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노란 염색 단발에 엉덩이 라인이 그대로 보이는 타이트 레드 원피스. 킬힐을 신은 채 바쁘게 걷는 그녀의 뒤로 남자들의 시선이 여럿 쏠린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휴대폰을 손에 든 채 활짝 웃는 그녀의 미소를 뒤로 하고 핫팬츠에 패치가 어지러이 붙은 반팔 청셔츠 등 스트릿 패션의 왁자지껄 웃는 10대 소녀 군단이 이어진다. 그 옆으로 스키니 블랙진을 입은 도도한 인상의 생머리녀가 부토니에 꽂은 블랙 쟈켓의 스타일 좋은 반바지 남과 팔짱을 끼운 채로 길을 건넌다. 자정을 넘긴지 몇 시간 째임에도 이 도시는 잠들 줄을 모른다.
신호가 바뀌자 8차선 도로 횡단보도의 수백명 사람들이 동시에 움직이고, 정지선을 살짝 넘은 노란 포르쉐와 그 맞은 편 라인의 흰색 콜벳을 사람들의 눈길이 한번씩 훑는다.
"오빠 저 차는 뭐야?"
"어? 응…그거네"
언뜻 차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듯 한 남자가 적당히 얼버무리며 지나가고, 나는 차창을 닫으며 조용히 오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그루브한 리듬의 올드 팝이 차에 쿵쿵 울리자, 더이상 근처 휴대폰 대리점의 시끄러운 호객용 가요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가벼운 한숨을 내쉬자 신호가 바뀌었고 난 미끄러지듯 조용히 차를 출발시켰다. 조수석의 혜리는 오디오 소리를 듣고 깬 모양이다. 일어나자마자 조수석 화장거울로 얼굴을 확인한 그녀.
"음, 얼마나 왔어?"
"거의 다 왔어. 10분 정도면 도착이야"
몇 번의 신호를 거쳐 어느새 혜리의 집 앞에 도착했고, 난 내리면서 가벼운 입맞춤을 하려는 그녀의 입술을 피했다.
"왜?"
"CCTV에 찍히고 있잖아"
"괜찮아"
그녀 집 담벼락의 CCTV가 정면으로 우리를 찍고 있었지만 혜리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고 난 굳은 얼굴로 그녀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잘가"
"도착하면 문자해"
"안하는거 알잖아"
"치"
"들어가"
혜리가 내리자 나는 다시 차를 돌려 골목을 빠져나와 빠른 속도로 공항 고속도로를 향해 밟았다. 언뜻 시계를 보자 어느새 새벽 3시. 다행히 오늘따라 차가 없다. 버킷 시트에 좀 더 몸을 깊게 묻은 나는 정신을 집중하며 차가 내는 굉음을 즐기기 시작했다. 연휴가 끝난 주말답게 줄어든 통행량에 기분좋은 콧바람을 내뿜는다.
마치 텅 비우기라도 한 듯 아무 생각없이 그저 눈에 들어오는 상황대로 몸이 반응하는 상태, 묘하게 몽롱한 기분에 세상 모든 것들이 내 눈 앞으로 빠르게 다가오다 사라져버리는 잔상, 뜨거운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은 양 후끈후끈하면서도 차갑도록 답답한 가슴, 몸 전체가 짓눌리는 기분이면서도 묘하게 타는 듯 감질나는 발바닥, 등줄기 저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간질간질한 쾌감, 이미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는 빠른 비트의 큰 볼륨 노랫소리, 묵직하면서도 미칠듯한 힘으로 차 전체를 앞으로 쏘아보내는 고출력 엔진의 굉음…
하지만 그 짜릿짜릿한 쾌감과 전율의 흥은 언제부터인가 울리고 있던 휴대폰의 벨소리를 깨닫는 순간 차갑게 식어버렸다. 나는 급격히 속도를 줄였고 텅 빈 도로 구석으로 차를 몰아간 나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재영아…"
"엄마, 근데 여기 한국은 지금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인데…"
"아버지 아프시다"
떨리는 어머니의 말에 난 긴 한숨과 함께 차를 세우고 물었다.
"얼마나"
"지금 당장 병원으로 와…한국대 병원이야"
"엄마 지금 한국이야? 언제 들어왔는데. 그리고 아빠한테는 왜 갔는데"
하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자신이 할 말만 겨우겨우 울음을 참으며 했다.
"얼른 와…"
"…후우…알았어"
나는 전화를 끊고,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차를 출발시켰다.
