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6학년 때, 나는 친구인 현성의 집에 처음 놀러가서 처음으로 컴퓨터라는 신세계의 문물을 접했다. 녀석의 방에 있던 386 PC 속에는 '천사들의 미드나이트'라는 제목의 성인 게임이 설치되어 있었다. 조악한 16컬러로 제작된 게임이었건만 그것은 나를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고, 난 컴퓨터라는 도구에 아주 깊이 매료되었다.
그래도 그 뿐이었다. 경제적으로 그다지 풍요롭지 않았던 우리 집 사정상 컴퓨터는 그저 꿈 속의 꿈이었고 금전적인 부분에 있어서 꽤나 조숙했던 나는 부모님께 PC를 사달라고 졸라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몇 년이 흘러 이윽고 PC가 대중화 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아직 컴퓨터가 '게임기'보다 '학습도구'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하던 시절이라 우리 부모님 역시 동네 PC 대리점 점원의 "어휴, 그럼요. 주판알 백날 튕겨봐야 어디 계산기 따라옵니까? 이제는 컴퓨터로 승부 봐야죠. 아드님이 아주 똘똘하게 생기셨네. 아버님, 자식 교육하는데 쓰는 돈은 아끼시는게 아닙니다" 라는 영업멘트에 혼쾌히 200만원을 쾌척했다.
그렇게 우리 집에 들어온 나름 '고성능' 컴퓨터. 뒤늦게 알았지만 아버지와 내가 구입해 온 그 PC는 아주 왕창 제대로 바가지를 쓴 것이었다. 당대의 게임조차도 무조건 최저 옵션(이라고 해봐야 그 시절 게임들은 사양조절을 위한 옵션도 그다지 풍부하지 않았다)이 아니고서는 실행이 버거웠을 정도니까. 조금 속상하기는 했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내가 하고 싶었던 게임들은 최신 게임들이 아닌, 몇 년 전에 친구네 집에서 어깨 너머로 플레이 한 한 두 세대 이전의 게임들이었으니까.
"성적이 이게 뭐냐…"
나는 나날히 컴퓨터 게임에 빠져들었고, 컴퓨터가 우리 집에 들어온 지 2년 만에 성적은 수직낙하를 시작했다. 전교권에서 놀던 나의 성적은 어느새 반에서도 중위권으로 추락했고, 부모님은 뒤늦게나마 컴퓨터 게임에 대해 제제를 시작했다. 자식들의 공부를 직접 챙기지 못하는 대다수의 부모님들처럼 곧 나에게 발생하는 모든 문제의 핑계를 컴퓨터 게임으로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게임을 그렇게 하니까 머리가 아프지!"
"컴퓨터를 도대체 몇 시간이나 하는거냐!"
"그렇게 게임을 하니까 어디 안 피곤하겠어?"
하지만 어차피 나 역시도 그 즈음해서는 게임에 대해 서서히 흥미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부모님 앞에서는 일부러라도 게임을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했다. 그 즈음해서 현성을 통해 배운 PC통신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수천, 수만명의 사람이 통신선을 통해 모니터 저 너머에서 애와 어른을 가리지 않고 실시간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는 짜릿함은 이미 짜여진 프로그래밍대로 움직이는 게임의 재미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분당 수십원씩 뚝뚝 날아가는 유료 채팅방에서 초조한 마음 달래면서 또래 여자애들을 꼬시고, 꼬신 여자애들에게 이런저런 말장난으로 주민번호를 알아내서 여자 아이디를 생성, 넷카마짓을 하는 재미는 가히 마약에 비할 그 무엇이었다.
이미 직장인이자 PC통신 폐인이었던 형 덕분에 야간정액제로 머드 게임이며 케이텔이며 나우통신을 자유롭게 만끽하던 현성과는 달리, 나는 그저 답답한 28.8K 모뎀으로 언제 집 전화로 전화가 올지 몰라 바들바들 떨며 통화료에 초당 30원, 50원이 넘어가는 사설 비비에스 이용요금까지 추가로 부담해가며 네트워크 세상을 즐길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왜 맨날 집 전화가 통화 중이야? 어?"
덕분에 장시간의 접속이 필요한 머드 게임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했고, 만원 내외의 월 정액제 요금을 무는 하이넷이나 나우통신, 천리경 같은 통신 서비스를 이용하지도 못했지만(guest 계정으로 제한된 이용은 가능했지만, 사실 할 수 있는게 거의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하이넷 시리얼란이나 사설 비비에스의 웃기고 재미난 글들을 캡쳐, 아니 '갈무리'한 다음 접속을 종료하고 천천히 그 재미난 글들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그 어떤 게임보다 즐거웠다. 게다가 사설 비비에스들의 성인용 서비스들은 '돈 값'을 충분히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돈 값이라기보다는 '매 값'이었다. 전화비가 14만원, 16만원, 21만원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나는 피시통신의 즐거움을 전화요금 나오는 날의 매 맞는 통증으로 정확히 등가교환하고 있었으니까. 처음 몇 달은 그래도 괜찮았다. 그 정도로 즐거웠으니까. 그러나 급기야 눈물까지 흘려가며 IMF다 뭐다 다들 살기 힘들고 이렇게 아파가면서 피같은 돈 벌어오는건데 너는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냐는 엄마의 말에 울컥한 나는 알겠노라며 내 손으로 컴퓨터와 연결된 전화줄을 끊었다.
"하아…참…"
물론 한번 중독된 PC통신의 맛은 결코 끊을 수 없는 것이었고 나는 며칠 후 동네 전파사에서 다시 전화 케이블을 사다 꽂았다. 그렇지만 나 역시 생각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마냥 돈을 쓰기만 하는 대신 돈을 벌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내가 곧잘 가던 사설 비비에스 중 '러브텔'이라는 곳은 성인 투고란에 일정 조회수를 돌파한 작품들에 한해서 고료를 지급하고 있었고, 난 그곳에 성애소설, 쉽게 말해 '야설'을 써서 올리기 시작했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했고, 난 학교에서 돌아오면 두어시간 동안 미친듯이 '집필활동'에 몰두하곤 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초중학교 시절 교내 백일장이나 방학숙제 독후감 등으로 상을 쓸고 다니면서 글짓기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중딩의 문장력에 그렇게나 반응이 좋았던 건 아마도 문장력보다는 그 소재들이 하나같이 어지간한 하드코어 야설에서도 안 나올 법한 기괴한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애초에 아이디도 아버지 명의로 가입한 것이었기에 고료도 아버지 통장으로 입금을 받았고, 첫 달 4만원을 시작으로 4개월 차부터는 22만원을 찍었다. 아버지 통장에 입금된 고료를 보여주자 엄마는 이게 무슨 돈이냐며 의심스러워했지만, 마침 당시에는 이우적 작가의 퇴마력 등 PC통신 출신 소설들이 서서히 빛을 보기 시작하던 시기였고 신문에 실린 그 홍보 기사들을 보여주며 나도 이런 비슷한 것이라고 둘러대자 엄마는 여전히 미심쩍어하기는 했어도 더이상 싫은 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어디 험한 소리 써서 큰일내지 말고" 하고 한 소리한게 전부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그 사설 비비에스가 망해 사라지기까지 약 1년 간 내가 그 사설 비비에스에서 번 돈은 PC통신 요금은 물론이요 우리집 전화세 전체를 커버하기에도 충분한 돈이었다.
