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부터 혀가 꼬부라진 그녀의 전화를 받고 헐레벌떡 뛰어온 덕훈. 바 테이블에 엎드려 "아, 취한다" 같은 아저씨 소리를 하며 주사를 부리고 있는 세아의 모습에 한숨부터 나온다.
'어휴'
하지만 어쩜 꼬아도 저렇게 길게 뻗을 수 있을까 싶은 저 긴 새하얀 다리와, 언제나 정면에 마주하면 시선을 앗아가는 짜릿한 볼륨감의 가슴, 무엇보다 도도해보이면서도 귀여운 구석이 있는 얼굴은 그로 하여금 그녀를 벌써 4년 동안이나 쫒아다니게 만든 매력의 결정체가 아닐 수 없다.
"야야, 일어나. 이제 겨우 9시인데 남의 가게에서 주사를 부리고 있어. 민폐되게"
"어 왔어? 덕훈아! 사으랑한드아"
세아를 깨우자 그녀는 와락 덕훈을 끌어안았다. 칵테일과 향수의 알딸딸하면서도 달큰한 향이 그를 덮치고 벌써부터 아랫도리에 신호가 들어갈랑 말랑하지만 적어도 여기서는 안된다. 아니, 적어도 내 방 컴퓨터 앞이 아닌 이상은.
"왜 이렇게 퍼마셨어"
그리고 그 말에 그녀는 갑자기 정신을 번쩍 차리듯 눈빛이 또렷해지며 "한잔 더 주세요" 하고 바텐더에게 주문을 넣고 말했다.
"야, 김덕훈, 뭐 하나 물어봐도 돼?"
그녀의 이름은 진세아. 나와 동갑인 28살이고, 나름 명문대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현재는 성인 웹 누드 BJ 일을 하고 있는…음, 뭐라고 해야하나. 뭐, 그래, 친구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워낙에 잘난 미모에 어쩌다 같이 길을 걷다보면 주변 남자들의 은근한 시선이 느껴지고, 특히 아저씨들 같으면 목을 휙휙 돌려가며 노골적으로 쳐다볼 정도. 물론 이어 자연스레 시선은 곧 나에게로도 향하지만… 그 직후
'키 작고, 배 나오고, 안경 쓰고, 엉덩이 크고, 군살 많고, 목 짧고, 머리 크고, 여드름 많고, 수염 자국 선명하고, 더벅머리에, 다리도 짧고, 요즘 같은 시기에 카고 바지에 체크 남방을 입고 다니는 놀라운 패션 감각까지 갖춘' 후진적인 나의 모습에 패닉과 질투, 혹은 분노를 느끼는 것 같다. 그러나 뭐 그건 남 이야기니까 접어두자.
'어쨌든'
그런 예쁘고 잘난 세아와 내가 이렇게 길거리를 마치 커플마냥 함께 걷고 함께 밥을 먹고 또 함께 술까지 종종 마시는 이유는, 아니 계기는, 저 위에서도 말했듯이 그녀가 '성인 웹 누드 BJ'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채널 토크방에서도 가장 열렬한 팬이자 자칭 매니저이기도 하고.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한때 말이 많았던 포르노 자키 같은 것과 비슷한데, 그렇다고 섹스를 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누드모델처럼 자세와 포즈를 취하면 그걸 보는 사이트 유저들이 별풍선, 아니 내가 다니는 사이트에서의 '하트 뿅뿅'을 날리면 그 하트 뿅뿅으로 그녀에게 팁이 제공되는 식인 거다. 포르노와 망가에 질려버린 내가
"아…뭐 독특한거 없나?"
하고 여기저기 뒤지고 다니다가 우연찮게 '누드 모델' 검색어로 발견한 것이 그것이다. 훌렁 벗은 채로 10분, 20분, 30분씩 같은 자세, 혹은 또 다른 자세로 누드 자세를 취해주는 모델들의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노라면 관음증을 자극하기도 하는게, 나는 슬슬 빠져들기 시작했다.
약 20개 가량의 BJ방을 슬슬 돌아보면서 내가 꽂힌 곳은 세아의 방이었고, '핑크'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던 그녀에게 나는 수백만원은 족히 썼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개인 쪽지창으로 그녀가 연락을 했고…
"흐"
기껏 만났지만 못난 외모의 나를 본 그녀는 그 날 저녁 돌아가는 길의 차 안에서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선을 긋는 정도가 아니라 독설을 퍼부었다.
