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벽력같은 호통에 온 가족은 잠시 충격을 먹은 듯 했지만 살짝 열린 문 틈으로 방 안의 상황을 눈치챈 역시나 눈치 빠른 고모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병훈아, 애들이 놀다보면…"
하지만 그에 앞서 어느새 성큼성큼 걸어온 아버지는 그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통을 내리치며 "이 놈 자식이 어른들 앞에서 뭐하는 짓이야!" 하면서 소리치셨다. 전혀 준비 없이 얻어맞았기에 순간적으로 허리가 꺾이고 코가 시큰하며 현기증이 났지만, 여기서 그대로 물러나면 나의 소중한 컬렉션들의 비참한 죽음은 그야말로 개죽음이 되어버린다.
"쫌! 지금 방 안을 보라고!"
문을 활짝 열어버리자 바닥에는 무슨 동체착륙이라도 시도한 것 마냥 랜딩기어가 다 부서진 하세가와 1/32 스케일 F-18 전투기 프라모델, 액정이 깨진 맥북 에어, 표지가 제대로 접힌 우루시하라 사토시 U:COLLECTION 화보집, 마찬가지로 비스듬하게 표지가 접혀버린 아마노 요시타카 환몽궁 화보집, 뒷 커버가 뜯겨나간 갤럭시탭, 로켓트 펀치 발사한 마징가Z 마냥 팔꿈치 이하가 절단된 아이언맨 에그어택 피규어, 뒷머리 연결 부위가 떨어져 나간 세가 아스카 랑그레이 피규어, 버튼 하나가 튀어나와 버린 XBOX 360 패드,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PS3, 바퀴 한 축이 부러진 타미야제 몬스터 트럭 RC카, 하드커버가 떨어져나간 내 중학교 졸업앨범…이건 보물 아니고, 표지가 뜯어진 게임라인 창간호, 속지가 다 떨어져 나온 취미가 2호, 한쪽 이어커버가 떨어져 나간 오르바나 라이브2….
내가 방 한 가운데 모아놓은 처참한, 그리고 망가진 내 보물들이 쌓여있었다. 윽박지르며 답을 얻어낸 태훈이의 말에 따르면 책들을 망가뜨린건 소민이와 영서. 책꽂이에 닥치는 대로 뽑아다가 마구 넘기고 그랬다는데 얘들이야 어리니까 그럴 수 있다 치고 까짓거 이번에 복학하면서 탈덕을 계획하는 내 입장에서 덕후 아이템들 폐기는 눈물을 머금고 이해하는데….
맥북 에어 2013 MID. 이거 전역하고 공장 알바한거에 용돈까지 합해 산 거다.
내가 액정 깨진 맥북을 가져와 친척들 앞에서 열어보이자 그제서야 어른들도 감이 잡히는 듯 했다. '장난감'이야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노트북의 경우에는 납득이 갈만하니까 말이다. 사실 처음에는 진짜 뚜껑이 열리는 것 같았지만 망가진 물건들을 방 한가운데 차곡차곡 모으면서 차분해졌고, 오히려 맥북 덕분에 어른들도 지금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차라리 위안이 되었었다. 맥북, 너의 희생은 헛된 것이 아니리라.
"병훈아, 일단 진정하고…"
식탁 의자에 앉아있던 큰 아버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씩씩대는 나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말했다.
"태훈이, 정훈이 이 눔 시키들 얼른 이리 안 와?"
방 안에 있던 태훈, 정훈 두 씹쌔끼 두 마리가 얼른 그제서야 거실로 튀어나갔다. 정훈이 저 새끼가 죽일 놈이다. 내 컬렉션 선반 맨 위에 있던 F-18을 꺼내려 힘을 주다가 그 받침대에서 동체만 뜯어져 나오자 놀라서 다시 제자리에 놓는다는 것이 그 옆을 툭 쳐서 아스카 피규어가 바닥에 떨어졌고, 발로 그걸 받으려다가 무릎으로 선반을 걷어찬 격이 되어서 선반 자체가 앞으로 와르르 엎어져 콜렉션들을 선반의 무게로 짓눌러버린 것이다. 그래 물론 사고다 사고. 일부러 그런건 아니었겠지.