몇 달이 지나자 엄마는 친척들한테 우리 아들이 온라인에 글을 써서 돈을 번다라고 틈만 나면 자랑을 하셨지만, 정작 그 '소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셨다. 다만 원래 책 읽기를 좋아하셨던 둘째 이모가 몇 년 후에 뒤늦게서야 그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보였는데, 때마침 그 즈음해서 나는 나우통신의 무료화를 계기로 나우통신 유머글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고 그 중 몇 개의 글을 보여주는 걸로 대신했다.
"그런데 나우통신에 글 올리면 돈을 줘?"
"아니, 거기 유머란에 이 글을 올렸는데, 검지일보에서 내 글 퍼가면서 고료를 줬어"
"와 멋지네"
난 작가방이 따로 존재할 정도의 유명 작가는 아니었지만, 사춘기 특유의 시니컬한 감성으로 쓴 사회비판적 블랙조크들이 당시 서서히 이슈몰이를 하고 있던 인터넷 매거진 검지일보 측의 관심을 끌었던 모양. 그 총수가 직접 메일을 보내온 덕분에 나는 내 글 중 몇 개를 검지일보에 게재하기도 했다. 당연히 고료 따윈 없었다.
[ 고가도로(punkman99) 님의 말 : ㅎㅇ 방가방가 ]
내가 집의 모뎀을 뒤늦게 중고 33.6K 모뎀으로 교체했을 즈음, PC통신은 서서히 황혼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9시 뉴스데스크의 마지막 화면에도 '뉴스 제보는 0000-0000, PC통신 하이넷, 나우통신, 천리경 GO MBG로 부탁드립니다' 라는 멘트가 뜰 정도로 영향력이 남아있던 시절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성장세는 둔화되기 시작했고 게시물의 조회수나 게시판 리젠율도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즈음에서 나는 이미 회원이었던 나우통신 이외에도 하이넷과 천리경에도 정회원으로 가입해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PC통신의 유명 작가들이 쓴 글들이 하나둘씩 베스트셀러 소설이 되고, 영화가 되고 하던 시절이었으며 누군가들은 ISDN으로 '보다 빠른 통신'을 즐기던 시절, 나는 그저 느려터진 모뎀으로 이미 망한지 백 년도 더 된 전체 채팅방에서 뒤늦은 번개 놀음 하기에 바빴다.
뉴스에서는 연일 '젊은 세대, 언어파괴 심각' 따위의 문제로 심각한 소리들을 해댔지만, 그저 나는 기계적으로 채팅방에 누가 들어오면 방가방가 인사 매크로와 별별 웃긴 화면효과를 안시로 만들어서 뿌려댈 뿐이었다.
그리고 [ 하얀숨결(yejin2) 님의 말 : 안녕^^? ] 하는 인사와 함께 나의 숨막히도록 찌질한 첫 사랑이 시작되었다.
'하얀 숨결'이라는 닉네임의 그녀와 나는 첫 만남부터 꽤 잘 맞았다. 우선 나이가 동갑이었고, 사는 지역이 같았으며, 둘 다 부모님이 맞벌이 가정이었고, 무엇보다 서로의 고민이나 관심사가 비슷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서로에게 빠져들었고, 그에 비해서는 꽤 길게 약 이주일간의 탐색기간을 거쳐 처음으로 전화통화를 가졌다.
닉네임 만큼이나 목소리도 청순한 느낌이었다. 나는 하루하루 몸이 달아 그녀와의 만남을 학수고대했지만, 나보다 전화선 짬밥이 훨씬 더 긴 현성은 "지랄하지마 병신아, 이쁜 년이 뭐하러 남자를 PC통신 채팅방에서 찾고 있어. 아마 니 몸 두 배 정도 되는 빅뚱녀가 네 발로 기어나올걸" 하며 비관적인 전망을 했다. 난 초치지 말라며 그의 예언을 무시했고 오프라인 만남을 주저하는 그녀를 잘 달래어 드디어 두 달만에 그녀와의 번개에 성공했다.
"실망했지…?"
그녀의 첫 인사는 "안녕" 이나 "반가워" 도 아니고 "실망했지?" 라는 말이었다. 그렇다. 기대에 기준해서 말한다면야 분명 실망했다. 머릿 속에서 그렸던 그 하늘하늘하고 갸날픈 청순 소녀는 온데간데 없고, 내 눈 앞의 '하얀 숨결' 님은 하얀 눈사람 같은 체형의 그 누군가였다. 괜히 말이 씨가 된다는 소리가 생각나며 현성이 원망스러웠지만 하기사 그 놈이 무슨 잘못인가.
"어? 아냐, 무슨 소리야. 반가워!"
하지만 난 전혀 아니라는 듯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쨌든 지난 두 달간 나는 그녀와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고, 많은 감정을 공유했다. 비록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고, 즐거웠으니까. 어릴 적 집에 있었던 민흠사 어린이 위인전집에 원효대사 편에 실려있던 해골물의 깨우침을 떠올리며 난 그녀와 나름 최대한 즐겁게 데이트를 나누었다.
"후우…그럼 그렇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 꽤 씁쓸한 느낌이 들었지만 적어도 번개 직후에 잠수 타는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나와 하얀 눈사람…아니 하얀 숨결의 만남은 생각보다 꽤 오래 이어졌다. 비록 그 이후로 오프라인에서 단 둘이 따로 만난 적은 없었지만, 온라인 상으로는 연락을 꽤 오래 주고 받았다. 그 인연은 인터넷 시대에 접어들어 메신저 프로그램 버디바디의 중흥기를 거쳐 그녀의 어느 날 뜬금없는 "나 사실 너 좋아해"라는 고백에 "어, 미안" 이라는 시크한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끝나기까지 이어졌다. 말 그대로의 '사이버 연애', 아니 솔직히 말해서 연애조차 아니지만, 뭔가 찡한 마음은 남았기에 나는 그녀와의 인연 중간중간 있었던 두 번의 연애를 포함하더라도 일단 그녀를 내 인생의 첫 사랑이라고 치기로 했다.
그녀와의 인연은 먼 훗날, 적당히 각색해서 대형 커뮤니티에 올린 소설로 부활하여 몇몇 이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어느 시점부터 각색이 심해지다보니 앞뒤가 안 맞지 않았고, 내심 '엽기적인 그 여자'의 뒤를 잇는 온라인 실화 소설을 꿈꾸었던 그 작품은 결국 어처구니없이 재각색되어 편당 5만원짜리 고료의 고강도 야설로 만들어지기에 이른다.
그 즈음해서 나는 과거 러브텔의 대표였던 노 아무개씨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집 전화로 걸려온 그의 자기소개에 나는 식겁했지만, 어쨌든 30분 정도에 걸친 통화 끝에 나는 과거 그 전설적인 야설 시리즈의 작가가 당시 중학생 소년이었으며 현재도 미성년자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그에게 납득시키는데 성공했고, 나 역시 그가 우리 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것이 가입 당시 입력한 가입정보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안심했다. 집으로 "안녕하십니까, 온라인 성인 커뮤니티 XXX의 대표 노 아무개입니다" 라고 당당히 밝히며 전화를 걸어온 그 사람의 배포와 배려없는 자기소개는 지금 생각해봐도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그는 꽤 의욕적으로 새로운 사업을 추진 중이었다. 그는 과거 사설 비비에스 시절 같은 인터넷의 유료 성인 서비스를 준비 중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은 56K의 모뎀이 주력으로 사용되던 상황이라 게임잡지 등에 '인터넷 접속, 분당 15원' 등의 광고가 실리던 시절이고, 스타트 크래프트와 조양 비디오 사건으로 초고속 통신망이 보급되기 이전의 시기라서 아주 가망이 없는 사업은 아니었다. 아직은 영상보다 이미지가 우선되던 시대였고, 이미지보다는 텍스트가 선호되던 시절이었으니까. 게다가 인터넷이 뭐지는 잘 몰라도 뭔가 큰 변혁의 바람이라는건 다들 알고 있었고, 시장 선점만 한다면야 대박이 터질 가능성까지 있었다.
