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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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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통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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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 바늘이 살갖을 뚫고 혈관 속으로 파고 든다. 주사기 피스톤이 끝까지 들어가고, 혈관을 따라
핏 속으로 약 기운이 퍼져가는 것이 느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좋은 시간 보내자구"

주사 바늘을 빼낸 윤정이 미소 지으며 내 목을 옆으로 돌려놓았다. 가벼운 호흡 두어번을 할 시간이
흐르자 박동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한다. 눈에 들어온 벽 시계의 시계 바늘이 조금 희미해질 무렵,
코에서 희미하게 새어나오던 콧바람은 조금씩 격해지고, 주사를 놓은 팔에서는 연기가 나며 녹아내
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허어어업"

숨쉬기가 어려워지고, 오래 달리기를 한 직후 마냥 강하게 심장을 때리는 충격이 전해져 온다. 아프
지만 달콤한 이 느낌, 발가락 끝이 저릿하더니 발바닥이 뜨거워지고 조금씩 몸에 열이 오른다. 겨우
심호흡으로 참아온 숨을 뱉어내고 한줄기 공기를 답답해진 폐 속으로 빨아들이자 머리부터 감전이
라도 된 듯한 전기가 전신을 한번 훑어내린다. 

그에 이어 쿵-쿵-쿵- 귓 속에서 소리가 울릴 정도로 격하게 맥박이 뛰며 열이 오른 몸이 하얗게, 새
하얗게 녹아내리듯 극도의 쾌감이 정말이지 내 모든 것을 분해하듯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그 쾌감에
짐승처럼 으으으 하는 신음소리를 흘리며 침대보를 쥐어짜고 온 몸을 비비꼰다. 그런 내 다리를 붙
들고는 알몸을 쓸어내리는 윤정.

"하아아아, 하아아아"

이미 눈 앞에는 오만색의 꽃들이 피어나고 눈이 멀어가는 듯 희미해질 무렵 아랫도리에서 또 다른
이상 감각이 느껴진다. 아득해지는 의식 속에서 그것이 윤정의 입술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난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 




"허억, 허억…"

정신을 차릴 무렵 우리는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아마 꽤 오랜 시간. 윤정은 자신의 가슴을 쥐
어뜯을 듯 매만지며 내 위에서 몸을 흔들고 있었다. 지치고 한없이 나른하지만, 어쩐 일인지 나의
그것만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우람한 상태가 되어 그녀의 밑을 파고 들고 있다. 온 몸이 땀 범벅이 
었고, 눅눅한 침대는 그저 한없이 끼익끼익하는 불쾌한 소리만을 질러대고 있었다.

"우움"

정신을 잃은 사이 구토를 한 듯 입 안에서는 씁쓸한 신 맛이 났다. 하지만 내 위의 윤정은 그런 것
에도 아랑곳않고 나의 혀와 입술을 탐했다. 

그 와중 나는 아랫도리에서 묵직한 통증 속의 장렬한 쾌감을 느꼈고, 그 느낌을 꿈결 속에서도 몇
번인가 느꼈던 것만 같다. 힘차게 나의 그것이 그녀의 안에 수억의 분신을 쏟아내었고, 나는 그녀
에게 피임에 대해 물어보려 했지만 내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라고는 그저 "어…" 하는 낮은 탄식 뿐
이었다. 




정신을 차린 것은 오후 5시 반. 극심한 추위를 느껴 깼다. 윤정은 내 옆에서 역시 알몸 상태로 마냥
널부러져 자고 있다. 그녀와 나의 아랫도리에는 한없이 쏟아낸 정액이 털에 엉겨붙어 있었다.

그보다 남극 한복판 어디에라도 떨어져 있는 것만 같은, 이가 사정없이 달달 떨리는 추위를 참기가
어려웠다. 다리 핏줄 속, 관자놀이 속에서 수천만마리의 개미들이 움직이는 것만 같은 엄청난 간지
러움을 느껴 몸을 긁으려 했지만 미리 윤정은 나의 손톱을 짧게 깎아놓은 상태였다. 

"후우우우"

이불을 둘러싸고 몸을 웅크린 채 길게 후우후우 심호홉을 하고 있으려니 눈을 뜬 윤정이 그대로
엎드린 채 고개만 돌려 웃으며 말했다.

"넌 정말 최고야"
"뭐가"
"정말 최고야. 나 완전 미칠 뻔 했어"
"후우, 하아아, 후우. 미친거 맞지 않냐? 안에다 해버렸잖아"
"괜찮아. 나 약 먹으니까"
"아 그래. 그보다 보일러 좀 올려봐. 너무 추워"
"금방 괜찮아져. 참아. 좀 깨면 밥 먹자" 




하도 온 몸을 웅크린 채 달달 떨었더니 전신이 다 뻐근하다. 숟가락 들 힘도 없건마는, 그녀가 모처럼
신이 나서 한 밥차림을 보자 식욕이 당겼다. 미역국에 동그랑땡에 소세지에 시금치… 

"엄마 다녀가셨냐?"
"어제. 근데 내가 한 건지 울 엄마가 한 건지 어떻게 알아?"
"딱 보면 알지. 너가 할 줄 아는 요리라고는 볶음밥이랑 라면 밖에 없다며"
"그래도 미역국은 내가 끓인거야"
"어, 맛있네"
"주사 맞고 나서는 피 맑게 해야 돼"
"몸 걱정하는 사람이 참…흐"

우리는 그저 실없이 웃었다. 작은 거실 창으로 노을녘의 햇살이 쏟아져 밥상을, 그리고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을 금빛으로 물들인다. 한참 아무 말도 없이 식사를 계속하던 우리. 난 그 침묵을 깨고, 참
뜬금없지만 토해내듯 한 마디를 했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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