도착하자 어느새 새벽 4시 14분. 외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새벽에 전화를 하러 병원 밖 주차장에 나와있던 퉁퉁한 체구의 20대 남자애가 흘낏흘낏 내 차를 쳐다본다. 무시하고 빠른 걸음으로 병원 로비로 향했다.
"아버지…아니 주영수 환자 병실이 어디죠"
리셉션만 보면 나도 모르게 그냥 '아버지'라는 표현이 너무 쉽게 나온다. 하기사 계열사에서라면 그것이 어쩌면 나의 신분을 가장 빨리 확인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니까. 조금은 피곤한 기색의 병원 접수 카운터의 남자는 내 질문에 잠깐 모니터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중환자실입니다"
"몇 층이죠"
"2층입니다"
중환자실이라. 어차피 이 시간에는 면회도 안 될텐데. 중얼거리며 나는 빠른 걸음으로 로비 홀 중앙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안내표식을 따라 중환자실로 향했다. 예상과는 달리 중환자실 앞에는 아버지 회사 사람들인지 양복을 입은 남자 몇 명이 서 있었고, 아버지 비서인 정란이 아줌마도 와있었다. 우리 엄마 평생 애증의 대상. 그녀가 없었다면 오늘날 아버지 회사도 없었겠지만, 대신 우리 부모님이 이혼하는 일도 없었겠지. 아니, 아니다. 어차피 이혼은 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우리 아버지를 100% 이해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테니.
"오셨어요"
"어머니한테 연락 받았거든요. 엄마는요?"
"잠깐 화장실 가셨어요"
"아버지 상태는 어떤데요"
"현재 의식이 없으세요. 다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눈가에도 눈물 자국이 남아었었다. 목이 마르다. 주머니를 뒤졌지만 동전이 있을 리 없다. 그때 뒤에서 화장실에서 언제 나왔는지 엄마가 물 병을 내밀었다.
"마셔"
"어. 아버지 상태가 어떤거야?"
"입원한지 일주일째래"
엄마는 눈가를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그러다가 어젯 밤에 갑자기 상태가 많이 안 좋아져서, 정란씨가 연락을 준거야"
"그럼 일주일동안 엄마한테도 연락이 없던거야?"
"니 애비 원래 그렇잖니"
나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이다 말했다.
"형은?"
"4시 비행기로 온다고 했으니 아마 지금 비행기 탔을거야"
"형은 또 어디 가있는데"
"일본 지사 출장갔었나봐"
엄마한테는 그렇게 말했지만 보나마나 미치코 보러갔겠지. 병신 새끼.
"여튼, 형도 곧 올테고… 면회도 안 되는거 같고, 그렇다고 숨이 껄떡껄떡 넘어가는 상황도 아닌 거 같으니까 난 그냥 가볼께. 아침에 다시 오던가 하지 뭐"
엄마는 무어라 나를 붙잡으려 하는 듯 했지만 부산하기만 하고 딱히 내가 할 일도 없는 거 같은 상황에 공감했는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가뜩이나 가냘픈 체구의 엄마가, 더 작게 느껴졌다.
현관에서 몇 번의 지문인식 실패에 괜한 문만 쾅 발로 찼다. 그 소리에 또 경보가 울려서 1층 경비 아저씨가 올라왔지만 미안하다고 내려보냈다. 아마 조금 있다가 경비 회사에서도 올텐데. 아저씨가 돌려보내겠지. 바보 짓했다. 문을 닫고 들어오니 마음이 답답하다.
"후우…"
그냥 엄마 곁에 있을걸 그랬나 싶었지만 솔직히 옆에 있어봐야 할 말도 없고, 어차피 흔한 부모 사이도 아니다. 나는 장식장에서 잡히는대로 술 한 병을 꺼냈다. 조니 워커 블랙…. 한잔 마시며 창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 20층 펜트하우스 발코니에서 뛰어내릴까 말까하고 몇 번을 고민했던가.
문득 성희 생각이 난다. 항상 삶이 벽에 부딪히면 나에게 용기를 주었던 그녀…. 그녀가 살아있더라면 어쩌면 조금은 나도 밝고 미래지향적으로 살고 있지는 않았을까. 나는 잔을 비웠다.
그리고 쓰러지듯 방으로 가서 누웠다. 창문을 살짝 열었다. 차 소리를 들으면 조금은 나을까 싶지만, 그래도 아마 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그저 눈을 붙일 따름이다. 그저 그렇게… 흘려 보내는 하루, 그걸로 충분하다. 머리 맡에 휴대폰을 놓았다. 무슨 일이 있지 않는 한 밤새 이 휴대폰도 울리지 않을테니, 부디 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삶은 이미 지금도 충분히 허무하고… 피곤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