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덥지근한 밤, 텅 빈 사무실에 나홀로 앉아 선풍기를 벗 삼아 야근을 한다. 후덥지근해 죽을 지경
이지만 중앙냉방식이라 7시만 넘어가면 에어컨이 꺼지는 통에 어쩔 수 없다.
"후우…"
나도 모르게 길게 한숨이 쉬어진다. 이미 짙은 어둠이 깔린 창 밖 너머로 도시의 빌딩 불빛들이 서로
잘난듯이 빛나고 있다. 깊은 고독이 가슴 한 켠을 파고 든다. 외롭다. 쌓인 업무는 산더미, 아마도 난
오늘 새벽이 되기 전에는 집에 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고독
"14층에 사람 없죠?"
"네"
업무를 겨우 마치고 1층으로 내려왔다. 역시 더워서인지 웃통을 벗고 메리야쓰 차림인 경비 아저씨에게
인사를 건내고 마지막 퇴근자 리스트에 싸인을 한다.
"수고하세요"
건물을 나오며 시계를 확인한다. 새벽 1시 7분… 집에 가고 씻고 뭐하고 하다보면 몇 시간 자지도 못하고
다시 출근해야겠구나 싶다. 마음 한 구석이 우울하지만 얼른 마음을 추스리고 택시부터 잡기로 한다.
"흠…"
초조하게 기다리지만 원래 우리 회사 앞이 출퇴근 시간 지나면 택시 잡기가 어렵다. 한참 발을 동동 구르다
겨우 도착한 택시에 올랐다. 타자마자 택시 안의 퀴퀴한 공기에 숨이 다 막히지만 별 내색 앉고 목적지부터
말했다.
"중대 병원 근처로 가주세요"
가타부타 대꾸 없이 택시는 출발한다. 무뚝뚝하지만 차라리 편하다. 나는 시선을 차창 밖으로 돌리며 깊은
상념에 사로잡힌다.
나이 서른 네 살, 남들 같으면 최소한 대리, 어쩌면 과장으로 자리 잡고 아마도 결혼도 했을테고 이제 살짝
시들해진 신혼살이이지만, 그래도 알콩달콩 재미있게 아내와 하루하루 깨알같은 추억을 만들어 나갈 나이
일 것이다. 빠르면 애를 가졌을지도 모르고, 주말이면 중형 세단에 몸을 싣고 아내와 함께 여행도 다녀오고
아주 살짝 삶에 대한 권태를 느끼지만 그래도 가장의 책임감으로 열심히 미래를 향해 달릴 나이…
허허.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이 나이 먹도록 파견직을 전전하며 가라 대리 직급에 2년, 아니 3년째 솔로.
보증금 천만원에 월세 39만원짜리 원룸에 살고 있고 가족이라곤 젊은 시절부터 키우던 고양이 한 마리가
전부. 원래 한 마리 더 있었지만 작년에 방광염으로 죽었다. 통장에 돈이라고는 현재 1천만원 쓴 상태의
마이너스 통장 하나, 그리고 이번 달 월세 줄 돈 맞춰놓은 월급통장이 전부다. 물론 뚜벅이 신세.
"큭"
스스로가 한없이 초라해서 견딜 수가 없다. 초라하다는 말이 나오니까 바지 무르팍에 살짝 구멍 뚫린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좀 더 어렸을 때는 종종 쇼핑도 하고 그랬는데 요새는 마지막 옷 쇼핑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출근-일-퇴근-집 앞 분식집에서 저녁식사-TV, 컴퓨터-잠. 반복되는 삶. 단 1mm도 전진하지 못하는 참
구질구질한 삶. 답답하고 당장이라도 관두고 싶어지는 삶. 고독하고도 지독하리만치 우울한 삶. 한없는
무기력감과 외로움이 나를 휘감는다. 눈꺼풀의 무게를 느끼며 살짝 눈을 감는다.