"해볼께요"
그는 파격적으로 나에게 현찰 100만원과 편당 고료 5만원이라는, 당시로서는 놀라운 돈을 제시했고 나는 혼쾌히 소설을 연재했다. 고딩 입장에서는 충분히 쏠쏠한 용돈벌이였다. 그 즈음해서 나는 또다른 사이버 연애를 시작했다. 여자 꼬실라고 온라인상에서 입 터는거 하나는 진짜 적벽대전을 앞두고 동오로 간 제갈량 귀썀 후려칠 정도였던 만큼 나는 범상치 않은 포스의 3살 연상 대딩 누나를 또다시 대화방에서 건진 것이었다.
깔쌈떼기(sexyjo20) 님의 말 : 요즘에도 대화방에서 노는 놈이 있네
고가도로(punkman99) 님의 말 : 그런 년도 있더라고
깔쌈떼기(sexyjo20) 님의 말 : -_____________- ++
생각보다 우리는 꽤 죽이 잘 맞았고 서로 지 할 말만 하는 헛소리를 하는 듯 하면서도 꽤나 묘하게 끌고 끌렸다. 한 30분 정도 신나게 대화를 주고 받다가 한박자 늦게 서로의 신상을 캐묻다가, 아무래도 여대생이었던 그녀에게 난 내가 고딩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고 나이를 속였다. 그 이후로 우리는 더욱 친해졌다. 그리고 슬슬 오프 만남을 가져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괜히 거짓말을 했다 싶어 후회하면서도 두 달을 질질 끌다 드디어 거행한 첫 번개. 신촌의 미래백화점 시계탑 앞에서의 만남… 문득 그 '하얀 숨결'의 추억이 스쳐지나갔지만 다행히도 '깔쌈떼기'는 닉네임만큼이나 꽤 삼삼한 외모의 여대생이었다. 난 일부러 좀 더 나이 들어보이게 꾸미고 나갔지만 지랄맞은 학주 덕분에 스포츠 헤어스타일만큼은 가릴 수가 없었고 결국 개털릴 것을 각오하고 그녀에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진희 누나는 오히려 "어쩐지. 말하는게 좀 귀엽더라" 하며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겼다. 그리고 내가 어정쩡하게 서있자 그녀는 먼저 팔짱을 끼며 "가자, 우리 꼬마 신랑아" 하면서 나를 남친으로 인정해주었다.
아청법이니 뭐니 하는 요즘, 아니 당장 그로부터 딱 몇 년 후에 나온 "나 이제 16 너 20살이야 나 이제 16 너 20살이야 아이 야 야야 쇼킹 쇼킹 아이 야 야야 쇼킹 쇼킹~" 하던 어떤 유행가 가사만 봐도 그 연애는 참 파격적인 만남이었지만, 그럼에도 의외로 꽤 우리는 잘 만났다.
고딩이었음에도 적어도 성인과의 데이트 비용 정도는 부담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바탕이 되던 나였고, 좆고딩의 넘쳐나는 발기력과 나이에 맞지 않는 능글맞음을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그녀의 조합은 생각보다 제법 괜찮았다.
"근데 너네 집 잘 살아? 무슨 고딩이 매주 이렇게 돈을 써? 너 알바해?"
"비슷해"
진희 누나와 나는 만날 때마다 그녀의 자취방, 혹은 모텔에서 잠을 잤고 어느덧 서로에게 꽤 익숙해졌을 무렵 난 조심스럽게 내 '알바'를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정색을 하거나 빵 터지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후자였다.
"너 진짜 대단하다. 소설의 이 여자는 나야?"
"아니야 그냥 상상의 캐릭터야"
자유분방하고 적당히 이쁘장하며 놀기 좋아하는 그 성격만큼은 고대로 그려넣었지만. 서서히 고3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지만 어쨌든 그 때까지는 모든게 평화롭고 즐거웠다.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런 즐거운 순간이 오래 갈 리 없다는 것을.
"미안하게 됐다. 돈은 생기는대로 내 꼭 채워주마"
초고속 인터넷의 대중화는 컨텐츠의 범람을 불러왔고, 당시의 웹에 구축된 빈약한 유료 컨텐츠들은 기대의 흐름에 부응하지 못해 하나둘씩 스러져갔다. 러브텔 인터넷 판은 결국 1년도 지나지 않아 그 아저씨에게 수천만원의 적자를 떠안겼고, 나에게도 받지 못한 20만원의 고료를 남긴 채 그렇게 시대의 흐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또, 그 즈음해서 진희 누나는 "너도 공부해야지. 나도 취업해야 되고" 라는 말과 함께 구름처럼 사라져버렸다. 참 허망한 이별이었지만 솔직히 슬프진 않았다. 그녀와의 이별보다, 돈 줄이 사라진게 더 아쉬웠다.
사실 대가리는 그리 나쁘지 않았던 나였기에, 나는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고2 겨울방학을 기점으로 새삼 공부에 매진했고 그리 어렵지 않게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대학 생활은 제법 나를 들뜨게 했지만, 생각보다 내가 기대한 괴짜나 천재들은 보이지 않았다. 좆고딩이 생각했던 대학생활은 이런게 아니었는데. 인물도 훤칠하고 집안까지 제법 괜찮은 엄친아들은 오히려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지만, 대학에 가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괴짜 천재 같은 놈들은 한 놈도 없었다. 그게 좀 실망스러웠다. 결정적으로 우리 과는 수질이 정말 안 좋았다.
게다가 진희 누나로 좀 일그러진 내 여성관 덕분인지, 내숭 많고 재미없는 동기 여자애들은 전혀 나의 흥미를 돋구지 못했다. 기대한 경영학 수업도 내가 생각했던 그런 류의 것은 아니었다. 나는 결국 다시 바깥으로 돌기 시작했고 결국 1학년 2학기, 나는 휴학계를 내었다.
그 즈음해서, 그 전까지는 들어본 적도 없던 IT라는 단어는 단 하루라도 언론에 오르지 않는 날이 없었고, 그런 만큼 '닷컴 기업' 역시 광풍이 불고 있었다. 그게 뭐가 됐던 인터넷으로 사업만 한다치면 투자자들이 미친듯이 돈을 쑤셔넣던 시기였다. 스카이러버, 세이카페 같은 채팅 사이트부터 버디바디, MNS 메신저 등의 본격 메신저 서비스들이 흥행을 시작했고 아이러브스콜라, 더모임, 사인월드 같은 사이트들이 찬란하게 명멸했다. MP3의 대중화를 이끌어 낸 소리월드가 대흥행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눈 먼 돈이 워낙에 여기저기 쏠려다니던 시기였던지라, 러브텔의 노씨 아저씨가 한 타이밍만 늦게 사업을 시작했더라면 그 역시 컨텐츠 기반의 사업가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학교가 영 재미없어서 휴학을 하긴 했지만 차마 집에는 "나 휴학했어"라는 말을 할 수 없었던 나는 맨날 아침 집에서 빠져나와 집 근처 도서관이나 PC방에서 시간을 보냈고, 원래부터 그다지 게임을 즐기지 않던 나였기에 나는 그저 인터넷을 도는게 일과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흐음…"
수십만 회원을 자랑하던 PC통신 시절의 대형 커뮤니티들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속속 인터넷으로 보금자리를 옮기고 있었지만 그 세력은 예전같지 않았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대형 커뮤니티들이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하이넷에서 활동하던 유명 유머작가 김무식 씨가 세운 비씨인사이드가 대표적이었다. PC통신 시절의 막장 감성과 디지털 시대의 속도감이 어우러진 비씨인사이드는 가히 충격이라 할만했다. 그리고 새로운 매체가 부상했다. 블로그였다.
