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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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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 됐고, 그냥 나가. 나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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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 아줌마는 이미 수미의 모든 집기와 물건을 복도 밖으로 내던져놓은 상태였다. 남자친구인 태경과 저녁을 먹은 후, 걔 폰으로 걸려온 여자 전화 문제로 격렬한 싸움 끝에 이별을 겪은 것이 불과 한 시간 전이다. 거기에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이렇게 갑작스럽게 길바닥에 나앉게 된 상황까지 감당하기에 그녀는 이미 너무 정신적으로 몰려있었다.

"아주머니…"

바닥에 내팽겨쳐서 다 깨진 컵과 그릇은 물론이요 심지어 다 터진 음식물 쓰레기 봉투 때문에 쓰레기 범벅이 된 속옷가지들에 눈이 미치자 순간 그녀로서는 머리통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아찔한 분노를 느꼈지만 간신히 눌러참았다. 게다가 지금은 무어라 화를 내고 항의를 하기보다는 그저 매몰찬 아주머니에게 통사정을 해서 자비를 기대하는 수 밖에 없었다.

"제가 지금 돈이 한 푼도 없거든요. 며칠 만이라도 여유를 주시면 제가 그때 집을 옮길께요"
"아 됐고, 지금 그냥 나가라고. 내가 지난 주에도 말했지? 이번 주까지 안 나가면 길바닥에 나앉게 될 줄 알라고. 어?"

표독스러운 아줌마의 얼굴에서는 일체의 연민이나 자비의 여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삶에 찌들고 나이를 먹을만큼 먹은데다 여성으로서 최소한의 매력을 잃은 아줌마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엿보이는 '천박함에 가까운 타인에 대한 무관용'….

"아주머니 저기요, 정말 죄송한데 제가 정말 지금 아무 데도 갈 곳이 없거든요. 그럼 몇 시간만이라도 시간을 제발…"
"난 모르는 일이니 알아서 하던가 말던가"

아줌마는 보조키 말고도 수미에게 없는 현관키의 문까지 잠그고 주인집인 5층으로 올라가버렸다. 수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저 영혼 없는 눈으로 바닥에 널부러진 온갖 짐들을 훑었다. 순간적으로 주인 아주머니에 대한 살의을 느꼈다. 하지만 곧 5개월간 밀린 집세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 마음은 다시 사그러들었다. 무보증 37만원 월세. 지난 9개월간 집세를 낸 것은 첫 달과 5개월 전 여기저기서 사정사정해가면서 돈을 꾸어다 준 것, 딱 두 번 뿐이었다.

"하아아…"

너무 서러워 울음 섞인 한숨이 쏟아졌다. 그러나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머리를 쓸어넘겼다. 여기서 울어버리면 한도 끝도 없이 울다 쓰러질게 분명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바닥에 널부러진 짐을 훑었다. 건질 것은 건져야했다. 제일 큰 백을 들었다.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가 묻지 않은 옷 중에서 당장 입을 수 있는 원피스 두 벌을 건졌다. 팬티도 하나를 건졌다. 하필이면 브래지어들이 음식물 쓰레기 한복판에 던져진 것은 불운이었다. 그나마 지금 하고 있는게 제일 새거라는 사실에 안도하기로 했다. 구두도 한 켤레 집어들었다. 아까운 짐들도 많았지만 어차피 들고다닐 수도, 들고 갈 곳도 없었다. 전부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건물을 내려왔다. 나머지는 아줌마의 표현을 빌어 '알아서 하던가 말던가'였다. 제 손으로 치울 수 밖에. 그게 그녀가 아줌마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복수였다.






거리의 천사들








달랑 가방 하나 들고 1층으로 내려와 한숨을 쉬노라니 무엇을 해야할지 머리가 복잡했다.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이미 두 달 전 전화가 끊긴 상태라 어디 전화할 곳도 없었다. 게다가 언제 아줌마가 내려와서 행패를 부릴 지 몰랐다. 그런 아줌마들은 이미 겪어 볼 만큼 겪어 봤기에 더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큰 길가로 향하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당장 오늘 밤을 잘 곳이 필요했다. 이미 아까 태경과 싸울 때 지쳐 쓰러져 죽을 것 같이 피곤한 상태였다. 현욱이 오빠? 아니, 그의 집으로 갔다가는 오늘 밤 결코 잠을 이룰 수 없으리라. 하룻밤 수면의 대가로 다리까지 벌리고 싶지는 않았다. 경진 오빠? 용인까지 갈 방법이 없었다. 태진이? 요즘 여자친구와 동거한다고 했지 참. 아, 여울 언니? 괜찮겠다 싶었다. 잠은 물론이고, 잘하면 돈도 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큰 길로 나가서 사람 좋아보이는 아저씨의 휴대폰을 잠깐 빌려 여울 언니의 폰으로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전화가 너머로 들리는 여울 언니의 목소리. 반가웠다.

