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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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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상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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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일어나, 지각하겠어"

엄마의 잔소리에 오늘도 어기적 어기적 일어난다. 새벽 3시 반이 넘도록 게임을 했으니 피곤한 것도 당연
하다. 간신히 상체만 일으켜 한숨을 푹 내쉰다. 접힌 뱃살이 부족한 운동량을 설명해준다.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아 얼른 씻고 밥 먹어!" 하고 재차 독촉하는 엄마의 소리에 그제사 "…알았어" 하고 짜증
섞인 대답과 함께 침대에서 빠져나온다.


"새벽까지 밤새 컴퓨터나 하니 밥맛이 있을 리가 있나"

밥맛이 없어 깨작깨작 대고 있노라니 엄마의 핀찬이 쏟아진다. 그저 엄마는 세상 모든 부정직인 일은 다
컴퓨터 탓으로 몰고간다. 뭐 사실 그게 꼭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고기 반찬이라도 하나 있으면 안 그러지"
"나이 스무살도 넘은 놈이 반찬투정하는게 자랑이다"

억지로 두어 숟가락 더 떠먹다가 적당히 일어선다.

"왜 그만먹어"
"입맛 없어. …반찬도 별로고"
"으이구"

방으로 돌아와 대충 오늘도 누런 카고바지에 지오다노 줄무늬 티에 보세표 야상을 걸친다. 엊그제
입었던 그대로다. 하지만 누가 기억해주는 것도 아니고 뭐 상관없다. 큼지막한 백팩을 메고 거울
앞에 서니 참 찌질이도 이런 상찌질이가 없다. 머리라도 어떻게 해볼까 싶지만 우리 동네 이발소,
미용실은 다 아줌마 아저씨 표라서… 그래도 자르긴 잘라야 할 것 같다. 너무 덮수룩 하다.

"다녀올께"
"잘 다녀와"

설거지를 하는 엄마를 뒤로 하고 집을 나선다.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정신줄 놓고 있노라니 어느새 학교다. 학교 근처로 갈수록 하나
둘씩 이쁜이들이 보인다. 그래 보일 뿐이다. 남들은 연애질이니 뭐니 하지만 다 남의 이야기다.

휴대폰으로 시계를 보노라니 살짝 이른 시간에 도착한 느낌이다. 하지만 딱히 어디에 가 있을 것도
아니니 그저 강의실로 향한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캠퍼스는 참 쓸데없이 넓다. 그래서 더 외롭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외로운 마음은 없지만…무엇을 하던 혼자 돌아다니는 나를 보며 누군가들이
수근거리지 않을까 생각하면 문득 괜히 부끄러워진다. 자격지심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노라니 어느새 강의실이다.

문득 목마름을 느껴 강의실 옆 자판기에서 뭐라도 하나 빼마시려니 죄 품절이다. 그나마 남아있는
것 중에서 매실 음료를 꺼내 마신다. 강의시간 전,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이 청량함이 내 유
일한 학교 생활의 즐거움이다.


강의실에는 먼저 온 여학생 하나 뿐이다. 교양 수업이라 모르는 애다. 하기사 전공 수업이라고 해보
아야 어차피 인사치레 뿐인 것을. 것두 강의실에서나 인사를 하지 캠퍼스 안에서는 그냥 쌩까는 애
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난 교재를 꺼내놓고 휴대폰을 쭈물딱 거린다. 남들이 친구들과 재잘재잘 히히낄낄 대는 동안, 나는
그저 휴대폰 하나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래도 외롭지는 않다. 그저 남의 시선이 좀 신경쓰일 뿐이지.

이윽고 시간이 흐르자 하나둘씩 자리가 찬다. 조용했던 강의실은 시끌벅적해진다. 이 시끄러움 속
에서 내가 내는 소음은 그저, 내 아주 작은 콧바람 소리 뿐이다. 군중 속의 외톨이라는 것이 이런 것
일까.

드륵

누군가 내 왼쪽 옆 자리에 앉는다. 살짝 나보다 앞 자리였기에 흰 맨다리가 시야에 잡힌다. 슬슬
아닌 척 시선을 들어 몰래 옆을 훑는다. 예쁘다. 좋은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온다. 잠깐 기분이 좋아
지지만 누군가는 이런 애랑 연애도 하고, 잠도 자겠지 생각을 하니 다시 우울해진다.

