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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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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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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벌써 여름이나 진배 없다. 끈끈해져 겨드랑이가 젖어든 셔츠가 민망하지만 5월에 "에어컨 틀어드릴께요" 라는 아주머니의 배려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아주머니가 거실벽에 내장된 콘솔창을 몇 번 누르자 시스템 에어컨 바람이 천장과 사방에서 시원하게 흘러나온다. 

"엄청 더우시죠. 이제 금방 시원해질거에요"
"감사합니다"

방을 스윽 둘러본다. 연포 지구 50평대 브랜드 아파트의 전망 좋은 집…. 부동산은 잘 모르지만 매매가 몇 십억은 족히 되고도 남으리라. 집도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실내 인테리어에 은은한 향기까지 돈다. 

"여기 땀 닦으세요"
"어이쿠, 민폐 끼쳐서 죄송합니다"

이런 좋은 집의 젊은 사모님이니 외모야 말할 것도 없다. 40대 초반? 느낌상 그렇다지만 외모 자체만 놓고 보자면 동안에 잘 관리받은 탱탱한 피부의 그녀는 30대 중반까지 보인다. 단아하면서도 착하고 좋은 인상. 이런 안주인이 집을 지키고 있다면야 남자가 바깥 일에 매진하는 것에 무슨 걱정이 있을까. 때맞추어 얼음 띄운 시원한 쥬스 한잔까지 받아마시고, 나는 본격적으로 필터 교체를 시작했다. 

"얼음은 잘 나오죠?"
"네, 잘 나와요"
"이게 신형모델이라서…좋긴, 좋아요. 저희도 일하기 좋거든요. 교체도 쉬워서"

정수기 겉부분을 가볍게 분리하고 몇 개의 위생 핀을 제거한 후 클린 마개를 돌려 쉽게 필터를 분리했다. 기본적으로는 6개월에 1회 교체가 정석이지만 이 단지 주민들은 대부분 한 달에 한 번, 이 집은 심지어 한달에 두 번씩 교체를 하는 편이다. 참 유난들도 떤다싶지만 나는 그저 묵묵히 가져온 새 필터를 끼웠다. 구형 모델 같은 경우에는 심하면 20분 이상 걸리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이거야 1분이면 여유있게 OK다.  다시 재조립을 하고 남은 주스 한 모금을 마셨다.

"주스 더 드릴까요?"
"네, 아니요. 괜찮습니다"

사실은 더워서 한잔 더 마시고 싶기도 한데, 배에 물찬 상태로 돌아다니는 것도 부담스럽고 오줌 자주 마려운 것도 피곤한 일이니까. 얼마 전에 본사에서 가급적 고객님들 화장실 사용하지 말라는 서비스 권고사항도 내려왔고 말이지. 그래도 에어컨 바람에 딱 1분만 더 땀 식히고 싶어 가만히 서있노라니 사모님이 한쪽 팔을 허리에 앉은 채 조금 묘한 얼굴로 나를 아래 위로 훑고 있었다.

아차, 내 땀냄새가 싫으셨겠지. 또 클레임 먹으면 이번 주에만 3회라서 징계인데. 진짜 이 동네 아줌마들 뭐가 그리도 깐깐한지. 참 있는 사람들이 더하다.

"음, 감사합니다. 에, 또…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언제든…"
"더우시죠?"

하지만 엊그제 아랫 집 그 늙은 할망구의 차가운 시선 대신, 사모님은 온화한 목소리로 물어왔을 따름이었다. 

"에, 덥죠. 그래도 에어컨도 틀어주시고, 주스도 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속으로 클레임만 넣지마라 하고 벌벌 떨며 대답했다. 그러자 뜻밖에 그녀는 "등목이라도 하고 가실래요? 보니까 옷도 땀에 젖으셨던데. 윗도리는 금방 손빨래해서 말려드릴께요. 스팀 건조기로 말리면 10분이면 말라요" 라고 내 팔을 잡았다. 