"언니, 나야, 수미"
"어어, 수미야. 간만이네? 잘 지냈어?"

길게 끌 것 없었다.

"언니, 미안한데 나 지금 술 한잔만 사주면 안 돼요?"

그 말을 하는 순간 왠지 모르게 눈물이 폭발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 왜? 무슨 일 있어?"

전화기 너머로 걱정해주는 언니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잠깐 얼굴 보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어, 알았어. 그럼 화곡역에서 볼까?"
"네"

30분쯤 후, 머리도 덜 말린 채로 급하게 나온 여울 언니를 만나 술 대신 커피를 마시며 사정을 이야기했다. 집에 동거하는 오빠 땜에 술은 같이 못 마셔줄거라고 해서. 그녀 역시 별로 사정이 좋지 않았다. 하룻밤이라도 좀 신세를 지고 싶었지만 언니랑 동거하고 있다는 그 오빠 때문에 힘들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그나마 있는대로 통장에서 현금 5만원을 찾아 내 손에 쥐어준게 고마웠다.

"언니 정말 고마워요"
"아냐,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녀에게 폰을 빌려서 여기저기 전화를 했다. 간만에 기댈 생각으로 혜승이한테 전화를 했지만 번호가 없는 번호라고 뜬다. 무너질 것만 같았다.

"여튼 가볼게요"

여울 언니가 물었다.

"너 갈 데는 있어?"

없지만 있다고 했다. 친구네서 자러 간다고 했다. 언니가 다시 물었다.

"그냥… 집으로 다시 들어가면 안 돼? 아빠한테 미안했다고 하고"

나는 한참을 대답없이 묵묵히 있다가 대답했다.

"그 쓰레기랑 같이 살 바에야 그냥 한강물에 들어갈래요"

여울 언니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나를 안아주었다.

"무슨 일 있으면 언니한테 전화 꼭 해"
"…네"

마음 속으로 고맙다고 다시 한번 인사하고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피곤했다. PC방에서 잠자는건 오랜만이다. 16살 때 이후로 거의 처음인 것 같다. 그 시절 이후로 PC방에 학을 뗐다. 적당한 PC방에 가서, 새벽까지 버티다가 알바생이 졸거나 자리를 비우면 화장실 가는 척 하면서 자연스럽게 도망치곤 했다. 물론 매번 성공하지는 못 했다.

"상훈…"

언젠가부터 함께 다니던 그 시절의 남자친구 상훈이. 도망치다 내가 잡히면 항상 달려와서 괜히 시비를 걸어서 얻어터지곤 그걸로 깽값이라면서 피시방비를 퉁 치곤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매번 통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내가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쟤는 두고, 따로 이야기 해요. 뭐든 해드릴께요"

그리 예쁜지는 모르겠지만 그럭저럭 어디 같이 다니기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외모는 되는 나. 남자 알바생이나 주인들은 당황하면서도 대부분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같이 화장실로 향하거나 가게 안쪽으로 함께 들어갔다. 그렇다고 내가 몸을 주지는 않았다. 그저 입술 한번 맞추거나, 가슴 한번 손대게 하고는 소리소리 비명을 지르면 그걸로 그만이었다. 그 어떤 남자도 피시방비 몇 천원 때문에 성범죄자로 몰리고 싶지는 않아했으니까.

