생의 루트를 정했네. 김호구는 생각이 많아졌다. 말년에도 미래 고민으로 가슴이 꽤 답답했었는데 나오니까 더 그렇다. 침대에 엎드려 미래 고민을 하게 된다.
"아니 장난쳐? 미국에서 안전성 평가를 어쨌다느니 할 시간에 국내 고객 신경을 써! 가격은 따불로 받아먹는 것들이 말이야"
어느새 잠이 들었을까. 문 밖에서 호통을 치는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 목소리인데. 눈 비비며 일어나 문을 연다.
"어 아버지 오셨어요. 저 전역했습니다"
마침 전화를 끊은 아버지가 여전히 씩씩대는 얼굴을 겨우 추스리며 아직도 흥분한 얼굴로 김호구를 반긴다.
"어휴 아들, 그래, 수고했다. 장하다"
"근데 무슨 일이세요"
그러자 아버지는 다시 흥분하며 언성을 높이신다.
"아니 비만 왔다 하면 차에 물이 샌다. 이거야 원, 어디 구닥다리 차도 아니고 산지 석달도 안 된 차가 비만 왔다 하면 여 문짝에서부터 물이 줄줄 새니…"
"차에 물이 새요?"
"그래서 내가 서비스센터에 전화하니까 원래 그런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느니 어쨌다느니 어디 이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 뭐야 진짜. 제가 인터넷에 글 올릴까요?"
"냅둬라. 내가 그렇잖아도 이거 소비자 보호원이랑 청와대 게시판에 올린다니까 그러던지 말던지 하란다. 한두번 그런 게 아닌 거 같더라. 어디 씨알이나 먹힐 것 같지도 않다. 아주… 이 나라 기업들 하는거 보면 진짜 이민 간다는 놈들 마음도 이해가 가"
"음"
그래도 니 인생의 소중한 2년을 바쳐 지킨 나라인데, 아버지 입에서 이민 이야기 나오니까 속이 쓰리다. 그러던 차에 여동생이 들어왔다.
"어?! 오빠!"
예전같으면 서로 말도 안 하고 지내던 여동생이건만, 그래도 나 전역했다고 사온 건지 그녀의 손에는 치킨과 과자들이 들려있었다.
"군대 PX에 쉬넬 치킨이라고 있는데, 그게 또 그렇게 맛있단다"
"군바리들 입에 뭐가 맛없겠어. 근데 오빠 이제 완전 전역한거야?"
"어"
"축하해. 그럼 복학은 언제 해?"
"바로 해야지"
치킨을 뜯으며 여동생과 이야기를 하노라니, 바로 복학한다는 말에 아버지가 아주 찬성하셨다.
"그래, 잘 생각했다. 얼른 복학하고 얼른 졸업해. 이 애비 회사에서도 지금 공기업 개혁이다 뭐다 말이 많어. 감원 시작하면 니들 등록금도 다 돈 벌어서 내야 돼"
"만약에 잘리면 아빠 뭐해먹고 살아"
"이거나 만들어 팔아야지"
치킨을 집으시며 말하는 아버지. 그의 모습에 여동생이 질색한다.
"은퇴자들 사업하다 다 망한대. 무슨 치킨집이야. 그냥 어디 원룸이나 하나 인수해서 임대로…"
"그럴 돈은 어디서 나는데"
아버지는 근심이 많으신지 그나마도 몇 점 드시지도 않는다. 나 역시 입맛이 사라져 동생이 사온 과자 봉다리나 뜯으려다 보니…
"야, 이 기집애 보게. 무슨 과자를 다 수입 과자를 사먹어. 그냥 국산 사먹어. 과자 그까짓게 뭐라고 이런 것까지 다 외제로 먹을라고 그래. 돈 없는 대학생이 뭔 과자까지… 돈 아껴!"
"뭔 헛소리야. 아 진짜 시대 뒤떨어진 군바리랑 같이 못 살겠네. 요 앞에 편의점 가서 국산 과자들 가격이 얼마나 하는지 보고 와 봐. 요즘에 수입과자가 싸다고 다 난리야. 국산 과자 다 질소 충전에 바가지라고. 이거 다 해서 만원도 안 해. 전부 이거 국산으로 사려면 2만원도 더 줘야 돼"
"그래?"