"솔직히 나 남자 외모 진짜 안 보는 편인데, 넌 진짜 좀 너무하다. 안 그래?"
뭐 인정하지 못할 이야기도 아니었기에 씁쓸하게 웃으며 넘겼지만, 어쨌든 나도 인간이기에 그녀를 데려다주고 집에 오는 차 안에서 나는 씨팔조팔을 찾다 못해 분한 마음에 눈물까지 줄줄 흘렸다. 집에 와서도 오자마자 탈퇴하고 핑크인지 브라운인지 개년 아주 내 죽도록 안티가 될테다 선언했지만, 화장실에서 씻고 나오니 도착해있던 그녀의
[ 그래도 항상 많이 도와주고 응원해줘서 고마워. 다음 주에 시간되면 또 보자♡ ]
라는 카톡 메세지에 사르르 마음이 녹아
[ 응!! 난 우리 핑크의 영원한 팬이잖아!! ]
라고 답톡을 한 건 나의 흑역사. 어쨌든 끝끝내 내가 그녀의 남자친구가 된다거나, 그녀와 살을 섞는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후 몇 년 간의 인연을 통해 이제는 서로의 가장 깊은 곳까지 이해해 줄 수 있는 사이… 그녀의 표현을 빌어 '소울 메이트'가 되었던 것이다.
"야, 남자들은 도대체 뭐에 그렇게 꽂혀서 그러는거냐? 어? 파슬린지 시슬린지 하는 그 년 말이야, 걔 진짜 뭐 하는 것도 없어. 이렇게, 이렇게, 씨바 나는 아예 대놓고 막 이런 거…"
"야야야!"
뭘 물어본다더니, 취해서 혼자 방송 하듯이 야한 자세들을 이 바에서 재현하는 것을 억지로 뜯어 말렸다.
"뭐하는거야 이 멍청아"
"아니, 말이야. 왜 나는 맨날… 난 맨날 갈 데까지 가는데도 그 하트 뿅뿅 왜 2천개도 들어올까 말까고, 그 시슬린가 하는 그 성괴년은 왜 그렇게 막 몇 만개씩 돈 좍좍 쓸어가냐고. 맨날 병신같은 포즈, 기본 자세 밖에 안 하는데! 어?"
나는 "그야 당연히 시슬리 걔는 너보다 훨씬 귀엽고 어리고 이쁘잖아" 라는 정답을 말해주려다가 맞아죽기 싫어서 다른 대답을 했다.
"걔는 덕후팬들이 많잖아. 정신나간 새끼들. 그런 애들이 돈을 있는대로 퍼주니까 돈이 잘 들어오는거고, 또 걔는 약간 그런 애들 취향에 특화된 얼굴이잖아"
그러자 세아는 나를 빤히 바라다보며 물었다.
"그럼 난? 나는 아니야? 나는 남자들 취향이 아니야?"
"아니, 취향이 아니라는게 아니라…어… 이게 비유가 맞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남자 아이돌 가수들 있잖아. 삐쩍 마르고 얼굴은 동안에 막 버섯머리한 애들. 스키니진 입고. 그런 애들이랑, 진짜 몸도 완전 근육질에 얼굴도 석고상 같은 남자가 있다고 쳤을 때 상식적으로 누가 봐도 잘생기고 멋있는건 후자지만, 그래도 뭔가 응원해주고 싶고, 막 빠순이짓 하고 싶은건 누구겠어?"
"몸 좋은 조각미남"
어휴 노답.
"아니, 물론 너야 그게 취향이지만 빠순이들은 그게 아니잖아. 아 좀 와닿지가 않아서 그런가? 그래, 그래, 야, 길거리에 검은색 에쿠스랑 핑크색 미니 쿠퍼가 있다고 쳤을 때 너 뭐 탈래? 당연히 에쿠스가 더 좋은 차지만 뭔가 감성을 자극하는…"
"난 에쿠스 탈건데?"
"야이!"