"어디 쪽에 세워드릴까요"
기사의 말에 화들짝 놀라서 눈을 떴다. 잠에 빠져들었나보다. 잠깐 허둥지둥 창 밖을 확인하다가 집 근처
임을 확인하고 근처에 세워달라고 말했다. 카드 결재를 하고 영수증을 받았다. 영수증 처리 해야하니까.
택시에서 내려 새벽 공기를 음미한다. 하지만 어느새 칼칼해진 공기가 콧 속을 괴롭힌다. 안 하느니만
못한 짓을 했다.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1시 46분. 집을 향해 걷다가 근처 편의점에서 콜라 0.5리터 페트
하나를 샀다. 편의점의 밝은 조명과 신나는 음악이 왠지 더욱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언제부터인가, 밝은 아이돌 음악을 듣노라면 무언가 잃어버린 청춘의 시간에 대한 갈구 같은 것이 마음
한 구석을 아프게 한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안 그랬는데.
집 현관문에 붙은 전단지들을 대충 떼버리고 도어락 비밀 번호를 입력한다. 3년째 같은 번호를 썼더니
특정 숫자의 버튼만 닳아서 숫자가 지워져 보인다. 비밀 번호를 바꿀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귀찮기도
하고… '싫었다'. 아직도 미련이 남은 것일까. 난 픽 웃으며 문을 열었다.
니야아옹-
"집 잘 보고 있었어?"
하루종일 혼자 있었을 불쌍한 내 반려묘 '냥이'에게 사료을 조금 주고 난 바로 훌렁훌렁 옷을 벗으며
화장실에 들어섰다. 샤워커튼을 치고, 쏟아지는 물줄기에 몸을 맡긴다. 물줄기 속에서 눈을 감는 바로
그 순간만이 그나마 하루에 마음이 덜 아픈 시간이다.
"후, 노곤하다"
씻고 방 좀 대충 정리하고, 고양이 똥 치우고 머리를 대충 말린 후 침대에 누우니 벌써 새벽 2시 20분
이다. 출출했다. 문득 아까 사온 콜라가 생각났지만 어차피 양치질까지 했는데 참기로 했다. 휴대폰
알람을 맞추고 슥 이불을 가슴까지 올린다.
방 안이 정적에 잠긴다. 언젠가 이 시간에 째깍째깍 울리는 시계 바늘 소리가 거슬려서 벽시계를 뗴어
버렸다. 이 정적이 싫다. 냥이는 점잖은 성격이라 잘 울지 않는다. 노곤하다. 눈을 감고 그냥 이대로 뭐
영원히 잠에 빠져들고 싶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
손가락 깍지를 끼우고 가만히 숨을 내쉰다. 그리고 슬금슬금 차오르는 알 수 없는 고독과 억울함에 날
그대로 무방비로 던져놓는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난 지독한 안개 속에서 헤메이는 것처럼 내 안의
좌절 속에서 무기력한 의지를 들고 싸우고 있다. 머지않아 나는 쓰러진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모
레도 언제나 그래왔듯이 지독한 고독감에 나 스스로를 만신창이가 되도록 내버려둔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언제나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 베개를 흠뻑 적시고 있다. 실컷 울어서 차분해진
마음으로 입가에 흐른 침도 닦고, 배게를 거꾸로 뒤집는다. 마지막으로 휴대폰 시계를 확인하고 이제
잠에 들고자 할 무렵, 누군가 집 현관문 도어락 버튼을 누른다.
삑- 삑- 삐익- 삑-
누구지. 아무도 올 사람이 없는데. 아무도 모르는데. 나 말고 아는 사람이 없는데. 아니 한 명 있지만 걘
지금 여기 올 사람이 아닌데.
대단한 두려움이 나를 꼼짝 못하도록 휘감지만 곧 난 아쉬운대로 침대 맡에 놓아둔 TV리모콘을 쥐어
들었다. 얼굴을 향해 던지면 한 합은 벌 수 있을거라는 계산이었다. 비밀 번호가 맞았는지 문이 열렸고
내 긴장이 최고조가 된 시점, 문을 연 것은 절대 지금 여기 올 사람이 아니라 생각했던 '그녀'였다.
