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의 스토리지 시스템에 비해 최소 200배 이상 빠르고 효율적인 네트워크 플랫폼으로서의 혁신…"
나는 아까부터 하품을 참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STK 기영원 대표의 환영사에 이어 다음 연사로 나온 배
뭐시기 부장이라는 이의 시스템 소개 PT인데, 말투가 느릿느릿하고 뻔한 내용을 과다하게 포장하는 것이
엄청나게 지루했다.
"지루하신가봐요"
그리고 바로 그때 내 옆 자리에 앉은, 아까 우리 테이블 사람들끼리 인사 나눌 때 NTH 다닌다고 했던…
슬쩍 교환한 명함을 확인했다. 한채윤. 그녀의 이름이다. 그녀가 내게 작게 속삭였다. 난 머쓱하게 웃으며
얼른 하품하던 입을 추스리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작게 말했다.
"음, 죄송합니다. 실례했습니다. …근데 살짝. 지루하네요. 내용을 반 정도 밖에 이해 못하거든요"
보통 이런 기술 세미나에는 언제나 시꺼먼 남자들로 가득한 법이다. 기업설명회나 제품 런칭쇼, 기자간담회
같은 자리라면 그나마 여사원들이 제법 있는 마케팅 부서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겠지만 기업의 이런 기술 세
미나는 당연히 공돌공돌한 사람들로 채워지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내 옆 자리에 앉은 그녀는 꽤 예뻤다. 아
까 슬쩍 보건데 나이는 30대 초반? 단아한 느낌이면서도 왠지 모를 세련미가 있어서 매력적이었다. 그게 뭐
무슨 상관이겠냐만.
그리고 내 솔직한 대답에 살짝 웃은 그녀는 내 말에 공감했다.
"저도 사실 잘 몰라요. 그냥 우리 부장님이 여기 음식 맛있다고 해서 억지로 참석한 거에요"
이번엔 내가 그녀의 말에 폭풍공감하며 웃었다. 나 역시 우리 회사 서버팀 오 부장님이 "하도 여기서 우리
귀찮게 하는 바람에 내가 립서비스 날려놓은 것도 있거든. 가보긴 가보는게 좋을 거 같은데 우리 팀이 이번
서버 이전 때문에 아주 정신이 없잖아? 미안한데 그냥 가서 자리만 좀 앉아있다 올 사람 있어? 밥도 준대"
해서 내가 어쩌다 떠밀려서 오게 된 것 뿐이니까.
"박스 과장님 가보세요. 좋아하시잖아요. 분위기 좋은 데서 식사하시는거"
"에이, 아저씨들 드글드글한 세미나에서 남자들끼리 얼굴 보며 먹는건데… 호텔 밥인들 맛있겠어요?"
"됐고, 박스 과장이 갈거야 그럼? 요새 사업기획팀 한가하잖아. 다녀와 줘 좀"
"흐, 네 알겠습니다"
괜히 없어보일까 튕기긴 했다만 음식맛 좋기로 유명한 힐츠얏트 호텔에서의 세미나. 나쁠 것 없지. …그런
경위로 내가 여기 세미나에 온거다.
어쨌든 아무리 지루하다고 한들 앞에서 저 육중한 체구의 사람이 땀 줄줄 흘려가며 열심히 준비한 PT를
무시하고 떠들 수 만은 없는 법. 20분 정도 더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우리는 쉬는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근데 사실 이 호텔은 밥도 밥이지만 35층의 클럽 라운지 바가 더 분위기 좋더라구요"
"아, 정말요? 이런데 자주 오세요?"
"아니요, 그냥 어쩌다 한두번 와서는 맨날 아는 척 하고 다녀요"
내 너스레에 그녀는 웃음을 흘렸다. 한채윤. 아까 이야기를 했다시피 NTH의 기술 마케팅 부서 사람이라고
했다. 특허-저작권 관련쪽 일을 하는데, 사실 이과 계통 출신 사람이 아니라서 전문적인 내용에 부딪힐 때
마다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 말에 난 "저도 아까는 반 밖에 이해 못한다고 했는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대표 환영사 이후로 나온 말은 한 마디도 이해 못했어요" 하고 과장해서 말했다. 그녀는 또 웃었다.
