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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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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쳐 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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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임대비용은 공동 사무실로 할 경우에 초기 보증금 100만원이랑 월 46만원, 그리고 시설 이용료 4만원만 내시면 되세요"

나는 전화기 너머로 안내하는 여자가 불러주는 내용을 받아적는다. 그리고 물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이벤트로 9900원인가 하는건 뭔가요?"
"아, 이벤트요. 네, 초기 보금증은 내셔야 되구요, 선착순 10분 한정해서 첫달 월세를 9900원만 내시면 되세요"

사근사근한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착착 감기는게 참 좋지만 이쯤해서 전화를 끊을 때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네에, 그럼 또 연락주세요"

전화를 끊고 나서 돈 들어갈 목록을 새삼 체크해본다. 한숨이 나온다. 생각보다 돈 들어갈 곳이 많네. 우선 사무실 임대로는 당분간 재형이네 자취방에서 하는 걸로 세이브하기로 했다. 그래, 원래 역사적인 스타트업 기업들은 죄 어디 창고 같은 곳에서 시작하는 법이다. 그게 더 간지나지. 일단 초기 투자비용으로 일단 파파야 스토어 컴퍼니 등록비용이랑, 미니머그 한 대, 또… 내 책상 하나 의자 하나, 사업자 등록하는데 들어가는 각종 비용들 몇 만원, 우리 명함 제작비… 내 사업자금 500만원으로 몇 달이나 감당이 될까. 

"또 뭐가 필요하지? 아…"

생활비.

"그래. 제일 좆같은게 남았었구만"

사내 새끼 둘이 생활하는데 뭐가 필요할까 생각해봤지만 아무래도 재형이 새끼 덕후끼가 문제다. 게임 스킨 사는데 또 돈 지랄하기 시작하면 답 없는데. 여튼 밥이야 지어먹는다고 치고, 반찬도 뭐 대충 집에서 쌔벼온다 치고 어 뭐 햄이랑 뭐 그런 걸로 대충 어떻게 안 되려나. 살림을 해봤어야지. 

"에휴"








벤쳐 하는 남자 







말이야 벤쳐요 스타트업이요 그럴싸 하지만 우리 케이스는 사실 까놓고 말하자면 남들처럼 어디 제대로 투자 받아서 하는 비전 있는 진짜 사업도 아니고 그저 게으른 백수 두 마리가 취업 안되니까 사업한답시고 설치는 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고 기본 바탕이라도 좀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그냥 두 찌질이가 좀 잘안다 아는게 그나마 스마트폰 게임이었으니 그거나 우리도 만들어보자, 한 거다. 재형이 새끼야 원래 고딩 시절부터 임베디드 개발 좀 하던 놈이고, 나는 한때 만화가 지망생이었으니 빡세게 하면 얼추 어떻게든 뭐가 나오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는 갖고 의기투합한거. 거기에 재형이의 여친이자 내 중학교 동창인 하영이가 웹 디자이너니까 도움 좀 받는다고 치면…

그렇지. 전형적인 시간 버리고 돈 까먹는 답 없는 막장들의 창조경제 미친 사업병인 것이다. 딱 안다. 이건 진짜 사업입네 하고 판 벌여놓고 그거에 집중하는 척 시간 버리고 돈 까먹는 행동인데, 이를테면 그 본인 스스로도 답이 없다는거 알면서도 계속 부모 등골 다 부러트려가며 만년 고시낭인으로 살아가는 노량진과 신림동 고시촌 고시중독 버러지 같은 뭐 그런거다.  

왜 시작도 안 해놓고서 이렇게 부정적인가 하면 그런 전력이 있거든. 나름 1,2등급으로 도배된 괜찮은 수능성적표 들고 난데없이 "나 적성 살려볼게요" 라면서 지잡대 만화학과에 들어갔다가 뒤늦게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이미 답 없음을 느끼고 1년 만에 중퇴하고는 마침 때맞춰 정리해고 된 아버지의 등쌀에 뒤늦은 반항심 불태우며 출가를 했지만 결국 생활비가 부족해서 러시 앤 머니까지 끌어쓰다 970만원 빚덩이 부모님께 토스하고 "이건 사람이 아니라 웬수새끼여" 소리까지 들어가며 뒤늦게 취업에 매진하다가 1년 반을 날백수로 살다 기어코 출사표 던지고 제발 500만원만 속는 셈 치고 투자해달라고 빌고 또 빌어 시작한게 이 놈의 '사업'이라는 것이다. 