그러고 있노라니 곧 교수님이 들어오셨고, 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다가 다시 꺼내어
책상 옆에 놓았다. 딱히 누군가 나에게 연락을 할 일도 없지만 말이다.



두 시간의 강의를 듣고, 화장실에 들렀다 나오니 어느새 살짝 이른 점심시간이다. 11시 45분. 햇살은
참 찬란하고 날씨 한번 끝내준다. 이런 날 어디 놀러나 다니면 좋겠지만 말만 그렇지 어디 놀러다닐
재주도 경험도 친구도 돈도 없다. 흐, 쓰레기 새끼.

그보다 배가 고파오기 시작한다. 그래, 배고프다. 윤학이가 같이 학교에 다닐 때는 그래도 같이 밥을
먹을 사람이라도 있지만 녀석이 학교에 안 나오기 시작한 이후로는 같이 밥 먹을 사람도 없다. 가끔
교양 수업 때 같은 과 동기들이랑 함께 먹을 때도 있긴 한데, 어차피 아무도 나에게 말을 안 걸고 나
역시 그들과 함께 하는 자리가 부담스럽다.

어쩌지, 하고 고민하다 난 결국 학식을 포기하고 도서관 내 매점으로 향한다. 그나마 나같은 놈들이
좀 있는 곳이다. 매점 옆 한 켠에, 쓰레기통 옆에서 주르륵 서서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PC방이나 도
서관으로 향하는 것이다. 고시 준비하는 선배들이야 시간이 아깝다는 핑계요, 복학생들이야 친구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치지만 난 도대체 뭔가. 자꾸 자괴감이 들지만 이 우울한 마음은 뱃 속의 꼬
르륵 소리에 묻힌다.

컵라면에 바나나 우유 하나, 900원짜리 볶음김치 김치 한 팩을 사서 먹는다. 어차피 이러면 학식이랑
별반 돈 얼마 차이도 안 나니 차라리 학식 먹는게 낫지만 그래도 혼자 먹는건 왠지 부담스럽다.

계산을 마치고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잠시 기다리고 있노라니 오 맙소사, 우리 과 애들이다.

"어! 영훈! 혼자 먹는거야?"

경아를 비롯해 그 그룹 여자애 셋과 주형, 찬희 이렇게 다섯이 매점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들은 날
보며 말을 걸었다. 혼자 우울하게 라면을 쳐먹는 모습이 부끄러웠다. 살짝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평소 같으면 그래도 옆에 같이 라면 먹는 사람이라도 몇 명 있었을텐데 오늘은 나 뿐이다. 씨발.

"어…어. 그냥…얼른…먹으려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들 사이로 스쳐지나가는 표정을 보며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구원한건 경아였다.

"아 맞다, 영훈아, 너두 MT 갈거지?"

MT라니. 난 아무 소리 들은게 없는데. 혹시 지난 주에 나 금요일에 학교 빠졌을 때 나온 말인가?
하지만 MT가 추진되는 것조차 몰랐다고 하면 정말 아무도 말해주는 이 하나 없는 놈-맞는 말이
지만-처럼 보일까봐 짐짓 고민하는 척 했다.

"어…글쎄, 음, 그게 언제라고 했지?"
"5일날. 어때? 갈거지? 응?"
"가자~ 영훈아, 안 가면 뭐해. 응? 가자"

경아랑 현지가 내 팔을 붙들며 가자고 조른다. 행복하다. 오늘 무슨 여복이 이리도 터졌나. 우리 과
최고의 귀요미 둘이 가자고 조르니 나도 모르게 "그래, 알았어" 소리가 절로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안 가면 출석처리 안 되는 거 알지? 어차피 뭐 주말이라고 특별히 할 것도 없을텐데 와라"

과대표 한주형의 '주말이라고 특별히 할 것도 없을텐데' 라는 말에 겨우 좋아졌던 기분이 싹 가라
앉는다. 하지만 난 억지로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와!"
"좋았어!"

어차피 난 가봐야 꿔다놓은 보릿자루나 될 텐데 뭘 그리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혹시 MT비 삥땅칠
돈이 커져서 좋아하는건가? 어차피 난 가봐야 술도 안 마실테니. 

