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대충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다 구겨진 싸구려 티셔츠에 카고바지를 입는 그를 보며 물었다.
"그냥… 편하잖아"
난 그저 피식 웃으며 "잘 다녀와"라는 말로 그를 출근길로 떠나보낸다. 다시 침대에 누워, 닫힌 문 너머
출근하고 있을 내 남친의 이해할 수 없는 서민 코스프레에 또 한번 웃는다.
'재밌어'
그를 만난 것은 평소 즐겨가던 라운지 바 '클럽A'에서였다. 과거 한때 '좀 놀 줄 안다'라는 사람들 사이
에서 나름 핫 플레이스일 때도 있었지만 이젠 "어? 거기 아직도 있어? 안 망했어?" 소리를 들을 정도로
'추억의 그때 그곳'이 되어버린 그 가게.
지난 금요일, 퇴근길에 아무 이유없이 너무 우울해서 간만에 옛날 생각하며 기분전환이나 하려고 간
그 곳에서 현수를 만났다.
편하게 후드티에 카고 바지를 입은 그는 혼자 칵테일을 몇 잔이나 마시며 음악에 맞춰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고 있었다. 그런 그가 귀여웠다. 몇 번이나 힐끔 거리며 그의 시선을 끌자 그가 먼저 다가왔다.
"혼자 오셨으면 같이 마셔요"
목소리도 좋았다. 그러라고 했다. 이미 살짝 알딸딸해진 상황에서 우리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바로
친하게 말도 놓고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장현수라 이름을 밝힌 그는 29살이라고 했다. 작은 중소기업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중이고, 이 가게는
예전에는 참 자주 왔는데 몇 년 만에 괜히 생각나서 퇴근길에 잠깐 들렀다고 했다.
내가 서른 한 살이라고 하자 그는 정말 놀란 얼굴로 "아무리 봐도 스물대여섯 이상으로는 안 보이는데"
라며 "누나 완전 동안이네요" 라는 말로 내 마음을 녹였다. 솔직히 서른 넘은 직후부터 급격히 피부가
쳐지기 시작해서 팔자 주름이 선명한게 요즘 최대의 고민인 나로선 정말 고마운 말이었다. 설령 빈 말
이라도.
음악 취향도 비슷하고, 조곤조곤 부드러운 어조와 정감가는 표현, 귀여운 얼굴이 꽤 마음에 들었다.
물론 마음에 들었다고 해서 쉽게 흔들리는 그런 내가 아니지만, 참 조심스러우면서도 마치 착한 동생
처럼 다정다감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어쩌면 내가 너무 외로워서 였는지도.
정말 하늘에 맹세코 이상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 새삼 '내가 남자랑 마지막으로 잤던게 언제였지'
라는 생각을 해봤다. 전 남자친구 영현 오빠랑 헤어지고 거의 1년 반을…아, 아니다. 지훈이랑 작년 겨
울에 잤구나. 그러고 보면 대충 반년 좀 더 됐나.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급속히 말이 없어진 나에게 현수가 물었다.
"술 많이 마셨으면 우리 그만 마실까요?"
"헐, 이거 누나 차에요?"
세워놓은 내 차를 보고 그가 감탄했다. 내 첫 직장이었다. 수입차 회사였고, 연봉도 꽤 괜찮았다. 4년
일했고 이런저런 프로모션에 최저가 마진 적용해서 몇 대가 파격적인 가격에 나온 것을 뒤도 안돌아
보고 질렀다. 너무너무 귀여운 드림카였으니까. 물론 아무리 싸게 샀더라도 국산차에 비하면 분명히
비싼 가격이었지만 어차피 좀 타다가 중고로 팔아도 충분하리라 생각했고 '외제차 몰고 다니는 잘
나가는 여자'라는 지위를 스스로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그 포장을 바탕으로 더 높은 자리로 가고 싶
다는 생각도 있었다.
"완전 귀엽다"
그는 연신 감탄했다. 대리를 불러서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조잘조잘 내 차에 대해 이야기 했다.
다른 누가 그랬다면 조금 짜증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수가 그러니 그저 귀여웠다. 그리고
물었다.
