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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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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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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딘지도 모르는, 차도 거의 다니지 않는 도로변을 걷고 있었다. 그것도 새벽 1시에. 거의 두 시간
넘게 정신없이 걷고 있었던 것 같다. 평소 같았으면 이 인적 드문 도로를 혼자 걷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차라리 무슨 일이라도 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불과 3시간 전에 헤어진 남자친구의 완력에 의해 원래 하늘하늘했던 치마 한쪽은 30센치미터가 넘게
찢어져 팬티가 보일락말락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신발도 산 지 얼마 안되는 쪼리였기에,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는 물집이 잡히고 벗겨져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쓰라렸다.

그때였다.

"아가씨, 어디까지가요?"

흰색 세단 한 대가 옆에 섰다. 볼살이 퉁퉁한, 못생긴 아저씨였다. 난 힐끗 주었던 시선을 다시 거두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차는 다시 천천히 다가왔다. 

"어디까지 가냐니까? 데려다 줄께"

17살의 내 얼굴은 그에게는 거의 딸 또래처럼 보였을테고, 그러자 반말이 된 그의 말투. 나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아저씨, 저 17살이에요"

그러자 쾌활한 웃음과 함께 "난 마흔 둘이야"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난 아저씨 아닌데? 같은 대답을
예상했던 나는 그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에 이유없이 픽 웃었고, 눈치 빠른 아저씨는 다가와 스윽 문
을 열어주었다. 



"어디로 모실까, 꼬마 아가씨"
"아무데나요"
"아무데나 라는 곳은 없는데?"

우리나라 아저씨들은 어디서 저런 말을 따로 교육이라도 받는 것일까. 어쩌면 항상 저렇게 레파토리가
똑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 식상한 대답에 내가 말이 없자 그는 어디론가 차를 몰기 시작했다. 음악도
틀었다. Love potion No. 9 였다. 그 올드함에 난 피식 웃었다.






한쪽에 산을 끼고 한참을 달렸다. 그리고는 약간 외진 도로로 한참을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쯤
일까, 궁금함과 불안함이 동시에 나를 휘감았다. 하지만 그것을 말로 꺼내는 순간 불안함이 현실이 되
어버릴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투의 말. 난 조금 대답할 타이밍이 지났다 싶을 무렵에 입을
열었다.

"찔리는거 있어요?"

내 물음에 그는 또 한참을 웃었다. 웃다가 운전미스라도 할까 살짝 겁이 날 정도로. 하지만 그는 노련한
솜씨로 운전을 계속했고 어느 즈음부터는 다시 번화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이
아저씨가 빙 크게 돌아서 다시 내가 걸어온 반대방향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쪽으로 한참 가면 우리 집 나오는데"

내 말에 그가 물었다. 

"집이 어딘데?"
"서초 3동이요"
"좋은데 사는구만"

그렇게 우리는 또 한참을 달렸다. 집으로 가는 길과는 다른 길이었다. 그리고 새벽 2시를 넘긴 시각, 그는
차를 세웠다. 

"담배 한 대만 피우자"

그리고는 뒷좌석에서 담요를 집어서 나에게 건내주었다. 뻐끔뻐금 태우는 그에게 나는 부탁했다.

"나도 한 대 줘요"
"쪼그만게 담배도 피워?"

그가 건낸 것은 디스였다. 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우리는 그렇게 새벽까지 멍하니 차 안에 있었다. 눈을 감기에는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고, 눈을 뜨고 있기
에는 너무 피곤하다고 느낄 무렵, 코를 골던 그가 눈을 번쩍 떴다.

"쓰읍, 좀 잤냐? 이제 집에 가자"

서서히 동이 터오고 있었다. 새벽의 어둠은, 한번 걷히기 시작하자 무서운 기세로 걷혀가 어느새 밖은 꽤
밝아져 있었다.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기분들이 내 마음 속을 채워나갔다. 그리움, 미움, 두려움, 허무
함…구분할 수 없는 그 복잡한 마음들이.


"기름 앵꼬 나겠다"
"기름 넣어야 되요?"
"아냐"

짧은 대답과 함께 그는 차를 서서히 몰기 시작했다. 그리고 30분 정도를 더 달리자 낮익은 풍경이 나왔고
나는 안전벨트를 풀렀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저 내릴께요"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입술을 내 입술에 포개었다. 헤어진 전 남친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두툼하고 단단한 입술. 그리고 철사 같은 수염까지. 

물론 나는 번개같이 그의 뺨을 후려쳤고, 그는 "쪼그만게 손이 엄청 맵네" 하면서 자신의 손으로 벌개진
뺨을 문질렀다. 그리곤 말했다.

"아, 이거 차비로 치자. 야 진짜 너 손 진짜 맵다"

나는 차에서 내려, 문을 닫으며 말했다.

"아저씨가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라고 했으면, 난 안 때렸을 거에요"

그 말에 아저씨의 입가가 실룩였고, 등을 돌리고 집으로 향하는 내 입술에도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 special thanks to miss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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