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 똑, 똑똑 딱딱, 따따닥- 똑- 똑-
내 나름의 흥에 맞춰 스텝을 밟으며 목탁을 두드린다. 하지만 역시나 "교회 믿어요" 하는 말과 함께 가게 문을 닫아버리는 인상 사나워보이는 정육점의 여시주. 할 수 없이 옆의 미용실로 발걸음을 옮기지만 또 "불교 안 믿어요, 가세요" 하는 말이 문도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 들려온다. 오늘 공양받은 것이라고는 그나마 언제나 가면 없는 살림에 뭐라도 퍼주는 방아간 할머니의 현미 한 섬 뿐이다.
"하아…좆같네"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하지만 곧 라이터가 없음을 깨닫고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만 뭐가 있을 리 없다. 동네를 지나와 골목길이라 인적도 없고, 아 이거 참 라이터 사기도 돈 아깝고 어쩌나. …하고 고민하던 차에 저기 고딩 한 놈이 걸어온다.
"야"
하지만 놈은 귓구녕에 꽂아넣은 이어폰 때문인지 불러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보시 성공률 제로 개땡중 탁발승의 낮은 자존감이 또 괜히 역으로 대폭발해서 나는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간다. 그리곤 길을 막고 소리쳤다.
"야!"
그제서야 놈은 이어폰을 빼고 "네?" 하고 놀라서 묻는다. 나는 목적을 바로 밝혔다.
"혹시 라이터 있냐?"
놈은 왠 스님이 그런 질문을 하냐는 눈으로 나를 아래 위로 훑지만 나는 어쨌거나 급하다.
"야, 니는 귓구녕에 마구니가 끼었냐? 라이터 있냐고 라이터. 담배에 불 붙이는 라이터"
그러나 내 열반 직전의 타바꼬에 대한 지고한 열망과는 달리 놈은 고개를 저었다.
"없는데요"
"센터 까서… 아니 뒤져서 나오면 니 라이터 나한테 보시?"
요즘 애들은 센터 깐다는 말을 잘 모르더라. 그래서 친절히 '뒤져서'라고 설명까지 해줬지만 놈은 아무래도 정말 없는 눈치다. 하, 진짜 요즘 애들은 그렇게 학업 스트레스에 왕따에 뭐 학교폭력까지 스트레스 3종 세트 다 챙겨먹는 놈들이 담배도 안 피우면 도대체 무슨 낙으로 인생 사는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깡으로 버티나?
"진짜 없는데…저 담배 안 피워요"
"하 참. 알았다. 가라"
나는 혀를 차면서 녀석을 보냈다. 놈은 내가 한 대 안 후려쳤다고 그새 기어올라서 뒤에서 "근데 진짜 스님 맞으세요?" 하고 물어보았지만 나는 뒤돌아 대답 대신 "갈!" 하는 한 마디로 녀석을 떠내보냈다.
땡중
원래 내가 계획한 건 진짜 이런게 아니었다. 그냥 내가 바란 것도 그리 대단한게 아니었다. 어디 쥐좆만한 산사 같은 곳에 들어가서 아침 저녁으로 불경이나 좀 외고 스트레스 받으면 목탁 빠개져라 두드리고 헬스 머신 대신 쟁기 메고 농사 좀 짓고 그러면서 가끔 찾아오는 삼삼한 중년 여시주들이랑 노가리 좀 까면서 유유자적, 낮에는 농사 밤에는 인터넷, 하는 낮농밤넷의 핵꿀적 안빈낙도…
그렇게 산 속에서 한 3년 뭉개면서 얼굴에서 기름기 빼고 인자한 얼굴로 "조금 쉬었다 가는 길", "이보게, 어딜 그리 부지런히 가는가", "큰 산 넘어 작은 산 뒤 작은 암자", "내려놓음", "중생이 부처다", "목탁의 노래" 같은 제목으로 책도 내서 인세 수입 빡빡 긁어먹고 교조 문고 같은 데서 싸인회도 좀 하고, 케이블 방송 문화 교양 프로그램에서 7할 미즈와리 해버린 물사케 마냥 멀건한 말 좀 씨부리고 다니면서 돈 긁어모아 자산 9억 딱 찍으면 바로 승적 탈퇴하고 프라이빗 뱅크 자산운용사에 돈 맡기고 남은 인생 뜨겁게 살 생각이었다.