아 담배 땡기네. 

별로 동정을 받고 싶진 않다. 나같은 버러지가 어디 나 혼자 뿐이겠는가. 당장 인터넷 10분만 둘러봐도 나같은 건 뭣도 아닌 벌거지인생 머저리들이 얼마나 수두룩한데. 자, 어쨌거나 이렇게나 아까부터 마음에 먹구름이 잔뜩인 이유는 망할 놈의 재형이 새끼 때문이다.

두르르르르- 

"어, 왜?"

어 왜? 

"야, 너 지금 어디야?"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사람들 소리가 딱 시끌시끌하다. 

"나 지금 에버월드왔어"
"뭐?"

오늘 같이 세무서 가기로 했는데.

"나랑 같이 오늘 사업자 등록이랑 뭐 이런저런 잡무들 끝내기로 했잖아. 오후에 그 뭐야, 싼 사무실도 좀 알아보기로 하고"

하지만 녀석의 말은 그저 천하태평이다.

"아 미안미안. 오늘은 여튼 미안. 너가 좀 알아보고, 힘들면 내일 하자. 이따 다시 연락할께"

그리고 뚝 끊어진 전화. 흐, 시작부터 이 모양이냐. 개놈새끼.  

사실 나야 이게 내 생명줄이요 제대로 부러뜨린 우리 엄마 아빠 5,6번 척추 같은 돈이니지만 재형이 새끼 입장에서야 언제고간에 "미안, 아닌거 같다" 하고 박차고 일어서면 그만이다. 걔네 집은 잘 살거든. 백수라기보다는 한량이라고 해야 되나. 지금이야 집에 손 벌리기 싫다고 나와서 이렇게 아둥바둥 대는 거지만 어디 부잣집 아들 배 곯는 거 봤는가. 지금 걔 차도 나와살기 시작하면서 걔네 엄마가 사준 차다. 

"후우…"

답답한 마음에 창문 바람으로 담배 연기를 실려 보내려니 인생이 답답하고 눈물이 절로 난다. 참 별 것도 아닌데 사업자 등록증 떼다가 아빠 보여주니 그게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이제 니가 뭔가를 제대로 할 생각인가보구나" 하면서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던 아빠와 "그래도 사업 그거 조심해. 이제 시작하는거니까 진짜 열심히 해보고" 하던 엄마. 나 믿지 마요. 

까톡- 

누구지. 

[ 시작하는 청년 사업자들을 위한 창업 포럼 '더 스타트업' 오늘 참석자 분들은 오후 1시까지 한국대학교 건축관 B동 102호실에서 뵙겠습니다 ] 

아 맞다. 전에 가보기로 한거. 잊고 있었네. 아 씨발 재형이 새끼, 이것도 같이 가기로 해놓고선. 나라도 준비해야겠다. 




"스타트업이 말이 스타트업이지, '스타트' 자체를 못 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판 벌려서 이것저것 사재끼고 페이퍼 워크 진행하고 사무실 계약하고 기자재 세팅 해놓고 홈페이지 외주 줘놓고선 딱 드디어 시작! 하고 나면 바로 개점휴업 돌입하는거죠. 왜? 이 '사업 준비' 안에 아무런 사업적 접근이 없는 상태로 시작들을 하니까요. 미리 거래처도 확보하고 마케팅도 하고 영업도 하면서 진행을 하는건데 그냥 뭐 손놓고 주문만 들어오길 기다리는거니까, 어디 사업이 되나요. 그렇다고 어디 대단한 아이템을 갖고 시작하는 것도 아니면서"

포럼의 주최자인 한국대학교 벤처창업 모임장이 열띈 목소리로 말을 쏟아냈다. 아 열정 한번 좋구나. 한살이라도 젊은 놈이니. 그의 말을 옆에 있던 나이 좀 있는 아저씨가 받았다. 