사곤데… 어른들이 벌초하고 성묘하러 다녀올 동안에 사고를 쳤으면, 최소한 치우기라도 제대로 치워놓고 하나하나 제대로 모셔뒀으면 이 지랄까진 안 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 놈들은 슥 문만 닫은 채로 그 컬렉션의 킬링필드 위에서 뛰어놀았으니 2차 3차 피해가 나고야 만 것이다. 그나마 내가 빨리 돌아왔으니 망정이지, 어른들이 먼저 와서 상황을 파악했더라면 어쩌면 이 처참한 사태는 어떤 식으로던 은폐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작은 아버지 사업에 엄마 몰래 3천만원 빌려주고 아직껏 못 받은거 나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입 한번 열지 않은 것도 알고 있다. 엄마가 그렇게 맞벌이로 몸 부서져라 일하는데도 말이다.
"후우…"
괜히 눈물이 날 것 같다. 사고? 좋게 좋게 넘어가면 이번에도 '나한테만' 사고다. 게다가 이미 재작년에도 한번 전과가 있지 않나. 정훈이 저 개씹쌔끼는. 내가 군대 가 있는 사이에 엄마한테 졸라서 레고 6080 사자성을 가져가지 않았던가. 내가 그거 A급 중고 사려고 그 무슨 지랄삽질을 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것 뿐만이 아니다. 그 전에 언제였던가. 내 우표들 열심히 모은거 몰래 가져갔더랬지. 박정희 취임 우표부터 군인 대통령들, 노무현, 이명박 취임 우표까지 저 새끼만 왔다가면 무슨 대통령들이 하나하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듯 시리즈별로 슬금슬금 사라지지 않았던가. 그때 뒤집어 엎었어야 되는데.
"너네들 형꺼 장난감들 망가뜨렸어 안 망가뜨렸어?"
"일부러 그런거 아냐!"
큰 아버지의 물음에 울먹이며 항의하듯 대꾸하는 놈들. 흐흐, 그래 일부러 한건 아니겠지. 그랬으면 너넨 이미 목과 어깨가 분리됐을거야. 여튼 그 즈음해서 큰 아버지가 먼저 나에게 "미안하다 병훈아. 이 놈 자식들은 내가 따끔하게 혼낼테니까 그만 화 내고, 준구 너도 병훈이한테 뭐라 할 거 없다. 지 물건들이 다 망가졌는데 애가 눈 뒤집히는 것도 당연하지" 하고 입을 열었다.
어른이다. 어른이셔. 장녀 서영이 누나 해외유학 보내고 정훈이 태훈이 저 늦둥이 쌍둥이를 나이 50에 보셨으니 얼마나 귀여웠겠는가. 그랬으니 저 놈들이 맨날 버르장머리 없이 굴어도 어지간하면 봐주고 넘기셨겠지. 그랬으니 지금 상황도 이렇게 어른스럽게 정리하시고.
'하지만…'
어른이다. 어른이셔. 내 물건들의 시세를 전혀 감을 못 잡고 계시다. 지갑에서 선심 쓰듯 내미신 5만원권 4장으로는 맥북 수리비나 감당이 될까 말까. RC카만 해도 얼만데. PS3는, 헤드폰은. 난 눈을 잠깐 감았다 떴다.
"괜찮습니다 큰 아버지…그냥 태훈이 정훈이 따끔하게 혼내주시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솔직히 저 돈이라도 받고 싶다. 하지만 난 안다. 저 돈을 받으면 그걸로 끝이다. 물경 100만원이 훌쩍 넘는 피해가 났어도 어쨌든 20만원을 받고나면 그는 그것으로 홀가분해진다. 오히려 나만 명절에 그깟 컴퓨터 좀 고장나고 장난감 좀 망가졌고 어른들 앞에서 큰 소리 낸 병신이 될 따름이라는걸. 반의 반도 안되는 '보상금'을 받고 말이다.
