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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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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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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처럼 하릴없이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었다.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부터인가 딱히 할 게임도 없어진 나에게 주어진 여가활동이라고는 오로지 인터넷이 전부였다. 

"밖에 나가놀던지, 친구들이라도 좀 만나던지 너는 방구석에서 맨 컴퓨터만 하고 앉아있냐, 으휴 속터져"

라는 엄마의 잔소리도 이제는 인이 박힐 지경이었지만 사실 나에게는 친구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밖에서 만나서 놀 친구가 없었다. 물론 어떻게든 뭐 놀자고 하면 한 두 명 정도는 불러낼 수도 있겠지만 별로 그러고 싶은 친구들도 아니고, 만나봐야 정말로 밥 먹고 나면 할 것도 없는 녀석들이다. 그러니 차라리 집에서 컴퓨터나 하고 앉아있는 것이 차라리 나에게 이익인 것이다. 

"책이라도 좀 보던가, 공부를 그렇게 했음 대학도 서울대 갔지"

하지만 그건 좀 다른 이야기다. 그런 주장이라면 난 반대로 "엄마도 청소 좀 대충해. 어차피 맨날 더러워질거 그렇게 팔다리 쑤신다는 양반이 뭐가 그리 좋아서 청소를 그렇게 열심히 해. 엄마야말로 청소하는 정성으로 공부했으면 퀴리 부인 다음으로 공부 잘 했을걸" 하고 돌려줄 수도 있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등짝 후려 맞을테니 그저 입을 닫고 있을 따름이지만.

"컴퓨터 하는 것도 좋은데, 기왕이면 좀 남는게 있는걸 해라"

그나마 엄마보다는 아버지가 조금은 전향적인 잔소리를 하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곰곰히 생각해보면 여가시간(그런고로 회사 업무 등은 제외)에 할 수 있는 '나에게 뭔가 긍정적인 것이 남는 일'이라는게 의외로 별로 없다. 정말 금전적 이익과 직결되는 크리에이티브한 작업, 이를테면 작곡이나 돈 되는 글 작성 같은 것이 아닌 다음에야 의외로 컴퓨터로 할 수 있는 '남는 일'이라는건 생각보다 별로 없다. 인터넷에서 이런저런 정보 획득은 남는게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런 정보가 무언가 나의 삶에 실질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면 지금 내가 요모양 요꼴로 살지는 않고 있을게다. 

그렇지만…

"알았어요 아버지" 라는 대답을 하려던 바로 그 순간, 나는 내 눈 앞에 작은 구체의 푸른 빛이 영롱하게 떠오르는 것을 보았고 그 오묘한 빛 속에서 무언가 작은 사람 실루엣이 보이자 고개를 돌려 엄마와 아버지를 부르려 했지만 고개를 돌리자 벽걸이 시계의 초침은 멈춰있었고 엄마와 아버지 모두 마치 정지동작 판토파임을 하는 행위예술가마냥 제자리에 멈추어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시간이 멈춘 듯한 상황이었다.

"뭐야 이거"

이 황당한 상황에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내가 무언가 다른 판단과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이미 그 빛 속에서 나온 사람 형태의 작은 실루엣은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시간의 요정이다. 어차피 나는 환상 속의 존재이고 너는 나의 존재를 믿지 않을 것이며 내가 그 어떤 증명을 해보인다고 해도 언젠가는 그저 잠깐 헛것을 보았다고 치부할 것이 분명하기에 딱히 나에 대한 소개를 길게 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다만 본론으로 들어가서, 나는 너와 네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가 나눈 대화에 조금 흥미가 생겨서 한가지 제안을 하려고 한다. 여기까지 내 말 잘 따라왔나?"

상황이야 황당했지만 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았고, 거기에 대답을 "네" 라고 해야할자 "어"라고 해야할지부터 고민했다. 나는 약 5초간의 고민 끝에 "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시간의 요정'은 나에게 물었다.

