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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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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잘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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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언제나처럼 따박따박한 목소리로 내 폐부를 찔러왔다.

"사실 난 오빠가 모태솔로라고 해서 솔직히 좀 좋았어. 왜냐하면 처음은 누구한테나 소중한거고, 그만큼 내가 오랫동안 기억될게 분명하잖아?"

그 말에 '오랫동안 기억된다는건 역설적으로 말해서 언젠가 헤어졌을 때를 상정해서 하는 말이야?' 하고 되묻고 싶었지만 저번처럼 또 제발 꼬치꼬치 캐묻지 좀 말라고 할 것 같아서 그저 "응" 하고 맞장구만 쳤다. 그러자 윤지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아니야"
"왜?"

머리로 생각도 하기 전에 왜?라는 반문이 튀어나갔다. 윤지는 신랄하게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첫째, 스타일이 구려. 구려도 너무 구려. 생각해보면 그래. 다들 중고등학교 때 멋도 부려보고, 알바해서 용돈 생기면 옷도 좀 사고, 남들한테 멋지게 보이고 싶고… 사람이라면 다 그렇잖아? 근데 오빠는 안 그래. 안 그랬고. 그러니 멋을 부릴 줄도 몰라. 지금도 봐. 내가 그렇게 바지 좀 올려입지 말라고 했는데도 또 올려입었잖아. 이게 배바지야 뭐야? 습관이 너무 깊숙히 박힌거야. 머리도 그래. 어제 또 내가 가라는데 안 가고 동네 미용실 갔지? 그 뚱뚱한 아줌마 있는데? 맞지? 도대체 왜 그래?"

나는 말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윤지는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공격, 아니 지적을 이어나갔다. 

"둘째, 연애가 너무 재미가 없어. 맨날 밥, 영화, 커피. 밥, 영화, 커피. 맨날 똑같아. 여기에 기껏 추가되어봤자 모텔 정도? 무슨 연애가 그래. 게다가 막상 만나도 할 말도 없잖아. 그렇잖아. 맨날 무슨 인터넷 이야기나 하고. 솔직히 말하는데 그런거 하나도 재미없거든"

니가 박장대소하며 웃은게 몇 번인데, 하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나 혼자 빵 터진 기억이 더 많은 거 같아서 나는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사실 연애하면, 좀 노력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맛집 같은 것도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얼마든지 많이 나오잖아. 아니 그리고 꼭 그런거 아니더라도 뭐 어디 맛있대더라, 친구들끼리 그런 이야기도 하고 그러지 않아? 여친이랑 데이트 하기 좋은 맛집 이런거 오빠 하나라도 알아? 오빤 맨날 패밀리 레스토랑이 끽해야 최고지. 그게 나쁘다는건 아니지만, 좀 그래. 값을 떠나서라도 좀 분위기 좋고 맛난 것도 좀. 에휴 아니다. 그건 오빠한테 바라는게 너무 큰 거 같다. 맛집 같은데 척척 데려가는 남친 있으면 진짜 내가 맨날 돈 내도 하나도 안 아깝겠다"

마치 방언이라도 터진 것마냥 시원시원 나에 대해 불평을 쏟아대는 그녀의 모습. 왜인지 지금 이 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건 지금 이 상황을 도피하고 싶은 나의 욕망 탓인지 아니면 갑작스레 쏟아지기 시작한 오후의 노곤함 탓인지. 

"결정적으로 말야, 오빠는 여자 마음을 너무 몰라. 내가 화가 나면 좀 풀어줄 줄도 알고, 적당히 어른스럽게 이런저런 말도 해주고, 뭔가 두근거리고 설레이게 여심을 흔들 줄도 모르고, 진심을 턱 털어놓지도 못하고.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내가 이래도 흐 저래도 흐. 내가 말하는게 진심인지, 아니면 좀 떠보는 건지도 모르고, 뭔가 자극도 하나도 없고, 진짜 재미없는 사람이야 오빠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래도 나름 웃긴 놈인데 나. 

"또 정작 그렇다고 내가 오빠한테 가끔 기대고 싶을 때는 하나도 그럴 수도 없어. 오빠 완전 허당이잖아. 뭐 남자답게 척척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어디 인터넷에서 본 쓸데없는 정보 같은건 빠삭해도 진짜 뭐 생활에 필요한 그런 거는 쥐뿔도 모르잖아. 뭐 해본 것도 거의 없고. 뭔가 남자답지가 못해. 운동도 못하고 말이야"

음, 사실 이건 나도 좀 인정하는 부분이다. 또래에 비해서 뭐 인생경험도 확실히 적은 것 같고, 어디 남들처럼 해외여행을 하거나 봉사활동을 해  것도 아니고, 운전면허도 없고, 자전거도 탈 줄 모르고, 토익 점수도 없고, 알바도 한번 해본 적도 없고, 클럽 같은 데도 한번 가본 적도 없고, 뭐 어디 행정적으로 신고해야 된다 이런거 아무 것도 할 줄 모르고 그런거 해야된다고 하면 겁부터 나고, 뭔가 그냥 나는 최대한 오늘도 무사히 식의 하루하루가 좋다보니까…. 친구도 없고. 간접경험은 인터넷에서 얻는게 전부인데 그것도 사실 다 남의 이야기고 두루뭉실한 이야기니까 막상 현실에서는 도움이 안 되지. 