"어…어, 왠일이야?"
지난 3년 간, 특히 처음 1년 간은 거의 매일 밤 기대하고 간절히 바랬던 그 일이, 참 아무 일 아닌 것처럼
지금 일어났다. '그녀'가, 티셔츠에 핫팬츠를 입고 작은 가방 하나 들고, 그렇게 성큼성큼 자기 집인양
우리 집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는 목에 건 가방을 집어 던지듯 벗어놓고 나를 향해 다가왔다.
"응? 왠일이냐니…"
그녀는 다른 말 대신 내 입술에 입술을 맞추었고 이윽고 내 품 안으로 파고 들었다. 난 얼떨결에 그녀를
끌어안았고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내 다리를, 내 허리를, 그리고 내 콧가를 간지럽히고 휘감았다. 나는
가볍게 떨었다. 너무나… 정말로 너무나 갖고 싶었던…내 영혼을 팔아서라도, 내 모든 것을 버리더라도
제발 바랐던 그 일이….
하지만 그 순간 난 문득 떠올렸다. 2년 전 그녀가 미국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내 품 안을 가득 채우던 그녀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따스한 체온조차 온데간데 없이.
너무나 큰 허탈함에 난 몸을 일으키고도 한참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침대를 만져보기까지 했다. 온기
까지 느껴지는 꿈도 있나? 혹시 잠결에 전화를 받은건가 싶어서 확인해봤지만 통화기록은 없었다. 꿈
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문을 열고 잠깐 바깥을 둘러보기도 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냥 꿈이었다. 흔한 개꿈.
요 근래 몇 달 간은 그녀가 꿈에서 나온 적이 없는데. 이런 류의 꿈은 더더욱 꾼 적이 없는데. 혹시나
몽정이라도 한 것인가 싶어서 아랫도리를 확인했지만 살짝 발기가 되어있기는 해도 몽정을 하지는
않았다.
정말로 그냥 꿈이었던건가.
그렇다는 생각이 들자 긴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정말로, 결코 열릴 리 없는 현관을 그렇게
참 오랫동안, 정말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이지만 중앙냉방식이라 7시만 넘어가면 에어컨이 꺼지는 통에 어쩔 수 없다.
"후우…"
나도 모르게 길게 한숨이 쉬어진다. 이미 짙은 어둠이 깔린 창 밖 너머로 도시의 빌딩 불빛들이 서로
잘난듯이 빛나고 있다. 깊은 고독이 가슴 한 켠을 파고 든다. 외롭다. 쌓인 업무는 산더미, 아마도 난
오늘 새벽이 되기 전에는 집에 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고독
"14층에 사람 없죠?"
"네"
업무를 겨우 마치고 1층으로 내려왔다. 역시 더워서인지 웃통을 벗고 메리야쓰 차림인 경비 아저씨에게
인사를 건내고 마지막 퇴근자 리스트에 싸인을 한다.
"수고하세요"
건물을 나오며 시계를 확인한다. 새벽 1시 7분… 집에 가고 씻고 뭐하고 하다보면 몇 시간 자지도 못하고
다시 출근해야겠구나 싶다. 마음 한 구석이 우울하지만 얼른 마음을 추스리고 택시부터 잡기로 한다.
"흠…"
초조하게 기다리지만 원래 우리 회사 앞이 출퇴근 시간 지나면 택시 잡기가 어렵다. 한참 발을 동동 구르다
겨우 도착한 택시에 올랐다. 타자마자 택시 안의 퀴퀴한 공기에 숨이 다 막히지만 별 내색 앉고 목적지부터
말했다.
"중대 병원 근처로 가주세요"
가타부타 대꾸 없이 택시는 출발한다. 무뚝뚝하지만 차라리 편하다. 나는 시선을 차창 밖으로 돌리며 깊은
상념에 사로잡힌다.