"물론, 그것도 매번 성공하지는 못했지"

딱 한번, 내가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배를 얻어맞고 정신을 잃은 적이 있다. 그 이후는 어떻게 된지 모른다. 그저 눈을 뜨니 몸이 욱씬욱씬했고 병원이었으며 상훈이의 얼굴이 처참하게 퉁퉁 부어있었을 따름이었으니까. 어떻게 된 것인지 물었지만 걔는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저기요…"

오래 전의 상념에 빠져있던 나를 깨운건 옆자리의 남자였다. 노랑-파랑의 스트레이프 반팔티를 입은 남자는 깔끔한 인상이었다. 찌든 담배 냄새가 아닌 은은한 향수 냄새도 좋았다. 뭐랄까, 동네 피시방에 자주 오는 타입이 아닌, 그냥 데이트 하러 만나 "오빠"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그런 남자.

"네?"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저기, 아까 전부터 일부러 볼라고 본 건 아닌데 그냥 봤거든요. 아까부터 게임 같은 것도 안하고 아무 것도 안 하던데. 혼자 온 거면 같이 커피라도 마시러 안 나갈래요?"

시계를 봤다. 오후 9시 47분. 어떻게 할까. 어쨌든 지금은 누구라도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다.

"알았어요"
"피시방비는 제가 낼께요"



밖으로 나오니 언제 비가 왔었는지 길거리가 다 비에 젖어있었다. 아직 한 방울 두 방울 빗물이 떨어지긴 했지만 우산을 쓸 정도는 아니었다. 남자는 작은 가죽 파우치백을 옆구리에 끼었다. 그건 좀 싫었다. 언제적 유행인지 뾰족 구두는 더더욱 싫었다. 순간 다시 피시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졌지만

"담배 피워요? 한대 줄까요?"

라는 말에 그냥 담배 한대 피울 시간은 같이 있기로 했다.

"몇 살이에요?"
"스무살"

내 대답에 "레알?"하며 조금 놀라는 눈치.

"미성년자인 줄 알았는데. 가출한"
"그래서 싫어요?"
"아뇨. 근데 난 스물 세살인데"
"오빠 소리 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없어졌다'. 하지만 남자는 싱글싱글 웃을 따름이었다.

"괜찮아요. 반말해도 되고"

난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잠깐 고민하는 듯 하더니 "커피 대신 술 안 마실래?" 하고 물었다. 어쩜 남자들은 정말 단 한 놈도 빠짐없이 다 이런 새끼들 뿐일까. 뭔가 한숨나게 짜증이 났지만 그래, 솔직히 술이 마시고 싶었다. 이런 짜증나는 상황 속에서는 술이라도 좀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요"
"응, 근데 진짜 반말해도 되는데"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의 대화가 끊어졌지만 남자는 곧 인근의 번화가에서 자기가 곧잘 가는 가게라며 나를 근처 호프로 안내했다. 맥주를 마시자는 그의 말에 난 그냥 소주를 달라고 했다.

"와 잘 마시네?"

주고 받고 주고 받고, 10분 만에 한 병을 비웠다.

"오늘 나 어떻게 해볼 생각이면 그냥 관둬요. 술값은 내가 낼께요"

못 이기는 척 함께 모텔에 가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득 내가 창녀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미 한두번 무너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무너지고 싶지는 앉았다.

"아냐, 됐어. 내가 무슨 뭐 그런…. 근데 뭐야? 집 나온거야?"

백에 대충 쑤셔박은 옷가지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좆같애. 다…" 하고 뜬금없는 투정을 부렸다. 조금 알딸딸해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원래 술은 소주 한 잔만 마셔도 취하는 타입이다. 남자는 묵묵히 새 소주병을 따서 내 잔을 채워주었다.

"그러고보니 우리 이름도 모르네"

그의 이름은 상민. 어차피 곧 잊을 이름이니 상관 없었지만.

"너 근데 좀 많이 피곤해보인다"

수작 부리지 마. 마음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의 말이 곧 마법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꿈나라로 인도했다.




"지금 몇 시야"

기억이 중간중간 토막났지만 난 겨우 실눈을 뜨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옆에 누가 있는 듯 해서. 하지만 몇 번이고 불렀음에도 답이 없기에 난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그리고 정신없이 지갑을 찾았다. 다행히 5만원은 그대로 있었다. 다리 사이는 얼얼했고, 장소는 모텔방이었다.

"미쳤어 미쳤어"

새삼 그가 내 위에 올라탄 기억이 났다. 그리고 혹시나 싶어 안에 손가락을 대어 냄새를 맡았지만 다행히 그가 안에 한 것 같지는 않았다.