"그래. 요즘 뭘 사던 다 국산사면 다 호구 되는거야. 아주 자국민 뒤통수 치는데 재미들렸어. 우리나라 회사들"
"그래, 가영이 말이 맞다. 이 애비 차봐라"
세상이 어찌 굴러가는건지. 뭐가 이렇게 다 거꾸로 가냐.
"여튼, 티비 좀 켜봐라"
그래도 아버지는 새로 구입한 티비가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시다.
"아빠, 떳다 장보리 보자"
"벌써 그거 할 시간이냐?"
생전 드라마 안 보시던 아버지였건만, 그도 점차 나이가 드시긴 한 모양이다. 방으로 돌아와 컴퓨터로 이것저것 알바 자리를 검색하노라니 숨이 턱턱 막히는걸 느끼는 김호구. 그냥 꺼버리고 간만에 뉴스나 보러 포털에 들어가니 내년도 여성부 예산 증가 기사 댓글에 또 병림픽들이 벌어지고 있다.
[ 도대체 하는 일이 뭔지도 모르는 여성부 예산은 왜 맨날 늘어나냐? ]
[ 온갖 다 규제하면서 온갖 사업 다 말아먹는 쓰레기 부서 예산 늘려서 뭐함 ]
[ 군바리들 월급이나 좀 늘려줘라 ]
무어라 댓글을 달까 하다가 문득 싸지방에서 댓글 하나 잘못 달았다가 영창 풀로 다녀오고 그 위로 장교들 줄줄히 징계 받았던 동기 생각이 났다. 그 때문에 군 생활 2년 내내 싸지방 이용에 애로사항이 꽃 피었었지. 그 이후로 김호구 본인도 인터넷에 뭐 댓글 달기가 두려워졌다.
"담배나 피우자"
슥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오자 어느새 뉴스를 보고 있던 여동생이 티비에 나오는 대통령을 보고 욕을 하고 있었다.
"진짜 볼 때마다 재수없어. 진짜 짜증나. 무슨 세금을 또 올릴라고 저래"
평소 같으면 그런 그녀에게 엄중한 경고의 메세지를 날릴 아버지이건만, 아버지조차도 별 말씀이 없으시다.
"저 잠깐 밖에 나갔다 올께요"
하지만 내가 담배 사러 나가는걸 귀신같이 눈치챈 여동생은 그 상황에서도 한 마디 날린다.
"오빠도 담배 끊어. 이제 담배값 4500원으로 오른대. 아빠도 그래서 금연 시작했어. 오빠도 끊어"
"그래, 한 갑에 근 오천원씩 주고 어떻게 피우냐. 너도 이제 금연 시작해라"
"노력해볼께요"
밖으로 나와 편의점에서 담배 한 값을 사노라니, 이제 앞으로 담배값 오르면 그것도 지랄이겠구나 싶다. 두 대 피우고 슥 들어가니 동생이 그 사이 컴퓨터를 붙잡고 있다.
"뭐해"
그러자 동생은 무슨 종이에 리스트를 죽 적어놓고 그거 하나하나를 체크하고 있었다.
"책 주문해"
"하나 사서 다 보고 하나 주문해. 그 많은걸 다 주문하려고? 언제 볼건데"
"11월부터 도서정가제 통과되면 이거 다 비싸게 주고 사야 돼. 지금 할인할 때 질러야 돼"
"그건 또 뭐야"
"이제 온라인에서 책 사도 할인 10% 이상 안 해줘. 다 정가주고 사야 돼"
"야, 그게 말이 돼? 나라에서 책을 사보라고 권장해도 모자를 판에 비싸게 책 사게 만드는게 말이 돼. 그리고 책만 그러는게 어딨어. 다른 상품들은 다 온라인에서 할인 되는데"
"말 안되는데, 이제 그렇게 시행될거야"
"도대체 뭐야 진짜. 세상이 왜 이렇게 돌아가"
"몰라. 그니까 오빠도 정신 차리고 살어"
동생이 컴퓨터를 잡고 있으니 할 수가 없다. 휴대폰을 꺼내서 인터넷을 하노라니 동생이 말을 건낸다.