"넌 차 안 사? 요즘 여자애들 차 없는 남자 싫어하잖아"
그러자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뭐 사정 뻔하겠지. 중소기업에 계약직, 남들 다 간다는 어학
연수 1년 어설프게 다녀오고 뭐 그렇고 그런 뻔한 애들. 그렇지만 난 상관 없었다.
어차피 나도 당장은 결혼 생각도 없고, 아니 오늘 처음 만난 남자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도
웃기지만. 어쨌든.
그리고 그 날 난 현수와 잤다. 원나잇도 처음이었지만, 그런 남자를 내 자취집까지 데려온 것도 처
음이었다. 그리고는 주말을 또 함께 했다. 그를 집으로 바래다주는 길, 차 안에서 현수가 말했다.
"누나, 우리 사귀어요"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난 그리 어렵지 않게 오케이 했다. 왠지 현수를 떠나보내면 이번엔 정말
오래 솔로로 지내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두렵기도 했고, 아니 그보다 그냥
이제는 쉬운 연애를 하고 싶었다.
너무 지긋지긋하게 힘들었던 지난 연애의 후유증일까. 마음 가는대로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그런 연애를 하고 싶었다. 게다가 연하남은 처음이었다. 귀엽고, 착한 것 같고…
그렇게 3개월을 사귀었다. 주변의 의견은 반반이었다. 아니, 친하고 착한 애들은 "연하남이라니 너
은근 능력있네" 하며 웃어주었고, 어떤 애들은 "슬슬 결혼까지 생각할 나이인데…좀…" 그러면서
신경을 은근히 긁어대기도.
그런 어느 날 그가 처음으로 자기 집을 보여주겠노라 했다. 처음 3일간,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낸 시간
이후로 우리는 서로의 집에 간 적이 없다. 특히 그는 항상 내가 집에 바래다주고 간다고 해도 부득불
말리며 우리 집까지 함께 내 차를 타고 와서 다시 집으로 갔다.
그리고 그의 집에 함께 가서 난 너무나 놀랐다. 너무 놀라서 솔직히 배신 당한 기분까지 들었다.
"왜 이제껏 말 안 했어?"
"…누나가 물어본 내용에 내가 답 안 한거 있었어?"
주상복합 20층 건물의 최상층 150평 펜트하우스. 그의 명의로 된 차만 네 대고 그 중 세 대가 수입차
였다. 물론 같은 수입차라고는 해도 내 차와는 클래스가 다른 수퍼카들. 성원 그룹 오너의 손자이자,
성원 건설 사장의 막내 아들… 쉽게 말해 재벌 3세.
그런 그가 도대체 왜 자신의 신분(?)을 숨겨가면서 중소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지도 궁금했고 무엇
보다 이제껏 그런 사실을 감춘 이유도 궁금했다.
그저 날 잠깐 가지고 놀 생각이라서 그랬나? 아니면 부자집 아들내미라고 하면 내가 뭐 돈만 보고
덤벼들 것 같아보이기라도 했나? 하지만 그는 정색을 하며 아니라고 했다.
"난 누나한테 거짓말 한 거 하나도 없어. 분명히 중소기업에서 계약직을 일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누나한테 내가 우리 가족 사항에 대해 거짓말한 거 하나라도 있어?"
그래, 없지. 삼형제 중에 막내이고 집에서 따로 나와 혼자 자취하며, 작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고 뭐
자세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거짓말을 한 것은 없지. 그래도 이상해.
"사람들 마음 다 비슷한거 아닌가?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은 누구나 있는 거고, 굳이 그걸
말하지 않을 수 있다면 최대한 말 안 하는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야?"
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 솔직히 사귀는 남자가 부자집 아들이라는 사실이 싫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왜 그걸 굳이 숨겼을까. 혹시 뭐 그 흔한 삼류 드라마에 나오는 혹시 돈 보고
덤벼드는 여자일까 싶어 그에 대한 시험이라도 한 건가 싶었다.
"누나 그런 여자 아니잖아. 나 처음 만난 날도 나 되게 후줄근 하게 입었는데도 그냥 오케이 한 거고.