농담을 하긴 했지만 세아도 슬슬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깨달은 듯 했고, 얼음물을 마시고 어느새 술이 좀 깬 그녀는 나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돼? 나도 막 그럼 귀욤귀욤하게 그렇게 할까? 야, 근데 그게 나한테 어울리겠어? 에라이"
그래, 사실 내 생각에도 그런게, 컨셉을 하루 아침에 바꾸는 것도 웃기고, 아니 애초에 누드 모델인데 그냥 몸뚱아리 하나로 승부하는건데 컨셉이라는게 의미가 있을까 싶긴 한데…
"음, 그럼 나도 뭐 앞머리도 좀 내고, 머리도 이렇게 자르고, 일부러 샤방샤방한 옷 입고 등장해서 벗고 뭐 그래볼까?"
오, 굿
"그래, 그거야. 너도 하면 되네. 맞어. 누드모델이라고 꼭 시작부터 벗고 출발할 필요 없잖아. 일부러 평소 입고 다니는 옷을 탈의하는 것도 보여주고, 음, 어쨌든 명색은 BJ니까 유저하고 소통도 좀 하고…"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 이어 말했다.
"그리고 말이야, 내가 너의 오랜 팬으로서 말하자면 넌 솔직히 너무 당당해. 물론 그만큼 너가 너 자신의 매력에 자신감이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만 남자들은 그런게 아니란 말이지. 약간은 수줍어하기도 하고, 뭐랄까, 할까말까, 이건 좀 아 어려운데, 이런 뭔가도 좀 섞어가면서, 그러면서도 참고 참았다가 드디어 할 것 같은 상황에서 다시 한번 빼고, 아, 남자들 애간장을 몇 번 쥐어짜고 그렇게 하트 뿅뿅으로 응원해달라고도, 물론 그게 과하면 역겹겠지만 '힘을 주세요!' 같은 뭔가 그런 간절한 무언가를…"
"야야, 때려치워. 난 그런거 안된다"
좌절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뭔가 꽤 실의에 빠진 듯한 세아의 모습에 웃음을 거두었다.
"근데 갑자기 왜 그러는거야? 요즘 수익 많이 줄었어?"
"어. 아니 그것보다 뭔가 짜증이 나는거야. 나는 솔직히 막, 장난 아니잖아. 야, 솔직히 방송 통틀어서 나처럼 컨텐츠 많은 애 없어. 포즈 수위도 높고. 근데 정작 돈은 쥐뿔…아 막 신경질 나. 그리고 내가 갑자기 막 그렇다고 애교 부리면 다 토할거 아냐"
순간 그녀가 뿌잉뿌잉하는 자세의 누드 포즈를 취한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빵터질 뻔 했지만 겨우 참았다.
"어쨌든 변화를 줄 필요는 있을거야. 방 분위기도 좀 일신하고, 음 뭐랄까 '모델로서의 너'가 아니라 '여자로서의 너'를 어필해 봐. 걸그룹 멤버들이 '가수로서의 나'를 어필하는게 아니잖아. '예쁜 여자아이로서의 나'를 더 어필하는 것처럼, 너도 좀 그런 것을 연구해 봐"
"아 몰라몰라, 너 얼굴 보니 술 맛 다 깼어. 가자. 가"
"야이 망할…"
세아는 백에서 지갑을 꺼내 계산했고, 나는 곧 가게 앞에 주차해 놓은 차에 그녀를 태웠다.
"안전벨트 해"
"금방 갈건데 뭐"
"그래도 해"
"아저씨 같아"
"내가 너보다 생일 느리거든요 아줌마?"
"뭐?"
세아는 내 팔뚝을 꼬집었고, 팔뚝을 문지르던 나는 그녀에게 친히 안전벨트를 메어주었다.
"이제 간다"
"잠깐만"
"왜?"
잠시 숨을 고르며 창 밖을 바라보던 그녀는 "아냐, 이제 넘겼어. 토할 뻔 했거든" 하고 무서운 소리를 했다.
"너 또 이 차 안에 토하면 진짜 길바닥에 버리고 간다?"
"안 토해"
그러면서도 조금 입을 벌리고 한숨을 토해내던 그녀는 진짜 괜찮다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간다"
"근데 그 전에…"
세아의 집주소 네비를 찍으려는 순간, 그녀는 내 손을 잡아 다시 운전대로 옮겼다.
"왜?"
어리둥절하는 나에게 그녀는 말했다.
"모텔로 가자"
그 말에 차 안에는 잠깐 정적이 돌았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차를 가까운 번화가 골목 쪽으로 몰기 시작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고, 차 안의 공기는 조금 더 어색해졌다. 술이라고는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거늘, 내 얼굴은 세아만큼이나 발그레해졌다.
