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703

금요일 밤

$
0
0


"자연씨도 얼른 퇴근해"
"네, 과장님 주말 잘 보내세요"
"그래요, 그럼 자연씨도 주말 보내요"
"네에"

사업 결산보고서 때문에 함께 야근을 하던 최 과장님까지 퇴근하고 나니 이제 사무실은 나 혼자 뿐이다.
나도 모르게 타이핑하던 손이 느려진다. 졸립고 피곤하고 우울하다.

어제도 오늘도 사무실에서 맨 마지막까지 야근이다. 울고 싶을 정도다. 일이 많아도 너무 많다. 사람을
빨리 뽑아줬으면 좋겠는데 위에서는 차일피일 미루기만 한다. 어제도 집에 가서 그냥 울었다. 너무 힘들
어서 다 관두고 싶은데, 관둘 수가 없으니까. 광명 집에서는 집 주인이 보증금도 올려달라고 했다면서
은근히 엄마가 돈 이야기를 꺼낸다. 난 어떻게든 마련해보겠다며 내 결혼자금이 든 통장을 떠올렸다.

머리를 쓸어올렸다. 현기증이 살짝 났다. 문득 새삼스레 사무실 형광등이 침침하다고 느꼈다. 눈도 아주
뻐근하다. 렌즈 낀 눈 주변을 가볍게 맛사지 해주었지만 그저 피곤하기만 하다. 멍하니 정신줄 놓은 채
타이핑 하다보니 한 줄을 통째로 잘못 입력했다. 순간 짜증이 폭발할 뻔 했지만 그냥 너털웃음 한번 슥
짓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효"

시계를 보자 한기를 느꼈다. 10시 49분. 금요일 밤인데 그 누구 하나 문자 메세지 하나를 안 날린다.

갑자기 몰려오는 고독감에 와이셔츠 팔뚝을 쓰다듬다 결국 다시 의자에 걸쳐놓은 코트를 챙겨입었다.
그리고는 슥 자리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벗고 다시 힐을 신었다. 조명 스위치가 있는 출입구 쪽으로
가서 저기 창가 쪽, B파트의 불을 껐다.

또각- 또각-

불을 끄고 창가로 다가가자 어둠의 창가에 내 모습이 반사되었다. 그리 나쁘지 않은 프로포션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뿐이다. 더이상 그 누가 칭찬해 줄 사람도 사랑해 줄 사람도 없다. 나는 두 달 전 헤어
졌고, 두 달 간 잠수했다. 이제 더이상 아무도 날 찾지 않는다.

한 발자국 다가서자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고, 창문에 코가 닿을 듯 한발자국 더 다가서자 이번
에는 드디어 창문 밖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16층 빌딩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은 언제나 묘한 아찔함이 있다. 야경, 하니 문득 올 초 태진이와 함께
했던 포르코 마로 레스토랑이 떠올랐다.




"야경 멋있지?"

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반응이 별로라고 생각했는지 그는 "별로야?" 하며 힐끔 내 눈치를
다시 살폈다. 난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좋아"

그제서야 태진의 얼굴에 웃음이 퍼져 나간다. 웃을 때마다 저 코가 넓어지는, 그래서 참 못나지는
그 웃음이 나는 좋았다. 꼭 우리 아빠를 닮은 그 편안한 웃음이.  


그와의 멋진 저녁식사, 그리고 분명 무리했음이 분명한 호텔 스위트 룸… 그냥 모텔로 가지 뭐하러 
호텔 방 잡았냐고 타박하자 어색하게 웃으면서 "한번은 그래도, 좋은 데서 자봐야지" 하던 그. 계속
뭐라고 하자 "이거 어차피 소셜커머스에서 싸게 잡은 방이야" 하고 내 손을 잡아 이끌던 그.

…그렇게 멋은 없지만, 그래도 항상 나에게 뭘 더 못해줘서 미안해하던 그. 



문득 그가 미치도록 보고 싶다. 하지만 다시 그를 볼 용기가 없다. 그에게 그토록 큰 상처를 준 것이
미안해서라도 연락을 할 수가 없다. 

설움이 복받쳤다.

사실은 나도 상처 입은 사람이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너무나 상심해서 그저 고개만 한참을 주억
거리던 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면 다시 전화를 걸 용기가 사라져 버린다. 

콧물까지 훌쩍거리며 눈가를 닦던 나. 그리고 마침 그때 경비 아저씨가 들어왔다. 