"아냐, 아냐 받어. 돈이 많이 모자르지. 어른이 주는 돈은 받는거야. 이건 니 뭐 저거 망가뜨린 돈이 아니라, 이 큰아버지가 너 용돈 주는거야. 기분 상했을테니까"
"아니, 아닙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정훈아 태훈아, 앞으로 형 물건 망가뜨리면 안돼, 알았지?"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큰어머니가 "정식으로 사과해야지!" 하고 꾸중하자 그제서야 둘은 다시 "형 미안해", "형 미안" 하고 사과했다. 나는 조용히 인사 드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어휴, 병훈이가 많이 컸네", "아 그럼 내 물그릇 하나 깨져도 성 나는게 사람 마음인데 애가 콤푸타가 망가졌으니 그게 성이 안 나?", "노트북 저거 비싼거야" 하는 소리가 들렸고, 추석 내내 고모, 할머니, 작은 아버지, 큰어머니가 알게 모르게 위로의 말과 용돈들을 쥐어주었고 마지막 날 큰아버지는 내 손에 100만원짜리 수표를 쥐어주셨다. 나는 계속해서 안 받는다고 했지만 큰 아버지의 "너 이 돈 안 받으면 나한테 짜증내는 걸로 받아들인다?" 하는 너스레에 나도 마음이 녹으며 그 돈을 받았다. 사업하시는 분이라 통도 크시다.
"아휴, 형, 미안해. 저 놈이 등치만 컸지 아직 애야"
"됐어. 그래도 병훈이 저 놈도 어디 우리 장씨 집안 식구 아니랄까봐 속이 깊네. 깊어"
"형"
"준구야. 너도 이제 병훈이 보고 뭐라 하지 마라. 이제 쌤쌤 된거 아니냐. 자식 놈들 한번씩 사고 친거니까. 그러니까 너도 이제 마음의 짐 덜어라"
한참 후에 형 성구의 말을 이해한 준구는 "에이…그거랑 그게 같아?" 하고 팔을 벅벅 긁었다. 그리고 물었다.
"그래, 말 나온 김에 서영이는 요즘 공부 잘 하고 있대?"
"어디 외국가서 혼자 지내는게 쉽겠어. 돌아와도 지 또래는 다 이미 취업한 나인데 걱정이 많은 가봐"
"그래도 서영이 똑똑하잖아. 잘 하겠지"
그러나 그 말에 성구는 고개를 저으며 담배를 찾았다.
"어디 대한민국에서 기집애가 공부 잘한다고 취업 잘 된다디. 얼굴이 이뻐야지. 얼굴이 그 모양인데. 차라리 외국은 그런거 차별이 뭐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나 어쨌다나. 나는 그냥 거기 일자리 있으면 거기서 눌러 자리잡고 살라고 했어. 여기 와서 속상한 일 더이상 겪지 말라고"
준구는 고개를 떨구었다.
"지금도 한이 되는게, 그때 무리를 해서라도 피부이식 수술을 한번 더 했어야 됐는데 싶더라고. 그게 때를 놓치니까 나중에 두 번 세 번을 해도 그 한참 때 하는거 효과 반도 안 나더라고. 참…그때 대성 건만 아니었어도 그리 힘들진 않았을텐데"
"미안해 형"
"아냐 내가 사과 받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야. 살다보면 자식 땜에 속 썩는 일 어디 한두번인가. 조카는 내 자식 아냐? 다 피붙이인데. 너 만약에 나 죽으면 서영이 정훈이 태훈이 뭐 병훈이랑 차별해서 키울거야? 아니잖아. 다 내 자식이다 생각하는거지. 그리고 너 저번에도 그 정훈이한테 병훈이가 뭐라 하니까 서영이 얘기 꺼낼라고 하던데, 서영이도 입 안 여는거 니가 입 열면 되겠냐? 으이구. 병훈이 잘 달래주고, 그거 뭐 수리비 돈 모지라면 말해. 내가 좋은걸로 하나 새로 사줄께"
"아이고 됐어 저 놈 새끼 컴퓨터 사줘봐야 밤낮으로 게임 밖에 안 해요 게임 밖에"
성구는 차 문을 열고 말했다.