아무리 수십만명의 회원을 자랑하던 대형 커뮤니티의 '네임드'라고 해도, 어차피 그 커뮤니티만 벗어나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니었고 수많은 시간과 열정을 들여 만든 많은 컨텐츠도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그건 '자기 것'이 아니라 그냥 '커뮤니티의 것'이었다.
블로그는 좀 달랐다. 개인 위주의 매체였고 접근성도 훨씬 더 높았다. 게시물 하나 읽을라면 가입하고 로그인하고 활동하고 등업해야 되는 지랄맞은 커뮤니티나 카페와는 달리 아무나 주소만 치고 입력하면 쉽게 컨텐츠를 접할 수 있었다. 난 그게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뭐하는가. 입대해야 되는데.
훈련소에 쳐박혀 구르면서 제일 간절했던 것은 바깥 소식이었다. 세상 바깥의 소식을 알고 싶었다. 나중에는 하다하다 과 후배 여자애한테 부탁해서 요즘 세상 돌아가는 뉴스들을 프린터로 찍어다가 좀 보내달라고 하기도 했다. 여자애 이름으로 두툼한 편지가 날아와서 옆의 동기 녀석이 부러워하다가, 안에서 뜬금없이 네이비 뉴스 프린터한 종이들을 튀어나오자 황당해하며 "이거 얘가 너한테 얘가 장난 친거냐?"하고 묻기도 했다.
그때 계획했던 것이 군인들 대상으로 일~이주일간 온/오프라인의 핫이슈들을 잘 정리해서 A4 용지 대여섯장 분량으로 편지로 보내주는 정보제공 서비스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아예 훈련병도 인터넷을 하는 세상이 왔다는 소식에 꿈을 접어버렸다.
어쨌거나 내가 간 곳은 보이스카웃도 캠핑도 아니었고 군대였다. 좆같은 공간에서 좆같은 시간을 좆같은 새끼들과 좆같이 보내다보니 좆같이 안 가는 시간도 어느새 흐르기 마련이고, 이윽고 2년 2개월의 시간이 지나고 나자 나는 다시 사회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사회는 공기부터 다르구나 씨팔"
인터넷의 대유행의 시작부터 그때에 이르기까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거의 모든 컨텐츠는 대부분 무료였다. 원칙적으로 유료 서비스라고 하더라도 다 뒷구멍이 존재했고 돈이 되는 것들은 이미 개인이 어쩌기에는 좀 더 기업적인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들이었다.
"뭐 좋은거 없을까"
다행히도, 인터넷의 발달은 방구석에 앉아서도 이웃나라의 물건을 클릭 몇 번으로 구매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아직까지도 구매/배송대행보다는 직접 물건을 떼어다 파는 보따리상들이 더 익숙하던 시절이라, 난 일본에서 각종 성인용품들을 구매해다 당시 우후죽순 생겨나던 성인용품점에 개인 나까마 자격으로 납품했다. 성인용품점이라고 해봐야 컬러별 콘돔에 섹스토이 몇 개 가져다놓은게 전부였던 시절이라 내가 직접 선별해서 고른 아이템들은 가히 엽기적인 것들이 많았다. 마진이 쏠쏠했다. 국제우편료만 해도 엄청났고, 네다섯 박스를 보내면 그 중 하나 정도 꼴로 세관에서 잡혀서 모조리 압수당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꽤 남을 정도였다. 세상에 섹스사업만큼 확실한 장사가 없다 싶었다.
"너 요즘 뭐하고 다니는거냐"
하지만 역시나 땅 짚고 장사하기란 쉬운게 아니었다. 성인용품 수입으로 세관에 몇 번 걸려서인지 언제부터인가 압수 당하는 빈도가 늘었고, 마침 청량리 588일대를 밀어버린 조광자 경찰서장 등의 영향으로 사회적 분위기가 반 섹스적 선비문화로 돌변한 상태이던 참에, 내가 불법성인용품 밀수 혐의로 난데없는 경찰 조사를 받게 된 것이었다.
다행히 대학생이었던데다 범죄경력도 없고 사업규모(?)도 미미했던 터라 조사 몇 번 받다가 불기소 처분을 받고 넘어가기는 했지만 겁도 나고, 어차피 이제는 돈도 잘 안되던 터라 그 즈음해서는 그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다. 학교도 다시 복학했다.
그 즈음해서 다시 블로그에 손을 댔다. 하지만 남들 눈치보며 이쁜 소리만 하는건 싫었기에 되는대로 찍찍 개소리들을 싸질렀다. 그런데 얼척 없던건, 사람들이 참 얼마나 인터넷의 내숭문화에 질려있었던지 시원하게 툴툴 이빨을 털면 털수룩 더욱 좋아라 하는 것이 아닌가. 허, 참 세상 말세구나 하고 혀를 끌끌 차고 있노라니 평소 나의 팬이라며 안양에 사는 '꿰뿛쒜떫'이라는, PC통신 시절 참 유명했던 닉네임을 가져다 쓴 한 여대생이 적극적으로 구애를 펼쳐왔다.
위에서 말은 안 했지만 나는 14세의 어느 날, 채팅방에서 대학생 남자와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다. 나는 오히려 현성이까지 불러다가 채팅방에서 둘이 힘을 합해 놈을 조리돌림했고-중딩은 이래서 안된다- 바보가 된 그 놈은 씩씩거리면서 채팅방을 나갔다. 그 며칠 후 나는 채팅방에서 한 여자애와 썸을 타게 되는데 그 기집애가 전화번호를 물어(당시는 휴대폰이라는게 없던 시절이다) 전화를 하려고보니까 그 대딩 남자놈이 씩씩거리는 목소리로 난리를 피우는게 아닌가. 알고보니 그 여자애는 대학생 놈의 여자친구였고, 나에게 미인계를 건 것이었다.
14살 나이에 미인계에 걸려 화를 당할 뻔한 이후로 온라인에서 일방적으로 괜히 나에게 먼저 강력하게 접근하는 여자한테는 괜히 일부러 더 거리를 두었던 나였지만, 그때는 나도 전역하고 심심하고 외로울 무렵이라 '꿰뿛쒜떫'과 오프라인 만남을 가졌다. 전혀 기대도 안 하고 만났거늘, 의외로 늘씬하고 이쁜 아가씨가 좋아하라며 나를 반기는 모습에 나는 복학생 특유의 낮아진 허들로 그녀와의 만남을 곧바로 시작했다.
