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씨에 긴 셔츠를 입고 한강대교를 걷는다. 그래도 벌써 밤 9시, 후덥지근해 등에 땀이 흐르긴 해도
도저히 못 버틸 정도는 아니다.
절반쯤 걸어오니 절로 코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온다.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난
헤어진지 2주일, 아직 가슴의 통증은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서서히 내리기 시작하는 빗
줄기에 번지는 자동차 불빛처럼 어느새 또 헤어지던 순간의 기억이 떠오른다.
…아니. 떠올리지 않기로 한다. 마음 독하게 먹기로 한다. 걷는다. 등에 또 한줄기 땀이 흐른다. 나는
되뇌인다.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날 것이고, 닿지 않으면 못 만나겠지"
그리고 곧바로 "지랄" 하는 소리가 터져나온다. 될 일이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이 도데체 내
삶을 얼마나 갉아먹었는가. 그러면 어쩌면 좋지? 지금 걔네 집 앞에 찾아가서 어떻게 하기라도 할까?
엎드려 빌어? 아니면 밤새도록 술이나 쳐마시다가 쓰러져 잘까? 그것도 아니면…
"그만해 씨발!"
옆을 지나가던 아줌마가 흠칫 놀라며 걸음을 빨리한다. 염병, 나는 소리 한번을 질러도 민폐구나. 원
나는 씨팔 세상에 살 이유가 없는 새끼네. 좆같은 민폐쟁이. 아주…질려. 지긋지긋한 새끼.
짜증이 난다. 다 짜증이 난다. 아무도 잘못한 것이 없고 모두 내 잘못인데, 어쨌거나 짜증이 난다. 난
도대체 왜 이런가. 문득 고개를 돌려 난간 너머를 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일렁이는 가로
등 불빛에 흔들리는 강물이 보인다. 저 밑으로 들어가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겠지.
다시 걷는다. 전화기 배터리는 11%. 어디 걸려오는 전화도 없는데 왜 이리 배터리는 빨리 닮는지, 참.
그리고 다시 혜지 생각을 한다. 그녀의 예쁜 얼굴과 섹시한 바디라인이 눈 앞에 어른거린다. 하아…,
번뇌가 나를 잠식한다.
제일 곤욕이 그것이다.
그녀에 대한 마음을 아무리 닫고, 잊으려 해도 성욕이 차오르면 스멀스멀 다시 그녀에 대한 충동이
나를 휘감는다. 자고 싶다. 미친듯이 자고 싶다. 이 세상 다른 그 어떤 여자가 아닌, 그녀를 정복하고
싶다. 그녀를 안고 미친듯이 절정을 향해 달리고 싶다.
그렇다고 해봐야 그저 긴 한숨 끝에 조심스럽게 컴퓨터 앞에서 바지를 내리는게 전부인 구질구질한
하루하루에 참 기가 막힐 따름인 것이다. 아까 현철이가 그랬지.
"야 됐어. 다른 여자 만나. 뭐 연애 한 두번 해봐? 다른 여자 만나서 잊으면 돼."
물론 정작 지는 여자랑 헤어지고 나서 자살한다느니 어쩐다느니 난리를 피운 적이 있는 놈이지만 뭐
저 말이 틀린 얘기는 아니겠지.
하지만 지금의 난…막말로 진태희가 발가벗고 내 앞에서 춤을 춰도 그냥 심드렁한 얼굴로 꺼져, 라고
말할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다.
"씨팔"
열쇠를 새로 맞추던지 해야지. 집 현관문이 안에서 걸린 듯 잘 열리지가 않는다. 지금처럼 막 짜증 나
있거나 화장실이 급할 때 이 지랄이면 아주 스트레스에 돌아버릴 거 같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겨우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며칠 째 쌓여있는 냄비와 그릇더미의 쉰 냄새가 내 코를 자극한다. 악취를
피해 숨을 내쉬며 신발을 벗고 털썩 침대에 눕는다.
바로 이 침대에서 그녀와 몸을 섞곤 했지. 혜지는 키는 작아도 볼륨감이 있었다. 몸을 섞다보면 나는
항상 천국을 느꼈다. 부드러움과 탄력, 그리고 과감함과 신선함, 강렬한 자극과 귀여움…그리고 천국.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웅-
눈을 떴다. 얼마를 잤을까. 어둠 속의 방 안을, 책상 위의 휴대폰이 진동과 함께 빛으로 밝히고 있었다.
전화가 오고 있었다. 그래, 난 저 진동 소리에 잠에서 깬 것이다. 서둘러 달려가 전화를 확인했다.
혜지였다.
"어…음, 있을거야. 아마"
헤어진 연인의 애틋한 재회의 메시지를 기대했지만 그녀가 요구한 것은 오로지 선글래스. 아직 할부까지
남은 것이라 돌려받아야겠단다. 이번 주말에 친구들이랑 해수욕장 간다나. 허….
"잠깐만"
끊겠다는 것을 겨우 세우고는 할 말을 한다. 지난 2주간, 절대로 다시 내뱉어선 안된다고 다짐하고 다짐
했던 말이면서도 밤마다 연습했던 그 말.
"저기, 혜지야"
뭐, 하고 바로 톡 내쏘듯 대꾸하는 그녀의 말에 뻘쭘해지지만 그래도 장전한 말, 안 쏠 수는 없다.
"주말에, 아니, 내일이라도, 혹시 시간되면 잠깐 보자. 이야기 좀 하자 우리"
하지만 전화기에서 들려온 것은 "병신" 한 마디 뿐. 전화는 곧바로 끊어졌다. 나는 몇 초를 멍하니 있다
곧 미칠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 웃다 웃다 숨 넘어갈 뻔 했다. 그래, 그게 혜지 너다운 반응이지. 눈물까지 흘려가며 웃었다. 지난
2주간 제일 크게 웃은 거 같다. 그리고는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머리가 차가워졌고,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이 통증에서 흐뭇함으로 바뀌었다. 나는 방에 불을 켜고, PC를 켜며 바지를 내린다.
적어도 며칠 정도는, 아니 최소한 오늘 하루 정도는 혜지 생각에 답답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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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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