"요즘 애들이 다 그렇지. 참… 그래도 내 진짜 병훈이 고 놈 승질 좀만 더 바락바락 내면 내가 괘씸해서라도 한대 쥐어박을라고 했더만. 하… 하여간 피가 진하긴 진해. 니 놈 새끼 어렸을 때랑 똑같다. 타이밍 하나 죽여. 여튼 나 간다"
"그려 형. 도착하면 전화해"
"오야"
- fin -
"병훈아, 애들이 놀다보면…"
하지만 그에 앞서 어느새 성큼성큼 걸어온 아버지는 그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통을 내리치며 "이 놈 자식이 어른들 앞에서 뭐하는 짓이야!" 하면서 소리치셨다. 전혀 준비 없이 얻어맞았기에 순간적으로 허리가 꺾이고 코가 시큰하며 현기증이 났지만, 여기서 그대로 물러나면 나의 소중한 컬렉션들의 비참한 죽음은 그야말로 개죽음이 되어버린다.
"쫌! 지금 방 안을 보라고!"
문을 활짝 열어버리자 바닥에는 무슨 동체착륙이라도 시도한 것 마냥 랜딩기어가 다 부서진 하세가와 1/32 스케일 F-18 전투기 프라모델, 액정이 깨진 맥북 에어, 표지가 제대로 접힌 우루시하라 사토시 U:COLLECTION 화보집, 마찬가지로 비스듬하게 표지가 접혀버린 아마노 요시타카 환몽궁 화보집, 뒷 커버가 뜯겨나간 갤럭시탭, 로켓트 펀치 발사한 마징가Z 마냥 팔꿈치 이하가 절단된 아이언맨 에그어택 피규어, 뒷머리 연결 부위가 떨어져 나간 세가 아스카 랑그레이 피규어, 버튼 하나가 튀어나와 버린 XBOX 360 패드,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PS3, 바퀴 한 축이 부러진 타미야제 몬스터 트럭 RC카, 하드커버가 떨어져나간 내 중학교 졸업앨범…이건 보물 아니고, 표지가 뜯어진 게임라인 창간호, 속지가 다 떨어져 나온 취미가 2호, 한쪽 이어커버가 떨어져 나간 오르바나 라이브2….
내가 방 한 가운데 모아놓은 처참한, 그리고 망가진 내 보물들이 쌓여있었다. 윽박지르며 답을 얻어낸 태훈이의 말에 따르면 책들을 망가뜨린건 소민이와 영서. 책꽂이에 닥치는 대로 뽑아다가 마구 넘기고 그랬다는데 얘들이야 어리니까 그럴 수 있다 치고 까짓거 이번에 복학하면서 탈덕을 계획하는 내 입장에서 덕후 아이템들 폐기는 눈물을 머금고 이해하는데….
맥북 에어 2013 MID. 이거 전역하고 공장 알바한거에 용돈까지 합해 산 거다.
내가 액정 깨진 맥북을 가져와 친척들 앞에서 열어보이자 그제서야 어른들도 감이 잡히는 듯 했다. '장난감'이야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노트북의 경우에는 납득이 갈만하니까 말이다. 사실 처음에는 진짜 뚜껑이 열리는 것 같았지만 망가진 물건들을 방 한가운데 차곡차곡 모으면서 차분해졌고, 오히려 맥북 덕분에 어른들도 지금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차라리 위안이 되었었다. 맥북, 너의 희생은 헛된 것이 아니리라.
"병훈아, 일단 진정하고…"
식탁 의자에 앉아있던 큰 아버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씩씩대는 나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말했다.
"태훈이, 정훈이 이 눔 시키들 얼른 이리 안 와?"
방 안에 있던 태훈, 정훈 두 씹쌔끼 두 마리가 얼른 그제서야 거실로 튀어나갔다. 정훈이 저 새끼가 죽일 놈이다. 내 컬렉션 선반 맨 위에 있던 F-18을 꺼내려 힘을 주다가 그 받침대에서 동체만 뜯어져 나오자 놀라서 다시 제자리에 놓는다는 것이 그 옆을 툭 쳐서 아스카 피규어가 바닥에 떨어졌고, 발로 그걸 받으려다가 무릎으로 선반을 걷어찬 격이 되어서 선반 자체가 앞으로 와르르 엎어져 콜렉션들을 선반의 무게로 짓눌러버린 것이다. 그래 물론 사고다 사고. 일부러 그런건 아니었겠지.