근데 왜 내가 그랬겠어. 단지 내가 말을 안 한건, 누나가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혼자 마음 접을까봐,
그런게 싫고 겁나서 그랬어. 생각보다 그런 여자 많아. 내가 부자집 아들내미라고 하면, 어떤 여자는
마냥 좋아라 하지만 또 어떤 여자들은 '나 같은게 뭘' 하면서 혼자 마음 접는 여자들도 많다고"
정말일까 싶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솔직히 그랬을 것 같다. 돈 많고 잘 생기고 막내 아들에 아직
나이도 창창한 남자가 뭐가 아쉬워 나같은 여자랑 진지하게 만나겠나.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우울
해지기도 하고, 조금 마음이 풀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나한테 제대로 안 밝힌 거 제대로 사과해"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꿈같은 생활이 펼쳐졌다. 드라마 속 신데렐라가 남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불과 반나절만에 3천만원 가까운 돈을 나에게 썼다. 명품이라곤 전 남자친구가 어렵게 선물한 지갑
하나 뿐이던 나에게 그는 머리부터 발 끝까지 명품으로 도배를 해줬다. 그나마 내가 평소 좋아하는
스타일에 맞춰 지르다보니 그 정도에서(?) 멈춘 것이지 돈 쓸 기세만 보면 3천이 아니라 3억도 쓸
듯 했다.
"나 부담스러워 솔직히. 그리고 내가 이런 선물 받을 자격이 있는지도 의문이고…"
선물을 다 받아놓고 이런 소리하는게 너무 가식적으로 보일지도 몰랐지만 정말이었다. 결재를 할
때마다 민망할 정도로 계속 난 그를 말렸고, 그는 그럴 때마다 웃으며 질렀다.
"이 돈, 남의 돈 아니야. 누나한테 지른거, 전부 내가 번 돈으로 산 거야"
그 말이 사실이라 해도 어차피 생활비나 지금 사는 집 같은 것은 부모님 돈일테니, 그게 그거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리고 내가 왜 이러냐고 묻자 현수는 말했다.
"그냥…그러고 싶어. 부자집 아들내미 노릇 좀 하는게 뭐 어때서"
언제나 후드티에 카고바지, 구멍 뚫린 청바지나 입고 다니던 그가 2천만원짜리 수트를 입은 모습은
정말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 느낌이었다.
그날 밤, 특 1급 호텔에도 딱 두 개 뿐이라는 최고급 스위트룸에서 현수와 잤다. 람보르기니에 올라
신호에 걸릴 때마다 사람들 시선을 받으며 오고, 호텔 스파에서 쌓인 피로를 풀고, 비싼 밥을 먹고.
…그리고 그날 난 집에서 따로 나와 살고 왜 또 엉뚱한(?)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줄 알게 되었다.
현수는 다른 형제들과 어머니가 달랐다. 직설적으로 말해 현수의 어머니는 세컨드였다. 그 어머니가
받은 수많은 모욕과, 겨우 호적에 올리기는 했지만 자라면서 받은 수많은 차별에 의해 그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대단했다.
…그래도 "사람이 밉지 돈이 미운건 아니잖아. 찜찜한게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이라는 나름 편한
논리로 지금의 생활을 하고 있단다. 집도 차도 마음껏 고르고… 그래, 차라리 솔직해서 좋다고 생각
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 일도 안 하고 놀고 먹으면 인간 쓰레기 취급 당할게 뻔하고, 그렇다고 일거수
일투족 감시 당할게 뻔한 성원 그룹 계열사에 낙하산으로 가자니 그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스스로
일자리를 알아봤는데…
자리가 없었단다. 대학생활 내내 놀기만 했으니 학점도 별로고 토익점수도 별로고 특별한 자격증도
없고, 맨날 야근하는 빡센 회사는 가고싶지 않으니까-그 정도로 절박할 이유도 없는 아이기도 하고-
갈 곳이 꽤나 뻔해지더란다.