"아무리 백수인 너라도 시간은 소중하겠지?"
"그렇지"
"그리고 인터넷을 하면서 날리는 시간도 사실 따지고 보면 소중한 시간이겠지?"
"별로 딱히 소중하다는 실감은 없지만, 일단은 그렇겠지. 난 아직 청춘이니까"
"그럼 내가 제안을 하나 하지"
"무슨?"

요정은 빙긋 웃으며-딱히 표정이 보인 것은 아니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말했다.

"넌 나와 헤어진 직후 나와 만난 순간의 기억은 잊게 될거야. 넌 언제나처럼 그저 시간을 하릴없이 버리면서 컴퓨터로 웹서핑이나 하고 있을거다. 다만 우리의 만남을 어떤 식으로던 기억해내고,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며 살아가기로 한다면 우리의 만남을 기점으로 앞으로 10년 후 네 삶에 큰 선물을 하나 주기로 하지"
"선물이 뭔데?"
"그건 네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따라 좀 달라지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럼 만약 내가 영화 메멘토처럼 뭐 몸에다 문신까지는 아니지만, 어디 종이로 적어놓는다면 그거 보면 되지 않나?" 하고 물었다. 아차, 괜히 물어봤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엎지른 물이다. 하지만 요정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니가 종이에 뭘 적어놓는다고 해서, 그것도 이런 황당무개한 내용을 적어놓는다고 해서 과연 네가 그 종이의 내용을 믿을까?"

보통은 믿지 않겠지만…

"그래도 너와 만난 직후에 이 만남의 기억은 다 잊혀진다며. 그러면 지금 방금 전의 나는 그저 하릴없이 컴퓨터만 하고 있었는데, 눈 앞에 딱 '나는 5분 전 요정을 만나서, 앞으로 시간을 소중히 쓰기로 한다면 10년 후 삶에 큰 선물을 받게된다. 그러나 열심히 살자 5분 후의 나야' 하고 내 필체로 진지하게 적힌 종이가 놓여있다면 한번 믿어볼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사실 내 성격상 딱히 그럴 거 같진 않지만 그래도 말이다. 요정은 나의 말에 잠시 갈등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시니컬하게 한 마디 던졌다. 

"일리가 있군. 좋아. 그런 고로 그건 반칙으로 간주하겠어. 네가 직접 너에게 메세지를 기록해놓거나 하는건 금지하겠어"

아, 이런. 괜히 물어봤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 순간 '지금 도대체 내가 무슨 미친 환각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꿈이라고 쳐도 딱히 나쁜 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유치하지만 나름 재미있는 꿈이잖아? 

"자, 어떻게 할래?"

나는 "알았어" 라고 대답하면서, 이번에는 괜히 입방정을 떠는 대신에 물었다.

"더이상의 조건은 달지 않기다? 내가 나한테 직접 메세지를 보내지 않으면 되는거지?"
"물론"

그리고 나는 그 순간 내 인터넷 창에 열려있던 스타일박스 블로그에 나와있는, 그의 이메일로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 제목 : 안녕하세요 스박님 ] 

그리고는 시간의 요정과 나눈 모든 대화 내용을 잘 정리해서 가급적 글로 올려주십사, 하고 메일로 보냈다. 사실 처음에는 생판 모르는 남보다 친구들에게 보낼까 했지만 뭔 개소리냐, 너 아직도 행운의 편지 같은거 믿냐? 하는 소리나 들을 거 같았고, 어쨌든 스박이라면 어쩌면 내가 보낸 내용을 잘 정리해서 글로 올려줄 수도 있고, 하다못해 "뭔 개소리십니까?" 하는 답장이라도 보내줄 것 같았다. 왠지 몰랐지만 그랬다. 그 왜, 스박한테 메일로 상담보내서 결혼에까지 골인한 사람도 있다지 않는가. 