"어쨌든 그럼 내일 수업 때 보자"
"어"
"영훈아 MT 꼭 가야 돼? 알았지?"
"알았어"

현지의 밝은 표정에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곧이어 가슴이 왠지 쿡 하고 아프다. 나도
쟤들이랑 어울려서 재밌게 대학생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네들은 우르르 매점 안을 휘저
으며 음료수에 물티슈에 뭐에 여튼 하나씩들을 사들고 어디론가 다시 나간다. 

"맨날 라면 같은거 먹지 말고 밥 좀 챙겨먹어라. 이게 뭐냐"

나가면서 주형이 씹쌔가 한 마디 하고 나간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냥 기분 나쁘다. 누구는 밥
먹고 싶지 않나. 라면 맛이 뚝 떨어졌다.


라면을 먹고 도서관에서 오늘도 하릴 없이 시간을 좀 때우노라니 슬슬 강의시간이 되어간다. 아
다 귀찮다. 따스한 햇살에 나도 모르게 나른해진다. 창 밖에서 들려오는 청춘남녀들의 히히호호
즐거운 목소리들. 같은 비싼 돈 내고 대학 생활 하는데 쟤들은 어쩌면 저렇게 즐겁고 나는 어쩜
이렇단 말인가.

난 다시 휴대폰을 꺼내들고 멍청하니 뒤적거리다 힘없이 몸을 일으킨다. 전공수업 시간이다. 차
라리 교양이 난 편하다.



전공수업이라고 해봐야 별 다른 건 없다. 교수님은 강의를 하고, 난 멍하니 그 강의를 듣고 다른
이들 역시 강의를 듣고. 그저 중간중간 서로 수업시간 중에 카톡을 주고 받거나 도란도란 잡담을
할 친구가 나에게는 없다는게 차이라면 차이랄까.

가만히 정신줄 놓고 오후의 춘곤증을 이기고 있노라니 뒤에서 누가 톡톡 건드린다. 여자 과대표
아름이다.

"영훈아, 너 MT 간댔지?"
"어"
"MT비 7만원이니까, 내일까지 내면 돼"
"7만원?"

뭐가 그렇게 비싸. 에효. 난 가도 재미 하나도 없을텐데. 속으로 한숨을 쉬다가 물었다.

"몇 명 가?"
"지금까지는 9명"

뭐? 다 가는거 아니었어?
 
"그거 밖에 안 가?"
"전체 과 MT가 아니라 그냥 끼리끼리 모여서 가는거니깐. 여튼 낼까지 꼭 내야 돼, 알았지?"

순간 좆됐다 싶었다. 난 과 전체 MT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면 뭐 어차피 다들 놀 때 한두명쯤 슥  
빠져도 티도 별로 안 나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나같은 놈들 몇 명이 적당히 어울리면 된다고
생각했는데…꼴랑 9명이라니. 난 지옥을 맛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출석처리 안 된다는 말도 다
구라였구만.

"…어"

머리가 아득해졌다. 그러고보니 그래서 아까 다들 그렇게 좋아했구나. 나같은 호구 하나가 끼면
분담금도 낮아질테니. 그만큼 나를 호구로 본 건가.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그냥 애써 난 좋게 생각
하기로 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그냥, 돈 내고 그냥 적당히 핑계대고 빠지지 뭐. 문득 반찬값 걱정
하던 엄마 얼굴이 떠올랐지만 어쩔 수 없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터덜터덜 집 쪽으로 가기 위해 걷노라니 문득 학교 근처 분식집
앞에 아까의 그 MT크루들이 몰려있었다.

"어, 영훈!"

찬희가 날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생전 안 그러던 놈들이 갑자기 급친한 척을 하니까 부담스럽
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난 그렇게 외로웠던 것일까.

"어"

어떻게 해야할까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무시할 수도 없어 난 그들 쪽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영란이가 물었다.

"우리 떡볶이 먹을건데, 너도 같이 먹을래?"

뜬금없는 제안, 혹시 내가 끼는게 괜한 민폐는 아닐까 싶어 거절하려는 순간 현지가 말했다.