그 말을 듣자 왠지 좀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어차피 나와는 입장이 다르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자 그러려니 싶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지금 일하는 회사는 마음에 들어. 다들 사람도 좋고, 일도 재미있고. 다음 달에 원래 계약
만료인데, 사장님이 정규직 전환도 고려한다고 하고"
"회사 사람들은 너에 대해 전혀 몰라?"
"맨날 이 꼴로 다니는데 누가 알겠어"
서민 코스프레. 내 말에 그는 크게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했다. 자기가 하고 있는 행동이 조금만
삐딱하게 보면 아주 반감 살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 안다고 했다.
"그런데 뭐? 내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울 회사에서 내 몫은 충분히 한다고. 그리고 나 아니면
능력 있는 다른 누가 성원 기업에서 대기업 직원입네 하면서 인생 멋지게 살 수 있는 기회, 핏줄로 뺏는
거보다는 지금이 훨씬 낫잖아. 또 내가 재벌 3세라고 말하면 우리 회사 누가 믿어나 주겠어?"
그러고보니 정작 그 본인은 그 흔한 명품 하나 없었다. 요즘에는 남자들도 그런거 하나쯤은 다들 갖고
다니지 않느냐는 말에 "내가 명품이잖아" 라고 웃으며 받는 그. 하기사 재벌 3세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생각이냐고 묻자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아버지도 일선
에서 물러날테고 그때가 오면 더이상 집에 손 벌릴 수도 없을텐데 다른 형제들의 견제 탓에 성원 그룹
내에서 뭔가를 할 수는 없고, 사업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실무를 좀 배워놓으면, 나중에 사업을 해도 현장을 아는 사장님이 되지 않겠어?"
…그와 나는 내일 여행을 떠난다. 징검다리 휴일이라고 남들 다 쉬는 날에도 출근하고, 월요일에 월차
내는 것에 눈치를 보고, 겨우겨우 휴가에 싸인 해준 부장님께 고맙다며 애교까지 떠는 재벌 3세인 그와
함께.
그제는 람보르기니, 오늘은 포르쉐 카이엔을 타고 말이다. 그런 비싼 차 없고, 재벌 3세가 아니라도 좋다.
그가 이대로 변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편하잖아"
난 그저 피식 웃으며 "잘 다녀와"라는 말로 그를 출근길로 떠나보낸다. 다시 침대에 누워, 닫힌 문 너머
출근하고 있을 내 남친의 이해할 수 없는 서민 코스프레에 또 한번 웃는다.
'재밌어'
그를 만난 것은 평소 즐겨가던 라운지 바 '클럽A'에서였다. 과거 한때 '좀 놀 줄 안다'라는 사람들 사이
에서 나름 핫 플레이스일 때도 있었지만 이젠 "어? 거기 아직도 있어? 안 망했어?" 소리를 들을 정도로
'추억의 그때 그곳'이 되어버린 그 가게.
지난 금요일, 퇴근길에 아무 이유없이 너무 우울해서 간만에 옛날 생각하며 기분전환이나 하려고 간
그 곳에서 현수를 만났다.
편하게 후드티에 카고 바지를 입은 그는 혼자 칵테일을 몇 잔이나 마시며 음악에 맞춰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고 있었다. 그런 그가 귀여웠다. 몇 번이나 힐끔 거리며 그의 시선을 끌자 그가 먼저 다가왔다.
"혼자 오셨으면 같이 마셔요"
목소리도 좋았다. 그러라고 했다. 이미 살짝 알딸딸해진 상황에서 우리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바로
친하게 말도 놓고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장현수라 이름을 밝힌 그는 29살이라고 했다. 작은 중소기업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중이고, 이 가게는
예전에는 참 자주 왔는데 몇 년 만에 괜히 생각나서 퇴근길에 잠깐 들렀다고 했다.
내가 서른 한 살이라고 하자 그는 정말 놀란 얼굴로 "아무리 봐도 스물대여섯 이상으로는 안 보이는데"
라며 "누나 완전 동안이네요" 라는 말로 내 마음을 녹였다. 솔직히 서른 넘은 직후부터 급격히 피부가
쳐지기 시작해서 팔자 주름이 선명한게 요즘 최대의 고민인 나로선 정말 고마운 말이었다. 설령 빈 말
이라도.