웃음이 많은 사람 같다. 웃는 얼굴도 밝고 예쁘다. 어디가서든 환영받는 사람이리라.
"…저, 이제 다음 순서 시작합니다"
주최측 진행 요원이 우리를 다시 홀로 유도했고 우리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비지니스 모델 소개와 실제 응용 사례, 신규 플랫폼 서비스로서의 가능성 등등등 아까보다는 훨씬
더 볼만한 PT와 시연이 이어졌고 2시간 반에 이르는 긴 강연이 지나갔다. 지루하다고 하더니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은 표정과 자세로 내용을 나름 알차게 받아적고 정리하는 듯 했다. 문득 내 옛 여친이 생각났다.
기자 출신의 그녀가.
그러고보니 하나 그 기집애 지금은 시집 갔으려나? 갔다면 그 드센 애를 누가 데리고 살지도 궁금하다.
"이상입니다. 질문있으신 분?"
내가 멍하니 딴 생각 하는 동안 드디어 식순상의 거의 모든 순서가 끝났고 마지막 질의응답만 남았다.
몇 차례의 내가 알아먹을 수 없는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고, 마지막으로는 뜻밖에 채윤씨가 손을 번쩍
들었다.
"네에"
사회자가 그녀를 가리키자 STK 측 진행요원이 마이크를 그녀에게 가져다 주었고, 그녀는 마이크를 건내
받자 연단에 선 기술책임자에게 질문을 했다.
"NTH의 한채윤 기술마케팅 차장입니다. 아까 설명하신 바에 따르면 B2B쪽 사업모델을 우선 전개하고,
이어 내년 상반기 중으로 개인이나 영세사업자를 상대로 한 다양한 응용이 가능한 맞춤형 플랫폼 서비스
도 준비 중이라고 하셨는데…일반적인 클라우드를 기반으로, 단순 스토리지 플랫폼 서비스가 아닌…"
…대충 내가 말을 이해한 것은 거기까지이고 그 뒤로 각종 기술적, 법률적 용어가 난무한, 질문만 30초
짜리 긴 질문이라서 난 속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잘 모른다며?'
어쨌든 그에 반해 답변은 형식적이었다. 그런 걱정에 대해서는 이미 인지하고 있는 상태이며 아무런 문제
없을 것이다. 특히 기존에 유사한 사업을 하고 있는 다른 외국 기업들에 비해서도 훨씬 우월한 서비스이므
로 자신있다, 법적 문제의 경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등의 두리뭉술한 내용. 답변을 들은 그녀는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는 얼굴로 작게 "0점" 하고 중얼거렸다.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나만 들었다. 난 흐, 하고 웃었다. 귀여웠다.
"어땠어요? 기대만큼 맛있었어요?"
질의응답이 끝나고 나온 저녁식사. 말하고보니 뭐 내가 사준 것도 아닌데 꼭 생색내는 질문 같아 속으로
좀 멋적기도 하고, 오바한 거 같아 아차 싶었지만, 그녀는 내 질문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청 맛있네요"
사실 음식 맛은 그저 그랬다. 다이닝 잡지에서 지지난 달에 호텔 총주방장이 외국의 유명한 쉐프로 바뀌었
다고 해서 나도 조금, 아니 꽤 기대했는데 별로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앙트레로 나온 관자요리도 그저
그랬고 메인의 안심 스테이크에 곁들인 장어 소스는 기대한 맛이 아니었다.
…공짜로 얻어먹은 주제에 궁시렁 댈 이유도 없고, 기준을 높게 잡아서 그랬을 뿐 그렇다고 맛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네, 저도 간만에 고기 썰어선지 맛있네요"
엊그제 윤정이랑 스테이크 썰었고, 바로 어제 태준이랑 삼겹살 구워먹었건만 적절히 구라를 쳤다. 허세
떨 필요없지.