흠…. 조금은 민망했다. 온 몸에서 땀내가 풀풀 날텐데. 땀냄새를 지우려고 문 앞에서 가지고 다니는 스킨을 한번 뿌리긴 했다만 그래도 이렇게 가까이서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길에 나도 모르게 무안해지며…묘한 웃음이 지어진다. 

'예쁘다'

같은 40대인데 우리 영업소장이랑은 어쩜 이다지도 차이가 날까. 단아한 이마에 큰 눈망울, 오똑한 콧날, 작지만 도톰한 입술….

"그래도 되나요?"
"그럼요. 저희 집 먹는 물 일 봐주시는 분인데 그 정도도 못 해드리나요"
"감사합니다!"



마치 내가 자기 남편이라도 되는 양 자상한 손길로 내 땀 내 풀풀 풍기며 등에 들러붙은 끈끈한 반팔 유니폼을 직접 벗겨주시고, 샤워실로 인도하는 그녀. 와, 욕조 대박이네. 무슨 가정집에 이런 욕조가 있지. 무슨 호텔 같네. 어쨌든 바닥에 엎드리자 그 위로 시원한 물을 부어주는 그녀. 

"으으, 시, 시원합니다"
"후후, 그쵸?"

문득 지금 상황이 뭐지. 내가 왜 남의 집에서 남의 집 마누라의 손길을 느끼면서 등목을 하고 있나, 하는 원론적인 의문이 들었지만 그보다는 그저 이 시원함에 감사할 따름이다. 시원한 찬물 세례 몇 번을 받고나니 샤워도 하고 싶다, 생각하는 순간 그녀가 물었다.

"그냥 아예 샤워하실래요?"

흠. 이걸 무슨 상황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일까. 정수기 교체하러 온 외갓 남자에게 등목을 넘어 아예 샤워까지 하고 가라는거. 아니면 그저 정 많고 고마우신 고객님의 배려에 내가 더러운 생각을 하는건가. 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하기 전, 나는 아까와 같은 대답을 했다.

"그래도 되나요?"
"그럼요" 



감사한 배려에 샤워까지 다 하고 나왔다만, 문득 그제서야 아까 올라오기 전에 1층에서 경비 아저씨한테 출입확인 받는 과정에서 1802호실 아줌마가 "새로 오신 분인가 보네? 그러면 1701호실 다 하고, 우리 집도 봐줘요" 하고 말했던게 생각났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괜히 이 집에 오래 있다가 왔다고 이상한 생각이라도 하면 큰일이다. 

수다와 스캔들에 굶주린 아줌마들 사이에 더러운 소문 도는거, 한순간이다. 하물며 이런 집에 사는 남편들이면 나같은 놈한테 어디 손 쓸 인맥 하나 없을까. 이렇게까지 나한테 잘 배려해주신 고마운 분 입장 난처하게 할 수야 없지. 나는 얼른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낸 다음 허겁지겁 팬티와 바지를 챙겨입고 나왔다. 

"감사합니…"

그러나 샤워실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내 눈 앞에 있던 것은 아까의 단정한 차림 사모님이 아닌 란제리 차림의 그녀였다. 너무 놀라 바닥에 주저앉을 뻔 했지만 그녀는 그저 작게 웃을 따름이었다.

"1802호실 미란이 엄마한테도 예약 잡아놨다면서? 힘 좋은가봐? 하지만 안 돼. 쉽게 안 보내줄거야"

그제서야 나는 왜 이 단지 주민들이 그토록 자주 정수기 필터를 교체했는지, 내 사수였던 경욱 선배가 피차 꼴랑 월급 160 받는 처지에 도대체 무슨 돈으로 그 좋은 차를 끌고 다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웃 영업소 여직원을 건드렸다가 사고쳐서 잘린 사실에 대해 신께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사모님, 그러고보니 이 필터도 새 걸로 갈아끼우셔야겠네요" 

나는 웃으며 바지 지퍼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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