< 끝 >
'어휴'
하지만 어쩜 꼬아도 저렇게 길게 뻗을 수 있을까 싶은 저 긴 새하얀 다리와, 언제나 정면에 마주하면 시선을 앗아가는 짜릿한 볼륨감의 가슴, 무엇보다 도도해보이면서도 귀여운 구석이 있는 얼굴은 그로 하여금 그녀를 벌써 4년 동안이나 쫒아다니게 만든 매력의 결정체가 아닐 수 없다.
"야야, 일어나. 이제 겨우 9시인데 남의 가게에서 주사를 부리고 있어. 민폐되게"
"어 왔어? 덕훈아! 사으랑한드아"
세아를 깨우자 그녀는 와락 덕훈을 끌어안았다. 칵테일과 향수의 알딸딸하면서도 달큰한 향이 그를 덮치고 벌써부터 아랫도리에 신호가 들어갈랑 말랑하지만 적어도 여기서는 안된다. 아니, 적어도 내 방 컴퓨터 앞이 아닌 이상은.
"왜 이렇게 퍼마셨어"
그리고 그 말에 그녀는 갑자기 정신을 번쩍 차리듯 눈빛이 또렷해지며 "한잔 더 주세요" 하고 바텐더에게 주문을 넣고 말했다.
"야, 김덕훈, 뭐 하나 물어봐도 돼?"
PLUM PINK
그녀의 이름은 진세아. 나와 동갑인 28살이고, 나름 명문대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현재는 성인 웹 누드 BJ 일을 하고 있는…음, 뭐라고 해야하나. 뭐, 그래, 친구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워낙에 잘난 미모에 어쩌다 같이 길을 걷다보면 주변 남자들의 은근한 시선이 느껴지고, 특히 아저씨들 같으면 목을 휙휙 돌려가며 노골적으로 쳐다볼 정도. 물론 이어 자연스레 시선은 곧 나에게로도 향하지만… 그 직후
'키 작고, 배 나오고, 안경 쓰고, 엉덩이 크고, 군살 많고, 목 짧고, 머리 크고, 여드름 많고, 수염 자국 선명하고, 더벅머리에, 다리도 짧고, 요즘 같은 시기에 카고 바지에 체크 남방을 입고 다니는 놀라운 패션 감각까지 갖춘' 후진적인 나의 모습에 패닉과 질투, 혹은 분노를 느끼는 것 같다. 그러나 뭐 그건 남 이야기니까 접어두자.
'어쨌든'
그런 예쁘고 잘난 세아와 내가 이렇게 길거리를 마치 커플마냥 함께 걷고 함께 밥을 먹고 또 함께 술까지 종종 마시는 이유는, 아니 계기는, 저 위에서도 말했듯이 그녀가 '성인 웹 누드 BJ'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채널 토크방에서도 가장 열렬한 팬이자 자칭 매니저이기도 하고.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한때 말이 많았던 포르노 자키 같은 것과 비슷한데, 그렇다고 섹스를 하는 것은 아니고 그저 누드모델처럼 자세와 포즈를 취하면 그걸 보는 사이트 유저들이 별풍선, 아니 내가 다니는 사이트에서의 '하트 뿅뿅'을 날리면 그 하트 뿅뿅으로 그녀에게 팁이 제공되는 식인 거다. 포르노와 망가에 질려버린 내가
"아…뭐 독특한거 없나?"
하고 여기저기 뒤지고 다니다가 우연찮게 '누드 모델' 검색어로 발견한 것이 그것이다. 훌렁 벗은 채로 10분, 20분, 30분씩 같은 자세, 혹은 또 다른 자세로 누드 자세를 취해주는 모델들의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노라면 관음증을 자극하기도 하는게, 나는 슬슬 빠져들기 시작했다.
약 20개 가량의 BJ방을 슬슬 돌아보면서 내가 꽂힌 곳은 세아의 방이었고, '핑크'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던 그녀에게 나는 수백만원은 족히 썼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개인 쪽지창으로 그녀가 연락을 했고…
"흐"
기껏 만났지만 못난 외모의 나를 본 그녀는 그 날 저녁 돌아가는 길의 차 안에서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선을 긋는 정도가 아니라 독설을 퍼부었다.
