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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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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그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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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썩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이삼주에 한번씩 만났으며, 만나서는 서로가 알고 있는 최고의 맛집에서 식사를 함께 하고
영화를 보거나 미술관을 가거나 함께 운동경기를 보거나 하며 즐거운 시간을 함께 했다.

한두달에 한번 꼴로 플로리스트에게 부탁한 꽤 비싼 꽃다발을 안겼으며 1년에 한두번 여행도 함께
했다. 30대 중반에 접어든 성인 남녀인 이상 당연히 밤의 관계도 가졌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연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암묵적으로 어떤 끈끈한 관계를 피하고자
했던 것 같다. 연인이 하는 행동, 관계는 모두 가지며 말이다. 그게 편하니까 라는 핑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얽매임에 대한 기피랄까. 

마지막 종이 한 장의 선이 항상 그어져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연인 간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어떤 불편함과 마찰을 피할 수 있었다. 어쨌든 우린
남이니까. 연인으로서 이해해주고 받아줘야 하는 그런 부담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 한쪽이 먼저
선을 넘는다면 그냥 등 돌려버리면 그만이니 항상 긴장과 설레임이 유지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힘든 그런 관계에 대한 선호를 인정하는 둘이었다. 겉으로는 말이다.



"금요일에 원생동물티 콘서트 갈까?"

전화를 받는 정희의 첫 목소리는 우울한 듯 했지만 애써 무시하고 물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냥 물어봤으면 좋았을 것을.

"아니"

꽤나 차갑게…아니 차갑다기 보다는 여전히 무거운 목소리.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러면 다음에 보지 뭐"

여전히 이때라도 무슨 일 있냐고 물었으면 좋았을텐데. 괜히 뻘쭘해진 난 마침 다른 전화가 들어
오기도 해서 "아, 미안 다른 전화 들어온다. 이따 다시 전화할께" 라면서 전화를 먼저 끊었다. 그
리곤 깜박하고 지나갔다.


이후 그녀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물론 피차 전화를 남기면 꼭 바로 전화하는 무슨 알콩달콩한
처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며칠씩 계속 전화를 피하거나 그런 사이는 아니었는데.

걱정이 되었다. 그녀의 신변이 걱정된다는건 핑계고…마치 연인 사이의 헤어짐이 우려되는 그런
걱정. 그렇게 우리 사이의 '쿨'한 관계는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전화를 받지 않는 그녀에게 난 아침 저녁으로 하루 2~3회의 전화를 남겼고, 매번 씁쓸함을 느꼈다.
속이 타들어 갔다. 처음에는.

하지만 꽤 빨리 합리화가 되었다. 어차피 연인관계도 아니었고 그냥 유통기한 지나 끝났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까지 채 2주가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컸다. 솔직히 말만 연인이 아니었지 사실 연인이나 다름없지 않았나. 들이부은
돈이 얼마인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무슨 놈의 쿨한 관계…되돌아 생각해보니 그냥 헛지랄
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궁금했다. 왜 갑자기 연락이 끊어졌는지가. 아무래도 마지막 전화통화에
그 답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후회가 몰려왔지만 적당히 쓴 맛 좀 겪어본 성인
남성은 후회가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법이고, 나 역시 그랬기에 어차피 끝난 관계라면 최소한
궁금증이라도 풀고 싶다는 핑계로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차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정희가 사는 원룸 오피스텔 앞에서 차를 대고 기다렸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상등신 같은 짓을 하냐고 스스로에게 되물었고 난 그 질문에 쩔쩔매며 '궁금함'이라는 답을
냈다.

생각보다 답은 허무하리만치 뻔했다. 그녀의 집 앞에서 난 그녀와, 그녀의 남자친구로 보이는 조금
어려보이는 남자를 봤다. 흔한 남녀관계에 대한 오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유심히 보았지만 집 앞
에서 뽀뽀를 하는 사이면 연인관계가 분명하겠지.

난 차 안에서 픽 웃고는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그녀의 번호와, 그동안 주고받은 선물
같은 것을 다 치워버렸다. 생일선물로 받은 시계는 요긴하게 쓰고 있으니 남겨뒀지만. 꽤 쿨하게 난
그녀를 잊을 수 있었다. 그녀의 집 앞으로 찾아간 것은 그래서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을 못 봤더
라면 아마도 '왜 우리가 헤어진 것일까'에 대해 꽤 오랜 의문이 남았을테니까.



그로부터 한 2~3개월이나 지났을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겠지만, 격무에 시달리는 직장인
에게 두어달이면 '그게 겨우 두 달 밖에 안 됐어?' 싶은 시간이기도 하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았더니 정희였다. 그토록이나 내 전화를 무시하던게 바뀐 번호로 전화질이라니, 하는 생각에 괘씸
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반가움이 몇 배는 더 컸다.