음악 취향도 비슷하고, 조곤조곤 부드러운 어조와 정감가는 표현, 귀여운 얼굴이 꽤 마음에 들었다.
물론 마음에 들었다고 해서 쉽게 흔들리는 그런 내가 아니지만, 참 조심스러우면서도 마치 착한 동생
처럼 다정다감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어쩌면 내가 너무 외로워서 였는지도.
정말 하늘에 맹세코 이상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 새삼 '내가 남자랑 마지막으로 잤던게 언제였지'
라는 생각을 해봤다. 전 남자친구 영현 오빠랑 헤어지고 거의 1년 반을…아, 아니다. 지훈이랑 작년 겨
울에 잤구나. 그러고 보면 대충 반년 좀 더 됐나.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급속히 말이 없어진 나에게 현수가 물었다.
"술 많이 마셨으면 우리 그만 마실까요?"
"헐, 이거 누나 차에요?"
세워놓은 내 차를 보고 그가 감탄했다. 내 첫 직장이었다. 수입차 회사였고, 연봉도 꽤 괜찮았다. 4년
일했고 이런저런 프로모션에 최저가 마진 적용해서 몇 대가 파격적인 가격에 나온 것을 뒤도 안돌아
보고 질렀다. 너무너무 귀여운 드림카였으니까. 물론 아무리 싸게 샀더라도 국산차에 비하면 분명히
비싼 가격이었지만 어차피 좀 타다가 중고로 팔아도 충분하리라 생각했고 '외제차 몰고 다니는 잘
나가는 여자'라는 지위를 스스로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그 포장을 바탕으로 더 높은 자리로 가고 싶
다는 생각도 있었다.
"완전 귀엽다"
그는 연신 감탄했다. 대리를 불러서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조잘조잘 내 차에 대해 이야기 했다.
다른 누가 그랬다면 조금 짜증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수가 그러니 그저 귀여웠다. 그리고
물었다.
"넌 차 안 사? 요즘 여자애들 차 없는 남자 싫어하잖아"
그러자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뭐 사정 뻔하겠지. 중소기업에 계약직, 남들 다 간다는 어학
연수 1년 어설프게 다녀오고 뭐 그렇고 그런 뻔한 애들. 그렇지만 난 상관 없었다.
어차피 나도 당장은 결혼 생각도 없고, 아니 오늘 처음 만난 남자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도
웃기지만. 어쨌든.
그리고 그 날 난 현수와 잤다. 원나잇도 처음이었지만, 그런 남자를 내 자취집까지 데려온 것도 처
음이었다. 그리고는 주말을 또 함께 했다. 그를 집으로 바래다주는 길, 차 안에서 현수가 말했다.
"누나, 우리 사귀어요"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난 그리 어렵지 않게 오케이 했다. 왠지 현수를 떠나보내면 이번엔 정말
오래 솔로로 지내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두렵기도 했고, 아니 그보다 그냥
이제는 쉬운 연애를 하고 싶었다.
너무 지긋지긋하게 힘들었던 지난 연애의 후유증일까. 마음 가는대로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그런 연애를 하고 싶었다. 게다가 연하남은 처음이었다. 귀엽고, 착한 것 같고…
그렇게 3개월을 사귀었다. 주변의 의견은 반반이었다. 아니, 친하고 착한 애들은 "연하남이라니 너
은근 능력있네" 하며 웃어주었고, 어떤 애들은 "슬슬 결혼까지 생각할 나이인데…좀…" 그러면서
신경을 은근히 긁어대기도.
그런 어느 날 그가 처음으로 자기 집을 보여주겠노라 했다. 처음 3일간,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낸 시간
이후로 우리는 서로의 집에 간 적이 없다. 특히 그는 항상 내가 집에 바래다주고 간다고 해도 부득불
말리며 우리 집까지 함께 내 차를 타고 와서 다시 집으로 갔다.
그리고 그의 집에 함께 가서 난 너무나 놀랐다. 너무 놀라서 솔직히 배신 당한 기분까지 들었다.