그래도 그 뿐이었다. 경제적으로 그다지 풍요롭지 않았던 우리 집 사정상 컴퓨터는 그저 꿈 속의 꿈이었고 금전적인 부분에 있어서 꽤나 조숙했던 나는 부모님께 PC를 사달라고 졸라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몇 년이 흘러 이윽고 PC가 대중화 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아직 컴퓨터가 '게임기'보다 '학습도구'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하던 시절이라 우리 부모님 역시 동네 PC 대리점 점원의 "어휴, 그럼요. 주판알 백날 튕겨봐야 어디 계산기 따라옵니까? 이제는 컴퓨터로 승부 봐야죠. 아드님이 아주 똘똘하게 생기셨네. 아버님, 자식 교육하는데 쓰는 돈은 아끼시는게 아닙니다" 라는 영업멘트에 혼쾌히 200만원을 쾌척했다.
그렇게 우리 집에 들어온 나름 '고성능' 컴퓨터. 뒤늦게 알았지만 아버지와 내가 구입해 온 그 PC는 아주 왕창 제대로 바가지를 쓴 것이었다. 당대의 게임조차도 무조건 최저 옵션(이라고 해봐야 그 시절 게임들은 사양조절을 위한 옵션도 그다지 풍부하지 않았다)이 아니고서는 실행이 버거웠을 정도니까. 조금 속상하기는 했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내가 하고 싶었던 게임들은 최신 게임들이 아닌, 몇 년 전에 친구네 집에서 어깨 너머로 플레이 한 한 두 세대 이전의 게임들이었으니까.
"성적이 이게 뭐냐…"
나는 나날히 컴퓨터 게임에 빠져들었고, 컴퓨터가 우리 집에 들어온 지 2년 만에 성적은 수직낙하를 시작했다. 전교권에서 놀던 나의 성적은 어느새 반에서도 중위권으로 추락했고, 부모님은 뒤늦게나마 컴퓨터 게임에 대해 제제를 시작했다. 자식들의 공부를 직접 챙기지 못하는 대다수의 부모님들처럼 곧 나에게 발생하는 모든 문제의 핑계를 컴퓨터 게임으로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게임을 그렇게 하니까 머리가 아프지!"
"컴퓨터를 도대체 몇 시간이나 하는거냐!"
"그렇게 게임을 하니까 어디 안 피곤하겠어?"
하지만 어차피 나 역시도 그 즈음해서는 게임에 대해 서서히 흥미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부모님 앞에서는 일부러라도 게임을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했다. 그 즈음해서 현성을 통해 배운 PC통신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수천, 수만명의 사람이 통신선을 통해 모니터 저 너머에서 애와 어른을 가리지 않고 실시간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는 짜릿함은 이미 짜여진 프로그래밍대로 움직이는 게임의 재미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분당 수십원씩 뚝뚝 날아가는 유료 채팅방에서 초조한 마음 달래면서 또래 여자애들을 꼬시고, 꼬신 여자애들에게 이런저런 말장난으로 주민번호를 알아내서 여자 아이디를 생성, 넷카마짓을 하는 재미는 가히 마약에 비할 그 무엇이었다.
이미 직장인이자 PC통신 폐인이었던 형 덕분에 야간정액제로 머드 게임이며 케이텔이며 나우통신을 자유롭게 만끽하던 현성과는 달리, 나는 그저 답답한 28.8K 모뎀으로 언제 집 전화로 전화가 올지 몰라 바들바들 떨며 통화료에 초당 30원, 50원이 넘어가는 사설 비비에스 이용요금까지 추가로 부담해가며 네트워크 세상을 즐길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왜 맨날 집 전화가 통화 중이야? 어?"
덕분에 장시간의 접속이 필요한 머드 게임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했고, 만원 내외의 월 정액제 요금을 무는 하이넷이나 나우통신, 천리경 같은 통신 서비스를 이용하지도 못했지만(guest 계정으로 제한된 이용은 가능했지만, 사실 할 수 있는게 거의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하이넷 시리얼란이나 사설 비비에스의 웃기고 재미난 글들을 캡쳐, 아니 '갈무리'한 다음 접속을 종료하고 천천히 그 재미난 글들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그 어떤 게임보다 즐거웠다. 게다가 사설 비비에스들의 성인용 서비스들은 '돈 값'을 충분히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돈 값이라기보다는 '매 값'이었다. 전화비가 14만원, 16만원, 21만원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나는 피시통신의 즐거움을 전화요금 나오는 날의 매 맞는 통증으로 정확히 등가교환하고 있었으니까. 처음 몇 달은 그래도 괜찮았다. 그 정도로 즐거웠으니까. 그러나 급기야 눈물까지 흘려가며 IMF다 뭐다 다들 살기 힘들고 이렇게 아파가면서 피같은 돈 벌어오는건데 너는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냐는 엄마의 말에 울컥한 나는 알겠노라며 내 손으로 컴퓨터와 연결된 전화줄을 끊었다.
"하아…참…"
물론 한번 중독된 PC통신의 맛은 결코 끊을 수 없는 것이었고 나는 며칠 후 동네 전파사에서 다시 전화 케이블을 사다 꽂았다. 그렇지만 나 역시 생각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마냥 돈을 쓰기만 하는 대신 돈을 벌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내가 곧잘 가던 사설 비비에스 중 '러브텔'이라는 곳은 성인 투고란에 일정 조회수를 돌파한 작품들에 한해서 고료를 지급하고 있었고, 난 그곳에 성애소설, 쉽게 말해 '야설'을 써서 올리기 시작했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했고, 난 학교에서 돌아오면 두어시간 동안 미친듯이 '집필활동'에 몰두하곤 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초중학교 시절 교내 백일장이나 방학숙제 독후감 등으로 상을 쓸고 다니면서 글짓기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중딩의 문장력에 그렇게나 반응이 좋았던 건 아마도 문장력보다는 그 소재들이 하나같이 어지간한 하드코어 야설에서도 안 나올 법한 기괴한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애초에 아이디도 아버지 명의로 가입한 것이었기에 고료도 아버지 통장으로 입금을 받았고, 첫 달 4만원을 시작으로 4개월 차부터는 22만원을 찍었다. 아버지 통장에 입금된 고료를 보여주자 엄마는 이게 무슨 돈이냐며 의심스러워했지만, 마침 당시에는 이우적 작가의 퇴마력 등 PC통신 출신 소설들이 서서히 빛을 보기 시작하던 시기였고 신문에 실린 그 홍보 기사들을 보여주며 나도 이런 비슷한 것이라고 둘러대자 엄마는 여전히 미심쩍어하기는 했어도 더이상 싫은 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어디 험한 소리 써서 큰일내지 말고" 하고 한 소리한게 전부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그 사설 비비에스가 망해 사라지기까지 약 1년 간 내가 그 사설 비비에스에서 번 돈은 PC통신 요금은 물론이요 우리집 전화세 전체를 커버하기에도 충분한 돈이었다.
몇 달이 지나자 엄마는 친척들한테 우리 아들이 온라인에 글을 써서 돈을 번다라고 틈만 나면 자랑을 하셨지만, 정작 그 '소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셨다. 다만 원래 책 읽기를 좋아하셨던 둘째 이모가 몇 년 후에 뒤늦게서야 그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보였는데, 때마침 그 즈음해서 나는 나우통신의 무료화를 계기로 나우통신 유머글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고 그 중 몇 개의 글을 보여주는 걸로 대신했다.
"그런데 나우통신에 글 올리면 돈을 줘?"