"간만이네"
"그러게"

이번에는 내 목소리에 어둠이 깔려있었다. 내가 더 놀래서 얼른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억지로 쾌활한
척 물었다.  

"잘 지내냐? 난 갑자기 니가 연락 끊어서 무슨 일 있나 했다. 어쨌든 살아있었네"
"살았나 죽었나 걱정까지 하면서 한번 보러도 안 왔어?"

갔었지.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주말에 잠깐 만나서 이야기 좀 할래?"

그녀의 제의. 이제와서는 별로 만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호기심이 더 컸다.

"알았어. 토요일에 보자"



간만에 만난 그녀는 여전했다. 특별히 바뀐 것이 없었다. 이런저런 겉도는 이야기를 잠시 하다가 난
물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갑자기 잠수 탄 거야?"

남자가 생겼으니까. 답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조금 이따가 이야기 하자. 그보다 넌 어떻게 지냈어? 요즘 살 조금 빠진 것 같은데"
"빠지기는, 그대로야. 운동을 시작하긴 했는데, 운동 조금 했더니 식욕이 폭발해서 오히려 살이 더
찌진 않을까 걱정이다"

결국 다시 겉도는 이야기로 넘어갔다. 뭐 시간은 넉넉하니까. 곧 점심식사를 위해 자리를 옮겼다. 꽤
간만의 한정식, 채빈나에서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는 그 이야기에 대해 꺼내지 않았다. 새삼 그녀의 오물오물 밥 먹는 모습이 귀엽다고
느꼈고, 큰 눈과 선명한 이목구비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내 말에 빵 터질 때마다 감듯이 웃는 그
눈웃음이 너무나도 예뻤기에 예전 생각이 났고, 문득 '오늘 우리는 어떤 관계로 만난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그냥 예전처럼, 잠시 두어달 쉬었을 뿐 관계가 복구된 것인지? 아니면 새 남친이 생겼음을 나에게 정
식으로 통보하는 자리? 아니면 잠깐 다른 남자로 한 눈을 팔다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 것인지? 아님
여전히 그 남자랑 연애를 하는 가운데 그저 단순히 내가 간만에 생각나서 밥 한번 같이 먹고 싶었던
것인지? 이도저도 아니라면 그녀가 나와 그 남자 사이에서 양다리?

적어도 일방적인 연락 차단으로 보았을 때 두 번째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지막의 가능성을
본다면 꼭 있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첫 번째나 세 번째, 마지막 경우
라면 난 그녀를 받아줘야 하나?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확실한 정보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답을 내릴 수 없었고, 혼자 김칫국 마시기
전에 식사는 끝났다.



"그랬던거야"

식사를 마치고는 좀 이른 시간이지만 인근의 와인 바로 향했다. 대낮이었지만 와인 한 병을 맥주
마시듯 비워낸 우리는 그제서야 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진솔하다기보다는 그냥 뭐
일방적으로 그녀가 그동안의 이야기를 풀어낸 것에 불과하지만.

"그랬구나"

그녀의 이야기는 흔한 이야기였다. 내 앞에서는 감히(?) 티를 못 냈지만 나를 좋아했더란다. 아니
그건 나도 마찬가지만 그게 아니라 정식으로 연인으로서 사귀고 싶었단다.

처음에는 적당히 이런 관계가 좋다고 생각했지만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토록 허무
할 수가 없었다나. 너무너무 좋지만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미칠듯이 공허함이 남았단다.

"그냥 그런 거 있잖아. 밤마다 사랑해, 잘자 하고 끊는 그런 전화. 그런 전화를 하고 싶었어. 유치
하지만"
"뭐 그게 유치한건 아니지"

그렇다고 정식으로 사귀자고 제의를 해볼까도 생각을 했지만 그동안의 관계도 있고, 거절당하면
더이상 볼 자신이 없어서 말도 꺼내지 못했다고. 몇 번인가 눈치를 주기도 했지만 내가 무시했다
고 했다. 난 그 '눈치'를 무시한게 아니라 아예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그러던 차에 회사 내에 자기를 좋아하던 두 살 연하의 남자 직원이 고백해왔고, 두 살 연하라고
해봐야 서른 둘이니 그 남자도 결혼적령기. 그래, 어차피 이루지 못할 꿈을 꿀 바에야 조금 재미
없더라도 더이상 공허함에 이유없이 울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이미 그때가 나랑 만나고 있을 때
라고 했다.

하지만 역시 만나다보니 이건 아니다, 싶어 그 남자와 정리하고 나한테 그 이야기를 고백하려고
했던게 바로 '그 전화'를 내가 걸었던 날이었단다. 그러나 내가 전화를 끊었고 기다렸지만 끝내
내 전화를 오지 않았었다고.