연회실을 나오면서 시간을 보니 어느새 7시 5분. 세미나도 거의 마무리 되어가는 분위기고, 우리 테이블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녀도 가방을 집어든다.
"그럼, 오늘 감사합니다"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STK의 기술 본부장이라는 사람하고 악수를 나누고 일어났다. 주최측에서는 참석자 전원에게 머그컵을
돌렸다. 요샌 텀블러 같은 거 많이 하던데. 머그컵이라… 나쁘지 않았다.
"배부르네요"
"저두요"
그 짧은 대화를 마지막으로 우린 어색한 침묵과 함께 유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마침 우리와 같은 시간
에 다른 층 연회홀에서 바이오 세미나도 열린 터라, 역시 비슷한 시간에 끝난 그 세미나 참석자들로 인해
엘리베이터가 비좁았다. 나와 채윤씨는 바짝 뒤로 밀렸고, 엘리베이터 벽면 바에 댄 우리 둘의 손은 얼떨
결에 포개어졌다. 그녀의 손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난 같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는 대신에 그저
가만히 있었다.
몇 분처럼 느껴진 몇 초의 시간이 지나고, 로비에 도착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그녀도 내리려는 찰나,
내가 말했다.
"차로 태워드릴께요"
능구렁이 같은 표정 따위는 싹 없앤, 믿음직한 남자의 얼굴. 언젠가 하나 그 기집애가 그랬었지.
"어디 가서 그런 표정 짓지마. 오빠가 그런 표정 지으면서 뭐 요구하면 여자들 다 들어줄걸"
기분좋은 기억이구나. 그 다음 말은 별로였지만.
"완전 불쌍해보이거든"
마침 방향도 같은 방향. 그녀는 처음 괜찮다고 했지만 "방향 같으면 태워드릴께요. 방향 다르면 몰라도"
라는 내 말에 흥미가 동한 듯 "사당이요"라고 툭 던졌다. 오케이.
언젠가 느낀 것이지만, 남자가 절대적으로 많은 세상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남은 여자들은 보통
왠만한 남자 이상으로 마초적 성향이 강하다. 아무리 부드러운 이미지의 소유자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내기나 도전 같은 것에 약하다.
"주로 등산 다녀요. 안 바쁠 때는"
"혼자서요?"
"같이 갈 사람도 없고, 전 같이 가는 것보다 혼자 가는게 더 좋아요. 산을 오르면서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 생각하다보면 툭, 하고 쉽게 답이 나오기도 하거든요"
그녀는 넌지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로 나에게 자기가 솔로라는 것을 어필했다. 그래, 바로 이런거다.
내가 좀 무리수를 띄워가면서 태워준다고 하니까 이번에는 알아서 착착 솔로라고 말해주는 센스. 하나
가면 하나 오는 이런게 좋지.
"산 좋죠. 가끔 저도 관악산 올라가요"
가끔 올라가기는 개뿔, 3년 전엔가 억지로 회사 사람들한테 이끌려서 가본게 전부인데.
"정말요? 와, 그럼 우리 주말에 같이 산 안 탈래요?"
"좋아요. 빈 말 아니죠?"
"정말이에요. 돌아오는 이번 주 토요일 어때요?"
내일 퇴근 길에는 등산복이나 한벌 사야겠다.
그녀를 바래다주고, 나는 다시 집으로 향한다. 아직도 그녀의 은은한 향수 냄새가 콧 가를 어른거리는
느낌이다. 곰곰히 오늘 세미나에서의 일들을 떠올려본다. 혼자 애처럼 들떠서 많이 오바한 느낌이기도
하고, 어찌됐던 명목상 일하러 간 자리에서 도대체 뭔 짓을 하고 온 건가 싶고 새로운 만남에 설레이는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 귀찮기도 하고…
"됐어"
나는 머리까지 흔들며 뭔가 묘하게 들뜨면서도 가라앉은 마음을 겨우 붙든 채, 음악을 튼다. 밤 11시가
넘었거늘, 막힌 도로는 뚫릴 줄을 모른다.