"오빠 나중에 졸업하면 뭐할거야?"
"몰라. 지잡대 나와서 뭐하겠어. 아님 공무원이나 하던가"
"공무원이 어디 쉽냐. 오빠 맨날 할 거 없음 경찰한다고 했지? 요즘 해경 해체된다는 이후로 그거 준비하던 애들 다 일반 경찰로 지원해서 경찰 공무원도 경쟁율 쩐대. 글구 이제 공무원도 별로야"
무슨 소리야 공무원이 별로라니.
"왜? 공무원만큼 좋은 일자리가 어딨냐. 안 잘리고. 연금 빵빵하고. 완전 최고지"
"뉴스 안 보고 사니까 또 저런 헛소리 한다. 이제 공무원 연금 개혁되서 연금 쥐꼬리만큼 나온다. 9급들은"
"뭐? 그럼 누가 공무원 하냐"
"오빠 같은 사람들. 아빠 같은 공기업들도 이제 다 복지 축소하고 정년도 폐지된대. 아빠 진짜 어쩜 정리해고 1순위일지도 몰라. 우리 둘 대학 장학금이랑 뭐 그런 거도 크잖아"
"어휴, 그런 걱정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하지만 동생은 걱정이 많은 모양이었다.
"아빠 회사 관두면 우리 다 굶어죽는다고 얼마 전부터 엄마 일 나가는거 알아?"
"무슨 일?"
"요 앞에 공장 나가"
"엄마가?"
"어. 맨날 9시까지 잔업해"
"몸도 안 좋은 사람이 무슨 일이야. 거기다 무슨 잔업을 그렇게 늦게까지 해"
"원래 야근 많이 하는 나라잖아, 우리나라. 그리고 그거 알아? 앞으로 특근수당 같은거 다 줄어들지도 모름. 야근수당도 그렇고. 확정된건 아니지만"
"아 뭐가 그래 진짜"
"소득세도 오르고 부가가치세도 오르고 주민세도 오르고 자동차세도 오른대. 아빠가 그래서 요즘 대통령 별로 안 좋아하는거야. 갈수록 살기 팍팍해진다고"
"진짜 요즘 살기 빡세졌구나"
게임하다가 갑자기 난이도를 상 옵으로 하고 즐기는 기분이다. 내가 들어도 한숨이 절로 나오는데 원래부터 사회에 불평불만 많은 여동생은 입이 한발은 나오고도 남겠다.
"나 다 했어. 이제 오빠 컴퓨터 해"
그러다가 동생은 흘낏 휴대폰을 보고 말했다.
"그거 산거야?"
"어"
"완전 바가지 썼겠네? 단통법 바가지?"
"어"
"호구"
"그럼 어떡해. 폰 없이 어떻게 살아"
"언락폰 해외주문하면 되지. 그럼 싼데"
"몰라 그런거"
"어휴, 됐어. 여튼 즐겜해"
"어"
그래도 여동생이 예전보다 뭔가 어른스러워진 느낌이다. 부모님 걱정도 그렇고. 김호구는 답답하면서도 조금 위안이 되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대대장님의
'니 나가믄 아 그래도 군대가 편했구나 할껄?'
하는 말이 떠올랐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편하긴 사회가 편하다. 그래, 그걸로 만족하자. 적어도, 여기선 아무리 잘못한다고 해도 고참한테 쳐맞을 일도, 후임한테 잔소리 조금 했다고 마음의 소리 긁혀서 영창 갈 일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순간 나라 위해 바친 2년의 시간이 너무나 허망하게 느껴졌지만 어쨌든 전역을 한 이상, 군대 걱정은 하지 말자, 하고 김호구는 생각했다. 닫힌 문 너머로 흘러나오는 남북한 포격 교전 어쩌고 하는 뉴스 멘트는 애써 무시하면서 말이다.
-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