어쨌든 참 이게 뭔 유치한 짓인가 생각하면서도 어쨌든 난 메일을 보낸 후 보낸 편지함에서 그 메일을 지웠다. 자, 이제 적어도 나는 직접 나에게 메세지를 보낸 것은 아닌 것이다. 

"호오 제법이네"

시간의 요정은 제법 짧은 시간에 생각해 낸 답치고는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칭찬을 해줬다. 하지만 그는 피식 웃었다. 

"안타깝지만 중요한 걸 놓쳤군"
"뭘?"
"신뢰도가 없지. 그 사람이 설령 네가 보낸 내용으로 글을 올려준다고 해도, 그리고 네가 언제나처럼 그 사람 블로그에 간다고 해봐야 넌 믿지 않을테니까"

아차. 그 생각을 못했구나. 아 이런. 

"메일 한 통만 더 보내면 안 돼?"
"안 돼"

치사하군. 어쨌든 스박이 좀 리얼하게 글을 써준다면 좋을텐데. 내가 "호오" 하고 생각할 정도로. 

"어쨌든 계약은 성립됐다. 난 이제 사라질거다. 만약 네가 그 글을 믿고 시간을 소중히 하며 살아간다면 10년 후 큰 보상이 있을 것이고, 아니라면 네 미래는…"
"내 미래는?"
"뻔하지"

음. 뭐 어쨌든 크게 손해볼 건 없는 조건이군. 

"어쨌든 시간을 다시 원점으로 돌려줘"
"알았…아 미안"
"왜?"

시간의 요정은 잠깐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물론 이번에도 표정이 보인 것은 아니다. 그렇게 보였을 따름이다- 꽤 무책임한 소리를 했다.

"원래는 너와 나만의 시공간이었어야 하는데, 네가 외부와 접촉을 한 바람에 평행우주에 구멍이 뚫렸다"
"무슨 소리야?"
"내가 '자, 그럼 우리의 기억은 이제 사라진다. 뿅!'하고 사라지는 순간, 너는 전혀 엉뚱한 시공간에서 깨어난다는 소리야"
"뭐? 그럼 내가 어디 우주 한복판에 떨어질 수도 있는거야?"

하지만 시간의 요정은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말했다.

"아니 그 정도로 어처구니없이 멀리 떨어지는건 아니고, 아마도 지금 네가 사는 시간축을 중심으로 해서, 공간점이나 변수 핵은 좀 많이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접촉점은 유지가 되어야 하니까 너와 스박이라는 그 사람은 매개체로 이어져 있을거야. 그런고로 네 성별이나 지금의 장소, 너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다양한 특성 정도는 좀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네가 스박한테 이메일을 보낼 수 있는 상황의 환경'은 유지가 된 채로 넌 깨어나겠지"
"그럼 우리 엄마랑 아버지는?"

시간의 요정은 "미안. 운이 아주, 그러니까 거의 무한대에 이르는 확률의 벽을 뚫을 정도로 좋다면 만날 수 있겠지만…아마 다른 평행우주에서 다른 관계로 재정립된 또 다른 존재가 네 부모님이 될거야"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염병!"

내 입에서는 욕이 튀어나갔지만 시간의 요정은 "괜한 짓을 한 것 같군. 대신에 보상은 더욱 확실히 해주도록 하지. 뭐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다고 시작한 짓이고, 너도 오케이한 거니까 나는 조금은 책임감을 덜어도 되겠지. 어쨌든 난 사라지도록 하지. 명심해. 넌 스박에게 메일을 보냈고, 스박이라는 사람이 착하고 웃기는 놈이라면 아마 그 내용으로 그 자신의 소설 블로그에 올리겠지. 그리고 넌 그 글을 믿어야 돼. 알겠어? 그럼 난 간다. 시간을 소중히 사용하도록 해"
"잠깐만!"

하지만 내 외침이 닿기도 전에 그 파란 빛은 사라져 버렸고, 나 역시 그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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