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부터 난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거래처의 마케팅 팀장이었던 그녀는 또박또박 옳고 그름을
짚어 따지고 들었고, 그 주장은 논리정연했다. 아마도 단단히 준비를 해온 모양이다. 악명 높았던
내 전임자와의 힘겨운 싸움을 위해서였겠지.
"우선 이 표를 봐주세요. 이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렇군요"
우리 회사가 그동안 우월적인 입장을 이용해서 거의 착취에 가깝도록 거래처를 쥐어짜기는 했지.
특히 내 전임자는 그런 부분에서는 가히 천재적이었고. 그래서 말썽이 났지만.
한 거래처가 공정위에 그동안의 일을 정리해서 찔러버린 것이다-물론 그래봐야 당연히 권고 조치
정도로 그쳤고, 찌른 업체는 까발려져서 우리 회사와 거래 중단. 결국 그로 인해 부도까지 났다-.
공공연히 해오던 관행이었을 뿐이었지만 언론에까지 크게 보도가 된 이상 누군가 책임을 져야했고
일이 좀 크게 터지는 바람에 우리 팀장은 퇴사, 내 위로 있던 직원 셋이 전보·정직 조치를 당했다.
원칙적으로는 나도 징계 대상이고 외부 인사 영입이 거론되었지만, 빠른 상황 수습을 위해 좀 문제
있는 어부지리로 내가 새 팀장 자리에 올랐다. 본사 내 최연소 팀장이었다. 물론 당분간 상황이 좀
진정될 때까지의 임시직이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녀의 당당한 자세가 좋았다. 우리 측에서는 오늘 당장 거래를 끊어도 하나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영세한 업체의 마케팅 팀장-이라고 해봐야 딱 봐도 자기 밑에 직원 한 둘 겨우 있을 법한-인 그녀
의 모습은…
이런 비유가 어울릴지, 내가 너무 시건방을 떠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그녀의 모습은 마치
끝까지 당당히 독립국임을 주장하는 소국의 당찬 공주님 같은, 뭐 그런 느낌이었다.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 오늘 저희가 만난 것 아니겠어요?
다만 저도 결국 회사에 메인 몸일 뿐인지라 입장이라는게 있어서요. 일단 이 부분은 그러면 이렇게
조정하면 어떨까요?"
다만 이쪽도 회사 입장이 있는데 아무리 내가 그녀가 마음에 든다 한들 멋대로 그쪽 주장을 일방
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는 법. 계약 건에 대해서는 아주 심하다 싶은 계약 내용 위주로 일부를 수정
하기로 했다. 거기에 추후 각종 협업 프로젝트의 진행을 구두 약속하는 선에서 매듭을 지었다
사실 협업 프로젝트는, 위에서 내려온 지시 '상생을 하되, 퍼주지는 말 것'에 기반해서 대충 짜낸,
반쯤은 립 서비스에 가까운 내용이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은 모양이다. 딱 나흘만에
세부 기획안까지 짜서 추가 미팅을 제안해왔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 없던 기획을 세세한 부분까지 만들어왔다는데 그 이야기를 안 들어볼 수
없었고, 솔직히 명분이야 둘째치고 어떻게든 또 그녀의 모습을 한번 볼 구실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던 나에게 그녀의 미팅 요청은 천사의 부름에 다름 아니었다.
"이야…이건 정말 좋네요"
좋았다. 그녀도 그녀지만, 기획안 말이다. 내용은 알찼고 더이상 빼거나 더할 구석이 없었다. 양사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어 있었고, 그 누구 하나 손해볼 일이 없을 법한, 회장님이 올 초 시무식 때
그토록이나 주장했던 '상생'의 결정체가 내 손에 들려있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말이다.
"바로 진행하죠"
'긴급'으로 처리해서 바로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기로 했다. 항상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마치 투사와
같이 내 앞에서 그 큰 눈에 힘을 주던 그녀가 처음으로 활짝 웃어보였다.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어차피 점심시간이기도 한데, 식사 어떠세요?"