"솔직히 나 남자 외모 진짜 안 보는 편인데, 넌 진짜 좀 너무하다. 안 그래?"
뭐 인정하지 못할 이야기도 아니었기에 씁쓸하게 웃으며 넘겼지만, 어쨌든 나도 인간이기에 그녀를 데려다주고 집에 오는 차 안에서 나는 씨팔조팔을 찾다 못해 분한 마음에 눈물까지 줄줄 흘렸다. 집에 와서도 오자마자 탈퇴하고 핑크인지 브라운인지 개년 아주 내 죽도록 안티가 될테다 선언했지만, 화장실에서 씻고 나오니 도착해있던 그녀의
[ 그래도 항상 많이 도와주고 응원해줘서 고마워. 다음 주에 시간되면 또 보자♡ ]
라는 카톡 메세지에 사르르 마음이 녹아
[ 응!! 난 우리 핑크의 영원한 팬이잖아!! ]
라고 답톡을 한 건 나의 흑역사. 어쨌든 끝끝내 내가 그녀의 남자친구가 된다거나, 그녀와 살을 섞는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후 몇 년 간의 인연을 통해 이제는 서로의 가장 깊은 곳까지 이해해 줄 수 있는 사이… 그녀의 표현을 빌어 '소울 메이트'가 되었던 것이다.
"야, 남자들은 도대체 뭐에 그렇게 꽂혀서 그러는거냐? 어? 파슬린지 시슬린지 하는 그 년 말이야, 걔 진짜 뭐 하는 것도 없어. 이렇게, 이렇게, 씨바 나는 아예 대놓고 막 이런 거…"
"야야야!"
뭘 물어본다더니, 취해서 혼자 방송 하듯이 야한 자세들을 이 바에서 재현하는 것을 억지로 뜯어 말렸다.
"뭐하는거야 이 멍청아"
"아니, 말이야. 왜 나는 맨날… 난 맨날 갈 데까지 가는데도 그 하트 뿅뿅 왜 2천개도 들어올까 말까고, 그 시슬린가 하는 그 성괴년은 왜 그렇게 막 몇 만개씩 돈 좍좍 쓸어가냐고. 맨날 병신같은 포즈, 기본 자세 밖에 안 하는데! 어?"
나는 "그야 당연히 시슬리 걔는 너보다 훨씬 귀엽고 어리고 이쁘잖아" 라는 정답을 말해주려다가 맞아죽기 싫어서 다른 대답을 했다.
"걔는 덕후팬들이 많잖아. 정신나간 새끼들. 그런 애들이 돈을 있는대로 퍼주니까 돈이 잘 들어오는거고, 또 걔는 약간 그런 애들 취향에 특화된 얼굴이잖아"
그러자 세아는 나를 빤히 바라다보며 물었다.
"그럼 난? 나는 아니야? 나는 남자들 취향이 아니야?"
"아니, 취향이 아니라는게 아니라…어… 이게 비유가 맞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남자 아이돌 가수들 있잖아. 삐쩍 마르고 얼굴은 동안에 막 버섯머리한 애들. 스키니진 입고. 그런 애들이랑, 진짜 몸도 완전 근육질에 얼굴도 석고상 같은 남자가 있다고 쳤을 때 상식적으로 누가 봐도 잘생기고 멋있는건 후자지만, 그래도 뭔가 응원해주고 싶고, 막 빠순이짓 하고 싶은건 누구겠어?"
"몸 좋은 조각미남"
어휴 노답.
"아니, 물론 너야 그게 취향이지만 빠순이들은 그게 아니잖아. 아 좀 와닿지가 않아서 그런가? 그래, 그래, 야, 길거리에 검은색 에쿠스랑 핑크색 미니 쿠퍼가 있다고 쳤을 때 너 뭐 탈래? 당연히 에쿠스가 더 좋은 차지만 뭔가 감성을 자극하는…"
"난 에쿠스 탈건데?"
"야이!"
농담을 하긴 했지만 세아도 슬슬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깨달은 듯 했고, 얼음물을 마시고 어느새 술이 좀 깬 그녀는 나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돼? 나도 막 그럼 귀욤귀욤하게 그렇게 할까? 야, 근데 그게 나한테 어울리겠어? 에라이"
그래, 사실 내 생각에도 그런게, 컨셉을 하루 아침에 바꾸는 것도 웃기고, 아니 애초에 누드 모델인데 그냥 몸뚱아리 하나로 승부하는건데 컨셉이라는게 의미가 있을까 싶긴 한데…
"음, 그럼 나도 뭐 앞머리도 좀 내고, 머리도 이렇게 자르고, 일부러 샤방샤방한 옷 입고 등장해서 벗고 뭐 그래볼까?"