"아까 너 라면으로 때웠잖아. 배고프지 않아? 같이 먹자"

다시 아까 매점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 난 자격지심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녀가 같이 먹자는
소리에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알았어"

자기네 말에 무조건 예스 예스 하는 내 모습이 웃겼던 것일까, 그녀들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얘네들-주형, 찬희, 영란, 현지, 경아-에 대해 난 이중적인 시선을 갖고 있었다.
맨날 보면 생각없이 연예인 이야기나 하고 뭐 꺅꺅 거리기나 해서 생각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그냥
솔직한 마음으로 찬희랑 주형이 뭐 이런 애들이 부럽기도 부러웠다. 이쁜 여자애들이랑 같이 어울
리며 즐거운 대학생활 하는 거 말이다.

나야 아는 노래도 없지만, 함께 노래방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놀러도 가고. 부럽다. 하기사
언제 또 내가 이런 '끼리끼리' MT를 가보겠나.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은 씁쓸한 위로가 되었다.

"여기 맛있지 않니?"
"어, 그러네"

사근사근한 현지가 나를 잘 챙겨주는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에 질투를 느꼈던지 곧바로 주형이가
묻는다.

"근데 너 평소에도 맨날 그럼 점심에 밥 혼자 먹어?"

그걸 꼭 물어야 아냐. 개새끼. 하지만 난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맨날은 아니구…가끔 태현 선배랑 먹을 때도 있는데, 주로 혼자 먹긴 하지"

어떻게든 포장을 하려다가, 그냥 포기했다. 인정했다. 그 말에 주형의 얼굴에 좀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이 지나간 듯 했지만 그건 나만의 생각일까. 그렇지만 곧 영란이 말했다.

"같이 먹을 사람 없으면 우리랑 같이 먹자. 밥 혼자 먹으면 재미없잖아. 너도 맨날 혼자 다니지만
말구, 같이 다니자. 우리랑. 다음 학기 되면 이제 강운이도 군대 가서 없을거고, 아름이도 어학연
수 간다는데…남는 사람끼리라도 뭉쳐야지"
"그래, 맞어. 뭉치자 우리"
"어 알았어"

…얘들 내 생각보다 꽤, 아니 훨씬 좋은 애들이었구나. 난 내 입가가 실룩이는 것을 느꼈다.

"근데 아름이 걔는 어학연수 간다면서 그럼 성택이는 어쩌려고 그러는거야?"
"뭐 정리하고 가겠지"
"성택이도 같이 가지 않을까?"
"걔 영장 나온 걸로 아는데"
"정말? 대박"

아름이가 성택이랑 사귀는 사이였구나. 몰랐었다. 하기사 학과생활 같은 것도 안 하니 뭐 내가 알
길이 있나. 내가 잘 모르는 주제들로 넘어가자 난 다시 떡볶이 먹는데 열중했고…맛있었다. 내가
학교 다닌 이래 먹은 그 어떤 것보다 맛있는 분식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난 쾌재라도 부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현지, 영란, 경아의 폰 번호가
내 폰에 실리다니!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당장 내일부터 뭐 "나 지금 정문 근처인데 어, 식당 근처
에서 보자" 이러면서 같이 밥 먹자고 하기는 좀 거시기해도, 그래도 어쨌든 말이다.

'하아'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걷노라니 문득 길거리 매장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 초라했다. 내가
봐도 찐따 같은데 이런 나와 놀아준 그네들이야말로 착한 애들이지 씨발. 그러고보니 MT 가려면
뭐 옷이라도 이쁘게 입고 가야할 거 같은데. 입을 옷도 없지만. 다시 답답해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난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옷을 훌렁훌렁 벗고 츄리닝 바지에 런닝셔츠만 입고
컴퓨터 의자 앞에 앉았다. 이러다 저녁을 먹고, 중간에 잠깐 인터넷 하고, 다시 게임하다 침대에
누우면 그게 새벽 2시쯤 되겠지.

그때 내 머릿 속에 아까 학교에서의 그 일들이 살짝 스쳐지나갔고 난 하릴없이 게임에 접속하려던
것을 관두었다.

그리고 냉장고에 가서 물 한잔을 마시는데 문득 또다시 현실이 떠올랐다. MT비 7만원에, 비상금
같은거 생각하면 돈 10만원은 들거 같은데. 그리고 뭐 티라도 하나 사입어야 하지 않을까. 하아.

'괜히 간다고 그랬나'

당장 내일까지 돈 7만원 엄마한테 달라고 하기도 미안한데. 머리를 벅벅 긁게 된다. 에이. 괜히
나 혼자 헛바람 들어가서 헛지랄 하는건가. 지금이라도 그냥 못 간다고 할까? 마음이 무겁다.