"좋아요"
"뭐랄까…전 솔직히 '이 사람이 도대체 나랑 뭐하자는거지? 나를 떠보기라도 하는건가?' 하고
생각했다니까요. 다 받아주니까. 근데 또 이야기를 하다보니 내공이 보통이 아니네, 하는 생각을
했어요. 뭔가 부드럽게 술술술술 다 받아주는 것 같은데 조금 후에 보면 생각보다 이쪽이 건진게
뭐 하나도 없는거죠. 아 확실히 대영그룹, 늑대 물러나고 이번에는 여우가 왔구나 하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딱 저한테 제의하신 거에요. 협업을. 솔직히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이 근처가 사무빌딩 촌이라 조금만 늦게 나와도 자리가 없다. 결국 우리는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일식 돈까스 체인으로 향했고, 돈까스를 썰며 그녀가 말했다. '늑대 물러나고 여우 왔구나' 하는
표현에 난 그만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그 얼음공주 같던 그녀의 눈에 온기가 돌고, 신나서 이런
저런 말을 마치 친구에게 하는 말처럼 조잘조절 쏟아내는 모습은 참 귀여웠다.
첫 미팅 때 워낙에 준비를 잘해왔길래 짬밥이 좀 되나 했는데, 그녀 역시도 나처럼 올해 갑자기
전임자의 퇴직으로 팀장이 된 처지라고 했다. 하기사 그 '열정'은 닳고 닳은 베테랑들의 그것관
다소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먼저 묻기 어려운 질문을 그녀가 물어왔다. 난 서른 둘이라고 답했고, 그녀는 깜짝 놀랬다.
"왜 놀라세요, 제가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여요?"
그러자 그녀는 겨우 놀란 표정을 지우고 입을 가리고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얼굴이 엄청 동안이시긴 하지만, 당연히 전 최소한 30대 중반은 됐을거라고 생각했거
든요. 엄청 진급이 빠르시네요"
그녀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마치 예쁜 여자가 눈 앞에 있을 때의 남자들 표정처럼, 유능하고 잘난
남자를 바라볼 때의 여자들 표정…그런 것이 스쳐 지나갔다.
게다가 그 눈빛은 단순한 동경이나 호감이 아닌, 뭔가…야심 많은 '여자'의 그것과도 비슷했달까.
익숙한 그 눈빛. 어디서 본 눈빛이지, 하고 고민하던 차에 기억이 났다. 대학 시절의 유정이.
내가 만났던 그 모든 여자보다 기가 '센' 그녀. 기 세다고 소문난 우리 회사 여자들을 보아도 나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어쩌면 유정이 덕분인지도 모른다. 당당하고, 쾌활했고, 침대에서는
낮보다도 몇 배는 더 에너지 넘쳤던 그 유정이 말이다.
유정이와 눈빛이 꼭 닮은 그녀… 이 여자도 유정이처럼 침대에서 대단한 여자일까. 나 또한 그녀에
대해 호기심이 버럭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그러면 정윤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스물 일곱? 여덟?"
액면가보다 한두살 낮춰서 불러보았다. 그녀는 픽 웃으며 대답했다.
"서른이에요"
결혼은 안 한 것 같고, 남자친구는 있을까. 곧바로 직구를 뿌려보고 싶었지만 어깨가 아직 덜 풀린
상황에서 어설픈 직구는 무리수. 나는 곧바로 다른 화제로 전환했고 식사-직장 생활-상사 욕-그의
황당한 지인-비슷한 케이스의 연예인 일화-그 연예인의 결혼식 이야기-이상적인 결혼식 등으로
이야기를 빙빙 돌리다 난 원하는 대답을 간접적으로 얻어냈다.
그녀는 솔로였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1시 40분이었다. 거의 두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밝은 웃음이 아직도 눈 앞에 선했다. 몽롱한 표정을 겨우 지우고 자리에 앉으니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씁쓸했지만 그 중에는 정윤씨와 함께 처리해야 하는 일도 있었으니 위안이 되었다.
'잘해보자'
난 얼굴을 쓸어내렸다.
<< 계속 >>