나이 서른 네 살, 남들 같으면 최소한 대리, 어쩌면 과장으로 자리 잡고 아마도 결혼도 했을테고 이제 살짝
시들해진 신혼살이이지만, 그래도 알콩달콩 재미있게 아내와 하루하루 깨알같은 추억을 만들어 나갈 나이
일 것이다. 빠르면 애를 가졌을지도 모르고, 주말이면 중형 세단에 몸을 싣고 아내와 함께 여행도 다녀오고
아주 살짝 삶에 대한 권태를 느끼지만 그래도 가장의 책임감으로 열심히 미래를 향해 달릴 나이…
허허.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이 나이 먹도록 파견직을 전전하며 가라 대리 직급에 2년, 아니 3년째 솔로.
보증금 천만원에 월세 39만원짜리 원룸에 살고 있고 가족이라곤 젊은 시절부터 키우던 고양이 한 마리가
전부. 원래 한 마리 더 있었지만 작년에 방광염으로 죽었다. 통장에 돈이라고는 현재 1천만원 쓴 상태의
마이너스 통장 하나, 그리고 이번 달 월세 줄 돈 맞춰놓은 월급통장이 전부다. 물론 뚜벅이 신세.
"큭"
스스로가 한없이 초라해서 견딜 수가 없다. 초라하다는 말이 나오니까 바지 무르팍에 살짝 구멍 뚫린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좀 더 어렸을 때는 종종 쇼핑도 하고 그랬는데 요새는 마지막 옷 쇼핑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출근-일-퇴근-집 앞 분식집에서 저녁식사-TV, 컴퓨터-잠. 반복되는 삶. 단 1mm도 전진하지 못하는 참
구질구질한 삶. 답답하고 당장이라도 관두고 싶어지는 삶. 고독하고도 지독하리만치 우울한 삶. 한없는
무기력감과 외로움이 나를 휘감는다. 눈꺼풀의 무게를 느끼며 살짝 눈을 감는다.
"어디 쪽에 세워드릴까요"
기사의 말에 화들짝 놀라서 눈을 떴다. 잠에 빠져들었나보다. 잠깐 허둥지둥 창 밖을 확인하다가 집 근처
임을 확인하고 근처에 세워달라고 말했다. 카드 결재를 하고 영수증을 받았다. 영수증 처리 해야하니까.
택시에서 내려 새벽 공기를 음미한다. 하지만 어느새 칼칼해진 공기가 콧 속을 괴롭힌다. 안 하느니만
못한 짓을 했다.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1시 46분. 집을 향해 걷다가 근처 편의점에서 콜라 0.5리터 페트
하나를 샀다. 편의점의 밝은 조명과 신나는 음악이 왠지 더욱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언제부터인가, 밝은 아이돌 음악을 듣노라면 무언가 잃어버린 청춘의 시간에 대한 갈구 같은 것이 마음
한 구석을 아프게 한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안 그랬는데.
집 현관문에 붙은 전단지들을 대충 떼버리고 도어락 비밀 번호를 입력한다. 3년째 같은 번호를 썼더니
특정 숫자의 버튼만 닳아서 숫자가 지워져 보인다. 비밀 번호를 바꿀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귀찮기도
하고… '싫었다'. 아직도 미련이 남은 것일까. 난 픽 웃으며 문을 열었다.
니야아옹-
"집 잘 보고 있었어?"
하루종일 혼자 있었을 불쌍한 내 반려묘 '냥이'에게 사료을 조금 주고 난 바로 훌렁훌렁 옷을 벗으며
화장실에 들어섰다. 샤워커튼을 치고, 쏟아지는 물줄기에 몸을 맡긴다. 물줄기 속에서 눈을 감는 바로
그 순간만이 그나마 하루에 마음이 덜 아픈 시간이다.
"후, 노곤하다"
씻고 방 좀 대충 정리하고, 고양이 똥 치우고 머리를 대충 말린 후 침대에 누우니 벌써 새벽 2시 20분
이다. 출출했다. 문득 아까 사온 콜라가 생각났지만 어차피 양치질까지 했는데 참기로 했다. 휴대폰
알람을 맞추고 슥 이불을 가슴까지 올린다.