사곤데… 어른들이 벌초하고 성묘하러 다녀올 동안에 사고를 쳤으면, 최소한 치우기라도 제대로 치워놓고 하나하나 제대로 모셔뒀으면 이 지랄까진 안 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 놈들은 슥 문만 닫은 채로 그 컬렉션의 킬링필드 위에서 뛰어놀았으니 2차 3차 피해가 나고야 만 것이다. 그나마 내가 빨리 돌아왔으니 망정이지, 어른들이 먼저 와서 상황을 파악했더라면 어쩌면 이 처참한 사태는 어떤 식으로던 은폐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작은 아버지 사업에 엄마 몰래 3천만원 빌려주고 아직껏 못 받은거 나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입 한번 열지 않은 것도 알고 있다. 엄마가 그렇게 맞벌이로 몸 부서져라 일하는데도 말이다.
"후우…"
괜히 눈물이 날 것 같다. 사고? 좋게 좋게 넘어가면 이번에도 '나한테만' 사고다. 게다가 이미 재작년에도 한번 전과가 있지 않나. 정훈이 저 개씹쌔끼는. 내가 군대 가 있는 사이에 엄마한테 졸라서 레고 6080 사자성을 가져가지 않았던가. 내가 그거 A급 중고 사려고 그 무슨 지랄삽질을 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것 뿐만이 아니다. 그 전에 언제였던가. 내 우표들 열심히 모은거 몰래 가져갔더랬지. 박정희 취임 우표부터 군인 대통령들, 노무현, 이명박 취임 우표까지 저 새끼만 왔다가면 무슨 대통령들이 하나하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듯 시리즈별로 슬금슬금 사라지지 않았던가. 그때 뒤집어 엎었어야 되는데.
"너네들 형꺼 장난감들 망가뜨렸어 안 망가뜨렸어?"
"일부러 그런거 아냐!"
큰 아버지의 물음에 울먹이며 항의하듯 대꾸하는 놈들. 흐흐, 그래 일부러 한건 아니겠지. 그랬으면 너넨 이미 목과 어깨가 분리됐을거야. 여튼 그 즈음해서 큰 아버지가 먼저 나에게 "미안하다 병훈아. 이 놈 자식들은 내가 따끔하게 혼낼테니까 그만 화 내고, 준구 너도 병훈이한테 뭐라 할 거 없다. 지 물건들이 다 망가졌는데 애가 눈 뒤집히는 것도 당연하지" 하고 입을 열었다.
어른이다. 어른이셔. 장녀 서영이 누나 해외유학 보내고 정훈이 태훈이 저 늦둥이 쌍둥이를 나이 50에 보셨으니 얼마나 귀여웠겠는가. 그랬으니 저 놈들이 맨날 버르장머리 없이 굴어도 어지간하면 봐주고 넘기셨겠지. 그랬으니 지금 상황도 이렇게 어른스럽게 정리하시고.
'하지만…'
어른이다. 어른이셔. 내 물건들의 시세를 전혀 감을 못 잡고 계시다. 지갑에서 선심 쓰듯 내미신 5만원권 4장으로는 맥북 수리비나 감당이 될까 말까. RC카만 해도 얼만데. PS3는, 헤드폰은. 난 눈을 잠깐 감았다 떴다.
"괜찮습니다 큰 아버지…그냥 태훈이 정훈이 따끔하게 혼내주시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솔직히 저 돈이라도 받고 싶다. 하지만 난 안다. 저 돈을 받으면 그걸로 끝이다. 물경 100만원이 훌쩍 넘는 피해가 났어도 어쨌든 20만원을 받고나면 그는 그것으로 홀가분해진다. 오히려 나만 명절에 그깟 컴퓨터 좀 고장나고 장난감 좀 망가졌고 어른들 앞에서 큰 소리 낸 병신이 될 따름이라는걸. 반의 반도 안되는 '보상금'을 받고 말이다.