"왜 이제껏 말 안 했어?"
"…누나가 물어본 내용에 내가 답 안 한거 있었어?"
주상복합 20층 건물의 최상층 150평 펜트하우스. 그의 명의로 된 차만 네 대고 그 중 세 대가 수입차
였다. 물론 같은 수입차라고는 해도 내 차와는 클래스가 다른 수퍼카들. 성원 그룹 오너의 손자이자,
성원 건설 사장의 막내 아들… 쉽게 말해 재벌 3세.
그런 그가 도대체 왜 자신의 신분(?)을 숨겨가면서 중소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지도 궁금했고 무엇
보다 이제껏 그런 사실을 감춘 이유도 궁금했다.
그저 날 잠깐 가지고 놀 생각이라서 그랬나? 아니면 부자집 아들내미라고 하면 내가 뭐 돈만 보고
덤벼들 것 같아보이기라도 했나? 하지만 그는 정색을 하며 아니라고 했다.
"난 누나한테 거짓말 한 거 하나도 없어. 분명히 중소기업에서 계약직을 일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누나한테 내가 우리 가족 사항에 대해 거짓말한 거 하나라도 있어?"
그래, 없지. 삼형제 중에 막내이고 집에서 따로 나와 혼자 자취하며, 작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고 뭐
자세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거짓말을 한 것은 없지. 그래도 이상해.
"사람들 마음 다 비슷한거 아닌가?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은 누구나 있는 거고, 굳이 그걸
말하지 않을 수 있다면 최대한 말 안 하는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야?"
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 솔직히 사귀는 남자가 부자집 아들이라는 사실이 싫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왜 그걸 굳이 숨겼을까. 혹시 뭐 그 흔한 삼류 드라마에 나오는 혹시 돈 보고
덤벼드는 여자일까 싶어 그에 대한 시험이라도 한 건가 싶었다.
"누나 그런 여자 아니잖아. 나 처음 만난 날도 나 되게 후줄근 하게 입었는데도 그냥 오케이 한 거고.
근데 왜 내가 그랬겠어. 단지 내가 말을 안 한건, 누나가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혼자 마음 접을까봐,
그런게 싫고 겁나서 그랬어. 생각보다 그런 여자 많아. 내가 부자집 아들내미라고 하면, 어떤 여자는
마냥 좋아라 하지만 또 어떤 여자들은 '나 같은게 뭘' 하면서 혼자 마음 접는 여자들도 많다고"
정말일까 싶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솔직히 그랬을 것 같다. 돈 많고 잘 생기고 막내 아들에 아직
나이도 창창한 남자가 뭐가 아쉬워 나같은 여자랑 진지하게 만나겠나.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우울
해지기도 하고, 조금 마음이 풀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나한테 제대로 안 밝힌 거 제대로 사과해"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꿈같은 생활이 펼쳐졌다. 드라마 속 신데렐라가 남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불과 반나절만에 3천만원 가까운 돈을 나에게 썼다. 명품이라곤 전 남자친구가 어렵게 선물한 지갑
하나 뿐이던 나에게 그는 머리부터 발 끝까지 명품으로 도배를 해줬다. 그나마 내가 평소 좋아하는
스타일에 맞춰 지르다보니 그 정도에서(?) 멈춘 것이지 돈 쓸 기세만 보면 3천이 아니라 3억도 쓸
듯 했다.
"나 부담스러워 솔직히. 그리고 내가 이런 선물 받을 자격이 있는지도 의문이고…"
선물을 다 받아놓고 이런 소리하는게 너무 가식적으로 보일지도 몰랐지만 정말이었다. 결재를 할
때마다 민망할 정도로 계속 난 그를 말렸고, 그는 그럴 때마다 웃으며 질렀다.
"이 돈, 남의 돈 아니야. 누나한테 지른거, 전부 내가 번 돈으로 산 거야"
그 말이 사실이라 해도 어차피 생활비나 지금 사는 집 같은 것은 부모님 돈일테니, 그게 그거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리고 내가 왜 이러냐고 묻자 현수는 말했다.
