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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빌려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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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의 일이다.

연말이라 다같이 여자인 친구네를 놀러갔는데 마침 녀석의 책상 위에 몇 권의 책들이 쌓여 있었다. 마침 내가 보고 싶던 책도 있어서 그 자리에서 몇 페이지 조심스레 읽어보노라니 역시 내용도 제법 재미난 것이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빌려달라고 했지만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단칼에 거절당했다.

그녀의 말인 즉슨 "난 다른건 다 빌려줘도 책은 안 빌려줘". 조금 서운하고 아쉬웠지만, 나 역시 남에게 책 빌려줘서 별로 기분 좋았던 기억이 없던 걸 알기에 순순히 포기하고 그 얼마 후 따로 그 책을 구입했다.

나도 평소에 크게 그렇게 많이 사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항상 보고 싶은 책들이야 넘쳐나는 법이고, 온라인 서점들의 세일 프로모션도 거의 매달 있는 터라 결국 매달 사는 책이 몇 권인지 모른다. 게다가 꽤 잡식성이라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구매하는 편인데…

그러다보니 친구들이 집에 오거나, 회사 책상에 책을 올려놨을 때 종종 사람들이 책을 빌려달라고 할 때가 있다. 차라리 친구들이야 그냥 거절하면 그만이지만, 회사 동료나 상사 같은 경우에는 거절하기도 힘들다. "책은 안 빌려줍니다" 하는 것도 매몰차 보이고, 내가 생각해도 서운하고 인색하게 느껴지니까. 하지만 막상 빌려주는 입장이 되면 정말 빌려주기 싫은 것이…

뭐 깔끔하게 보고 금방 가져다주면 상관이 없는데, 보통 그렇지가 않으니까.

도대체 책을 어디에서 그렇게 막 굴렸는지 분명 빌려줄 때는 새 책처럼 깨끗했는데 10년 묵은 헌 책 마냥 표지가 온통 때가 타서 돌아온다거나, 페이지들이 구겨지거나 안에 무슨 정체불명의 음식 국물이라도 튀어 있는 채로 돌아오면 아무렴 내 돈 주고 산 물건인데 기분 좋을 리가 만무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지간히 심하게 훼손되지 않는 다음에야 "미안" 소리도 듣기 어렵다.

그래도 내 품으로 돌아오기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보통 남의 물건을 빌려갔으면 가급적 빨리 1~2주 안에 얼른 보고 곱게 돌려줄 생각을 해야 되는데, 당최 빌려가긴 왜 빌려갔는지 의문일 정도로 보지도 않거나 기껏해야 하루 10분 남짓 훑어보다 쳐박아놓고 그저 묵혀놓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 그러다가 몇 달이 지나고 내가 까먹으면 나와 그 책과의 인연은 그걸로 끝이다.

나중에 몇 달이 지나 문득 생각난다 해도 뒤늦게 책 돌려달라고 하기도 뭣하고, 돌려달라고 해도 "아 맞다, 다음에 가져올께" 해놓고 몇 번 또 "깜박했다" 스킬 시전하면 결국 영영 그 책을 돌려받기는 힘들게 된다. 그러면서도 정색하고 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는게 현실. 딱히 그 정도로 아쉽지는 않으니까 보통은. 별로 크게 아끼는 책이 아닌 이상 선물로 준 셈 쳐도 되는 거고.

하지만 애초에 구할 때도 어렵게 구한 희귀본이나 이미 절판된 책, 아니면 문득 인상 깊었던 구절이 생각나서 간만에 다시 볼라고 하니까 빌려주고 못 돌려받은 책이더라, 이런 케이스 같으면 아무래도 속이 상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빌려간 사람 입장에서야 겨우 한 권이지만 빌려주는 입장에선 그런 사람 몇 명이면 그게 몇 권인가. 이럴 때면 아무래도 역시 몇 년 전의 "난 다른건 다 빌려줘도 책은 안 빌려줘"가 떠오르게 된다.

옛 말에 책도둑은 도둑도 아니라는 말이 있듯이 누군가 내 책으로 그만큼 좋았다면 그럭저럭 납득하겠지만, 글쎄. 차라리 책도둑이면 그만큼 간절해서 훔쳐가기라도 하지, 잠깐의 흥미로 빌려가서 결국 보지도 않고 쳐박아 둘 것 같으면 빌려가지 않는게 예의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요즘은 그리 두껍지 않은 책 한 권도 만원이 훌쩍 넘어가는 세상 아닌가. 돈 아까운 건 피차 마찬가지다.

책 사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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