"미친 정신 나간 년"

스스로를 욕하고 나는 모텔 침대 옆 메모지 통에 붙어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11시. 낮인지 밤인지 알 길이 없어 창문을 열었다. 다행히 밤이었다.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짐을 다시 챙기다가 그냥 침대에 걸터앉았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그냥 자고 가기로 했다. 어차피 나간다고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모텔에는 그리고 전화기도 있으니까. 착신이 정지된 전화기 목록을 뒤지며 다시 전화할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경호 오빠…"

궁지에 몰리니까 별 사람한테 다 전화를 할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전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하다가 겨우 누르는 순간 누군가 모텔방의 문이 열리며 누가 들어왔다. 놀라며 전화기를 내려놓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나야"

같이 술을 마신 그 상민… 오빠였다. 간 게 아니었나.

"집에 간 거 아니었어요?"
"아니? 담배 사갖고 왔는데? 왜? 나 없는 새 나 보고 싶었어?"

나는 대답 대신 그의 몸을 확 밀쳤다.

"너 나랑 잤지?"

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가 안아달라며"

미친.

"구라치지마"
"잘 마시는 거 같더니 한 병 마시고 바로 뻗더니 내가 그만 마실까? 하니까 안아달라고 그랬잖아. 그래서 내가 편한데 가서 좀 쉴래? 하니까 어 데려가줘 했잖아"
"거짓말!"

남자는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믿기 싫음 말던지. 경찰에 가서 나 신고할래? 강간범이라고?"
"뭐야 지금? 배짱 튕기는거야?"
"아니 그럼 지금 도망치려고"

기가 막혀 한숨을 쉬었다.  

"한 대 피울래?"

난 그가 내민 담배를 받아들었다. 우리는 말 없이 한 대를 다 피웠고 열린 창문으로 다시 내리기 시작한 비가 들이치자 상민이 창문을 닫았다.

"일단 모텔로 왔는데 말이야, 너 갈 데 없으면 당분간 나 자취집에서 지내도 돼. 원래 투 룸인데 마침 형이 이사가서 비어있거든"
"니가 누군지 알고?"
"자꾸 야야 하지마. 나 그래도 니보다 세 살이나 더 먹었어. 그리고 솔직히 니도 지금 오갈 데 없는 신세잖아. 피씨방에서 잘 바에야 그래도 뜨신 물 나오는 집이 낫지"
"강간범집에서 살 생각 없어"

꽤 여유를 부리는 그였지만 내 표현에 살짝 움찔하더니 조금 정색하며 말했다.

"야, 니가 니 입으로 안아줘 안아줘 해놓고서 같이 모텔방까지 걸어와 놓고선 내가 강간범이라니"
"됐고, 여튼 같이 살 생각도 없고 더이상 살 섞을 생각 없으니까 집에나 가"

상민은 내 말에 또 혼자 쿡쿡 웃었다.

"너 말하는거 은근 야하다. 살 섞는다가 뭐냐 살 섞는다가"

난 대답 대신 그의 손에서 담배갑을 뺏었다.




결론적으로 그날 밤 상민과 한번 더 했다. 그리고 며칠만 그의 집에서 묵기로 했다. 그게 괜히 길어질까 싶어져서 인터넷 사이트 여기저기 룸메이트를 찾는 곳에 댓글을 남겼다. 그의 집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야, 어차피 여기서 사나 생전 처음 보는 놈들 집에서 자나 거기서 거기 아니냐? 그리고 여기 괜찮잖아 솔직히"
"남자랑 같이 살 생각 없거든?"
"아, 여자 룸메이트? 근데 돈 내야 되는거 아냐? 뭐 월세 뿜빠이 해야 될 거 아냐"
"나 거지 아냐"

당장은 돈이 없지만 다음 주면 알바비가 나올 것이다.

"생활비는? 너 돈 많아?"
"니가 대줄 것도 아니면 말하지 마"
"대주지 뭐. 어차피 밥이야 내가 하면 되고, 너 뭐 크게 돈 나갈 거 있냐? 컴퓨터도 저기 있고, 뭐 필요한거 다 있잖아. 아 너 입을 옷? 그거도 내가 몇 벌 사줄께"
"개소리"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니 좆대로 해. 근데 그럴거면 그 전에 이거 내 연락처니까…"
"나 폰으로 전화 못 해"
"받는건 되잖아. 아 씨… 잠깐만"

그리고 그는 책상 서랍을 뒤지더니 휴대폰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난 듯 뛰어가 자기 가방에서 뭘 꺼내어 한참을 꾸물거리다가 말했다.