"그냥…그러고 싶어. 부자집 아들내미 노릇 좀 하는게 뭐 어때서"
언제나 후드티에 카고바지, 구멍 뚫린 청바지나 입고 다니던 그가 2천만원짜리 수트를 입은 모습은
정말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 느낌이었다.
그날 밤, 특 1급 호텔에도 딱 두 개 뿐이라는 최고급 스위트룸에서 현수와 잤다. 람보르기니에 올라
신호에 걸릴 때마다 사람들 시선을 받으며 오고, 호텔 스파에서 쌓인 피로를 풀고, 비싼 밥을 먹고.
…그리고 그날 난 집에서 따로 나와 살고 왜 또 엉뚱한(?)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줄 알게 되었다.
현수는 다른 형제들과 어머니가 달랐다. 직설적으로 말해 현수의 어머니는 세컨드였다. 그 어머니가
받은 수많은 모욕과, 겨우 호적에 올리기는 했지만 자라면서 받은 수많은 차별에 의해 그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대단했다.
…그래도 "사람이 밉지 돈이 미운건 아니잖아. 찜찜한게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이라는 나름 편한
논리로 지금의 생활을 하고 있단다. 집도 차도 마음껏 고르고… 그래, 차라리 솔직해서 좋다고 생각
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 일도 안 하고 놀고 먹으면 인간 쓰레기 취급 당할게 뻔하고, 그렇다고 일거수
일투족 감시 당할게 뻔한 성원 그룹 계열사에 낙하산으로 가자니 그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스스로
일자리를 알아봤는데…
자리가 없었단다. 대학생활 내내 놀기만 했으니 학점도 별로고 토익점수도 별로고 특별한 자격증도
없고, 맨날 야근하는 빡센 회사는 가고싶지 않으니까-그 정도로 절박할 이유도 없는 아이기도 하고-
갈 곳이 꽤나 뻔해지더란다.
그 말을 듣자 왠지 좀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어차피 나와는 입장이 다르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자 그러려니 싶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지금 일하는 회사는 마음에 들어. 다들 사람도 좋고, 일도 재미있고. 다음 달에 원래 계약
만료인데, 사장님이 정규직 전환도 고려한다고 하고"
"회사 사람들은 너에 대해 전혀 몰라?"
"맨날 이 꼴로 다니는데 누가 알겠어"
서민 코스프레. 내 말에 그는 크게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했다. 자기가 하고 있는 행동이 조금만
삐딱하게 보면 아주 반감 살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 안다고 했다.
"그런데 뭐? 내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울 회사에서 내 몫은 충분히 한다고. 그리고 나 아니면
능력 있는 다른 누가 성원 기업에서 대기업 직원입네 하면서 인생 멋지게 살 수 있는 기회, 핏줄로 뺏는
거보다는 지금이 훨씬 낫잖아. 또 내가 재벌 3세라고 말하면 우리 회사 누가 믿어나 주겠어?"
그러고보니 정작 그 본인은 그 흔한 명품 하나 없었다. 요즘에는 남자들도 그런거 하나쯤은 다들 갖고
다니지 않느냐는 말에 "내가 명품이잖아" 라고 웃으며 받는 그. 하기사 재벌 3세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생각이냐고 묻자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아버지도 일선
에서 물러날테고 그때가 오면 더이상 집에 손 벌릴 수도 없을텐데 다른 형제들의 견제 탓에 성원 그룹
내에서 뭔가를 할 수는 없고, 사업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실무를 좀 배워놓으면, 나중에 사업을 해도 현장을 아는 사장님이 되지 않겠어?"
…그와 나는 내일 여행을 떠난다. 징검다리 휴일이라고 남들 다 쉬는 날에도 출근하고, 월요일에 월차
내는 것에 눈치를 보고, 겨우겨우 휴가에 싸인 해준 부장님께 고맙다며 애교까지 떠는 재벌 3세인 그와
함께.
그제는 람보르기니, 오늘은 포르쉐 카이엔을 타고 말이다. 그런 비싼 차 없고, 재벌 3세가 아니라도 좋다.
그가 이대로 변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