"저도 해봐서 아는데요, 저 같은 경우에는 무역 쪽인데 이제 제가 생각이 짧았던게, 아이템이 좋으면 일단 뭐던 될거다 라는 생각을 막연히 했죠. 제가 당시에 들여오려던게 젤리볼인데 이거 보신 분 있으세요? 그냥 장난감인데, 이게 꾹꾹 누르면 건강용품도 되고 가만히 놓으면 캐릭터 상품이기도 하고 벽에 던지면 착 붙고…"

줘도 안 가질거 같은데.

"근데 이게 처음에 들여올 때 툰샵이랑 3개월 독점 공급계약을 맺고 들어간 거에요. 그리고 추가로 오픈 마켓이랑 제 쇼핑몰이랑 해서 진행을 했는데 1차 공급물량은 완매되었고 그래서 아 반응 좋네 싶어서 이만큼 주문을 했는데 바로 오픈 마켓에서 다른 판매자 통해서 제 공급가보다도 10% 싸게 판매가 되기 시작하더라구요. 당연히 제가 판매하던 것도 오픈 마켓 측에서 가격압박 들어오고 거기에 쿠폰할인 강요하면서 마진이 안 남기 시작했죠. 거기다가 그나마 근근히 팔아주던 툰샵에서 공급선 갈아타면서… 지금 집에 이거 박스로 꽉 찼어요. 다들 이거 하나씩 가지세요. 홍보도 좀 해주시구요"

아 뭔가 리얼하게 망한 이야기라서 좋구만. 그에 이어 내 옆 자리의 이쁘장한 여자애가 손을 들었다. 그녀를 본 주최자가 말했다.

"아, 우리 이제 말을 할 때 자기 이름부터 말하고 하죠. 거기… 성함이…"
"윤지수입니다. 한국대학교 4학년이구요. 저도 비슷한 경험담인데요…" 

뭐 흔한 쇼핑몰 이야기다. 1,800만원 까먹었다고. 하 씨. 뭐하는데 돈이 그렇게 들었지. 그리고 그 다음은 내가 봐도 좀 호구처럼 생긴 비만 체형의 청년이었다.

"저는 1인 기업으로 머그폰 앱 개발을 했었는데요…"

오호라.

"아 참. 제 이름은 박철규라고 하구요. 개발부터 디자인까지 제가 다 하고, 마케팅은 그냥 제가 활동하는 커뮤니티에서 좀 활동했었고, 게임 만들었습니다. 폴리 워즈라는 게임인데요…"

모르는 게임이다. 

"저는 제가 봤을 때 마케팅의 실패라고 보아요. 뭐 게임이 재미없으니까 실패한거 아니냐는 말도 있지만, 아 왜 실패냐면 개발비 반의 반도 못 건졌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계좌에 딱 4만원 들어왔더라구요. 유지티 등록비랑 아이머그랑 파파야 스토어 등록비랑… 여튼 돈 꽤 들어갔는데" 

뭔가 내 미래 이야기 같군.

"게임도 나름 제 기준에선 재미있었어요. 돈 오브 워리어 시스템이랑 올드 커맨더랑 좀 시스템을 차용했는데요 쉽게 말해서 VOL같은 게임 생각하시면 될 거 같아요. 유닛들이 일단 자동으로 생성되는데요…"

내가 제일 오타쿠를 싫어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저렇게 뭔가 지가 좋아하는 주제의 이야기가 나오면 그냥 이성을 잃고 고유 명사 남발하면서 남들 전혀 모르는 이야기를 주구장창 씨부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도 끝도 없이 이야기 하고. 

"아 잠시만요. 말씀 중에 죄송한데, 그래서 결론이…?"