"그리고 이거 진짜 이건 이야기 안 하려다가 말하는데, 솔직히 오빠 너무 못해"

뭘? 하고 또 묻고 싶어졌지만 아차, 설마 '그'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어서 나는 입을 그대로 꾹 다문 채 가벼운 콧김만 내뿜었을 따름이다.

"뭐 말하는지는 알지? 오빠의 자존심 때문에 차마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오빠 진짜 못하는거 같아. 그래 이건 뭐 오빠 잘못만도 아니야. 내가 좀 더 가르쳐주면 언젠가는 잘하겠지. 언젠가는. 근데 그러고 싶지 않아졌어"
"왜?"

역시 이번에도 생각하기 전에 질문이 튀어나갔다. 그러자 그녀는 피식 웃었다.

"내내 대답 안 하더니 이 말에는 바로 질문 튀어나오네. 어쨌든. 왜냐고? 그야… 모태솔로인 오빠를 내가 하나하나 가르쳐서 섹시한 남자 만들 바에야, 그냥 차라리 섹시한 남자를 새로 꼬시는게 훠얼씬 빠르고 속도 안 터질 것 같아. 내가 아무리 오빠가 귀엽다고 해도, 이건 아니잖아. 나이 먹을만큼 먹은 남자가 어느 정도 연애에 대한 기본 센스도 없다는게. 후진 연애 그만할래. 내 연애세포도 다 죽는 것 같아"

그래, 사실 윤지 너는 애초에 처음부터 나한테는 좀 아까운 여자였으니까. 니가 한 말 중에 틀린 말도 별로 없는 거 같고. 흐, 그래. 뭔가 서글프고 자기 자신에 대해 큰 자괴감이 들었지만, 정말로 윤지가 한 말 중에 틀린 말은 없는게 사실이니까. 

"그래… 하긴 내가 좀 재미없긴 하지. 연애하기 별로 안 좋은 남자긴 해. 흐, 미안. 그럼 우리 오늘 이렇게 헤어지는거야?"

나는 정말로, 진심으로 윤지를 사랑하는 마음에, 나같은 놈 만나지 말고 더 좋은 남자 만나라는 생각에 한 말이었다. 하지만 윤지는 그 말에 내가 처음 보는 아주 슬픈 눈을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오빠는 정말 안 되겠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게 무슨 이유겠어? 정말로 헤어질려고 했던 거 같으면 내가 오빠한테 이렇게 말했겠어? 정말 오빠는 여자 마음을 그렇게 몰라? 정말 헤어질려고 만난거면, 그냥 나도 오빠한테 '오빠는 좋은 남자야, 근데 나보다 더 좋은 여자 만났으면 좋겠어. 그동안 행복했어. 고마웠어. 앞으로 잘 살아' 하고 말했겠지. 안 그래? 고치라고 한 말 아니야. 좀. 제발. 진심으로"

그런 건가. 세상에 뭐 이렇게 복잡하고 황당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화법이 있담. 하지만 그녀의 그 말에 정신을 퍼뜩 차린 나는 다시 말했다.

"아아, 그런 거구나. 미안. 정말로 미안. 앞으로 진짜 잘할께. 니가 말한거 다 하나하나 배워서 잘할께. 정말 미안"

그렇지만 윤지는 이번에도 또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오빠도 힘들겠지. 그냥 오늘 내가 이렇게 오빠한테 따박따박 따지고 든 건 그냥 그만큼 오빠한테 고치라고 하고 싶었고, 잘 해보려고 한건데 그 말 듣자마자 오빠는 바로 헤어지는거냐고 묻더라. 오빠한테 결국 나는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거겠지. 맞지? 그럼 됐어. 그냥 내가 그렇게 힘없이 포기당하느니, 그냥 내가 먼저 헤어질래. 오빠 사.랑.했.고.미.안.해. 안녕"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다는 뜻인지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마지막으로 '사랑했고 미안해' 라는 말을 남긴 그녀는 휑하니 자리에서 일어나 까페에서 나갔다. 그리고 까페 문 밖에서 한참이나 나를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그제서야 '아, 잡아달라는 말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그녀는 잔뜩 화난 모습으로 나를 버린 채 어딘가로 걸어갔고, 나는 뛰어나가 그녀를 잡는 대신 긴 한숨과 남은 커피 한 모금을 홀짝 마셨다. 그리고 중얼댔다.

"미안해 윤지야…"

내가 너래도 나같은 놈이랑은 별로 연애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순간 카톡으로 [ 앞으로 나한테 문자도 전화, 카톡 다 하지마 ] 라는 윤지의 메세지가 왔다. 

'아'

그리고 이번에는 확실히 그 메세지가 '한번 더 말 걸어주면 슥 넘어가 줄 수도 있지'라는 윤지의 화해의 메세지라는 것을 캐치했지만, 나는 이번에도 역시 그걸 모른 척 하기로 했다. 한참을 대답없이 가만히 있자, 그녀는 다시 메세지를 보내왔다.

[ 오빤 평생 모태솔로로 살아 그렇게 ]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윤지 너랑 사귀어봤으니까 모태솔로는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게 묘한 뿌듯함을 느낀 것 같아서, 그 병신스러움에 새삼 나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아, 병신같은 내 인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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