"아니, 거기 유머란에 이 글을 올렸는데, 검지일보에서 내 글 퍼가면서 고료를 줬어"
"와 멋지네"
난 작가방이 따로 존재할 정도의 유명 작가는 아니었지만, 사춘기 특유의 시니컬한 감성으로 쓴 사회비판적 블랙조크들이 당시 서서히 이슈몰이를 하고 있던 인터넷 매거진 검지일보 측의 관심을 끌었던 모양. 그 총수가 직접 메일을 보내온 덕분에 나는 내 글 중 몇 개를 검지일보에 게재하기도 했다. 당연히 고료 따윈 없었다.
[ 고가도로(punkman99) 님의 말 : ㅎㅇ 방가방가 ]
내가 집의 모뎀을 뒤늦게 중고 33.6K 모뎀으로 교체했을 즈음, PC통신은 서서히 황혼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9시 뉴스데스크의 마지막 화면에도 '뉴스 제보는 0000-0000, PC통신 하이넷, 나우통신, 천리경 GO MBG로 부탁드립니다' 라는 멘트가 뜰 정도로 영향력이 남아있던 시절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성장세는 둔화되기 시작했고 게시물의 조회수나 게시판 리젠율도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즈음에서 나는 이미 회원이었던 나우통신 이외에도 하이넷과 천리경에도 정회원으로 가입해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PC통신의 유명 작가들이 쓴 글들이 하나둘씩 베스트셀러 소설이 되고, 영화가 되고 하던 시절이었으며 누군가들은 ISDN으로 '보다 빠른 통신'을 즐기던 시절, 나는 그저 느려터진 모뎀으로 이미 망한지 백 년도 더 된 전체 채팅방에서 뒤늦은 번개 놀음 하기에 바빴다.
뉴스에서는 연일 '젊은 세대, 언어파괴 심각' 따위의 문제로 심각한 소리들을 해댔지만, 그저 나는 기계적으로 채팅방에 누가 들어오면 방가방가 인사 매크로와 별별 웃긴 화면효과를 안시로 만들어서 뿌려댈 뿐이었다.
그리고 [ 하얀숨결(yejin2) 님의 말 : 안녕^^? ] 하는 인사와 함께 나의 숨막히도록 찌질한 첫 사랑이 시작되었다.
'하얀 숨결'이라는 닉네임의 그녀와 나는 첫 만남부터 꽤 잘 맞았다. 우선 나이가 동갑이었고, 사는 지역이 같았으며, 둘 다 부모님이 맞벌이 가정이었고, 무엇보다 서로의 고민이나 관심사가 비슷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서로에게 빠져들었고, 그에 비해서는 꽤 길게 약 이주일간의 탐색기간을 거쳐 처음으로 전화통화를 가졌다.
닉네임 만큼이나 목소리도 청순한 느낌이었다. 나는 하루하루 몸이 달아 그녀와의 만남을 학수고대했지만, 나보다 전화선 짬밥이 훨씬 더 긴 현성은 "지랄하지마 병신아, 이쁜 년이 뭐하러 남자를 PC통신 채팅방에서 찾고 있어. 아마 니 몸 두 배 정도 되는 빅뚱녀가 네 발로 기어나올걸" 하며 비관적인 전망을 했다. 난 초치지 말라며 그의 예언을 무시했고 오프라인 만남을 주저하는 그녀를 잘 달래어 드디어 두 달만에 그녀와의 번개에 성공했다.
"실망했지…?"
그녀의 첫 인사는 "안녕" 이나 "반가워" 도 아니고 "실망했지?" 라는 말이었다. 그렇다. 기대에 기준해서 말한다면야 분명 실망했다. 머릿 속에서 그렸던 그 하늘하늘하고 갸날픈 청순 소녀는 온데간데 없고, 내 눈 앞의 '하얀 숨결' 님은 하얀 눈사람 같은 체형의 그 누군가였다. 괜히 말이 씨가 된다는 소리가 생각나며 현성이 원망스러웠지만 하기사 그 놈이 무슨 잘못인가.
"어? 아냐, 무슨 소리야. 반가워!"
하지만 난 전혀 아니라는 듯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쨌든 지난 두 달간 나는 그녀와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고, 많은 감정을 공유했다. 비록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고, 즐거웠으니까. 어릴 적 집에 있었던 민흠사 어린이 위인전집에 원효대사 편에 실려있던 해골물의 깨우침을 떠올리며 난 그녀와 나름 최대한 즐겁게 데이트를 나누었다.
"후우…그럼 그렇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 꽤 씁쓸한 느낌이 들었지만 적어도 번개 직후에 잠수 타는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나와 하얀 눈사람…아니 하얀 숨결의 만남은 생각보다 꽤 오래 이어졌다. 비록 그 이후로 오프라인에서 단 둘이 따로 만난 적은 없었지만, 온라인 상으로는 연락을 꽤 오래 주고 받았다. 그 인연은 인터넷 시대에 접어들어 메신저 프로그램 버디바디의 중흥기를 거쳐 그녀의 어느 날 뜬금없는 "나 사실 너 좋아해"라는 고백에 "어, 미안" 이라는 시크한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끝나기까지 이어졌다. 말 그대로의 '사이버 연애', 아니 솔직히 말해서 연애조차 아니지만, 뭔가 찡한 마음은 남았기에 나는 그녀와의 인연 중간중간 있었던 두 번의 연애를 포함하더라도 일단 그녀를 내 인생의 첫 사랑이라고 치기로 했다.
그녀와의 인연은 먼 훗날, 적당히 각색해서 대형 커뮤니티에 올린 소설로 부활하여 몇몇 이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어느 시점부터 각색이 심해지다보니 앞뒤가 안 맞지 않았고, 내심 '엽기적인 그 여자'의 뒤를 잇는 온라인 실화 소설을 꿈꾸었던 그 작품은 결국 어처구니없이 재각색되어 편당 5만원짜리 고료의 고강도 야설로 만들어지기에 이른다.
그 즈음해서 나는 과거 러브텔의 대표였던 노 아무개씨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집 전화로 걸려온 그의 자기소개에 나는 식겁했지만, 어쨌든 30분 정도에 걸친 통화 끝에 나는 과거 그 전설적인 야설 시리즈의 작가가 당시 중학생 소년이었으며 현재도 미성년자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그에게 납득시키는데 성공했고, 나 역시 그가 우리 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것이 가입 당시 입력한 가입정보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안심했다. 집으로 "안녕하십니까, 온라인 성인 커뮤니티 XXX의 대표 노 아무개입니다" 라고 당당히 밝히며 전화를 걸어온 그 사람의 배포와 배려없는 자기소개는 지금 생각해봐도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그는 꽤 의욕적으로 새로운 사업을 추진 중이었다. 그는 과거 사설 비비에스 시절 같은 인터넷의 유료 성인 서비스를 준비 중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은 56K의 모뎀이 주력으로 사용되던 상황이라 게임잡지 등에 '인터넷 접속, 분당 15원' 등의 광고가 실리던 시절이고, 스타트 크래프트와 조양 비디오 사건으로 초고속 통신망이 보급되기 이전의 시기라서 아주 가망이 없는 사업은 아니었다. 아직은 영상보다 이미지가 우선되던 시대였고, 이미지보다는 텍스트가 선호되던 시절이었으니까. 게다가 인터넷이 뭐지는 잘 몰라도 뭔가 큰 변혁의 바람이라는건 다들 알고 있었고, 시장 선점만 한다면야 대박이 터질 가능성까지 있었다.