"고백하려고 했다면 니가 먼저 전화를 걸어도 되는거 아닌가?"
"몰라, 그냥 그랬어. 내 우울한 목소리를 듣고도 전화가 다시 안 오는 자체가, 아, 이 남자 마음
속에는 별로 내가 없구나 하는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들었었나 봐"

그리고는 그 날 그 남자랑 술 마시다가 결국 처음으로 잠을 잤단다. 그러고나니 더이상 나를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연락을 끊었던 것이라고 했다.

"지라쉬…이거 한 병 더요"
"네, 알겠습니다"


두 번째 와인을 마시며 이번에는 내가 이야기를 했다. 솔직하게 집 앞에 찾아갔었던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전혀 몰랐다며 그녀는 놀라워했다.

"정말 너답지 않네"
"그러게 말이다"

와인 한 병을 비우고 두 번째 와인도 조금 마시고 나니 벌써 은근하게 취기가 돌았다. 더이상 뭐
구질구질한 옛날 이야기를 하기도 지루해졌다.

"그래서 그 남자랑은 어떻게 됐어?"
"정리했어. 너랑 만나던 시절 생각해보니 역시 그저 그런 남자는 못 만나겠더라. 헤어지고도 뭐
계속 집착해서 번호까지 바꾼거야"

'이겼다' 라는 생각에 우습지만 은근히 으쓱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론 혼돈의 연속이었다. 정희는
다시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눈치. 그렇다면 내 감정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시 만난다고 해봐야 예전의 그런 관계는 불가능할 것 같고, 그렇다고 이제와서 제대로 연애를
하자고 하기도 뭔가 우스운 것 같고… 

나 혼자 버려진 기분이 들었던 그것도 새삼 생각해보면 그랬다. 어렸을 적, 비오던 날 시장에서 
엄마를 잃어버리고 세 시간 동안 혼자 비 맞고 돌아다니던 생각이 났다. 그때도 난 울지 않았다.
그래서 시장 사람들도 잠깐 엄마가 어디 볼일 보러 갔나보다 했었단다. 다행히 오지랖 넓은 한
생선장사 아주머니가 인근 파출소에 나를 데려다줘서 엄마를 만날 수 있었지만. 

아주 뒤늦게 들었다. 어느 날 엄마가 아버지가 이혼하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술에 취해서 솔직
하게 털어놓았던 말. 그때 널 진짜 버렸던 거라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에
울고불고 다시 시장으로, 파출소로 뛰어가서 다시 널 데려왔지만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너한테
너무 미안하다고. 

엄마는 내가 기억을 못 하는 줄 알았겠지만 난 그 어린 시절, 그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 손을 슬쩍 놓는 엄마, 다시 손을 뻗었지만 슥 내 손을 피하던 엄마. 그리고 무엇엔가 홀리듯
인파 속으로 사라지던 엄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모르기에는 아마도 내가 너무 조숙
했던 것 같다.

뭐, 만취 상태에서 털어놓은 말이라 엄마는 자기가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 못하는
듯 하지만… 어쨌거나 문득 그 생각이 났다. 

어차피 그래도 엄마는 내 엄마고, 실수를 하기는 했지만 결국 그것을 바로잡으러 되돌아 왔으니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그때의 엄마 나이는 지금의 나보다 불과 한 살 더 많은
나이였다. 그것도 남편의 불륜에, 이혼까지 고려하던 상황에서 말이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일까'

그보다는 이제와서 적당한 이유를 대며 정희에게 "그냥 관두자" 라고 하기가 더 귀찮았다. 그냥
적당히 모르는 척, 그래, 다시 잘해보자 라고 하는게 더 편할 것 같았다. 난 미미한 웃음을 지으며
정희의 손을 잡아주었다.


처음으로 먼저 그녀가 모텔에 가자고 제의했다. 크게 내키진 않았지만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
기에 응했다. 모처럼의 관계치고는 그저 그랬다. 전에는 항상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안 자?"
"간만의 주말인데. 영화 좀 보고"
"그럼 나 먼저 잘께"

정희는 내 품에 파고 들고는 눈을 감았다. 그 남자와 사귄 불과 두어달 사이에 못 보던 애교가 꽤
늘은 것 같다. 술 기운도 있고, 다시 나와의 관계가 생각보다 쉽게 회복된 것에 안도를 느꼈는지
금방 그녀는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난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여전히 생각이 복잡했다. 그렇지만 역시 귀찮은게 싫은 난 혀를
차며 TV를 껐다. 그리고 내 품에 파고든 정희를 끌어안고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예전에는 좀
처럼 없던 일이다.

새삼…이제 나도 '연애'를 해야된다는 귀찮음에 짜증스러운 부담이 느껴졌다. 그래도 왜인지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곤히 잠든 정희의 표정을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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