사회자가 말을 끊고 들어갔다. 나이스. 하지만 철규는 말이 끊기자 다시 맥락을 잡지 못했고, 계속 어버버 거리다가 어영부영 차례를 넘겼다. 그래도 그는 좀 나은 편이었다. 어쨌든 성과를 냈던 사람이니까.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 대부분은 나처럼 실속없는 예비 창업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나중의 질문 시간이 있었지만, 그나마 나와 비슷한 입장에 있던 박철규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을 뿐 별 실속 없이 나는 세미나 장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육교를 건너다가 문득 그 중간에서 도로 밑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떨어지면 죽을라나'

어차피 답은 뻔하다. 아까 그 돼지의 이야기가 현실일 것이다. 분명히 그럴 일도 없겠지만 두어달 고생해서 게임 만든다고 해봐야 그 완성도가 대형 모바일 게임 회사만큼 나올 리도 없고, 카라멜톡에 등록해서 안정적으로 유저층 먹고 갈 돈도 없다. 분명 몇 푼 벌지도 못하고 묻혀버릴 것이다. 하루에 새로 나오는 게임이 몇 개인데. 목이 탄다. 육교를 내려가 바로 그 밑의 동네표 카페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톨 사이즈"
"드시고 가실 건가요?"
"네" 
"쿠폰 찍어드릴까요?"
"아니요" 
"3천원 결제하겠습니다"

아니아니, 모바일 게임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지금 내 처지 말이다. 이렇게 뭐 한답시고 집에서 돈은 끌어다 썼지만 결코 잘 될 리 없다는 것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답답하고, 우울하다. 엄마한테 미안하다. 아버지는 아파트 경비로 돈 120만원 벌어오고 엄마는 몸이 안 좋아서 식당 일도 이틀에 한번씩 해가면서 겨우 살림하는 판인데. 

"어? 수민아!"

답답한 나에게 까페 안 구석자리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었다. 하영이였다. 

"어? 너 재형이랑 에버월드 안 갔어?" …라고 물어보려다가 문득 그가 하영이랑 같이 간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곧이어 나온 커피를 받아들고 그녀의 테이블로 갔다.

"혼자 뭐해?"
"어, 사무실에 혼자 있기 답답해서 까페 나와서 그리고 있지. 캐릭터 디자인. 얘 어때?"
"어디 봐봐"

방금 전까지 우울했지만 하영이와 함께 앉노라니 조금 위안이 된다. 동업자는 사업 말아먹는 길이지만, 동료 없는 사업 역시 답이 없다. 사공이 많아도 문제지만 사공이 아예 없는건 더 문제 아니겠는가.

"좋다"

하영이. 유하영. 내 중학교 동창이자 함께 앱 개발 중인 재형의 여자친구. 사실은 짝사랑했었다. 오랜 시간.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 짝사랑 한게 문제였다. 항상 그녀 곁을 맴돌긴 했지만 그래서 결국 그녀에게서 더이상 '이성으로서의 긴장감'을 주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뒤늦게 대학 입학과 동시에 고백을 해지만 깔끔하게 차였다. 그래서 깔끔하게 포기하려고 아예 친구인 재형이를 소개시켜준건데 둘이 정말 잘 됐다.

겉으로는 잘 됐다고 축하해줬지만 뒤돌아서 미친듯이 후회했을만큼 미친 짓이었다. 재형이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불같은 질투가 치솟았다. 하지만 스스로를 위로했다. 재형이를 소개해 준 덕분에 그나마 그녀 옆에라도 자연스럽게 있을 수 있게 된 거라고. 그거면 충분하다고 분명 다짐하지 않았던가. 

"커피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커피를 받아들고 자리로 왔다. 자리로 오면서 힐끔 테이블 밑으로 짧은 핫팬츠를 입은 그녀의 각선미가 엿보였다. 물론 그녀가 나에게서 이성으로서의 긴장감을 느끼지 못하듯 나 역시 그녀에게서 그런 것을 크게 못 느끼게 된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난 수컷이다. 비쥬얼적으로 자극을 받으면 최소한 시선이라도 반응하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아니아니 하지만 이미 친구의 여자다. 

"하영아"

난 갑작스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어 왜?"
"너는 이거 잘 될거 같냐?"

하지만 하영은 "아직 이제 겨우 시작한거나 다름없는데 잘 될 거 같냐니. 잘 되게 해야지" 하고 씩씩한 대답을 했다. 맞다. 맞는 말이다. 슬프도록. 그녀는 이어서 다른 캐릭터들을 그리기 시작했고, 나는 말없이 그걸 바라보았다. 