"해볼께요"
그는 파격적으로 나에게 현찰 100만원과 편당 고료 5만원이라는, 당시로서는 놀라운 돈을 제시했고 나는 혼쾌히 소설을 연재했다. 고딩 입장에서는 충분히 쏠쏠한 용돈벌이였다. 그 즈음해서 나는 또다른 사이버 연애를 시작했다. 여자 꼬실라고 온라인상에서 입 터는거 하나는 진짜 적벽대전을 앞두고 동오로 간 제갈량 귀썀 후려칠 정도였던 만큼 나는 범상치 않은 포스의 3살 연상 대딩 누나를 또다시 대화방에서 건진 것이었다.
깔쌈떼기(sexyjo20) 님의 말 : 요즘에도 대화방에서 노는 놈이 있네
고가도로(punkman99) 님의 말 : 그런 년도 있더라고
깔쌈떼기(sexyjo20) 님의 말 : -_____________- ++
생각보다 우리는 꽤 죽이 잘 맞았고 서로 지 할 말만 하는 헛소리를 하는 듯 하면서도 꽤나 묘하게 끌고 끌렸다. 한 30분 정도 신나게 대화를 주고 받다가 한박자 늦게 서로의 신상을 캐묻다가, 아무래도 여대생이었던 그녀에게 난 내가 고딩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고 나이를 속였다. 그 이후로 우리는 더욱 친해졌다. 그리고 슬슬 오프 만남을 가져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괜히 거짓말을 했다 싶어 후회하면서도 두 달을 질질 끌다 드디어 거행한 첫 번개. 신촌의 미래백화점 시계탑 앞에서의 만남… 문득 그 '하얀 숨결'의 추억이 스쳐지나갔지만 다행히도 '깔쌈떼기'는 닉네임만큼이나 꽤 삼삼한 외모의 여대생이었다. 난 일부러 좀 더 나이 들어보이게 꾸미고 나갔지만 지랄맞은 학주 덕분에 스포츠 헤어스타일만큼은 가릴 수가 없었고 결국 개털릴 것을 각오하고 그녀에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진희 누나는 오히려 "어쩐지. 말하는게 좀 귀엽더라" 하며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겼다. 그리고 내가 어정쩡하게 서있자 그녀는 먼저 팔짱을 끼며 "가자, 우리 꼬마 신랑아" 하면서 나를 남친으로 인정해주었다.
아청법이니 뭐니 하는 요즘, 아니 당장 그로부터 딱 몇 년 후에 나온 "나 이제 16 너 20살이야 나 이제 16 너 20살이야 아이 야 야야 쇼킹 쇼킹 아이 야 야야 쇼킹 쇼킹~" 하던 어떤 유행가 가사만 봐도 그 연애는 참 파격적인 만남이었지만, 그럼에도 의외로 꽤 우리는 잘 만났다.
고딩이었음에도 적어도 성인과의 데이트 비용 정도는 부담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바탕이 되던 나였고, 좆고딩의 넘쳐나는 발기력과 나이에 맞지 않는 능글맞음을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그녀의 조합은 생각보다 제법 괜찮았다.
"근데 너네 집 잘 살아? 무슨 고딩이 매주 이렇게 돈을 써? 너 알바해?"
"비슷해"
진희 누나와 나는 만날 때마다 그녀의 자취방, 혹은 모텔에서 잠을 잤고 어느덧 서로에게 꽤 익숙해졌을 무렵 난 조심스럽게 내 '알바'를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정색을 하거나 빵 터지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후자였다.
"너 진짜 대단하다. 소설의 이 여자는 나야?"
"아니야 그냥 상상의 캐릭터야"
자유분방하고 적당히 이쁘장하며 놀기 좋아하는 그 성격만큼은 고대로 그려넣었지만. 서서히 고3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지만 어쨌든 그 때까지는 모든게 평화롭고 즐거웠다.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런 즐거운 순간이 오래 갈 리 없다는 것을.
"미안하게 됐다. 돈은 생기는대로 내 꼭 채워주마"
초고속 인터넷의 대중화는 컨텐츠의 범람을 불러왔고, 당시의 웹에 구축된 빈약한 유료 컨텐츠들은 기대의 흐름에 부응하지 못해 하나둘씩 스러져갔다. 러브텔 인터넷 판은 결국 1년도 지나지 않아 그 아저씨에게 수천만원의 적자를 떠안겼고, 나에게도 받지 못한 20만원의 고료를 남긴 채 그렇게 시대의 흐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또, 그 즈음해서 진희 누나는 "너도 공부해야지. 나도 취업해야 되고" 라는 말과 함께 구름처럼 사라져버렸다. 참 허망한 이별이었지만 솔직히 슬프진 않았다. 그녀와의 이별보다, 돈 줄이 사라진게 더 아쉬웠다.
사실 대가리는 그리 나쁘지 않았던 나였기에, 나는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고2 겨울방학을 기점으로 새삼 공부에 매진했고 그리 어렵지 않게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대학 생활은 제법 나를 들뜨게 했지만, 생각보다 내가 기대한 괴짜나 천재들은 보이지 않았다. 좆고딩이 생각했던 대학생활은 이런게 아니었는데. 인물도 훤칠하고 집안까지 제법 괜찮은 엄친아들은 오히려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지만, 대학에 가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괴짜 천재 같은 놈들은 한 놈도 없었다. 그게 좀 실망스러웠다. 결정적으로 우리 과는 수질이 정말 안 좋았다.
게다가 진희 누나로 좀 일그러진 내 여성관 덕분인지, 내숭 많고 재미없는 동기 여자애들은 전혀 나의 흥미를 돋구지 못했다. 기대한 경영학 수업도 내가 생각했던 그런 류의 것은 아니었다. 나는 결국 다시 바깥으로 돌기 시작했고 결국 1학년 2학기, 나는 휴학계를 내었다.
그 즈음해서, 그 전까지는 들어본 적도 없던 IT라는 단어는 단 하루라도 언론에 오르지 않는 날이 없었고, 그런 만큼 '닷컴 기업' 역시 광풍이 불고 있었다. 그게 뭐가 됐던 인터넷으로 사업만 한다치면 투자자들이 미친듯이 돈을 쑤셔넣던 시기였다. 스카이러버, 세이카페 같은 채팅 사이트부터 버디바디, MNS 메신저 등의 본격 메신저 서비스들이 흥행을 시작했고 아이러브스콜라, 더모임, 사인월드 같은 사이트들이 찬란하게 명멸했다. MP3의 대중화를 이끌어 낸 소리월드가 대흥행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눈 먼 돈이 워낙에 여기저기 쏠려다니던 시기였던지라, 러브텔의 노씨 아저씨가 한 타이밍만 늦게 사업을 시작했더라면 그 역시 컨텐츠 기반의 사업가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학교가 영 재미없어서 휴학을 하긴 했지만 차마 집에는 "나 휴학했어"라는 말을 할 수 없었던 나는 맨날 아침 집에서 빠져나와 집 근처 도서관이나 PC방에서 시간을 보냈고, 원래부터 그다지 게임을 즐기지 않던 나였기에 나는 그저 인터넷을 도는게 일과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흐음…"
수십만 회원을 자랑하던 PC통신 시절의 대형 커뮤니티들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속속 인터넷으로 보금자리를 옮기고 있었지만 그 세력은 예전같지 않았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대형 커뮤니티들이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하이넷에서 활동하던 유명 유머작가 김무식 씨가 세운 비씨인사이드가 대표적이었다. PC통신 시절의 막장 감성과 디지털 시대의 속도감이 어우러진 비씨인사이드는 가히 충격이라 할만했다. 그리고 새로운 매체가 부상했다. 블로그였다.