다시 난 PC 앞에 앉아 게임을 시작했다.



"7만원? 어휴, 1박 2일로 가는거야? 뭐가 그렇게 비싸대니"

엄마는 한숨을 쉬면서도 의외로 쉽게 돈을 내주었다. 그리고는 주의를 주었다.

"너 그런데 가서 술 먹고 막 사고치면 안된다. 알았어?"
"그럴 일도 없어"
"그래도 니가 왠일이라니. 1박 2일로 친구들이랑 놀러도 다 가고"

전체 과 MT도 아니고, 엄마는 친한 애들끼리 가는 MT라니까 조금 좋아하시는 눈치다. 모르는 줄
알았더니 역시 밖에서 새는 바가지인데, 안에서라도 그걸 몰랐으랴. 하기사 맨날 학교 끝나자마자
집에 와서 하루죙일 게임만 하는 새끼한테 뭔 친구가 있겠나, 싶으셨겠지.

"다 그런게 있어"

난 그날 일찍 잠에 들었다. 정말로 간만에, 12시 이전에 잠에 들었다. 내일 학교에 입고 갈 옷도
골라서 챙겨놓고.



언제나처럼 그 우울한 학교가 아니었다. 그저 '친구'가 몇 명 더 생긴 것에 나 혼자 너무 오바하는
건 아닌가 하고 스스로 브레이크도 걸어보았지만, 어쨌든 설레이는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일찍 준비하고, 아침 밥도 한 그릇 다 비우고-물론 내 반찬투정에 오늘은
계란말이라도 부친 덕분이지만- 학교에 오니 오늘은 날씨도 상쾌했다. 기분도 정말 좋았다.

강의가 끝나기 직전까지는.



강의가 끝나고 다들 자리에서 일어날 무렵, 아름이가 나를 불렀다.

"영훈아, 잠깐만"

다들 말하기 곤혹스러워하고, 아름이가 결국 총대 맨다는 표정으로 다가올 때부터 난 대충 상황이
짐작이 갔다.

"어"

아름이는 머리를 긁적이다 말했다.

"MT 가는거 말이야…음, 원래 우리가 딱 9명이었거든. 여기 우리랑, 성택이랑 윤미랑. 그렇게 딱
9명. 근데 어제 저녁에 동진 선배랑 소라랑 윤정이네 그, 걔 이름 뭐지? 아, 명원이. 걔네도 막 가고
싶다고 해서… 우리가 렌트한 차가 12인승인데…"

결국 한 명이 빠져줘야 한다, 그거구만. 명단이 딱 그냥 우리 과에서 잘 놀고 재미있고 성격 좋은
그런 사람들이다. 흐.

"아, 그럼 한 명이 빠져야 되는거야? 알았어, 그럼 내가 빠질께"

난 쿨한 표정으로 먼저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렇지. 내가 끼어서 뭐하게. 다들 재밌게 노는
데 나만 구릴텐데. 놀지도 못하는 새끼가.

다들 미안한 표정과 어색한 표정이 뒤섞인 채로 "미안하다 영훈아. 대신에 담에…" 어쩌고 하면서
위로와 사과의 말을 했다.

조금, 비참했지만 그렇게까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사실. 돈도 굳었고.



결국 점심시간이 되어서도 그 현지네 그룹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학식
에서 먹고 있다가 우연히 그네들과 조우해서 같이 조인하는 상황이라도 왔으면 하는 마음에 혼자
학식에서 밥을 먹었지만 결국 그들은 보지 못했다.

"흐"

뭐 결국 이렇게 되는게 수순이겠지.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에서 소변을 누고 화창한 햇살을 맞으며
난 다시 캠퍼스로 나왔다. 살짝 현기증을 느껴 주변을 돌아보다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
찬란한 눈부심에 순간 눈이 멀었다가 다시 눈을 끔뻑이며 겨우 정신을 되찾노라니…

이토록 알록달록 즐겁고 아름다운 청춘의 캠퍼스가, 내 눈에는 그저 군데군데 구멍 뚫린 잿빛의
흑백사진처럼만 보였다.

난 다시 터덜터덜, 다음 수업이 있는 510호 강의실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혼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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