방 안이 정적에 잠긴다. 언젠가 이 시간에 째깍째깍 울리는 시계 바늘 소리가 거슬려서 벽시계를 뗴어
버렸다. 이 정적이 싫다. 냥이는 점잖은 성격이라 잘 울지 않는다. 노곤하다. 눈을 감고 그냥 이대로 뭐
영원히 잠에 빠져들고 싶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
손가락 깍지를 끼우고 가만히 숨을 내쉰다. 그리고 슬금슬금 차오르는 알 수 없는 고독과 억울함에 날
그대로 무방비로 던져놓는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난 지독한 안개 속에서 헤메이는 것처럼 내 안의
좌절 속에서 무기력한 의지를 들고 싸우고 있다. 머지않아 나는 쓰러진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모
레도 언제나 그래왔듯이 지독한 고독감에 나 스스로를 만신창이가 되도록 내버려둔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언제나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 베개를 흠뻑 적시고 있다. 실컷 울어서 차분해진
마음으로 입가에 흐른 침도 닦고, 배게를 거꾸로 뒤집는다. 마지막으로 휴대폰 시계를 확인하고 이제
잠에 들고자 할 무렵, 누군가 집 현관문 도어락 버튼을 누른다.
삑- 삑- 삐익- 삑-
누구지. 아무도 올 사람이 없는데. 아무도 모르는데. 나 말고 아는 사람이 없는데. 아니 한 명 있지만 걘
지금 여기 올 사람이 아닌데.
대단한 두려움이 나를 꼼짝 못하도록 휘감지만 곧 난 아쉬운대로 침대 맡에 놓아둔 TV리모콘을 쥐어
들었다. 얼굴을 향해 던지면 한 합은 벌 수 있을거라는 계산이었다. 비밀 번호가 맞았는지 문이 열렸고
내 긴장이 최고조가 된 시점, 문을 연 것은 절대 지금 여기 올 사람이 아니라 생각했던 '그녀'였다.
"어…어, 왠일이야?"
지난 3년 간, 특히 처음 1년 간은 거의 매일 밤 기대하고 간절히 바랬던 그 일이, 참 아무 일 아닌 것처럼
지금 일어났다. '그녀'가, 티셔츠에 핫팬츠를 입고 작은 가방 하나 들고, 그렇게 성큼성큼 자기 집인양
우리 집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는 목에 건 가방을 집어 던지듯 벗어놓고 나를 향해 다가왔다.
"응? 왠일이냐니…"
그녀는 다른 말 대신 내 입술에 입술을 맞추었고 이윽고 내 품 안으로 파고 들었다. 난 얼떨결에 그녀를
끌어안았고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내 다리를, 내 허리를, 그리고 내 콧가를 간지럽히고 휘감았다. 나는
가볍게 떨었다. 너무나… 정말로 너무나 갖고 싶었던…내 영혼을 팔아서라도, 내 모든 것을 버리더라도
제발 바랐던 그 일이….
하지만 그 순간 난 문득 떠올렸다. 2년 전 그녀가 미국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내 품 안을 가득 채우던 그녀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따스한 체온조차 온데간데 없이.
너무나 큰 허탈함에 난 몸을 일으키고도 한참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침대를 만져보기까지 했다. 온기
까지 느껴지는 꿈도 있나? 혹시 잠결에 전화를 받은건가 싶어서 확인해봤지만 통화기록은 없었다. 꿈
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문을 열고 잠깐 바깥을 둘러보기도 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냥 꿈이었다. 흔한 개꿈.
요 근래 몇 달 간은 그녀가 꿈에서 나온 적이 없는데. 이런 류의 꿈은 더더욱 꾼 적이 없는데. 혹시나
몽정이라도 한 것인가 싶어서 아랫도리를 확인했지만 살짝 발기가 되어있기는 해도 몽정을 하지는
않았다.
정말로 그냥 꿈이었던건가.
그렇다는 생각이 들자 긴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정말로, 결코 열릴 리 없는 현관을 그렇게
참 오랫동안, 정말 오랫동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