아무리 수십만명의 회원을 자랑하던 대형 커뮤니티의 '네임드'라고 해도, 어차피 그 커뮤니티만 벗어나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니었고 수많은 시간과 열정을 들여 만든 많은 컨텐츠도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그건 '자기 것'이 아니라 그냥 '커뮤니티의 것'이었다.
블로그는 좀 달랐다. 개인 위주의 매체였고 접근성도 훨씬 더 높았다. 게시물 하나 읽을라면 가입하고 로그인하고 활동하고 등업해야 되는 지랄맞은 커뮤니티나 카페와는 달리 아무나 주소만 치고 입력하면 쉽게 컨텐츠를 접할 수 있었다. 난 그게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뭐하는가. 입대해야 되는데.
훈련소에 쳐박혀 구르면서 제일 간절했던 것은 바깥 소식이었다. 세상 바깥의 소식을 알고 싶었다. 나중에는 하다하다 과 후배 여자애한테 부탁해서 요즘 세상 돌아가는 뉴스들을 프린터로 찍어다가 좀 보내달라고 하기도 했다. 여자애 이름으로 두툼한 편지가 날아와서 옆의 동기 녀석이 부러워하다가, 안에서 뜬금없이 네이비 뉴스 프린터한 종이들을 튀어나오자 황당해하며 "이거 얘가 너한테 얘가 장난 친거냐?"하고 묻기도 했다.
그때 계획했던 것이 군인들 대상으로 일~이주일간 온/오프라인의 핫이슈들을 잘 정리해서 A4 용지 대여섯장 분량으로 편지로 보내주는 정보제공 서비스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아예 훈련병도 인터넷을 하는 세상이 왔다는 소식에 꿈을 접어버렸다.
어쨌거나 내가 간 곳은 보이스카웃도 캠핑도 아니었고 군대였다. 좆같은 공간에서 좆같은 시간을 좆같은 새끼들과 좆같이 보내다보니 좆같이 안 가는 시간도 어느새 흐르기 마련이고, 이윽고 2년 2개월의 시간이 지나고 나자 나는 다시 사회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사회는 공기부터 다르구나 씨팔"
인터넷의 대유행의 시작부터 그때에 이르기까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거의 모든 컨텐츠는 대부분 무료였다. 원칙적으로 유료 서비스라고 하더라도 다 뒷구멍이 존재했고 돈이 되는 것들은 이미 개인이 어쩌기에는 좀 더 기업적인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들이었다.
"뭐 좋은거 없을까"
다행히도, 인터넷의 발달은 방구석에 앉아서도 이웃나라의 물건을 클릭 몇 번으로 구매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아직까지도 구매/배송대행보다는 직접 물건을 떼어다 파는 보따리상들이 더 익숙하던 시절이라, 난 일본에서 각종 성인용품들을 구매해다 당시 우후죽순 생겨나던 성인용품점에 개인 나까마 자격으로 납품했다. 성인용품점이라고 해봐야 컬러별 콘돔에 섹스토이 몇 개 가져다놓은게 전부였던 시절이라 내가 직접 선별해서 고른 아이템들은 가히 엽기적인 것들이 많았다. 마진이 쏠쏠했다. 국제우편료만 해도 엄청났고, 네다섯 박스를 보내면 그 중 하나 정도 꼴로 세관에서 잡혀서 모조리 압수당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꽤 남을 정도였다. 세상에 섹스사업만큼 확실한 장사가 없다 싶었다.
"너 요즘 뭐하고 다니는거냐"
하지만 역시나 땅 짚고 장사하기란 쉬운게 아니었다. 성인용품 수입으로 세관에 몇 번 걸려서인지 언제부터인가 압수 당하는 빈도가 늘었고, 마침 청량리 588일대를 밀어버린 조광자 경찰서장 등의 영향으로 사회적 분위기가 반 섹스적 선비문화로 돌변한 상태이던 참에, 내가 불법성인용품 밀수 혐의로 난데없는 경찰 조사를 받게 된 것이었다.
다행히 대학생이었던데다 범죄경력도 없고 사업규모(?)도 미미했던 터라 조사 몇 번 받다가 불기소 처분을 받고 넘어가기는 했지만 겁도 나고, 어차피 이제는 돈도 잘 안되던 터라 그 즈음해서는 그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다. 학교도 다시 복학했다.
그 즈음해서 다시 블로그에 손을 댔다. 하지만 남들 눈치보며 이쁜 소리만 하는건 싫었기에 되는대로 찍찍 개소리들을 싸질렀다. 그런데 얼척 없던건, 사람들이 참 얼마나 인터넷의 내숭문화에 질려있었던지 시원하게 툴툴 이빨을 털면 털수룩 더욱 좋아라 하는 것이 아닌가. 허, 참 세상 말세구나 하고 혀를 끌끌 차고 있노라니 평소 나의 팬이라며 안양에 사는 '꿰뿛쒜떫'이라는, PC통신 시절 참 유명했던 닉네임을 가져다 쓴 한 여대생이 적극적으로 구애를 펼쳐왔다.
위에서 말은 안 했지만 나는 14세의 어느 날, 채팅방에서 대학생 남자와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다. 나는 오히려 현성이까지 불러다가 채팅방에서 둘이 힘을 합해 놈을 조리돌림했고-중딩은 이래서 안된다- 바보가 된 그 놈은 씩씩거리면서 채팅방을 나갔다. 그 며칠 후 나는 채팅방에서 한 여자애와 썸을 타게 되는데 그 기집애가 전화번호를 물어(당시는 휴대폰이라는게 없던 시절이다) 전화를 하려고보니까 그 대딩 남자놈이 씩씩거리는 목소리로 난리를 피우는게 아닌가. 알고보니 그 여자애는 대학생 놈의 여자친구였고, 나에게 미인계를 건 것이었다.
14살 나이에 미인계에 걸려 화를 당할 뻔한 이후로 온라인에서 일방적으로 괜히 나에게 먼저 강력하게 접근하는 여자한테는 괜히 일부러 더 거리를 두었던 나였지만, 그때는 나도 전역하고 심심하고 외로울 무렵이라 '꿰뿛쒜떫'과 오프라인 만남을 가졌다. 전혀 기대도 안 하고 만났거늘, 의외로 늘씬하고 이쁜 아가씨가 좋아하라며 나를 반기는 모습에 나는 복학생 특유의 낮아진 허들로 그녀와의 만남을 곧바로 시작했다.
"우리 관두자"
하지만 니니지 오빠, 아이언 오빠, 보트리스 오빠, 와오 오빠 등, 뭔 게임으로 만난 아는 오빠가 그리도 많은지 남자 문제가 복잡했던 꿰뿛쒜떫의 일상에 나는 지쳐갔고 결국 나는 다시 대학생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시원시원하게 독설을 내뿜던 블로그 역시 접어버리고 다시 몇 개의 커뮤니티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그 몇 년 후, 나는 하던 지랄을 못 그만두고 '굵은 남자의 굵은 블로그' 라는 디스토리 블로그를 개설하게 되는데, 역시 장염 3일차의 후장 마냥 구린내 나는 개소리를 좍좍 시원하게 쏟아내던 그는 디스토리에서 몇 번인가의 제제를 먹고 결국 이글러스 블로그로 이전하게 되니 새 블로그의 이름은 '생각보다 짧은 인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