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뭘 보고 왔는지 형준이 난데없이 씩씩대며 한 마디 한다. 보나마나 어디 인터넷 같은 데서 여성혐오 유발글 같은 거 봤겠지.
"왜? 너 또 주베 보고 왔냐?"
옆에 있던 영석이 낄낄댄다. 그러자 형준이 정색을 하면서 의견을 피력한다.
"그렇잖아요. 남자들한테 결혼비용도 다 떠넘기고 집도 공동명의 하자고 하고, 결혼하면 일도 안 하겠다고 하고, 요즘 살림살이가 무슨 손빨래하던 시절도 아니고 저도 자취해봐서 아는데 살림하는거 솔직히 별로 안 어렵거든요. 애 보는건 어려울 거 같지만. 아니 그걸 떠나서 여튼 여자들 된장스럽고 명품백에 뭐에 막…"
나도 웃으면서 형준에게 "숨 좀 쉬고 말해" 하고 아메리카노를 건냈다. 그리고 녀석을 위해 물었다.
"너 그렇게 여자들이 뜯어먹을 재산이라도 있어?"
하지만 이제 갓 전역한 놈이 그런게 있을 리 없지. 당연히 내 예상한대로 "아니요" 라는 대답이 나온다.
"그러면 너 아는 여자가 대뜸 너한테 '오빠 나 백 사줘' 한다고 바로 사줄거야?"
"아니요. 미쳤나요"
당치도 않는 듯한 표정을 하며 대답하는 형준. 그래서 되물었다.
"그런데 뭐가 걱정이야?"
"그래도 사주는 놈들이 있잖아요. 호구처럼"
이번에는 영석이 물었다.
"호구의 기준이 뭔데?"
왠지 공격받는다는 느낌을 받아서인지 형준은 조금 움찔하는 듯 하면서도 다시 당당하게 의견을 내세웠다.
"뭐 그런거 있잖아요. 여자친구도 아닌데 막 뭐 사주고, 아니면 여자친구라도 막 무리해서 뭐 사주고, 그렇다고 크게 사랑받는 것도 아니고…음, 뭐 여튼 형들도 알잖아요. 호구 새끼들"
그러자 영석이 되물었다.
"내가 전에 사귀던 애는 걔도 돈 한달에 150 벌면서 나한테 옷도 맨날 사주고, 나 백수 시절에 밥도 지가 거의 다 사고, 그러면서도 난 공부한답시고 같이 데이트도 잘 못 해주고 그래도 같이 있으면 좋아라하고 그랬는데 그럼 걔도 호구야?"
형준은 그 말에 좀 부담스러워했지만 겨우겨우 대답했다.
"음, 그 분이랑 형이 얼마나 진실된 사랑을 했는지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요?"
"그럼 니 주장의 그 호구 남자도 진심으로 걔를 좋아했다면 그건 호구가 아니지 않을까? 금전적인건 상대적인거니까"
"그래도 무리해서 끌려다니는 남자들도 있잖아요. 그건 호구죠"
난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가 물었다.
"너 이제 24살인데 벌써 결혼하려고? 그럴 여자는 있어?"
"아니요, 그건 아니구 그냥 요즘 여자들이 그렇다는거죠. 근데 형들 보기에 요즘 여자들 안 그래요?"
뭔가 공감해주지 않는 우리가 좀 서운하다는 듯 묻는 그. 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그런 여자애들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있었어. 호구들도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근데 어차피 그런 여자애들이랑 너 결혼할 거 아니잖아. 그리고 그런 애들이 그런 식의 사랑을 한다고 해서 그걸 누가 뭐라고 해? 그것도 나름의 삶의 방식인데. 그러다 개과천선해서 좋은 여자 될 수도 있는거고. 그리고 무엇보다…"
"에이, 그런 여자들이 얼마나 있겠어요. 한번 되바라진 애들이…"
난 피식 웃은 후에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시고 말을 이어나갔다.