어쩌면… 아니, 아니다.
나는 아까부터 하품을 참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STK 기영원 대표의 환영사에 이어 다음 연사로 나온 배
뭐시기 부장이라는 이의 시스템 소개 PT인데, 말투가 느릿느릿하고 뻔한 내용을 과다하게 포장하는 것이
엄청나게 지루했다.
"지루하신가봐요"
그리고 바로 그때 내 옆 자리에 앉은, 아까 우리 테이블 사람들끼리 인사 나눌 때 NTH 다닌다고 했던…
슬쩍 교환한 명함을 확인했다. 한채윤. 그녀의 이름이다. 그녀가 내게 작게 속삭였다. 난 머쓱하게 웃으며
얼른 하품하던 입을 추스리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작게 말했다.
"음, 죄송합니다. 실례했습니다. …근데 살짝. 지루하네요. 내용을 반 정도 밖에 이해 못하거든요"
보통 이런 기술 세미나에는 언제나 시꺼먼 남자들로 가득한 법이다. 기업설명회나 제품 런칭쇼, 기자간담회
같은 자리라면 그나마 여사원들이 제법 있는 마케팅 부서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겠지만 기업의 이런 기술 세
미나는 당연히 공돌공돌한 사람들로 채워지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내 옆 자리에 앉은 그녀는 꽤 예뻤다. 아
까 슬쩍 보건데 나이는 30대 초반? 단아한 느낌이면서도 왠지 모를 세련미가 있어서 매력적이었다. 그게 뭐
무슨 상관이겠냐만.
그리고 내 솔직한 대답에 살짝 웃은 그녀는 내 말에 공감했다.
"저도 사실 잘 몰라요. 그냥 우리 부장님이 여기 음식 맛있다고 해서 억지로 참석한 거에요"
이번엔 내가 그녀의 말에 폭풍공감하며 웃었다. 나 역시 우리 회사 서버팀 오 부장님이 "하도 여기서 우리
귀찮게 하는 바람에 내가 립서비스 날려놓은 것도 있거든. 가보긴 가보는게 좋을 거 같은데 우리 팀이 이번
서버 이전 때문에 아주 정신이 없잖아? 미안한데 그냥 가서 자리만 좀 앉아있다 올 사람 있어? 밥도 준대"
해서 내가 어쩌다 떠밀려서 오게 된 것 뿐이니까.
"박스 과장님 가보세요. 좋아하시잖아요. 분위기 좋은 데서 식사하시는거"
"에이, 아저씨들 드글드글한 세미나에서 남자들끼리 얼굴 보며 먹는건데… 호텔 밥인들 맛있겠어요?"
"됐고, 박스 과장이 갈거야 그럼? 요새 사업기획팀 한가하잖아. 다녀와 줘 좀"
"흐, 네 알겠습니다"
괜히 없어보일까 튕기긴 했다만 음식맛 좋기로 유명한 힐츠얏트 호텔에서의 세미나. 나쁠 것 없지. …그런
경위로 내가 여기 세미나에 온거다.
어쨌든 아무리 지루하다고 한들 앞에서 저 육중한 체구의 사람이 땀 줄줄 흘려가며 열심히 준비한 PT를
무시하고 떠들 수 만은 없는 법. 20분 정도 더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우리는 쉬는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근데 사실 이 호텔은 밥도 밥이지만 35층의 클럽 라운지 바가 더 분위기 좋더라구요"
"아, 정말요? 이런데 자주 오세요?"
"아니요, 그냥 어쩌다 한두번 와서는 맨날 아는 척 하고 다녀요"
내 너스레에 그녀는 웃음을 흘렸다. 한채윤. 아까 이야기를 했다시피 NTH의 기술 마케팅 부서 사람이라고
했다. 특허-저작권 관련쪽 일을 하는데, 사실 이과 계통 출신 사람이 아니라서 전문적인 내용에 부딪힐 때
마다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 말에 난 "저도 아까는 반 밖에 이해 못한다고 했는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대표 환영사 이후로 나온 말은 한 마디도 이해 못했어요" 하고 과장해서 말했다. 그녀는 또 웃었다.