오, 굿
"그래, 그거야. 너도 하면 되네. 맞어. 누드모델이라고 꼭 시작부터 벗고 출발할 필요 없잖아. 일부러 평소 입고 다니는 옷을 탈의하는 것도 보여주고, 음, 어쨌든 명색은 BJ니까 유저하고 소통도 좀 하고…"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 이어 말했다.
"그리고 말이야, 내가 너의 오랜 팬으로서 말하자면 넌 솔직히 너무 당당해. 물론 그만큼 너가 너 자신의 매력에 자신감이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만 남자들은 그런게 아니란 말이지. 약간은 수줍어하기도 하고, 뭐랄까, 할까말까, 이건 좀 아 어려운데, 이런 뭔가도 좀 섞어가면서, 그러면서도 참고 참았다가 드디어 할 것 같은 상황에서 다시 한번 빼고, 아, 남자들 애간장을 몇 번 쥐어짜고 그렇게 하트 뿅뿅으로 응원해달라고도, 물론 그게 과하면 역겹겠지만 '힘을 주세요!' 같은 뭔가 그런 간절한 무언가를…"
"야야, 때려치워. 난 그런거 안된다"
좌절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뭔가 꽤 실의에 빠진 듯한 세아의 모습에 웃음을 거두었다.
"근데 갑자기 왜 그러는거야? 요즘 수익 많이 줄었어?"
"어. 아니 그것보다 뭔가 짜증이 나는거야. 나는 솔직히 막, 장난 아니잖아. 야, 솔직히 방송 통틀어서 나처럼 컨텐츠 많은 애 없어. 포즈 수위도 높고. 근데 정작 돈은 쥐뿔…아 막 신경질 나. 그리고 내가 갑자기 막 그렇다고 애교 부리면 다 토할거 아냐"
순간 그녀가 뿌잉뿌잉하는 자세의 누드 포즈를 취한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빵터질 뻔 했지만 겨우 참았다.
"어쨌든 변화를 줄 필요는 있을거야. 방 분위기도 좀 일신하고, 음 뭐랄까 '모델로서의 너'가 아니라 '여자로서의 너'를 어필해 봐. 걸그룹 멤버들이 '가수로서의 나'를 어필하는게 아니잖아. '예쁜 여자아이로서의 나'를 더 어필하는 것처럼, 너도 좀 그런 것을 연구해 봐"
"아 몰라몰라, 너 얼굴 보니 술 맛 다 깼어. 가자. 가"
"야이 망할…"
세아는 백에서 지갑을 꺼내 계산했고, 나는 곧 가게 앞에 주차해 놓은 차에 그녀를 태웠다.
"안전벨트 해"
"금방 갈건데 뭐"
"그래도 해"
"아저씨 같아"
"내가 너보다 생일 느리거든요 아줌마?"
"뭐?"
세아는 내 팔뚝을 꼬집었고, 팔뚝을 문지르던 나는 그녀에게 친히 안전벨트를 메어주었다.
"이제 간다"
"잠깐만"
"왜?"
잠시 숨을 고르며 창 밖을 바라보던 그녀는 "아냐, 이제 넘겼어. 토할 뻔 했거든" 하고 무서운 소리를 했다.
"너 또 이 차 안에 토하면 진짜 길바닥에 버리고 간다?"
"안 토해"
그러면서도 조금 입을 벌리고 한숨을 토해내던 그녀는 진짜 괜찮다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간다"
"근데 그 전에…"
세아의 집주소 네비를 찍으려는 순간, 그녀는 내 손을 잡아 다시 운전대로 옮겼다.
"왜?"
어리둥절하는 나에게 그녀는 말했다.
"모텔로 가자"
그 말에 차 안에는 잠깐 정적이 돌았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차를 가까운 번화가 골목 쪽으로 몰기 시작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고, 차 안의 공기는 조금 더 어색해졌다. 술이라고는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거늘, 내 얼굴은 세아만큼이나 발그레해졌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