지긋지긋한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살기도 피곤했고 좀 여유있고 편해보이는게 중이었고. 자고로 우리나라 말 중에 땡자 들어가는건 다 익스트림하고 좋은거 아닌던가. 장땡, 진땡, 얼음땡, 만고땡, 땡보, 땡중.
하지만 역시 세상에 생각처럼 쉬운게 없다. 인근의 그나마 뒷산에 좀 사이즈 되는 절이 있길래 머리 깎고 가서 스님 되러 절에 왔다니까 거기 행장 스님이라는 양반이 존나 웃으면서 "성경책 들고 교회 가면 바로 목사 시켜주나요?" 하고 되묻길래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니까 빗자루 하나를 내어주며 절 마당을 쓸란다.
하기사 요즘 기업들도 이런 면접 많이보더라, 하면서 열심히 마당 쓸고 있노라니 나뭇잎이 바람에 계속 날린다. 모아도 모아도 답이 없다.
"저, 혹시 쓰레받기나 비닐봉투 없나요?"
그랬더니 그 행장스님은 또 빙긋 웃는 얼굴로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휘날리는 것이 사념인즉 어찌 그리 쉽게 정리가 되겠습니까"
아, 진짜 살면서 이렇게 허세에 가득차서 말하는 사람들 제일 싫다. 뭔 새벽에 술 쳐먹고 싸이월드하니 하고 생각했지만, 그 말을 내뱉는 대신 "스님의 선문에 깨달음을 하나 얻습니다. 그러나 비록 제가 당장 마음 속 나뭇잎을 모두 정리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마당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라며 아마도 그가 좋아할 거 같은 대답을 했다.
정말 그게 정답인지 어쩐지 나는 인턴 스님으로서 이 절간에서 6개월을 허드렛일을 하기로 했다. 생각보다 어려운 것은 없었다. 새벽 3시 반에 일어나는건 짜증났지만 어쨌든 난 정식승려가 아니었기에 그만큼 일찍 자면 그만이었으니까.
휴대폰도 없고 컴퓨터도 없는 6개월. 하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워낙에 활자중독인 사람이, 읽을거리가 없으니까 자연스레 불경에 눈이 가는데 뒤에 해설본이랑 같이 보면 은근 훑는 재미가 있었다. 거기다 바라반야 어쩌고 하는 문장들도 발음상 꽤 읽는 쾌감이 있다.
"일진 스님, 기침하셨습니까"
"정도 스님, 식사하십시오"
"한윤 스님, 해우소 뚫어놨습니다"
이 절에는 주지인 행운 스님과 같은 항렬의 부주지 행장 스님, 그리고 탁발 여행을 떠난 조방 스님과 나를 제외하고 총 세 명의 스님이 더 있었는데 다들 나름 대졸 승려들이다. 특히 정도와 한윤은 불교학과 출신의 정통파 엘리트. 정도는 인도 유학까지 다녀왔단다. 멋진 양반들이다.
"밥맛이 좋구나"
주지 스님의 말씀. 나는 "요리도 불도를 닦는 하나의 길이라 생각하여 정진하고 있습니다" 라며 대기업 인턴 사원 같은 바른 말을 했다. 사실은 그냥 암만 간을 맞춰봐도 원하는 맛이 안 나길래 미원 존나게 퍼넣은 덕분이지만. 엄마 말로는 나물 반찬이 은근 하기 어려운 요리라더라. 간 맞추기 어려워서.