"근데 재형이 전화가 하루종일 없네?"

5시가 넘었다. 우리는 까페에서 꽤 오랜 시간 같이 있었지만 그 사이 그의 전화는 없었다. 한 통도. 물론 나는 녀석이 어디에 간 줄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하영이 말했다.

"수민아,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하자" 

나는 그녀와 함께 자취방 겸 사무실까지 길을 걸었다. 

"너 혹시… 요즘 재형이한테 뭐 들은 이야기 없어?"
"무슨 이야기?"

그러자 하영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하영은 재형의 자리에 앉아 캐릭터 디자인 그림을 이어 그리기 시작했고, 나도 배경 디자인을 그리기 시작했다. 원래는 서로 바뀐 일이지만, 둘 다에게 오히려 이게 더 잘 맞았다. 작업장이자 자취방에는 침묵이 넘쳐 흘렀다. 

"음악 들으면서 해도 돼"

내 평소 작업 스타일을 알기에 음악도 없이 조용히 일하기가 어색한 모양이었다. 난 괜찮다고 했다. 그러자 하영은 말없이 다시 그림을 그렸다. 나도 다시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돌산 배경을 하나 완성할 무렵, 등 뒤에서 작게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하영아…"

그녀의 말에 따르면 재형에게 새 여자가 생긴 것 같다고 했다. 난 기억을 더듬었지만 딱히 그런 거 같진 않았다. 다만 오늘 난데없이 에버월드에 간 건 좀 의심스럽지만. 

"아닐거야. 걔한테 여자가 생겼으면 내가 더 먼저 알았겠지"
"정말 그럴까?"

요즘 재형은 자기한테 전화도 거의 안 한다고 했다. 심지어 그 문제로 싸움을 해도 딱 그때 뿐. 나는 계속 "아닐거야. 재형이가 그럴 리가 없잖아" 하고 그녀를 달랬다. 

"여어"

재형이 돌아온 것은 밤 12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하영은 그를 보자마자 불같이 화를 냈고 둘은 내 앞에서 싸우기 민망했던지 곧 옥상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싸우는 소리는 다 들렸다. 나는 작업에 열중했다. 




"수민아"

둘은 어제 몇 시까지 싸운 것일까. 나는 새벽 2시까지 작업을 하다 침대에 누웠고 그렇게 잠이 들어버렸다. 그때까지 둘은 내려오지 않았으니 최소 새벽 2시까지 싸운 것이다. 하영이가 나를 깨웠다.

"어. 어제 재형이랑 싸웠지?"

바보같은 내 대답. 하지만 하영의 대답은 보다 충격적이었다.

"재형이, 같이 게임 만드는거 관둔대"

뭐라고.

"왜?"

하영의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걔 동생이 소아암이래. 백혈병인데… 병원에서 힘들거라고 했대. 요새 그거 때문에 병원 드나드느라 바빴고, 어제는 마지막으로 외출허가 받아서 동생이랑 에버월드 갔던거대. 난 그것도 모르고… 미안해서 어떻게 해"

하지만 난 그것보다 내 사업도 중요했다. 우리 엄마 아버지도 불쌍하다. 나는 재형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하영에게 묻자 녀석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나는 얼른 옷을 챙겨입고 녀석의 집 쪽으로 가는 버스에 탔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하영이는 재형이가 안 하면 자기도 안 할거라고 했다. 나 혼자서 게임 제작? 하자면 할 수야 있겠지. 개발새발 병신 게임 하나 겨우 만드는거. 다른 사람과 의기투합? 도대체 누가? 비전도 없고 당장 생계도 힘든 일을 누가?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씨발…"

뭐든 이런 식이다. 내 팔자가 뭐 하나 쉽게 풀리는 일이 없다. 이럴 줄 알았다. 내가 큰 마음 먹고 뭘 해보려고 하면 죄 어그러지고 꼬인다. 이거라고 별 다르겠는가. 