"아냐, 아냐 받어. 돈이 많이 모자르지. 어른이 주는 돈은 받는거야. 이건 니 뭐 저거 망가뜨린 돈이 아니라, 이 큰아버지가 너 용돈 주는거야. 기분 상했을테니까"
"아니, 아닙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정훈아 태훈아, 앞으로 형 물건 망가뜨리면 안돼, 알았지?"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큰어머니가 "정식으로 사과해야지!" 하고 꾸중하자 그제서야 둘은 다시 "형 미안해", "형 미안" 하고 사과했다. 나는 조용히 인사 드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어휴, 병훈이가 많이 컸네", "아 그럼 내 물그릇 하나 깨져도 성 나는게 사람 마음인데 애가 콤푸타가 망가졌으니 그게 성이 안 나?", "노트북 저거 비싼거야" 하는 소리가 들렸고, 추석 내내 고모, 할머니, 작은 아버지, 큰어머니가 알게 모르게 위로의 말과 용돈들을 쥐어주었고 마지막 날 큰아버지는 내 손에 100만원짜리 수표를 쥐어주셨다. 나는 계속해서 안 받는다고 했지만 큰 아버지의 "너 이 돈 안 받으면 나한테 짜증내는 걸로 받아들인다?" 하는 너스레에 나도 마음이 녹으며 그 돈을 받았다. 사업하시는 분이라 통도 크시다.
"아휴, 형, 미안해. 저 놈이 등치만 컸지 아직 애야"
"됐어. 그래도 병훈이 저 놈도 어디 우리 장씨 집안 식구 아니랄까봐 속이 깊네. 깊어"
"형"
"준구야. 너도 이제 병훈이 보고 뭐라 하지 마라. 이제 쌤쌤 된거 아니냐. 자식 놈들 한번씩 사고 친거니까. 그러니까 너도 이제 마음의 짐 덜어라"
한참 후에 형 성구의 말을 이해한 준구는 "에이…그거랑 그게 같아?" 하고 팔을 벅벅 긁었다. 그리고 물었다.
"그래, 말 나온 김에 서영이는 요즘 공부 잘 하고 있대?"
"어디 외국가서 혼자 지내는게 쉽겠어. 돌아와도 지 또래는 다 이미 취업한 나인데 걱정이 많은 가봐"
"그래도 서영이 똑똑하잖아. 잘 하겠지"
그러나 그 말에 성구는 고개를 저으며 담배를 찾았다.
"어디 대한민국에서 기집애가 공부 잘한다고 취업 잘 된다디. 얼굴이 이뻐야지. 얼굴이 그 모양인데. 차라리 외국은 그런거 차별이 뭐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나 어쨌다나. 나는 그냥 거기 일자리 있으면 거기서 눌러 자리잡고 살라고 했어. 여기 와서 속상한 일 더이상 겪지 말라고"
준구는 고개를 떨구었다.
"지금도 한이 되는게, 그때 무리를 해서라도 피부이식 수술을 한번 더 했어야 됐는데 싶더라고. 그게 때를 놓치니까 나중에 두 번 세 번을 해도 그 한참 때 하는거 효과 반도 안 나더라고. 참…그때 대성 건만 아니었어도 그리 힘들진 않았을텐데"
"미안해 형"
"아냐 내가 사과 받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야. 살다보면 자식 땜에 속 썩는 일 어디 한두번인가. 조카는 내 자식 아냐? 다 피붙이인데. 너 만약에 나 죽으면 서영이 정훈이 태훈이 뭐 병훈이랑 차별해서 키울거야? 아니잖아. 다 내 자식이다 생각하는거지. 그리고 너 저번에도 그 정훈이한테 병훈이가 뭐라 하니까 서영이 얘기 꺼낼라고 하던데, 서영이도 입 안 여는거 니가 입 열면 되겠냐? 으이구. 병훈이 잘 달래주고, 그거 뭐 수리비 돈 모지라면 말해. 내가 좋은걸로 하나 새로 사줄께"
"아이고 됐어 저 놈 새끼 컴퓨터 사줘봐야 밤낮으로 게임 밖에 안 해요 게임 밖에"
성구는 차 문을 열고 말했다.
"요즘 애들이 다 그렇지. 참… 그래도 내 진짜 병훈이 고 놈 승질 좀만 더 바락바락 내면 내가 괘씸해서라도 한대 쥐어박을라고 했더만. 하… 하여간 피가 진하긴 진해. 니 놈 새끼 어렸을 때랑 똑같다. 타이밍 하나 죽여. 여튼 나 간다"
"그려 형. 도착하면 전화해"
"오야"
-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