"허나 너무 좋은 밥맛은 곧 식탐을 부르기 마련이고, 너 역시 요리에 집착하게 되니 지나치게 맛있게 음식을 만드는 것도 경계함이 옳다"
라고 또 칭찬 뒤에 쓴 맛을 내리는 주지 스님. 뭐 나야 편하다. 앞으로 주지 스님 말씀 핑계대고 밥 대충 만들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여튼 그렇게 3개월쯤 지났을까, 내가 절에서 쫒겨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당연하게도 성욕이었다. 사내로 태어나 평생을 휘두르던 육방망이를 무 자르듯 자를 수도 없는 일이고, 어쨌든 달려있는 그것이 언젠가는 불끈불끈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한 바, 그것을 참는 것도 큰 일이었는데 다행히도 내 승방은 다른 스님들께 방해가 된다하여 혼자 독채를 쓰고 있는 특권 아닌 특권을 누리던 중이었기에 결국 어느 날 밤 나는 가랑이 사이에서 성난 뱀 한마리를 꺼내어 괴롭히다 하얀 피를 토하게 하는데에 이르고 말았다.
한번 시작한 고짓거리는 폭발적으로 잦아져서 어제 두 번, 오늘 한번, 내일 세 번, 글피에 두 번 등 아주 속세에 있을 때보다도 심해지는 것이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다짐하던 차, 이제 슬슬 승적을 내릴까 고민해보자며 방에 들어온 행장 스님이 "어찌 한 겨울에 밤꽃이 이리도 화사하게 피었는고!" 하며 화를 내노라니 쫒겨나면서도 그 문장이 너무 마음에 들어 언젠가의 먼 훗날 나는 그 말을 내 제자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게 된다.
어쨌든… 결국 그렇게 승적조차 얻지 못하고 가진 것이라곤 쥐색 괴나리 봇짐에 승복 한벌 뿐이니 산을 내려와 정처없이 걷는 걸음은 3일을 걷고 걸어 어느 초라한 작은 슬래트 지붕 집 아래에서 쉬고 있노라니 그곳이 마침 빈집이라 그 안에 쫒겨날 때 훔쳐온 손바닥만한 미니 돌부처 하나 차려놓고 그곳을 나만의 임시 암자로 삼았다. 방구석에 굴러다니던 빨간 테이프로 卍자 창문에 붙여놓고 보니 어째 절간이 아니라 점집 같지만 내 마음이 부처면 어딘들 절이 아니겠나.
"하아…"
사지 멀쩡하고 사연 없는 사내 놈이 왜 대뜸 나이 먹고 중이 되려 했겠는가. 나 역시 사연이 있다. 인생 팔자 고쳐보겠다는건 핑계고, 사기 당해 돈 날리고 여자 떠나고 집안 뿔뿔히 흩어지고 외기러기가 되어 떠도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참 그 중놈 말마따나 '마당에 어지러이 날린 나뭇잎 같아서' 절간에서 푹 썩으면서 머리나 좀 식혔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금욕생활이라는게 어디 쉽겠나.
"그래도 동안거 들어가기 전에 나왔으니 차라리 다행이다"
스님의 혹한기 훈련이라 불리는 동안거.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중이 못 됐으면 얼마나 짜증났겠는가. 봇짐에 싸온 고구마를 까먹으며 지갑을 뒤적이니 그래도 차비라도 하라고 행장 스님이 찔러준 오천원이 나온다.
이제 이 돈으로 살아야지.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승복에 목탁에 불경에 승모까지 얻어왔으니 탁발승 노릇은 할 수 있을테고, 절간 생활 공짜밥 공짜잠 삼개월에 옷 한벌은 건졌으니 남는 장사 했다고 치자.
"그래, 이제 배도 좀 불렀겠다, 돈 벌러 나가보자"
어쨌든 집도 생겼겠다, 마음은 든든하다. 목탁 한번 두드리고 나는 집을 나섰다. 언젠가, 땡중 몇 놈 더 받아다가 다단계 스타일로 여시주 꼬시고 절간 음식 월빙식 드립치며 팔아먹고 보시 열심히 받아다가 큰 절간에 포르쉐 끌고 다니는 간지 땡중 라이프를 이룩하기로 마음 먹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