[ 미안해 수민아. 하지만 내가 도올 수 있는건 꼭 도울께 ] 

하영의 까톡. 아냐, 필요없어. 다 필요없어.

"후"

버스 차창 밖으로 뜨거운 햇살이 내 머리통을 달군다. 내 500만원. 아니 우리 부모님의 500만원.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반쯤 졸며 도착했다. 내릴 때가 되어 밖을 내다보자, 재형은 지네 동네의, 사람없는 정류소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반가워했지만 나는 욕부터 했다.

"수민아" 
"됐어, 이 개새끼야. 여자친구하고는 의논해서 결정하고, 나한테는 그냥 통보냐? 너 씨발 같이 시작할 때 뭐라고 했냐? 뭐가 되던 끝을 보자고 했지?"
"수민아"
"그래 알아. 니 동생 아픈거. 그럼 씨발 나한테 동생 아프니까 좀 미뤘다가 하자고 말이라도 꺼낼 수 없냐? 정 아니면 내가 요즘 동생 때문에 마음이 안 좋다 말도 못해? 내가 그럼 니한테 뭐라고 하기라도 하냐?"

목요일 낮의 한가한 거리에 내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재형이는 세상 다 산 얼굴로 그저 "미안해" 라고 반복해서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왜? 니 동생 죽는대?"

내 질문에 한참을 대답없던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 힘들대"

그 말에 나도 그냥 정류장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재형아"
"왜"
"힘내라"

나는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은, 그래도 같이 해보자고 하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재형이도 재형이지만 하영이 디자인 실력이 아까웠다. 내 일도 훨씬 편해지는데. 버스 안에서 창문에 머리를 비스듬하게 기댔다. 이제 부모님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투자금 500만원 중에 아직 410만원이 남기는 했다. 하지만 얼레벌레 90만원 까먹은 셈이고, 정작 사업은 본 궤도에도 못 올라가봤다. 

"아…"

까먹은 돈 90만원보다 부모님 실망시켜드릴게 더 미안하고 속상했다. 답답한 마음에 휴대폰만 만지작 거리고 있노라니 모르는 번호에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였다.

"아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밥쳡귤이라고 함…"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불분명한 발음. 어디서 들어본 목소린데.

"네?"
"박.철.규입니다. 어제 같이 세미나 들었던"

아, 그 오타쿠.

"아, 네. 김수민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잠시 후, 박철규는 나에게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저 좀 뜬금없는 제안일 수도 있는데요… 그, 어제 세미나 때 이런저런 질문해주신 내용이 좀 인상적이라. 저, 혹시 같이 게임 만들어 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물론 금전적인 부분이나 뭐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협의를 먼저 거쳐도 좋구요…"

오.

"아, 네. 저야 뭐. 함께 할 분이 새로 생기면 좋지요. 그럼… 혹시 지금 바로 시간 되시나요?"
"네"

나는 1시간 후 한국대학교 정문 앞에서 그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글쎄. 뭐… 그래. 안되면 마는거지. 그저 기회가 한번 더 왔다면 그걸로 좋은거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한번 게임을 완성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난 버스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날씨가 좋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햇살은 찬란한. 

[ 힘내 아들. 열심히 하고 ] 

엄마의 까톡 메세지… 이유없이 코 끝이 조금 찡해졌지만 괜찮다. 그래, 열심히 하면 돼. 어차피… 실패 한두번 하나. 그리고 내가 하는 사업이 그거 아냐. 벤쳐. 실패할 수도 있지. 나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휴대폰으로 우선 그, 박철규가 만들었다는 게임부터 좀 확인해보기로 했다. 

"하…하하"

생각해보니, 나 스카웃 받은거랑 비슷한 거잖아? IT 세미나에 가서, 스카웃 된 뭐 그런. 실리콘 밸리처럼. 

"흐흐"

조금,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마켓에서 그가 예전에 만들었다는 게임을 받기 시작했다. 꽤 큰 게임용량이 부담스러웠지만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 도착할 때까지, 게임을 다 다운로드 받을 때까지 조금만 눈을 붙이기로 했다. 

노곤함이 몰려오는, 따스한 가을 햇볕이 참 기분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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