"이거 공기계인데, 선불폰이야"
"됐어"
"아 쫌!"

상민은 그제서 화를 벌컥 내더니 다가왔다.

"내가 뭐 너한테 해꼬지라도 할까봐 그러냐? 아 그래, 어제 모텔에서 내가 너 골뱅이 된 거 데리고 한 건 정말 미안하다. 근데 니가 니 입으로 안아달라고 한 거고, 다리 풀리긴 했어도 니 모텔까지 니 스스로 걸어갔어. 정말로 기억 안나? 그리고 그 다음에 또 한번 했잖아. 그건 너도 나 OK한거 아냐? 글구 내가 너한테 뭐 그거 말고 해꼬지 한거 있냐? 집 나온거 같길래 와서 자라고 하고, 휴대폰도 전화도 못하는거 같길래 폰도 준건데 뭐? 왜 그래? 무슨 평생 남한테 당하고 살았냐?"
"어"

내 말에 그는 할 말이 없는 듯 벌컥 내던 화를 멈추고 어떨떨하게 날 쳐다보았다.

"뭐, 어떻게 당했는데"

난 방금 전까지 손에 쥐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아빠라는 인간은 중학교 내가 올라가자마자 날 건드렸고, 엄마는 나 초등학교 때 집 나갔고, 나도 16살 되자마자 가출해서 온갖 고생 다했어. 온갖 미친 새끼 다 만나봤고, 나 정말 힘들 때 몇 달 동안을 나 대신 맞아주고 도둑질까지 했던 애는 같이 집 구해서 살자마자 오토바이 배달하다가 사고 나서 죽었어. 도둑질도 수도 없이 했고, 그래, 피씨방비 몇 천원 때문에 강간당한 적도 있고 알바하면서 온갖 쓰레기 같은 남자들한테 휘둘려도 봤어. 너도 뭐 다를 거 없잖아. 그냥 피씨방에서, 집 나온 쉬워보이는 여자애 하나 찾아서 밥 사멕이고 술 사주고 같이 자고. 그러고 집 나와서 오갈 데 없으니까 집에서 몇 달 데리고 살다가… 뭐 그런거. 안 그래? 달라? 아니면 너가 무슨 무료봉사 하는 사람이야? 애들 먹여주고 재워주는?"

상민은 할 말이 없다는 듯 한참을 무어라 할까 말까 말하더니 곧 나를 품에 안았다.

"미안하다"
"됐어"

나는 상민의 품을 벗어났고, 그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가방을 다시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내 손에서 가방을 빼앗아 저 쪽에 던져버렸다.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어렵게 컸어. 나랑 형은 엄마 아빠 다 없이 컸어. 그냥… 그래서 피씨방에서 너 보니까 문득 어렸을 때 생각나서 그랬다. 왜? 그래, 내가 너 정신 없을 때 해버린건 진짜, 진짜 미안한데 너도 솔직히 내가 막 되게 싫고 그런건 아니지 않아? 내가 뭐 너 속이고 그런 거 아니잖아? 내가 뭐 무료봉사 하는 사람이냐고? 아니 나 폰 팔아서 먹고 사는 놈이야. 폰팔이라고. 근데, 나 그렇게 쓰레기는 아냐. 그냥 너 힘들어 보이는게 불쌍해서 도와주고 싶었던거 뿐이야. 그게 뭐 잘못됐냐?" 

우리 둘 다 거기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고 뻘쭘히 서있던 그는 손을 내밀었다.

"밥 같이 먹자. 그리고 너, 뭐… 다른 집 구하고 가고 뭐 그래도 좋은데 일단 며칠동안이라도 여기서 살어. 아니 그냥 난 니가 여기서 쭉 살았으면 좋겠는데, 니가 좋으니까. 근데, 그리고 나 그렇게 막 아무 여자나 집에 들이고 그런 놈 아냐. 형이랑 같이 살아서 이 집에 여자 들인거 니가 처음이야. 그냥,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 배고프니 밥이나 먹으러 나가자"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민은 내 손을 잡았다.

"알았지? 같이 사는거지?"

난 바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한참을 울었다. 정말 오랫동안 참았던, 긴 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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