"아직 일하는 거요?"

난 얼른 눈가를 닦곤 "네, 금방 끝나고 갈 거에요" 하고 대답했다. 경비 아저씨는 구석에서 여직원이
울고 있자 저으기 놀란 듯 그저 고개만 끄덕이더니 "괜찮아요?" 하고 묻더니 금방 다시 나갔다. 



경식 오빠의 접근에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흔들렸던게 사실이다. 그저 식사 한 번, 커피 한 번이던
만남, 그리고는 영화까지 본 날, 내 손을 잡던 경식 오빠. 

집으로 돌아가던 길, 어색해진 차 안의 분위기 속에서 그가 한 고백. 한번은 거절했지만 집 앞에서 
내리기 직전 그의 뜨거운 키스 세례에 난 그만 온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솔직히 그가 좋았으니까. 남자로서 좋았으니까. 단 한번도, 태진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그런 감정
이었으니까. 얼마만에 느끼는 두근거림인지 몰랐으니까.

도망치 듯 차에서 내린 뒤, 그날 밤 밤새도록 경식과 나눈 통화. 3년 전, 캐나다로 떠나기 전부터
나를 좋아했다며 뒤늦게 한 그의 고백에 난 가슴이 터지도록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리고는 그의
연이은 고백에 난 그만 알겠노라고 승락을 해버렸다.


태진에 대한 이별 통보는 일방적이었다. 제발 다시 한번만 생각해달라며, 도대체 왜 그러냐는 그의
말에 더이상 구질구질한 우리 관계가 싫어졌다고 소리쳤다. 울먹이면서도 끝내 포기 못한다는 그
의 말에 결국 다른 남자, 그것도 그가 그토록이나 경계하던 바로 그 남자에게 내 마음이 가버렸단
말에 흐르는 눈물조차 닦지 못한 채로 갑작스레 바람 빠진 풍선처럼 바르르 떨며 "아니지?" 하고
묻던 그. 결국 통화기록까지 보여주자 허탈한 한숨과 함께 힘없이 돌아서던 그.


하지만 이제 한국에 완전히 들어온 것이라던 경식 오빠의 말은 거짓이었고, 그는 불과 한달 만에
다시 말 한 마디 없이 캐나다로 돌아가버렸다. 덩그러니 남겨진 난 그제서야 나 자신을 욕했지만
누구를 탓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모든 것은 내 잘못이었다.


그렇게 보고 싶던 태진에 대한 마음이, 거기에까지 생각이 닿으니 다시 연기처럼 사라졌다. 무슨
염치로 걔를 다시 보는데.

알고 있다, 지금이라도 연락을 하면 아마 분명 그를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의 그가
과거의 그와 같을 수 있을까. 그게 두려웠다. 아니, 그보다는 그냥… 태진을 다시 본다고 해도 이미
내 마음부터가 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그저 한없이 미안할테고, 그는 나를 보며 많은 감정을 떠올리겠지.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렇게 한참을 있던 난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밀려쓴 마지막 줄을 지웠고, 다시 꼼꼼하게 입력했다. 그리고 저장을 하고 컴퓨터를 껐다. 온 몸이
부서질 것만 같다. 예전 같으면 늦게 끝나면 택시를 타고서라도 마중을 와 줄 태진이 있고, 그의
자취방에서 "힘들지?" 하면서 안마도 받을 수 있었을텐데.

거기까지 생각하자 난 순간 피식 웃었다. 이렇게까지 이기적일 수 있을 수 있는 내가 싫었다. 

의자를 밀어넣고 난 가방을 챙겼다. 입구 쪽의 스위치로 사무실 불을 다 껐고, 사무실 보안장치를
보안 모드로 바꿨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는 잠깐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을 보며 살짝 번진 화장을 손질하고는 다시 엘리베이터 앞으로 왔다. 불 꺼진 사무실을 보며
난 다시 머리를 쓸어올렸다. 손에 쥔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넣었고, 멍하니 엘리베이터 안에서 
머리를 벽에 대고 아무 생각 없이 1층까지 내려왔고, 출입 대장을 작성 후에 건물을 나왔다.


"어디로 모실까요"
"공덕역 쪽으로 가주세요"

택시에 오른 난 휴대폰을 꼭 손에 쥐었다. 결코 울릴 리 없는, 누군가의 전화를 그렇게 기다리며.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703

Trending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