웃음이 많은 사람 같다. 웃는 얼굴도 밝고 예쁘다. 어디가서든 환영받는 사람이리라.
"…저, 이제 다음 순서 시작합니다"
주최측 진행 요원이 우리를 다시 홀로 유도했고 우리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비지니스 모델 소개와 실제 응용 사례, 신규 플랫폼 서비스로서의 가능성 등등등 아까보다는 훨씬
더 볼만한 PT와 시연이 이어졌고 2시간 반에 이르는 긴 강연이 지나갔다. 지루하다고 하더니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은 표정과 자세로 내용을 나름 알차게 받아적고 정리하는 듯 했다. 문득 내 옛 여친이 생각났다.
기자 출신의 그녀가.
그러고보니 하나 그 기집애 지금은 시집 갔으려나? 갔다면 그 드센 애를 누가 데리고 살지도 궁금하다.
"이상입니다. 질문있으신 분?"
내가 멍하니 딴 생각 하는 동안 드디어 식순상의 거의 모든 순서가 끝났고 마지막 질의응답만 남았다.
몇 차례의 내가 알아먹을 수 없는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고, 마지막으로는 뜻밖에 채윤씨가 손을 번쩍
들었다.
"네에"
사회자가 그녀를 가리키자 STK 측 진행요원이 마이크를 그녀에게 가져다 주었고, 그녀는 마이크를 건내
받자 연단에 선 기술책임자에게 질문을 했다.
"NTH의 한채윤 기술마케팅 차장입니다. 아까 설명하신 바에 따르면 B2B쪽 사업모델을 우선 전개하고,
이어 내년 상반기 중으로 개인이나 영세사업자를 상대로 한 다양한 응용이 가능한 맞춤형 플랫폼 서비스
도 준비 중이라고 하셨는데…일반적인 클라우드를 기반으로, 단순 스토리지 플랫폼 서비스가 아닌…"
…대충 내가 말을 이해한 것은 거기까지이고 그 뒤로 각종 기술적, 법률적 용어가 난무한, 질문만 30초
짜리 긴 질문이라서 난 속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잘 모른다며?'
어쨌든 그에 반해 답변은 형식적이었다. 그런 걱정에 대해서는 이미 인지하고 있는 상태이며 아무런 문제
없을 것이다. 특히 기존에 유사한 사업을 하고 있는 다른 외국 기업들에 비해서도 훨씬 우월한 서비스이므
로 자신있다, 법적 문제의 경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등의 두리뭉술한 내용. 답변을 들은 그녀는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는 얼굴로 작게 "0점" 하고 중얼거렸다.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나만 들었다. 난 흐, 하고 웃었다. 귀여웠다.
"어땠어요? 기대만큼 맛있었어요?"
질의응답이 끝나고 나온 저녁식사. 말하고보니 뭐 내가 사준 것도 아닌데 꼭 생색내는 질문 같아 속으로
좀 멋적기도 하고, 오바한 거 같아 아차 싶었지만, 그녀는 내 질문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청 맛있네요"
사실 음식 맛은 그저 그랬다. 다이닝 잡지에서 지지난 달에 호텔 총주방장이 외국의 유명한 쉐프로 바뀌었
다고 해서 나도 조금, 아니 꽤 기대했는데 별로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앙트레로 나온 관자요리도 그저
그랬고 메인의 안심 스테이크에 곁들인 장어 소스는 기대한 맛이 아니었다.
…공짜로 얻어먹은 주제에 궁시렁 댈 이유도 없고, 기준을 높게 잡아서 그랬을 뿐 그렇다고 맛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네, 저도 간만에 고기 썰어선지 맛있네요"
엊그제 윤정이랑 스테이크 썰었고, 바로 어제 태준이랑 삼겹살 구워먹었건만 적절히 구라를 쳤다. 허세
떨 필요없지.