"잘 생각해 봐. 20대 후반이나 30대 초중반에, 어느 정도 금전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기반이 좀 잡히거나 아니면 오래 연애를 해서 정말 이젠 반쪽이 된 커플 아닌 다음에야 어차피 결국에는 다 헤어지게 되어 있어. 90% 이상은. 젊은 날에 한 연애는 결과적으로 보면 다 엔조이 밖에 안된다는 소리야. 그게 추억이 됐던 상처가 됐던. 맞잖아? 결혼하지 않는 이상 헤어지면 결국 다 남 되는거고 추억 밖에 안 남잖아?"
형준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렇지. 근데 뭘 그렇게 여자 성격이 어떻고 개념이 어떠고 따지냐는 말이야. 스무살에 완전 개념녀 만난다고 해봐야 걔랑 정말 10년 넘게 연애해서 결혼까지 갈 수 있을 거 같냐? 있기야 있겠지. 아주 희박한 확률로. 근데 거의 99%는 언젠가 무슨 이유로든 헤어지겠지? 반대로 스무살에 완전 꼴통에 천박한 여자친구 만들었다고 치자. 걔랑 결혼까지 할 거야? 그건 더더욱 아니잖아?"
"네"
나는 거기에서 치고 나갔다.
"거봐. 어차피 이래도 헤어지고 저래도 헤어질 년들인데, 까짓거 너무 말도 안되게 무리해서 뭐 몇 백만원짜리 백 사주는거 아닌 다음에야 적당히 여자 비위도 맞춰주고, 기왕이면 좀 신나게 데이트도 하고 하는거지 뭘 그렇게 따지냐 이 말이야. 어차피 언젠가는 다 헤어질 년인데 개념녀면 어쩔거고 꼴통이면 어쩔거야. 그냥 마음 맞아 잠깐 살 섞고 즐거우면 되는거지"
형준은 내 말에 조금 고민하는 듯 했지만 다시 반박했다.
"하지만 못된 년 만나면 인생 꼬이는거잖아요"
"너 호구야?"
"아니요!"
"그런데 왜 자꾸 그런 걱정을 해"
"그래두요. 요즘 하도 나쁜 년들이 많으니까 걱정되서요"
그 말에 영석이 껄껄 웃었다.
"야, 다 상대적인거야. 지금 내가 사귀는 상미한테는 내가 개새끼지만, 반대로 상미 쫒아다니던 놈한테는 또 상미가 개년인거고. 그리고 무슨 니 돈을 여자친구가 마음대로 쓰냐? 니 카드 걔한테 줄거야? 그것도 아닌데 뭔 걱정이야. 만약에 니가 걔가 좋아서 너도 모르게 카드 긁었다? 그럼 니 좋아서 한 일인데 왜?"
"그런게 두려워요. 여자한테 홀려서 정신줄 놓는거요"
영석은 형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솔직히 말해봐. 너 호구지?"
"아니요"
"호구네"
"아닌데요"
"완전 호구네"
영석이 형준을 계속해서 놀리자 형준은 얼굴이 시뻘개졌고, 난 그 즈음해서 형준을 달래줬다.
"야 임마. 진짜 등신 천치 아닌 다음에야 호구 짓도 계속해서는 못 하는거야. 니가 살면서 그렇게 누군가한테 홀리듯이 미친듯이 좋아하는거 몇 번이나 할 수 있을거 같냐? 끽해야 한두번이야. 그리고 다 그것도 젊은 날의 추억이고. 오히려 평생을 남한테 진심으로 미친듯이 마음 바쳐 본 적도 없는 놈이 어디가서 사랑해봤다고 할 수나 있겠냐? 젊어서 하는 연애 감정부터 이것저것 따지는 새끼가 진심 수전노 찌질이 새끼지. 안 그래? 오히려 그런 놈들이 나중에 나이 먹고 사고치지 꼭"
나는 드디어 커피 잔을 비우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내상도 좀 입어보고 해봐야 성장하는건데, 요즘 고추 달린 놈들은 겁만 많고 어설프게 잔대가리만 굴려서 손해 안 보는 연애질 하려고 하니까 연애도 오지게 못하고 뜨겁지도 않고 밋밋하지. 제대로 된 사랑 한번 못 해보는 새끼들"
"형은 그런 연애 해봤어요? 미친듯이 뜨거운 사랑이요? 모든거 막 바치는?"
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영석은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우린 정말 뜨거웠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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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젊은 여자들 너무 되바라진 거 같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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