연회실을 나오면서 시간을 보니 어느새 7시 5분. 세미나도 거의 마무리 되어가는 분위기고, 우리 테이블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녀도 가방을 집어든다.
"그럼, 오늘 감사합니다"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STK의 기술 본부장이라는 사람하고 악수를 나누고 일어났다. 주최측에서는 참석자 전원에게 머그컵을
돌렸다. 요샌 텀블러 같은 거 많이 하던데. 머그컵이라… 나쁘지 않았다.
"배부르네요"
"저두요"
그 짧은 대화를 마지막으로 우린 어색한 침묵과 함께 유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마침 우리와 같은 시간
에 다른 층 연회홀에서 바이오 세미나도 열린 터라, 역시 비슷한 시간에 끝난 그 세미나 참석자들로 인해
엘리베이터가 비좁았다. 나와 채윤씨는 바짝 뒤로 밀렸고, 엘리베이터 벽면 바에 댄 우리 둘의 손은 얼떨
결에 포개어졌다. 그녀의 손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난 같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는 대신에 그저
가만히 있었다.
몇 분처럼 느껴진 몇 초의 시간이 지나고, 로비에 도착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그녀도 내리려는 찰나,
내가 말했다.
"차로 태워드릴께요"
능구렁이 같은 표정 따위는 싹 없앤, 믿음직한 남자의 얼굴. 언젠가 하나 그 기집애가 그랬었지.
"어디 가서 그런 표정 짓지마. 오빠가 그런 표정 지으면서 뭐 요구하면 여자들 다 들어줄걸"
기분좋은 기억이구나. 그 다음 말은 별로였지만.
"완전 불쌍해보이거든"
마침 방향도 같은 방향. 그녀는 처음 괜찮다고 했지만 "방향 같으면 태워드릴께요. 방향 다르면 몰라도"
라는 내 말에 흥미가 동한 듯 "사당이요"라고 툭 던졌다. 오케이.
언젠가 느낀 것이지만, 남자가 절대적으로 많은 세상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남은 여자들은 보통
왠만한 남자 이상으로 마초적 성향이 강하다. 아무리 부드러운 이미지의 소유자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내기나 도전 같은 것에 약하다.
"주로 등산 다녀요. 안 바쁠 때는"
"혼자서요?"
"같이 갈 사람도 없고, 전 같이 가는 것보다 혼자 가는게 더 좋아요. 산을 오르면서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 생각하다보면 툭, 하고 쉽게 답이 나오기도 하거든요"
그녀는 넌지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로 나에게 자기가 솔로라는 것을 어필했다. 그래, 바로 이런거다.
내가 좀 무리수를 띄워가면서 태워준다고 하니까 이번에는 알아서 착착 솔로라고 말해주는 센스. 하나
가면 하나 오는 이런게 좋지.
"산 좋죠. 가끔 저도 관악산 올라가요"
가끔 올라가기는 개뿔, 3년 전엔가 억지로 회사 사람들한테 이끌려서 가본게 전부인데.
"정말요? 와, 그럼 우리 주말에 같이 산 안 탈래요?"
"좋아요. 빈 말 아니죠?"
"정말이에요. 돌아오는 이번 주 토요일 어때요?"
내일 퇴근 길에는 등산복이나 한벌 사야겠다.
그녀를 바래다주고, 나는 다시 집으로 향한다. 아직도 그녀의 은은한 향수 냄새가 콧 가를 어른거리는
느낌이다. 곰곰히 오늘 세미나에서의 일들을 떠올려본다. 혼자 애처럼 들떠서 많이 오바한 느낌이기도
하고, 어찌됐던 명목상 일하러 간 자리에서 도대체 뭔 짓을 하고 온 건가 싶고 새로운 만남에 설레이는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 귀찮기도 하고…
"됐어"
나는 머리까지 흔들며 뭔가 묘하게 들뜨면서도 가라앉은 마음을 겨우 붙든 채, 음악을 튼다. 밤 11시가
넘었거늘, 막힌 도로는 뚫릴 줄을 모른다.
어쩌면… 아니,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